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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럽 4개국(영국,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 2007년 도교육청에서 주관한 우수교사 해외여행단에 선발되어 다녀온 해외여행 2탄 -
☞ 2007년 1월 12일(금) ~ 1월 22(월) 10박 11일 : 영국(2박), 프랑스(2박), 스위스(1박), 이탈리아(4박), 기내(1박) : 경북도내 유. 초. 중등 교사 남자 7명, 여자 8명 계 15명이 서유럽 해외여행단으로 구성되다.
도교육청에서 인당 150만원을 지원받아(나머지는 자비 부담) 롯데관광에 270만원을 지불하고 가이드 1명이 함께하는 여행사에 의뢰한 여행이었다.
50만원을 환전하니 유로화로 400유로였다.
공동경비로 50유로, 파리 세느강 야간유람선 탑승비는 포함사항이나 야간 시내 투어용 전용버스료 50유로, 이태리 베네치아에서 곤돌라 및 수상택시 탑승료 50유로가 당초계획에 없었던 내용이었는데 총 150유로가 추가되었다.
Ps : 현지에서는 이태리, 베네치아로 부르고 있지만, 미국식으로 발음하여 이태리는 이탈리아로, 베네치아는 베니스로 부르고 있다고 가이드가 설명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현지에서 부르는 이태리나 베네치아 같은 말이 더 정감이 간다.
고유명사인 국가명이나 지명까지 강대국의 입맛대로 부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 서유럽 4개국 안내(2007년 당시 기준)
① 4성 호텔에도 슬리퍼가 없으니 필히 휴대가 필요하다.
② 일회용 비누와 화장지, 삼푸, 수건은 비치되었지만, 1회용 면도기가 비치되어 있지 않다.
③ 충전시 영국만 3구여서 맞지 않고 프랑스, 스위스, 이태리는 우리와 동일하다.
④ 소주 2홉들이 식당가격 : 세금 탓으로 영국 3만원, 프랑스, 스위스, 이태리는 2만원
⑤ 김치깍두기 1접시 : 4,500원, 물1병 : 1,300원, 한정식 보통이 3만원
⑥ 승객용 비행계기판 메모 : 로마 → 서울 약 9,000km, 시속 831km에서 963km로 속도 점차 높아짐, 고도 6,100m에서 9,800m로 상승
▶ 1일차 : 1월 12일(금) - 집에서 01:45분에 출발하여 포항시외버스 터미널에서 02:00시에 출발하는 인천공항 직항 리무진에 탑승하다.(경주경유 버스비 40,300원)
인천공항 도착(약6시간 소요)이 13:20분이다.
촌놈이 난생 처음 와 보는 인천공항 인지라 이리 저리 구경을 하며 해외전화 카드를 구입하는 등 시간을 보내다가 런던행 대한항공 직항편에 탑승을 하다.
17:20 분에 출발하여 약 12시간을 비행 끝에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하다.
각자의 짐을 찾아서 버스에 탑승한 우리들은 영국에서의 첫 숙박지인 [St-giles호텔]에 투숙을 하다.
영국은 한국에 비하여 9시간이 늦다고 한다.
▶ 2일차 : 1월 13일(토) - 오늘의 첫 일정은 영국 여왕이 공식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윈즈성]이다.
- 윈즈 성 -
영국의 경우, 교사는 봉급중에서 세금이 약40%정도라고 한다.
물론 국민 각자는 소득에 따라 세금이 다르지만 모두가 많은 세금을 부담하고 있다.
이렇게 세금을 많이 걷는 대신에 고속도로 통행료가 없다.
뿐만아니라 국가에서 많은 복지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많은 복지 혜택을 받는 대신에 국민들은 많은 세금을 부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세금을 많이 내는 것은 부담스러워 하면서도 국가로부터 많은 복지 혜택을 받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다.
특히 정치권에서 세금은 많이 걷지 않고 선거때 표를 의식해서 무작정 퍼주기를 하는 것은 결국은 나라 살림을 거들내는 것이다.
'선별지원'이니 '전국민지원'이니 말이 많다.
원칙은 '선별지원'이 맞다.
그 이유는 대통령과 도지사, 국회의원들은 코로나로 인하여 경제적인 손실이 없다.
그들은 철밥통이므로 어떤 경우에도 또박 또박 봉급이 나온다.
그런데 왜 그들을 포함하여 전국민에게 지원을 해야하나?
그들에게 돌아갈 예산으로 경제적인 손실을 본 사람들을 지원하는 것이 맞다.
나라 곡간이야 어찌되던 득표에 도움이 된다면 온갖 사탕발림으로 인심을 쓰는 정치권을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남미대륙에서 열풍처럼 일어났던 ‘표플리즘’의 결과가 지금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윈즈 성]으로 가는 고속도로 주변의 활엽수들이 지금은 겨울철이라 가지만 앙상하지만, 지난 가을 한때는 붉게 물들어 경치가 무척 아름다웠으리라......
우리네 인생사와 잠시 비교를 해 보았다.
겨울이지만 그다지 춥지를 않아서 옅은 안개속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양떼를 보니 참으로 평화스러운 정경이다.
영국은 도로표지판이 잘 되어 있어서 초보자라도 지도 한 장만 있으면 어느 곳이라도 찾아갈 수 있다.
윈저성은 현재 왕실이 사용하는 성으로서는 세계최대의 규모라고 한다.
900년 동안이나 영국 왕의 성으로 사용되어 온 윈저성은,
왕실의 실무를 보는 곳 등은 공무상의 이유로 일반에게 공개되는 부분이 제한이 되어 있다고 한다.
윈저라는 지명은 옛날 로마시대에 이곳이 템즈강의 꼬불꼬불한 물가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성 중앙에 우뚝 서 있는 라운드 타워 위에는 왕가의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여왕이 머무르고 있을 동안에는 왕기를 게양한다고 한다.
웅장한 석조건물은 역대 왕들의 권력과 위엄을 보여주는 듯 하였다.
윈저성은 1992년에 대화재가 발생하여 일부 소장품들을 소실하였다.
한쪽에는 당시의 신문 보도사진과 불에 탄 서까래와 기둥, 구두 등을 전시해 놓고 있었다.
화재가 난 부분은 5년에 걸쳐 모두 복원되었다.
내부장식을 하고 있는 조각가의 모습도 큰 사진으로 전시해 놓고 있으니 전에 보다 전시품이 한가지 더 늘어나게 된 셈이다.
이와 같이 영국인들은 화재 사건도 하나의 관광자료를 만들어 전시해 놓고 있었다.
여왕이 주말에 거주한다는 [윈즈성]을 둘러본 후 [템즈 강]을 둘러 보다.
이 강은 조수 간만의 차로 인해서 유속이 엄청 빠르다.
이로 인하여 강바닥의 흙이 뒤집혀서 흙탕물이 많이 일어난다.
따라서 강물이 매우 탁하다.
마치 장마철에 폭우가 쏟아진 우리나라의 강물을 보는 것 같았다.
수많은 오리떼가 강물을 여유롭게 오가며 먹이활동을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 템즈 강에서 바라 본 여유로운 오리떼 -
이어서 영국 최고의 명문 사립 중·고등학교인 [이튼 컬리지]를 방문하다.
