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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119
8월12일 [연중 제19주간 월요일/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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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저는 현세에서나 내세에서나 주님 그분밖에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오랜 교회 역사 안에서 성화의 길, 성인이 되는 길은 대체로 성직자나 수도자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성화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점점 폭넓어졌고, 보편화되었습니다. 더 이상 성화의 길은 성직자 수도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세상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된다고 교회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각자 살아가는 삶의 환경과 처지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면서, 고통과 환난 속에서도 꿋꿋하고 당당히, 기쁘게 살아가면서 성인이 될 수 있음을 교회는 가르칩니다.
성덕의 보편성에 대한 강조는 성경에서부터 그 뿌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기 19장 2절)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오 복음 5장 48절)
이러한 흐름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교회 헌장에서는 성덕에 대한 보편성을 결연히 강조하면서, 이 세상 그 누구도 성화의 길에서 배제되지 않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 수도자(1572~1641)의 생애가 성덕의 보편성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녀의 생애는 참으로 기구했고 파란만장했습니다.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다가오는 세상만사를 주님의 뜻 안에서 바라봤고, 오늘 이 순간 주님께서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가 늘 찾고 추구했던 그녀는 마침내 성덕의 정상에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요안나는 프랑스 귀족 가문 출신의 여인으로 성장했고, 촉망받던 국왕의 충신이었던 바롱 크리스토퍼 드 샹탈 남작과 결혼해서 여섯 명이나 되는 자녀를 출산했고, 잘 교육시켰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더없이 화목했던 가정에 큰 불행이 들이닥칩니다. 극진히 사랑했던 남편이 젊은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떠나 하루 아침에 과부가 된 것입니다. 사별의 깊은 아픔을 겨우 추스르며 열심히 자녀들을 양육하던 요안나는 33세 되던 해 프란치스코 드 살(살레시오) 주교님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갖습니다. 그녀 인생의 가장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찾아온 것입니다.
당시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님의 명성과 인기를 하늘을 찔렀습니다. 준수한 외모와 다정다감한 성품의 소유자, 감동적인 설교가였던 그를 남녀노소 모든 사람들이 흠모하고 존경했습니다. 특히 당대 여성들 사이에서 그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거의 아이돌 급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님께서 말씀을 시작하면 신앙심이 깊은 여인들은 마치 해바라기가 태양을 바라보듯이 그를 둘러쌌습니다. 그 중에 한 명이 요안나였습니다.
당시의 만남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그녀는 나중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그분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그분의 거룩한 말씀과 행동은 나를 감동의 도가니로 몰고 갔습니다. 나는 그분 곁에 있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은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일 제 처지가 허락된다면 그분의 몸종이라도 되고 싶었습니다.”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님의 강론과 인품에 완전 매료된 요안나는 그분의 지혜롭고 슬기로운 영적 지도 하에 신심이 일취월장하게 되었고,
의기투합한 두 분은 전통적인 수녀원과는 많이 다른 신심깊은 과부들을 위한 수녀원(성모 방문 수녀원, Order of the Visitation of Our Lady)을 설립하게 되었고, 초대 총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한 백작의 아내요 여섯 아이의 어머니였던 요안나가 훌륭한 영적 지도자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님을 만나 수도자로 거듭나며, 거기서 멈추지 않고 성모 방문 수도회의 창립자가 되었다는 것, 오늘 우리 교회와 수도자들 그리고 평신도들에게 큰 의미와 과제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노력한다면 세상 안에서도 아주 훌륭히 수도생활 못지않은 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평신도로 살아가면서도 아주 높은 성덕의 정상에까지 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님 같은 훌륭한 영적 지도자를 찾는 일입니다. 그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는 일입니다.
영적 여정에서 생기는 모든 어려움 앞에 겸손되이 자문을 구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안에서 그분과 영적인 관계를 지속하는 일입니다.
“저는 현세에서나 내세에서나 주님 그분 밖에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주님, 저는 당신의 말씀을 직접 들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종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곧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그분을 통해 저를 온전히 바치겠습니다.”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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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내가 기분 좋게 끝나려면>
안무가 ‘리아 킴’을 들어보셨나요? 요즘 아이들이 제일 되고 싶은 사람이 유튜버라고 합니다. 종전까지는 연예인이었는데 실제적으로 연예인이 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유튜버 중 가장 많은 구독자를 가진 사람이 누굴까요? 바로 안무가 ‘리아 킴’입니다. 그녀가 가진 구독자가 1500만이니 그 수입이 엄청나리라 예상됩니다.
