고향과 어린 시절
일제시대와 부모님
돌이켜 보면 세월이 유수와 같다는 말이 실감난다. 한 세대가 지나
어느덧 어린 시절은 먼 옛날의 일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아직도 나에
게는 그때 기억이 어제일과 같이 생생하다.
나는 해방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고 동아시아가 전쟁의 소용돌이로
깊이 빠져들어가던 1935년에 태어났다. 유년 시절을 일제시대와 해
방, 그리고 전쟁으로 경험했던 세대가 바로 내가 살아왔던 세대였다.
당시는 도시보다 농촌에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많은 이
들이 가난하고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던 시절이었다.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아버님께서 어린 시절을 보내신 곳은
충북 옥천군 군북면 소정리로 깊은 산골이었다. 내가 고1때 아버님
과 함께 눈이 많이 온 날 고향을 다녀온 것이 기억된다. 험한 산을
몇 고개를 넘어 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곳은 지금은 대청
댐 건설로 인해 수몰지구가 되어 다시는 볼 수 없는 곳이다. 조부께
서 일찍 돌아가셔서 아버님께서는 일찌기 십대 소년 가장의 역할을
하셔야 했다.
요즘 젊은 이들에게는 역사책에서나 볼 수 있는 ‘일제시대’. 아버님
은 그 일제시대를 청·장년의 시기에 힘겹게 통과해 내셨다. 가난한
가정속에서 가족을 부양하고 생존을 위해 고향을 떠나 인근의 회덕
으로 가서 경부, 호남선 철로 건설 공사에 인부로 참여하셨다. 옥천
은 대전 옆에 붙어 있고 경부와 호남선이 갈라지는 철도의 분기점인
회덕이 가까웠다. 농사가 힘겨웠던 산촌에서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철
도 노동자의 일은 그나마 입에 풀칠이라도 하고 돈을 모아 고향에서
땅 몇마지기라도 사서 자영농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는 희망을 주는
일이었다. 예전 70년대 중동으로 건설 인력이 파견되었던 것 같이 당
시는 시골에서 공사현장으로 농촌에 있던 청년들이 살기위해 노동
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일제가 수탈의 목적으로 건설한 철로, 하지만
그것이 오늘 우리나라의 인프라가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수많
은 건설노동자가 투입되어 건설된 호남선, 그 철로의 한켠에는 아버
님의 땀과 눈물도 베어 있다.
회덕에서 철도일을 마치신 뒤, 아버님은 회덕의 동부에 있던 고향
으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고향 반대편인 회덕의 서쪽에 있던 강경
으로 가서 정착하셨다. 그 당시에 강경은 매우 큰 도시였다. 오히려
지금의 강경보다 훨씬 더 크고 활력이 넘치는 곳이었다. 젊은 아버
님께서 선택하신 것은 인생의 승부수를 산골 마을이 아닌 큰 도시에
서 걸어보고자 하셨던 것 같다. 강경은 오늘의 청주나 충주보다 더
큰 도시였기 때문이다.
강경에 대해 좀더 말해보면, 강경으로 23번 국도와 호남선이 연결
되었다. 교량 철교, 교통의 요지였다. 호남선의 핵심라인이 강경, 이
리, 익산이었다. 강경 시장은 당시 전국 3대 시장 중 하나였다. 평양,
강경, 대구가 3대 시장이었다. 강경은 평야지대라 주위가 전부 논이
다. 김제평야 다음으로 넓은 곡창지대이다. 인심이 후하고 살기 좋
은 곳이다. 중부권에서는 강경에 가장 큰 재래시장이 있었다. 그렇
기에 매우 풍요롭고 살기 좋은 지역이었다.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
이다. 국가 전체적으로는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금이 훨
씬 부유하지만 옛날에는 지금같이 수도권에만 모든 인적, 물적 자원
이 집중되지 않고 지방에 주요 도시들도 나름대로 제 기능을 발휘하
던 시절이었다. 그때의 강경과 지금의 강경을 비교해 보면 그 위상
이 너무도 초라하다. 지금은 겨우 새우젓 축제 때나 주목받을 뿐이
니 말이다.