1440년 헨리 6세가 재능은 있지만 가난해서 교육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서 나라에서 학비를 지원해 주는 학교를 설립했다.
위치는 윈저 성 옆인 이튼이었고, 남학생만 입학할 수 있는 남자 중 · 고등학교였다.
그러나 헨리 6세의 건학 이념과는 달리 점차 비싼 수업료와 기숙사비를 부담하는 학생이 늘어나면서 현재는 영국 최고의 명문 퍼블릭 스쿨(영국 상류 계급이나 부유층 자제가 다니는 사립 중 · 고등학교)이 되었다.
영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으며, 1,300명의 학생들은 모두 기숙사 1인실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 학교 출신의 상당수가 옥스퍼드 대학이나 케임브리지 대학 같은 명문 대학으로 진학한다.
찰스 왕세자, 윌리엄과 차남 해리 왕자가 모두 예외 없이 기숙 생활을 하면서 이 학교를 졸업했으며, 그 밖에 16명의 영국 수상이 이 학교 출신이다.
- 이튼 컬리지 -
웰링턴 장군과 영국 최고 문학가인 〈동물 농장〉의 작가 조지 오웰도 이곳 출신이다.
2005년부터는 한국인과 중국인에게도 정식으로 입학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하지만 이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테스트와 인터뷰를 거쳐야 하는데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다.
한국인 학생이 점점 늘어나면서 2010년에는 교장이 한국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어서 들린 곳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생가다.
영국이 낳은 가장 뛰어난 시인이며 극작가로 손꼽히고 있다.
4대 비극인 [햄릿], [오셀로], [리어왕], [맥베스]를 비롯하여 [로미오와 줄리엣], [베니스의 상인], [한여름 밤의 꿈] 등으로 널리 알려진 대문호이다.
- 셰익스피어의 생가 -
이어서 영국왕실에서 이용하는 말들의 숙소인 [마굿간]을 둘러보았다.
아직도 승마를 위해서 말들을 돌본다고 한다.
다음코스는 [영국 여왕의 산책로]다.
이 길을 걸어면서,
‘여왕은 무슨 생각을 하며 이 길을 걸었을까?’
하고 잠시 상념에 젖어 본다.
이어서 우리들은 왕실 [근위병의 교대식]을 보았다.
정해진 시간에 교대식이 열리므로 기회를 놓치면 다시 보기가 힘이 들다는 가이드의 재촉에 일행들은 달음박질로 달려가서 겨우 교대시간에 맞추어 교대식을 볼 수 있었다.
- 근위병 교대식 -
이어서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 기념탑]을 둘러 본 후에 [앨버트 홀]을 관람하다.
이 홀은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인 앨버트 공이 건립을 했으며 그의 이름을 딴 문화공연장이다.
이 홀은 로마의 원형 경기장을 본떠 만들어졌으며, 외벽은 붉은 벽돌로 지어져 아름답다.
빅토리아 시대의 건축을 대표하는 건물로, 주로 클래식 콘서트장으로 이용되며, 복싱 경기나 비즈니스 회합, 코미디 쇼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기도 한다.
요즘에는 특히 여름 8주 동안 세계 최대 규모로 열리는 프롬나드 콘서트장으로 더욱 인기가 높다.
- 앨버트 홀 -
이어서 비운의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거주하던 집]을 둘러 보았다.
그 앞쪽에 위치한 [백조의 호수]도 물론......
영국에서 백조는 여왕의 소유물이다.
수많은 백조들이 서식한다고 해서 백조의 호수라고 불리우는 이곳은 헨리8세가 소유권을 영주에게 넘겨 지금은 여왕의 재산이 아니다.
- 모두가 백조인데 요놈은 흑조 -
다음은 영국 산업 혁명의 표상이고 런던의 상징인 [타워브릿지]를 둘러 보다.
템즈 강은 19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 혁명의 주요 무대여서 하루에 수백 척의 배가 오갔다.
하지만 조수 간만의 차가 6m 이상인데다 다리와 강 수면이 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에 배들이 쉽게 통과하지 못했던 탓에 영도다리처럼 개폐식 다리를 짓게 되었다.
1894년 완공된 빅토리아 양식의 타워 브리지는 원래 초콜릿 브라운 색상으로 칠했는데 1977년 도색으로 현재와 같아졌다고 한다.
- 타워 브릿지 -
총 길이가 250m, 다리 하나의 무게만 해도 1,000톤 가까이 되며 들어 올리는 데에 1분 30초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대형 선박이 지나갈 때에는 다리 중앙이 위로 올라가며 ‘八’자 모양이 된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현재는 다리가 올라가는 횟수가 일주일에 2번 정도로 줄어들었다.
템즈강에는 6.25에 참전한 [퇴역 군함으로 만든 해군박물관]이 물 위에 여유롭게 떠 있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런던 시청을 둘러 본 후 세계금융의 중심지 월스트리트 가를 지나 [런던성]으로 향하다.
이 성은 1078년 노르만의 정복왕 월리엄 공이 템즈강변에 세운 것을 역대 왕들이 증,개축을 거듭하여 17세기의 모습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견고한 이중 성벽으로 만든 이 성은 증개축 과정에서 감옥과 천문대, 무기고 등이 추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었으며, 투옥과 고문, 처형 등 감옥으로 이용이 된 비극의 현장이다.
종교문제를 두고 끊임없는 사형과 피로 얼룩진 무시무시한 장면으로 가득찬 곳이다.
- 웅장한 런던 성 -
런던성이 유명해진 이유는 권력과 왕좌를 둘러싼 ‘피의 역사’ 때문이다.
왕족을 비롯한 귀족들의 감옥이자 고문과 처형장으로 쓰이면서 비극의 무대가 된 곳......
12세에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 5세와 동생, 헨리8세의 두 왕비와 제인 그레이 등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처형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를 비롯해 유폐되었다가 풀려난 이들도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런던 성은 원래는 왕궁이었으나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정치범의 투옥과 고문, 처형 등 감옥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피 비린내나는 비극의 무대가 되었다.
흘러가는 템즈강 물결을 바라보면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사형에 처해졌던 죄수들의 참수된 시체가 템즈강에 버려졌다고 한다.
이처럼 낭만적인 템즈강에 많은 사람들이 역사적, 정치적인 이유로 시신이 되어 버려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좋아하는 여자와 결혼하기 위하여 이혼을 한 헨리8세가 [성공회]를 만들어서 로마교황청을 등진 곳이기도 하다.
성공회에 반대한 토마스 모어가 갇혀 있다가 처형을 당했고, 헨리8세의 두 왕비와 9일간의 여왕 [제인 그레이]가 목숨을 잃은 곳이기도 하다.
☞ 토마스 모어 : 헨리8세가 1533년 수장령을 발표하여 자신이 교회의 수장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로써 영국은 로마 카톨릭과 결별하고 독자적인 [성공회]의 길을 걷게 된다.
토마스 모어는 영국 교회의 수장령을 받아들일 것을 거부한 죄로 처형을 당했기 때문에 로마 카톨릭의 성인으로 시성되어 오늘날까지 존경을 받고 있다.