그녀는 자신이 만든 춤을 100만 명이 따라하게 하고 싶은 마음으로 ‘1 Million Dance Studio’를 만들었습니다. 이는 마치 백종원 씨가 자신의 레시피를 모두 유튜브로 공개하는 것과 같은 개념입니다. 어차피 저작권을 인정받지 못할 바에야 그냥 다 공유해버리자는 생각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유튜브를 통해 자신의 춤 동작들을 나누게 된 것은 근래의 일입니다. 그녀는 그 동안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데 총력을 기울여왔습니다.
능력을 나눌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어렸을 때 왕따를 당하는 소심한 아이였습니다. 전교생으로부터도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그러던 중 중학교 때 마이클 잭슨의 춤을 보고는 춤으로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대학도 포기하고 가장 견디기 힘들다는 스승을 만나 피나는 연습을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만인 앞에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그 결과 그녀는 참가하는 수많은 댄스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여 명실상부 한국 대표 춤꾼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세계 댄스 대회에서 우승을 할 때는 한없이 기뻤습니다.
이어 연예 엔터테인먼트에서 유명한 수많은 아이돌 가수들의 춤 선생으로 활약하였습니다. 그러나 춤으로는 돈을 벌수가 없었습니다. 대회에서 우승해봐야 기쁨이 3일 정도밖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항상 가난하였습니다.
세계에서 제일가는 춤꾼인데도 택시 탈 돈도 없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돈을 벌기 위해 댄스 경연을 하는 TV프로그램에 출연하였는데 자신이 가르친 아이돌들에 의해 심한 모욕적인 판정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 것에서 벗어나 자신이 만든 춤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수강료도 매우 싼 댄스 학원을 만들고 그 학원에서 자신이 만든 춤을 유튜브로 공개하여 단 500명이라도 구독해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1500만 명의 한국 최대 채널을 소유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녀가 만족하게 된 계기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 것에서부터 이제 자신의 능력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의 전환 때문임을 알게 됩니다.
누군가가 필요로 하는 것을 내어주려 할 때 내가 필요한 것도 얻게 됩니다. 내가 아니라 타인을 기분 좋게 해주려 할 때 나도 기분 좋아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죽음과 부활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매우 슬퍼하였다고 말합니다. 제자들이 슬퍼한 이유는 죽음에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활은 ‘기쁘려면 먼저 슬퍼야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설명해주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카파르나움은 갈릴래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습니다.
거기에서 성전세를 걷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라고 묻습니다.
베드로는 “내십니다.”하고는 집에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어찌 아셨는지 세상 임금들이 자녀에게 세금을 걷을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도 당신 아들에게 세금을 걷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성전은 하느님 아버지의 집이고 그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성전세를 내실 필요가 없는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예수님 말씀대로 물고기를 잡았는데 그 입에서 돈이 나와 그것으로 성전세를 내게 되면 베드로는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요?
그러나 그렇게 순종하기까지는 ‘왜 안 내도 되는데, 자꾸 물고기를 잡아서 입을 벌려보라는 거지?’, 혹은 ‘돈이 있으면 그냥 주시면 되지 왜 물고기 잡는 고생까지 하게 하시지?’라는 불만스런 마음이 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뜻에 순종하고 나니 곧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십니다.
“나의 주님, 나의 주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며 십자가에서 부르짖으십니다.
왜 버리셨을까요? 인간을 기분 좋게 하시기 위해 그러셨습니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인간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며 이제 주님께 나아가도 된다는 안도감을 얻습니다.
이렇게 누군가를 기분 좋게 하기 위해서는 나는 고통을 받아야합니다. 엄청난 공포와 싸워야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분 좋게 하고 났더니 부활의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이처럼 누군가를 기분 좋게 하기 위해 자신의 기분을 망칠수도 있는 순명의 길로 가지만 결국은 기분이 좋아지는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옳음을 드러내는 것과 상대의 기분을 놓고 볼 때, 대부분은 상대의 기분을 고려하여 옳은 말이라도 침묵하는 편이 낫습니다.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은 곧 자신을 무시하는 말로 듣기에 그런 사람에게는 어떠한 말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오히려 저항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강의를 하다보면 듣는 분들이 이미 기분을 상하면 아무리 옳은 말을 해 주어도 그 강의는 실패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머니가 자녀에게 옳은 말을 하지만 기분 나쁘게 할 때는 자녀는 그것을 교훈으로 여기지 않고 ‘잔소리’로 여기고 귀찮아합니다. 기분이 먼저 상하면 아무리 옳은 말을 해 주어도 쓸모없어집니다.