아버님은 강경에 정착하여 나를 비롯한 4남매를 낳았다. 철도 공사
인부로 일을 하시다가 공사가 완료되자 일본인들이 건설한 양조장
에 취직하였다. 아사노하나 조화(朝花) 정종공장이었다. 거기서 일
해 받은 돈을 모아서 농지를 사서 농사와 공장 일을 겸하셨다. 상당
히 생활력이 강한 분이셨다. 해방 이후에 다니시던 공장이 폐업을 하
게 되어 공장 일을 그만두신 후부터 전업농으로 생활하셨다.
나는 이곳 강경에서 태어났다. 금강에서 수영하며 어린 시절을 즐
겁게 보냈다. 자연에서 놀면서 체득한 실력이 오늘날 수영강습을 받
는 것보다 더 실질적인 능력을 일깨워 준다. 나는 어릴 적 놀면서 갈
![](https://t1.daumcdn.net/cfile/cafe/133745424F23044F26)
70 여년 전 유년 시절 사진(오른쪽에서 두번째)
고 닦은 그 실력으로 대학 시절 한강을 헤엄쳐서 건너기도 하였다.
하모니카는 5세 때부터 불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불고 있다. 어린 시
절부터 음악에 소질이 많았다. 이것이 훗날 악단을 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버님은 요즘말로 ‘투 잡’을 하시며 재산을 모아 어느덧 우리 가정
은 강경에서 안정된 생활의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다. 소위 지역의 부
농으로 자리를 잡아가신 것이다. 덕분에 나는 지역 부농의 아들로서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을 비교적 넉넉하게 보낼 수 있었다. 그럼에
도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인지라 전체가 겪는 고통의 강도는 지금에
비하면 비할 바가 못 된다. 우리도 형편이 넉넉지는 않았지만 배곯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빈곤이 일상화 되어 있던 당시에는 배고픔만
면해도 대단한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 음식을 먹을 때 어
머님께서는 항상 맛있는 것을 나에게만 주셨다. 나를 생각해서 주신
것인데 어머님께서 일부러 싫어서 안 드시는 줄 알았다. 이렇게 나는
고생 모르는 철부지로 자랐다. 숙제도 방학동안 실컷 놀다가 누나들
에게 부탁하는 등 철부지였다.
하지만 행복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나라 없는 백성의 설움을 아
는가? 일제시대에 대하여 요즘 젊은이들은 역사책에서나 볼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나는 그 시절을 직접 경험하였다. 아직도 우리나라에
는 일제시대부터 6·25, 4·19, 월남전 등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그
대로 살아오며 오늘의 대한민국을 지켜보는 이들이 많이 있음을 기
억해야 할 것이다. 당시 일정시대의 농촌은 수탈의 대상이었다. 내
어린 시절 아버님께서 일본 순사들에게 엄청 당하는 모습을 보았다.
가택수색을 당하고 먹던 놋그릇, 벼, 수저 등 쓸 수 있는 물건은 모두
공출하여 뺏어가던 모습이 기억난다. 법, 제도, 인권 등 모든 것이 식
민지와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을
겪으니 반일정신이 어린 시절 깊숙하게 베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래서 난 일본에 대한 인식이 지금까지 좋지 않다.
해방 전에는 일본말, 일본식으로 교육을 받았다. 당시에는 초등학
교 입학 때도 입학시험을 보았다. 연필, 칼 등을 보여주면서 일본말
로 물어 봤다. 어느 정도 일본말 시험을 봐서 일본말을 못하면 합격
시키지 않았다. 내 누나는 난청이라 불합격되었는데 교육열이 강하
셨던 어머님께서는 일본인들이 찹쌀과 계란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
고 일종의 뇌물(?)을 써서 딸을 다음해에 입학시켰다. 찹쌀떡과 계란
으로 입학을 허가받은 것 같다. 나는 여자들 속에 둘러싸여 살았다.
위로 누님이 두 분, 여동생이 두 명이다. 덕분에 어린 시절에는 여성
화되었고 아들선호 사상이 있던 시절이라 독자인 내가 귀여움을 독
차지 하였다.
그렇게 지내던 나의 어린 시절은 일제시대와 함께 흘러갔다. 암울
했던 역사였지만 나는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그래도 아름다운 강경
의 추억이 아련하다.
학창 시절과 6.25(다음3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