☞ 제인 그레이 : 그녀는 '9일간의 여왕' 또는 '런던 탑의 비극'이라는 애절한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제인은 헨리 7세의 증손녀로 매우 아름답고 영리하며 외국어에 능통하여 학자 아스캄도 탄복하였다고 한다.
그의 비극은 파렴치한 시아버지 더들리 백작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에드워드 6세가 결핵으로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안 그는 그녀를 며느리로 맞이하여 왕위를 이어가게 하였다.
에드워드 6세가 16살의 어린 나이로 숨지자, 왕위계승권자인 장녀 메리 1세와 엘리자베스1세를 배제하고 며느리인 제인을 왕으로 옹립한다.
이에 귀족들과 국민들이 반발을 한다.
국민들의 지지를 받은 메리 1세는 런던으로 진격하여 백작과 그의 아들 그리고 며느리 제인을 런던 탑에 가두었다.
1554년 2월 그녀는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처형 당하였다.
그래서 '9일간의 여왕 제인 그레이'라고 한다.
지금도 음산한 날에는 런던 탑에서 제인의 망령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있다.
이어서 우리들은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 대만의 [국립 고궁 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3대 박물관 중의 한 곳인 [대영박물관]으로 향하다.
- 대영박물관 -
이 박물관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전에 만들어진 박물관으로 1753년 왕립 학사원장을 지낸 한스 슬론 경이 설립하였다.
작품이 많지 않았던 초기에는 몬터규 후작의 저택에 전시되었지만 전시품들이 많아짐에 따라 1824년 로버트 스머크 경이 설계한 신고전 양식의 현재 건물로 옮기게 되었다.
세계 3대 박물관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선사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유산을 소장하고 있는데, 특히 세계적으로 희귀한 고고학 및 민속학 수집품들이 볼 만하다.
고대 문명을 보여 주는 전시품들이 유명하며 그중에서도 고대 인간의 미라와 로제타 스톤은 언제나 관람객들로 붐비는 섹션이다.
일본이 우리나라의 수많은 문화재를 약탈했듯이 영국도 전성기때 해외에서 수많은 문화재를 획득하여 전시를 하고 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리워 졌었던 영국은 특히 이집트를 비롯한 아프리카에 많은 식민지를 두고 있었던 관계로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문화재를 구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 3일차 : 1월 14일(일) - 08:56분에 [St giles호텔]을 출발하다.
민주주의를 꽃피운 [영국의 국회의사당]을 둘러보러 가는 길이었다.
다리밑에서 노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복지제도가 아주 많이 발달한 영국에서 노숙인들을 보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복지제도가 발달이 되어 있지만, 저 사람들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들이어서 자기가 하고 싶은데로 저런 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라는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서야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이어서 들린 곳은 [웨스트 민스터 사원]이다.
- 웨스트 민스터 사원 -
이 곳은 성당과 수도원역할을 하는 곳으로 영국왕의 대관식이 열리는 곳이다.
‘서쪽에 있는 대사원’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이 곳은 성공회의 세계 총본산 성당이다.
7세기 초에 처음 건설되어 11세기 참회왕 에드워드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증축하였고 12세기 헨리 3세가 고딕 양식으로 개축하였으며 18세기에 들어와 2개의 첨탑이 세워지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참회왕 에드워드가 죽은 후 정복왕 윌리엄 대공이 왕위를 빼앗아 대관식을 치른 이래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에드워드 5세, 8세를 제외한 영국의 모든 왕이 대관식을 거행한 장소다.
대관식뿐만 아니라 왕실의 결혼식과 장례식도 이곳에서 치러진다.
내부에는 역대 왕과 정치가(처칠, 글래드 스톤 등), 문학가(셰익스피어, 워즈워스, 찰스 디킨스 등), 과학자(뉴턴, 다윈 등), 음악가(헨델 등)가 잠들어 있는 묘와 기념비가 있다.
이 중에서도 뉴턴의 묘와 챕터 하우스는 영화 〈다빈치 코드〉의 배경이 된 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관광객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다.
영국의 성당 중 가장 높은 본당과 16세기 초 지어진 아름다운 직립식 천장으로 유명한 헨리 7세 예배당,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역사가 그려진 대형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빛이 들어오는 팔각형의 챕터 하우스 등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장소다.
2011년 4월 윌리엄 왕자의 세기의 결혼식이 열렸던 장소이기도 하다.
이어서 2차세계대전 당시 [처칠수상이 지휘하던 방공호]를 둘러 본 후, [재무성과 외무성]을 둘러 보았다.
다우닝가 10번지에는 [영국 수상의 관저]가 있다.
- 영국 수상의 관저 -
공원 끝자락에 위치하며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주소가 된 다우닝가 10번지는 1680년 조지 다우닝경에 의해서 지어진 건축물인데 1732년 조지 2세가 영국 초대수상에게 하사하여 영국 수상의 공식관저가 되었다고 한다.
집의 크기나 위치가 서민들이 사는 곳과 같았다.
'이곳이 대영제국의 '수상 관저'라니?
우리나라 같으면 가능한 일일까?'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국가 유산중 하나라고 한다.
다음으로 [해군성]을 둘러 보았는데 이곳은 예전에는 군사훈련장으로 사용하던 곳이라고 한다.
[왕실소유 상가]도 둘러보았는데, 이곳은 운영권자의 85%가 유대인이라고 한다.
유대인의 상술은 전세계에서 알아주는 상술이다.
이어서 크리스마스이브에는 마음에 드는 아무나 붙잡고 자유롭게 키스를 할 수 있다는 [트라팔카 광장]에 도착하였다.
이곳에는 넬슨제독과 4마리의 사자상이 보인다.
넬슨제독이 트라팔가해역에서 나폴레옹이 지휘하던 프랑스와 에스파니아의 연합함대를 격파하는 커다란 승리를 올린다.
영국을 구한 영웅이 되었다.
이렇게 높은 곳에 동상을 세운 이유는,
“내가 죽어서도 프랑스를 감시할 수 있게 높은 곳에 올려달라!”
고 한 넬슨제독의 유언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경주 감포 앞바다에는 신라 문무대왕의 수중 능침이 있다.
"죽어서라도 왜놈들의 침략을 막겠다!"
는 대왕의 유언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넬슨제독이 신라 문무대왕의 유언을 벤치마킹했나?
우연치고는 희안한 인연이다.'
넬슨제독의 동상은 너무 높아서 멀리서는 잘 보이지가 않았다.
가까운 곳에서 자세히 살펴보니 그의 동상은 한쪽 눈과 한쪽 팔을 잃은 모습이다.
- 트라팔카 광장 -
역시 영국은 영웅을 대접해주는 나라이다.
전우를 구하다가 지뢰를 밟아서 다리를 절단당하는 부상을 입고 전역을 한 병사를
“전상이 아니고 공상이다.”
고 판정을 내린 우리 나라와는 근본이 다르다.
들끓는 여론을 못이기고 결국은 뒷북치기로 판정은 번복되었지만......
이 곳을 마지막으로 우리들은 프랑스로 건너가기 위하여 런던 시내를 달렸다.
달리면서 살펴본 런던시내에는 ‘2층 버스’가 대부분이었다.
- 런던의 2층 버스 -
지금은 우리 나라에서도 볼 수가 있지만 2007년만 해도 빨간색의 2층 버스는 상당히 신기하게 보였다.