상대의 기분을 잡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내가 옳다고 믿는 말을 사정없이 해 주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이 살려고 하는 행위기 때문에 나중에 죽게 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기분 좋게 끝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옳더라도 조금 참고 상대의 기분을 좋게 해 주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때는 조금 고통스러울지 몰라도 상대도 기분 좋고, 나도 기분 좋은 결과로 끝나게 됩니다.
이것이 십자가와 부활의 연관관계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 신비를 알려주려 하신 것입니다.
나를 위하는 것으로는 기분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습니다. 다른 이를 기분 좋게 해 줄 때 결국 나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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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7,22-2 : 성전 세
예수님께서는 또다시 당신의 수난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베드로가 주님을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고백하였고,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그 수난을 영광이라고 했으며, 아버지께서 하늘에서 말씀하셨다. 또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다는 말씀을 하셨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에 “몹시 슬퍼하였다.”(23절) 제자들은 그 사건의 권능이 어떤 것인지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넘겨지셨다는 것은 아버지께서 우리 모두를 위해 아들을 넘겨주신 것이다.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24절) 유대인들은 모두가 똑같이 이 성전 세를 반 세켈을 바쳤다(탈출 30,13 참조). 여기서 반 세켈을 내는 것은 자신을 바치는 것을 상징하며 세켈은 구원받은 사람을 상징한다. 주님께서도 성전 세를 내라는 요구를 받으신다. 성전 세를 바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서약한 우리가 하느님의 참 성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바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한 세금 징수원이 베드로에게 와서 예수께서 성전 세를 납부했는지를 물었을 때 베드로는 납부하겠다고 대답하고서는 예수님께 그 상황을 보고하였다. 베드로의 말을 들으신 예수께서는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므로 다른 사람은 세금을 내어도 우리는 세금을 면제받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또한 루가 2,49에서 보더라도 성모님과 요셉 성인이 소년 예수를 잃었다가 성전에서 3일 만에 찾았을 때, "내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라는 말씀에서처럼 어떻게 아들이 자기 아버지의 집을 위한 세금을 낼 수 있겠는가 하고 반문하셨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세금을 내야한다고 하신다. 그것은 자신의 의무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인 것으로서 신앙인은 타인에게 표양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세금 낼 돈은 어디서 구할 것인가? 복음에서 보면 낚시를 해서 첫 번째 잡히는 물고기의 입을 벌리면 은전이 들어있을 테니 그것으로 예수님과 베드로의 세금을 내라고 하셨다.
물고기는 교회의 모습이다. 이 물고기는 한 때, 불신앙과 미신의 물속 깊은 곳에 사로잡혀 세속적 쾌락이라는 폭풍과 불행에 싸여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물고기는 말씀의 가르침이라는 사도들의 낚싯바늘과,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1베드 2,9) 주시는 말씀의 낚시 그물에 의해 하느님께로 높이 들어 올려진다. 그 물고기 입에서 동전을 취하여 세금으로 내도록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땅에서도 동전을 취하실 수도 있었지만 호수에서 그 기적을 이루신다. 우리 모두는 삶의 씁쓸한 혼돈으로부터 건져진 물고기이다. 우리는 사도들의 낚시 그물에 잡혀 온 물고기와 같다. 이 물고기들의 입에는 그리스도의 고귀한 동전이 물려있다. 이 동전은 우리 영혼의 빛과 육신의 빚을 갚는 데 사용되었다. 유대인들과 다른 민족들의 빚, 가난한 사람들과 부자들의 빚을 갚았다고 할 수 있다. 똑같이 세금을 내라고 했기 때문이다.(탈출 3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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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홍보국장/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독서는 하느님의 능력에 대하여 말합니다. 사람은 큰 권한을 잡으면 가끔 폭군이 되기도 합니다. 반면 하느님의 힘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신중함과 관심 그리고 정의에 관한 관심을 수반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위대하고 힘세며 경외로우신” 분이십니다. 또한 “사람을 차별 대우하지 않으시고 뇌물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며,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고, 이방인을 사랑하시어 그에게 음식과 옷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의 선익을 추구하시는 분이십니다.