런던 구시가지는 옛날 마차가 다니던 시절에 만들어진 도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도로에는 길이 만들어질 당시에 돌로 다듬어 깔아진 돌 블럭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
물론 요즘 새로 만드는 도로는 그렇지 않지만......
따라서 도로폭이 엄청 좁은 탓에 차들은 우리나라의 ‘티코’같이 초소형차가 많다.
2인용 소형차도 많은데, 그 이유는 심한 주차난과 대형차는 여러모로 불편하므로 선호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건물의 색 또한 회색톤 일색이다.
예전 건물이 대부분이므로 당시의 벽돌색이 그대로 살아있기 때문이다.
시멘트 건물 일색인 우리는 도색 때문에 알록 달록 할 수 밖에 없는데 우리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워털루 역]에 도착한 우리들은 말로만 듣던 그 유명한 [유로스타]에 탑승을 했다.
런던에서 파리까지 이어지는 이 철로는 총길이가 51.5km로 시속 300km이상으로 달리며 도버해협 통과시간은 25분정도다.
- 유로스타 -
바다밑 수중 지하터널을 통과하는 코스인데, 우리 일행들은 바닷속을 통과하므로 각종 신기한 해저생물을 유리창을 통해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애써 차지한 창가쪽 자리에 앉았던 보람도 없이 실망이다.
왜냐하면 수중은 모두가 시멘트 터널로 되어 있어 바닷속이라는 느낌은 전혀 없고 육지에서 어느 터널을 통과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파리북역]에 도착한 우리들은 [Holiday inn orly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 4일차 : 1월 15일(월) - 아침에 호텔을 출발하여 프랑스에서의 첫 일정인 [세느강]을 둘러 보다.
- 에펠탑 -
이어서 파리의 명물인 [에펠탑]을 오르다.
이 탑은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된 세계 박람회를 위해 세워진 구조물로 박람회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비행기에서도 박람회 위치를 잘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귀스타브 에펠의 설계로 세워진 이 탑은 원래는 박람회가 끝나면 철거될 계획이었다.
오늘 날 '파리' 하면 많은 사람들이 제일 먼저 떠올리는 상징이지만 당시 파리 시민들은 예술의 도시 파리와 어울리지 않는 ‘추악한 쇳덩어리’라 하여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비판했다.
파리의 예술과 문화계 명사들의 반대가 가장 심했다.
그래서 1909년엔 철거될 뻔하는 위기에 처했지만 다행히 최신 송신 안테나를 세우기에 이상적이라는 이유로 위기를 모면해서 지금까지 남아 있다.
에펠탑이 처음 세워졌을 때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
건물 전체가 철골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강한 바람에도 13cm 이상 흔들리지 않고 탑을 잘 고정시켜 준다.
또한 철골이기 때문에 더운 여름에는 15cm가 더 길어진다고 한다.
총 무게는 1만톤이고 4년마다 도색 작업을 하는 데 들어가는 페인트의 양만해도 엄청나다.
엘리베이트 2대가 번갈아 가며 운행한다.
우리들은 탑을 올라가기 위하여 길게 줄을 서서 기다렸다.
그날 따라 왠 놈의 날씨가 그리도 추운지 엄청 고생을 하였다.
이어서 들린 곳은 [몽마르뜨 언덕]이다.
이곳은 언덕이라지만 아주 낮은 언덕이다.
거리의 화가들이 경주 보문호에서 초상화를 그려주는 것 같은 익숙한 풍경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소매치기와 사기꾼들로 악명이 높은 곳이니 조심을 해야 한다.
팔찌를 손에 걸어주는 강매 수법이 많이 행해지는 곳이 이곳이다.
심지어 야바위꾼도 있다.
하지만 파리를 한눈에 내려다보며 여행 온 기분을 한껏 만끽하는데 의미가 있다.
몽마르뜨 언덕은 파리에서는 가장 높은 언덕이다.
- 몽마르트 언덕 -
이 언덕에는 파리시내를 한번에 조망할수 있는 [성심성당]이 있다
멀리서봐도 엄청나게 장엄함이 느껴지는 이 건축물의 원래 이름은 [사크레쾨르성당]이다.
이곳에서는 계단에서 사진을 한장 찍어보면 좋다.
왜냐하면 이곳이 프랑스의 파리라는것을 단번에 알아 볼 수 있는 인증샷이 될것이기 때문이다.
이 곳은 [노틀담 성당]과는 달리 지붕이 돔 형식의 구조라 동양의 영향을 조금 더 많이 받은 느낌도 들었다.
- 성심성당 -
이어서 들린 곳은 [루브르 박물관]이다.
루브르가 최초로 박물관이 된 것은 1793년이다.
파리 생활에 싫증을 느낀 루이 14세가 베르사이유에 화려한 궁전을 지어 거처를 옮긴 뒤부터이다.
초기에는 왕실에서 수집한 각종 미술품을 보관 · 전시하는 소극적 의미의 미술 전시관이었다.
나폴레옹이 집권한 이후 수없이 많은 전쟁을 통해 예술품을 매입하고 약탈하면서 대규모 박물관으로 변모하였다.
그 방법은 [대영박물관]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루브르 미술관의 전시 작품은 크게 고고학 유물과 그리스도교 전례 이후의 서양 문명, 중세 예술, 르네상스 예술, 근대 미술 및 극동 지역 미술품으로 나누어진다.
- 루브르 박물관 -
이곳도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이므로 나는 1주일이 채 못되어 3대 박물관중 2곳을 보게 되었다.
원래는 바이킹의 침입으로부터 파리를 방어하기 위해 세운 요새였다.
이후 많은 왕들이 4세기에 걸쳐 루브르 궁전을 확장하고 개조했다.
하지만 루이 15세가 베르사이유로 궁전을 옮기고 나서 루브르는 주인 없는 궁전으로 방치되었다.
그후 나폴레옹 1세가 다시 루브르 궁전에 관심을 갖고 미술관으로서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나폴레옹 3세는 1852년에 북쪽 갤러리를 완성하면서 오늘날 루브르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1981년에는 미테랑 대통령의 '그랑 루브르 계획'으로 전시관이 확장되고 1989년 박물관 앞에 건축가 페이의 설계로 유리 피라미드를 세우면서 대변신을 하게 되었다.
현재 루브르 박물관의 225개 전시실에는 그리스, 이집트, 유럽의 유물, 왕실 보물, 조각, 회화 등 40만 점의 예술품이 전시되어 있다
저녁은 그 유명하다는 파리의 [달팽이 요리]다.
그런데 우와 이건 우리 입맛과는 전혀 맞지를 않는다.
해외 여행을 다니면서 이렇게 우리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은 처음이다.
그러나 가이드 왈,
“풍토가 전혀 다른 나라의 음식을 맛보는 것도 여행의 참맛입니다.”
라고 한다.
도저히 먹지 못하겠다며, 영덕에서 온 이선생은 기어이 비상수단을 발휘하다.
준비해 온 [사발면]을 꺼내 들었다.
프랑스 말이 통하지 않아서 손짖 발짖을 해가며 겨우 식당에서 뜨거운 물을 구해서 저녁을 해결하였다.
☞ 이선생님 관련 애피소드 한도막
파리는 가이드가 알려준 곳 외에는 대부분이 유료 화장실이다.
“화장실은 제가 무료로 해결할테니 저만 따라 오세요.”
라고 한다.
배짱이 있는 친구라서 손짖 발짖으로 콩굴리쉬를 하면 그 표정으로 왠만한 의사 소통을 할 수 있단다.
그러던 중 화장실에 갈 일이 생겼는데 화장실을 발견한 이선생왈
“이 곳은 무료화장실이니 들어갑시다.”
라고 한다.
우리 일행중 남자들은 모두 이선생을 따라서 호기롭게 들어갔다.
각자 볼 일을 마친 우리들은 일을 먼저 본 순서대로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이선생이 오지를 않았다.
가이드를 앞장 세우고 화장실로 향했다.
사연인즉 이 화장실은 들어갈 때 요금을 받는 것이 아니고 나올 때 요금을 받는 곳이란다.
공교롭게도 제일 늦게 볼 일을 마친 이선생이 먼저 나간 일행들의 요금까지 모두 부담하라는 관리인 때문에 말이 통하지 않아서 인질로 잡힌 조그마한 사건이었다.
저녁을 마친 우리들은 [세느강을 운항중인 야간유람선]에 탑승을 하다.
야경이야 어느 도시나 비슷하지만 그래도 이곳은 프랑스의 파리다.
세느강을 오르 내리는 유람선이라는데 의미를 두었다.
다음은 인근에 위치한 [개선문과 샹제리제 거리]를 탐방하다.
이 개선문은 높이가 50m, 폭이 약 45m로 1806년 오스텔리츠 전투에서 승리한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건축가 살그랑의 설계로 세워지기 시작했다.
- 파리의 개선문 -
하지만 1812년 러시아 전쟁에서 패배한 후 공사는 중단이 되었다.
그후 나폴레옹의 사후인 1836년에야 루이 필립의 요구로 완성이 된다.
나폴레옹은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이 개선문을 살아 있을 때는 통과하지 못하고, 죽은 후에 그의 유체가 개선문을 통과해서 파리로 귀환해 '앵발리드 돔 교회' 아래에 매장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독일의 점령에서 파리를 해방시킨 드골 장군이 이 문을 통해서 행진하기도 했다.
나폴레옹이 승리한 전쟁의 영광스러운 장면들이 여러 개의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다.
개선문의 안쪽 벽에는 나폴레옹이 이끄는 부대를 지휘했던 장군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전쟁 중에 전사한 사람의 이름에는 줄이 그어져 있다.
개선문 아래에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죽어간 참전 용사들을 위한 무덤이 있다.
개선문이 있는 '샤를드골 에투알 광장'은 12개의 대로가 별 모양으로 둘러싸 있어서 별처럼 보인다고 해서 별이라는 뜻의 에투알 광장이라고 불린다.
그 대로 중 하나가 [샹젤리제 거리]이다.
우리는 이 곳에서 간단하게 맥주를 마시고 Holiday inn orly 호텔에서 2박째를 맞이하다.
▶ 5일차 : 1월 16일(화) - 오늘의 첫 일정은 루이 14세의 궁전인 [베르사이유 궁전]이다.
이곳은 원래 파리의 시골 마을 중 하나였으나 이 궁전이 세워진 후 자치권을 가지는 파리 외곽의 도시가 되었다.
이곳은 원래 왕이 사냥할 때 머무는 여름 별장이었다.
루이 14세가 파리에서 이 궁전으로 거처를 옮긴 후 1789년 파리로 다시 돌아 갈때까지 프랑스 권력의 중심지였다.
바로크 건축의 대표작품으로 호화로운 건물과 광대하고 아름다운 정원과 분수 그리고 오페라와 거울의 방으로 유명하다.
'거울의 방'은 벽과 천장이 거울로 된 길이73m의 방인데 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지었던 [베르사이유 조약]이 이방에서 체결되었다.
- 베르사이유 궁전 -
이 궁전은 한번에 2만 명이나 수용할 수 있는 커다란 안뜰이 있는데 이곳에는 작은 궁전들이 있다.
1783년 이 안뜰에서 세계 최초의 열기구가 떠올랐다.
이곳이 실제 궁전으로 사용된 기간은 매우 짧다.
루이 14세가 죽자 뒤를 이은 루이 15세는 곧바로 파리로 궁전을 옮겼다.
이 곳을 마지막으로 프랑스에서 스위스로 가는 [떼제베 열차]를 타기위하여 [리옹 역]으로 이동을 하다.
이 열차는 프랑스의 초고속 열차다.
- 떼제베 열차 -
떼제베는 1세대 테제베, 1989년 시속 300㎞로 운행을 시작한 2세대 테제베와 1993년에 운행을 개시한 3세대 등 여러 모델이 있다.
한국은 1994년에 프랑스의 TGV시스템을 도입하기로 결정하였다.
2004년 운행하기 시작한 KTX에 기술과 차량을 일부 변경 도입했으며 동시에 기술이전을 받아 KTX차량을 제작했다
이동 중 차창 밖으로 비친 들판에는 겨울철인데도 작물들이 푸르게 자라고 있었다.
다만 열차의 속도가 너무 빠른 덕분에 그 작물이 무엇인지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수많은 목장에서 방목되는 젖소와 양떼들의 모습은 무척 평화스러운 모습이었다.
[스위스 로잔]에 도착한 우리들은 다시 전용버스로 갈아탄 후 [인터라켄]으로 이동하여 저녁을 해결하다.
알프스 초원에는 목동들이 즐겨 부는 [알프혼]이라는 매우 긴 악기가 있다.
마치 우리나라의 긴 담뱃대가 연상되는 악기인데 길이가 엄청나게 길다.
저녁을 해결한 식당에서는 이 악기를 연주한 후에 우리 일행들이 사진을 촬영할 수 있는 기회를 주며 반겨주었다.
- 전통악기 알프혼 -
식사후 우리들은 쇼핑에 나섰는데 나는 유명하다는 [쌍둥이칼]을 몇 세트 구입하였다.
지인들에게 선물을 할 계획이다.
오늘의 숙박지는 알프스의 눈 녹은 물이 흘러내리는 [아래강]앞에 위치한 Central continental 호텔이다.
▶ 6일차 : 1월 17일(수) - 06:30분에 오스트역에서 [융프라우 등정]을 위하여 첫기차에 탑승을 하다.
역에서는 사발면을 비롯한 라면종류를 엄청 많이 판매한다.
자세히 살펴보니 한국산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가격은 국내에 비하여 엄청 비싸다.
그러나 우리의 국력을 보는 것 같아서 괜히 기분이 우쭐했다.
융프라우는 라우터브루넨 계곡에 우뚝 솟아 있으며, 해양도시인 인터라켄에서 남남동쪽으로 18㎞ 떨어져 있다.
베른알프스 산맥에 속하는 경치가 아름다운 산으로 1811년 스위스인 마이어 형제가 처음으로 등반을 했다.
1865년에는 인터라켄에서 두 영국인이 어려운 서쪽 코스론 처음으로 산에 올랐다.
1927년에 전문등산가 2명이 가장 어려운 남쪽에서 등반했다.
- 톱니바퀴로 된 레일을 오르는 기차 -
유럽의 가장 높은 철도 중 하나인 이 철도는 험한 고갯길인 융프라우요크까지 약 7㎞ 되는 터널을 통과한다.
열차는 톱니바퀴로가 레일로 연결되어 급경사도 미끌어지지 않고 오를 수가 있다.
오르는 도중에 잠시 정차한 역에서는 [얼음동굴]체험을 하였다.
얼음으로 만든 각종 조각상들을 볼 수 있었으며 터널을 통과하는 데는 엄청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 등정중 차창밖에 비친 그림같은 알프스 마을 -
09:12분에 해발 3,454m에 위치한 스핑크스전망대를 정복하다.
남한 제일의 높이를 자랑하는 '한라산'이 1,950m인 것에 비하면 엄청나게 높은 곳이다.
겨울인데다 고도가 높은 곳이라 사진 촬영을 하기가 힘이 들 정도로 엄청나게 기후가 악천후다.
12:11분에 인터라켄역으로 하산을 하다.
이 곳에서 중식후 전용버스를 이용하여 '이탈리아'의 [밀라노]로 이동을 하다.
16:05분경에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국경초소를 통과하는데 이건 정말 어린애들 장난 같다.
별도의 국경 표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예전 [달전검문소]를 통과하는 느낌이었다.
버스에서 하차한 우리들은 도보로 검문소를 통과했는데 이 곳이 이탈리아란다.
이동중에는 길이가 17Km나 되는 긴 터널을 통과하여 16:50분에 밀라노에 도착하였다.
도착후 첫 일정은 [스칼라 극장]을 둘러 보았다.
유럽 최고의 성악가들이 공연하는 곳이며 단 한 번이라도 이 무대에 선 성악가라면 항상 그의 경력 맨 처음에 ‘스칼라 공연’이라는 말이 붙을 정도로 권위 있는 극장이다.
- 스칼라 극장 -
극장 건물은 1778년에 건축되었으나 2차 세계대전 때 소실되어 현재는 복원된 모습이다.
1800년대에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로시니, 푸치니, 베르디 등의 작품을 올렸으며 한국 사람을 잘 발탁하지 않는다는 리카르도 무티가 오랫동안 음악감독으로 있던 곳이다.
스칼라 극장은 겨울에 주로 공연을 한다.
이 극장 출신의 가장 유명한 성악도는 마리아 칼라스를 들 수 있다.
극장 옆에는 여러 오페라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스칼라 박물관이 있다.
오늘의 마지막 일정은 [두오모 성당 및 광장]이다.
- 두오모 성당 -
이 성당은 밀라노에 있다.
밀라노는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주의 주도이다.
이 곳에 위치한 이 성당은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성당이다.
오늘의 숙박지는 Jolly milano flori 호텔이다.
▶ 7일차 : 1월 18일(목) - 조식후 로미오와 줄리엣의 도시 [베로나]로 이동을 하다.
11:23분께 줄리엣이 살던 집을 방문하다.
- 줄리엣이 로미오를 기다리던 2층 발코니 -
이곳에는 그녀의 발코니와 동상이 있으며 방문객이 적어 놓은 글들이 가득하여 비극적 로맨스의 주인공인 그녀가 받는 세계인의 사랑을 느낄 수가 있다.
그녀의 동상은 짖궂은 남자 방문객들이 엄청나게 만져서 유방이 반질반질하게 윤이 난다.
- 접근이 더 쉬운 왼쪽에서 가슴을 만져
유난히 더 반짝 거린다. -
인근에 위치한 [베로나 성]을 둘러 보는 등 시내를 관광한 후 또다시 [베네치아]로 이동을 하다.
현지에서는 ‘이태리’, ‘베네치아’ 등으로 발음을 하지만 미국권에서는 ‘이탈리아’, ‘베니스’등으로 발음을 한다.
13:42분에 버스에서 하차후 배를 타고 이동을 하다.
이 곳에 위치한 [산 마르코 광장 및 성당]을 둘러보기 위해서다.
- 산 마르코 광장 -
주변에 산 마르코 성당과 두칼레 궁전이 있다.
이 광장은 항상 물이 찼다가 빠지곤 한다.
12세기에 만들었는데 워낙 많이 부식되고 망가져서 15세기에 새로 손을 봤다.
지금도 끊임없이 공사 중이다.
광장 중앙에 큰 시계탑이 보인다.
이 탑은 15세기에 만들었으며 24시간, 계절, 달의 주기 등을 보여 준다.
나폴레옹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라고 격찬한 곳인 만큼, 이곳은 베네치아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다.
원래 이곳은 채소밭이었는데 1723년 티랄리가 광장의 바닥을 설계하면서 지금과 같은 대표적인 광장이 되었다.
이어서 우리들은 [수상택시 및 곤돌라]를 탑승하고 유람을 하다.
이곳 현지가이드는 성악공부차 체류 중이라고 소개를 받았다.
곤돌라 탑승시 처음에는 자유탑승이라 하였으나 희망자가 적게 나오자 나중에는 강요에 의한 강제탑승이 되어 찝찝한 체험이 되었다.
- 물의 도시 베네치아의 명물 곤돌라 -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유리제품을 세공하는 공장]이다.
견학을 하면서 크리스탈 목걸이를 2개 구입을 하다.
검정색은 마눌님, 흰색은 딸내미용이다.
와?
그런데 귀국후 선물을 하니 반응이 제법 괜찮다.
이제까지 내가 여행을 하면서 사온 선물은 모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투덜대던 아내가 왠일로 이건 마음에 든다면서 딸내미와 수시로 바꿔가면서 외출시 착용을 한다.
“쥐구멍에도 볕들날이 있다.”
희대의 바람둥이 [카사노바가 건너간 탄식의 다리]를 건너다.
그가 죄를 짖고 채포되어 이 다리를 건넜는데 법원으로 연결된 이 다리를 건너면 감옥에 가야 하므로 이 다리를 건너면서 탄식을 하였다고 한다.
- 카사노바가 탄식을 하며 건넜다는
'탄식의 다리' -
☞ 카사노바 : '바람둥이 난봉꾼'과 카사노바를 동의어로 만든 인물이다.
배우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젊은 시절 추문을 일으켜 신학교에서 쫓겨나 방종한 생활을 시작했다.
잠시 로마 가톨릭 추기경 밑에서 일하다가 마법사로 고발돼 5년간 총독 관저의 감옥에 감금되는 선고를 받았지만 연인관계인 고관 부인의 도움으로 탈옥을 한다.
자기 주제를 뛰어 넘어 고관부인을 애인으로 만드는 비상한 재주의 소유자인 그는 바로 불세출의 바람둥이였다.
이후 파리로 가서 복권을 처음 소개해 명성을 얻고 귀족들 사이에 이름이 알려졌다.
그의 인생은 순탄치 않아 독일과 스위스, 프랑스 등지를 떠돌며 추문과 그에 따른 결투를 피해 도망을 다녔다.
베네치아에서는 종교 재판관들을 위해 첩자 노릇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이력만큼 저술도 다채로워 시와 평론을 쓰고 〈일리아스〉를 번역했으며, 베네치아의 귀족사회, 특히 유력한 그리마니 가문을 풍자하는 책을 쓰기도 했다.
스페인에서 피신처를 찾은 그는 말년에 보헤미아의 성에서 발트슈타인 백작의 도서관 사서로 일하다 죽었다.
19:45에 베네치아의 Antony호텔에 투숙을 하다.
▶ 8일차 : 1월 19일(금) - 르네상스가 처음 꽃을 피운 [피렌체]로 이동을 하다.
첫 일정으로 [성모 마리아 성당 및 광장]을 둘러보다.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중심 도시였다.
도시 전체가 잘 만들어진 르네상스 박물관이라고나 할까?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단테, 베르디, 푸치니 같은 유명한 예술가들 역시 피렌체가 낳은 인류의 보물들이다.
이곳을 대표하는 대성당인 두오모는 피렌체에서 가장 높이가 큰 건축물이며 유럽에서는 네 번째로 큰 성당이다.
특히 하얀색과 핑크색, 녹색의 대리석이 기하학 무늬를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외관을 가지고 있다.
건축은 1296년 시작되어 1371년 본당이 완공되었고, 돔은 브루넬레스키에 의해 1437년 완공된 것이다.
철근이나 콘크리트의 도움 없이 벽돌만으로 돔을 쌓아 올린 것이 특이하다.
돔의 내부에는 미켈란젤로의〈최후의 심판〉이 그려져 있으며, 돔의 꼭대기에는 전망대가 있어 463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멋진 피렌체의 전경을 볼 수 있다.
-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
두오모의 돔 전망대는 특히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배경으로 나와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는 낭만적인 장소로 기억되고 있는 곳이다.
영화 속에서는 연인들의 메카이며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곳이라고한다.
본당 역시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특히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는 바닥이 아름답다.
성당의 지하에는 두오모의 돔을 설계한 브루넬레스키의 묘가 있다.
이어서 신곡으로 유명한 [단테의 유적지]를 둘러 본 우리들은 [세뇨리아 광장 및 미켈란젤로 언덕]을 살펴보았다.
17:26분경에는 [올리버 농장]을 방문하였다.
이 곳 역시 올리버기름과 비누를 판매하였는데, 자기들 제품이 가장 우수하다고 광고를 한다.
오늘밤도 ‘Airport Palace 호텔’에 투숙을 하다.
▶ 9일차 : 1월 20일(토) - 이 호텔 식당에 근무하는 뚱뚱한 여자종사원은 되게 무섭다.
아침 식사시 손님별로 구분이 되어 있는 식사장소를 모르고 잘못 들어간 일행에게 소리를 엄청 크게 질렀다.
오늘 첫 일정으로는 그 유명한 [바티칸 시티]를 둘러 보다.
- 바티칸 시티 -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에는 바티칸이라는 또 하나의 국가가 있다.
바티칸 시 또는 교황청이라고도 하는 바티칸 시티는 전체 면적이 0.44킬로제곱미터로 전 세계에서 가장 작은 독립국이다.
이곳은 전 세계 가톨릭의 총본산이라는 성스러운 의미가 있다.
이외에도 미켈란젤로 불굴의 명작인 〈천지창조〉와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등 책에서만 보던 홀륭한 예술 작품들을 직접 감상할 수 있는 이탈리아 미술의 보고이기도 하다.
이곳은 로마 시내 테베레 강 서안에 자리잡고 있다.
한 번에 3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성 베드로 광장] 앞에는 도로 위에 흰색 선이 그어져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이탈리아와 바티칸을 구분 짓는 국경이다.
바티칸은 이탈리아가 19세기 들어 근대 통일 국가로 탈바꿈하면서 교황청 직속 교황령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후 1929년 이탈리아와 교황청 주변 지역에 대해 주권을 인정하는 라테라노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독립국이 되었다.
‘바티칸’이라는 국명은 그리스도교 발생 이전에 내려온 오래된 말로 테베레강 옆에 위치한 ‘바티칸 언덕’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다.
현재 바티칸의 영토권은 성 베드로 대성당과 로마의 성당과 궁전을 포함한 13개 건물, 로마 동남쪽 120km 지점에 있는 교황 하계 관저에 국한된다.
영토 내에는 성 베드로 광장과 대성당, 교황 궁전, 관청, 바티칸 박물관, 도서관, 은행, 방송국, 인쇄국, 철도역, 우체국, 시장 등이 있다.
하나의 국가이지만 국방은 이탈리아에 위임되어 있고 소수의 스위스 근위병이 지키고 있다.
과거 침략을 받던 시절 스위스 용병들만이 남아 목숨을 걸고 교황을 지켰다고 하여 오늘날도 그들을 중용한다.
- 화려한 의상을 입고 근무중인 스위스 용병 -
약 100여 명의 스위스 국적의 신체 건강한 젊은 용병들이 아직도 창과 칼만으로 바티칸을 지키고 있다.
이들이 입고 있는 화려한 옷은 ‘미켈란젤로’가 디자인 한 것이다.
이 곳에 위치한 [성베드로 성당]과 [바티칸박물관], [교황청]을 둘러보고는 로마시대의 유적지인 [쥴리어스 시저의 유적]을 둘러 보았다.
- 줄리어스 시저의 유적 -
이 유적지의 연대는 BC5천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지정학적으로는 동양과 서양의 교통과 교역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며 발달해왔다.
BC146년에 로마통치에 대한 반란으로 파괴당한 것을 BC44년에 [줄리어스 시저]에 의해서 도시가 재건설되었다.
지진과 침략자들에 의한 약탈 등으로 지금은 약간의 고대 유물과 유적이 남아 있다.
유물도 대부분 로마시대의 것들인데 예외적으로 BC 5세기의 [아폴로 신전]은 그리스양식으로 고대 유적 중에서 가장 탁월한 유적이다.
- 아폴로 신전 -
이 아폴로 신전은 아고라 북쪽 끝에 있는데 BC 6세기경에 태양신 아폴론을 위해 축조했다.
현재는 일곱 개의 기둥만 남아 있다.
그리스 신전 중 올림피아의 헤라 신전 다음으로 오래되었다고 한다.
다음에는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인정되기전 [기독교인들의 지하 응회암 공동묘지]를 둘러 보았다.
석회암의 일종인 응회암을 곡괭이로 파서 마치 개미집처럼 미로로 연결이 되어 있었다.
탄압을 피해서 숨어 사는 사정이라 이러한 환경에 적응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사람의 뼈조각이 그대로 보존이 되어 있어서 을시년스러운 날에는 방문하는데 제법 많은 용기를 내어야 하는 곳이다.
본래는 로마인들의 매장지로 출발하였는데 깊은 곳은 5층이나 된다.
고대 로마법에 따르면 로마성 안에는 시신을 매장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모든 지하공동묘지는 모두 로마 성 밖에 있다.(4.8km이내)
지하에 바위를 뚫고 묘실을 만들고 시신을 안치했던 장례법은 그 당시 여러 나라에 있었던 제도이다.
기독교도들을 박해 할 때 로마에 살던 기독교도들은 군인들의 습격을 피해 지하묘지 미로에 몸을 숨기고 달아나고 하였다.
여러 지하묘지 중 로마 근교의 것은 지하통로의 길이가 500㎞이상 되기도 한다.
다음 방문지는 고대 로마의 원형경기장인 [콜로세움]이다.
- 원형경기장 콜로세움 -
이 곳은 서기 72년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해 만들어지기 시작한 원형 경기장으로 8년 후 그의 아들인 티투스 황제 때 완공되었다.
총 5만 5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경기장이 그 시대에 지어졌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80여 개의 아치문을 통해 관중들이 입장하는 데 30분 퇴장하는 데는 불과 15분밖에 걸리지 않았고, 개폐형 지 붕과 같은 놀라운 시설을 갖춘 콜로세움은 2007년 새롭게 선정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다.
1층부터 독특한 구조를 띠고 있는 이 경기장에서는 맹수의 시합이나 검투사 경기가 개최되었고, 황제부터 노예까지 모든 로마 시민들이 함께 관람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신분에 따라 자리가 달랐는데 1층은 귀빈석, 2층은 일반석, 3층은 입석으로 이루어졌다.
3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검투사들의 경기가 계속되다가 450년 호노리우스 황제가 중지시키면서 끝이 난다.
이후 콜로세움은 지진의 피해를 입기도 하고 중세 교회를 짓는 재료로 쓰이기 위해 외벽의 절반 이상이 뜯기게 되어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지는 못해 아쉽지만 2천년 전 지어진 거대한 건축물의 경이로움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콜로세움앞에 있는 로마황제의 승전 기념 개선문을 둘러 본 후에 ‘로마의 휴일’에 등장하는 [트레비분수의 야경]을 관광하였다.
이 분수는 전쟁에서 돌아온 병사들에게 물을 준 한 처녀의 전설을 분수로 만든 것이다.
분수의 정면 오른쪽 위에 이런 일화를 담은 조각품이 있다.
고대 로마 시대는 풍부한 수원과 총 14개의 거대한 수도망이 있었고 로마 전역에 물을 공급했지만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많은 이민족들이 침입하면서 이 수로망을 파괴했다.
그로 인해 물 부족 현상이 발생했다.
이런 물 부족은 15세기 이후에 로마를 재정비하려던 교황들이 여러 수도교와 분수를 만들면서 해소되었다.
그중에 제일 유명한 것이 바로 이 트레비 분수이다.
평범했던 이 분수는 1732년 교황 클레멘스13세가 니콜라 살비에게 명해 공사 후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트레비 분수의 아름다움은 바로크 양식의 마지막 최고 걸작품이라고도 한다.
- 트레비 분수 -
이 분수가 유명하게 된 이유는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 여주인공이 분수에 뛰어드는 장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분수의 중앙에 있는 근엄한 모양의 부조물은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이며 양쪽에 말을 잡고 있는 두 명의 신은 포세이돈의 아들인 트리톤이다.
종종 테베레 강이 범람해서 이곳까지 물에 잠길 때가 많자 바다의 신을 만들어 이를 막고자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분수 왼쪽에 날뛰는 말은 풍랑을 상징하고, 오른쪽의 말은 고요한 물을 상징한다.
양쪽에 있는 4개의 여인 조각상은 4계절을 상징한다.
▶ 10일차 : 1월 21일(일) - 오늘은 호주의 시드니항,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항과 더불어 세계3대 미항의 하나인 [나폴리]로 이동을 하였다.
10:41분에는 [나폴리의 고성]을 둘러보았다.
- 나폴리 고성 -
이어서 [산타루치아 항구]를 살펴보았다.
- 산타루치아 항구 -
소싯적에 배운
‘내 배는 살같이 바다를 지난다. 산타루치아~~~ 산타루치아~~~’라는 구절이 생각 났다.
이탈리아에는
"나폴리에는 꼭 가보고 죽어라!“
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나폴리는 아름다운 곳이다.
나폴리만의 언덕에서 [베수비오 화산]을 바라본 풍경은 특히 인상적이다.
베수비오 산을 정면으로 보면서 카라치오로 해안도로를 거닐면 곧 돌로 된 안벽에 다다른다.
그 방파제에 둘러싸여진 작은 만(灣)이 산타루치아이다.
이 곳은 특히 야경이 아름다운 항구이며 유명한 노래 〈산타루치아〉는 바로 이곳의 정경을 노래한 것이다.
다시 이동을 한 우리들은 고대 베수비오 화산폭발로 비운의 도시가 된 [폼페이]에 도착을 하였다.
폼페이는 이탈리아 내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곳이다.
- 화산폭발로 화산재와 함께 인간미이라가
된 체 발굴된 폼페이 시민들 -
이 곳은 기원전 89년에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간 이래 로마 귀족들의 휴양지로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79년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면서 폼페이는 한순간에 엄청난 양의 화산재와 화산암 속에 파묻혀 버렸다.
당시 살아남은 사람들은 절대 자신의 고향인 폼페이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저주받은 도시 출신이라는 것을 알리기 싫어했기 때문이다.
- 당시 다니던 마차 바퀴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폼페이 -
잊혀졌던 이 도시는 1592년 공사 중에 우연히 유적이 발견되면서 다시 역사에 등장하였다.
발굴 결과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당장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게 모든 것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1748년에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면서 화려했던 고대 도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발굴 작업의 여파가 굉장해서 전 유럽에 고대 그리스풍의 유행이 새로 생기기 시작했을 정도이며 유럽의 부호들은 너도나도 이 발굴 작업에 뛰어들었다.
- 당시의 건물 흔적 -
서유럽에서 유물과 유적은 단순한 예술품 이외에 엄청난 부를 안겨 줄 수 있는 또 다른 노다지였기 때문이다.
발굴 작업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으며 지금은 시가지의 80% 정도가 발굴된 상태이다.
마치 시간이 멈춰 버린 것처럼 당시 로마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간직한 폼페이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보호되고 있다.
폼페이 유적 관광을 마지막으로 우리들은 귀국을 위한 비행기를 타기 위하여 [로마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 11일차 : 1월 22일(월) - 로마에서 출발한 대한항공 직항편은 다음날 15:35분에 인천공항에 우리들을 내려 주었다.
포항차편이 맞지를 않아서 리무진버스(차비 3만원)를 이용하여 대구동부시외터미널로 향하다.
포항 직항버스는 9시에 끝이 나서 할수없이 경주를 경유하는 시외버스(차비 7천원)를 이용하여 포항에 도착하였다.
이로써 길고 긴 서유럽 4개국 여행도 끝~~~
서유럽은 카톡릭의 성지이다.
교인들에게는 특히 많은 감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해보며......
첫댓글 송이골님 서유랍 4개국 여행 후기를 재밋게 잘읽었으며 많은것을 얻고 갑니다. 장문의 글을 올리시느라고 수고 많았습니다.복많이 받으세요♡
10일 이상 여행을 하다보니, 9시간 이상 차이가 나는 시차 때문에 귀국후 한참동안 시차적응에 곤란을 겪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합니다.
감사합니다.
간접여행 잘하고 갑니다.
작년에 다녀온 남편한테 보여줘야 겠습니다.
전 멀미가 심해 장거리 차.배,비행기 모두 무리랍니다.
매사에 바쁘신 가운데도 관심을 갖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