모세가 제시하는 계명과 규정 가운데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한 것은, 이방인으로까지 확대되는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가족, 친구들, 지인들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와 무관하지만 힘없고 빈곤한 사람, 하느님 사랑의 대상으로 간주되는 이방인에게도 사랑하는 마음을 열어 놓으라고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고 싶다면, 우리도 관대하게 열린 마음으로 난민과 이민을 포함한 이방인을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신중하심과 힘에 감탄합니다. 임금들은 이방인들에게서 세금을 거둡니다. 성전 세를 내라는 재촉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 집을 위한 세금을 내실 필요가 없음을 잘 알고 계시면서도 당신의 특권을 내세우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매우 신중하게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필요한 세금을 마련하시려고 당신 능력을 사용하십니다.
우리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진 것 없고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을 돕는 데 우리 능력을 이용해야 합니다. 만일 이것이 다른 이들에게 피해나 걸림돌이 될 위험이 있다면 우리 권리마저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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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전 세를 바치시다.>
“그들이 카파르나움으로 갔을 때,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다. 베드로가 ‘내십니다.’ 하고는 집에 들어갔더니 예수님께서 먼저,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면 남들에게서냐?’ 하고 물으셨다. 베드로가 ‘남들에게서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마태 17,24-27)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계시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고,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기 때문에(마태 12,6) 성전 세를 낼 의무가 없습니다. (성전 세는 스무 살 이상의 남자들이 매년 한 번씩 성전에 바치는 돈이었는데, 그 돈은 성전 유지비로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라는 말씀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그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지 않도록”입니다. 이 말은, 그들의 정당한 직무 수행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다는 번역은, 그들의 비위를 맞춰 주어야 한다는 뜻으로 오해하기가 쉬운 번역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세속과 타협할 필요가 있다는 뜻도 아니고, 어쩔 수 없이 법과 제도를 지킬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성전 세에 관한 율법은 세속의 법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직접 지시하신 ‘하느님의 법’입니다.(탈출 30,11-16) 그리고 지키기 싫더라도 어쩔 수 없이 지켜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성전을 위한 ‘선한 일’입니다.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모르고 있고, 또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기 때문에 성전 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만일에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있고, 믿고 있다고 하더라도 성전 세를 면제해 주는 것은 그들의 권한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세를 내신 일은, 산상 설교에 있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복음서를 읽다보면, 예수님께서 유대교 율법을 무시하신 것 같은 이야기를 자주 접하게 되는데, 예수님께서 무시하거나 배척하신 것은 ‘하느님의 법’이 아니라, 바리사이들 같은 율법주의자들이 정한 규정들입니다.(마태 15,1-9) 성전 세를 내신 일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은 모범적으로 율법을 지키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속의 법이라도 하느님 뜻에 합당한 선한 법은 잘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올바른 태도입니다. 도로교통법이 좋은 예입니다. 이 법은 온갖 교통사고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입니다. “신앙인은 세상 안에서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음주운전을 하고, 신호위반을 하고, 과속을 한다면, 과연 그것을 올바른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짓은 고해성사를 보아야 할 ‘죄’입니다. 신앙인은 더욱 모범적으로 도로교통법을 잘 지켜야 합니다.)
혹시 사람들 가운데에는 “예수님께서는 ‘성전 정화’ 때에 ‘이 성전을 허물어라.'"(요한 2,19)라는 말씀을 하셨다. 허물어야 할 성전이라면 왜 성전 세를 내셨는가?”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성전을 허물어라.”라는 예수님 말씀은, 글자 그대로 성전을 없애라는 뜻이 아니라, ‘강도들의 소굴’로 변한 성전을 ‘모든 민족들을 위한 집’으로 회복시키라는 뜻입니다.(마르 11,17) (당시에 대사제와 일부 수석사제들이 부패하고 타락했어도, 성전 세와 관련된 비리나 부정부패는 없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전 세를 낼 돈을 마련하는 방법이 특이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어부 출신이었기 때문에 물고기를 잡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고, 잡은 물고기를 시장에서 팔면 간단하게 돈을 마련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인간적인 방식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기적을 행하십니다. 물고기 입에서 돈이 나온 것은, 또는 돈을 물고 있는 물고기를 잡은 것은 분명히 기적이고,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바치는 ‘봉헌’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일이다.”라는 가르침으로 해석합니다.
<봉헌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일이기 때문에, 많이 바쳤다고 생색낼 일도 아니고, 적게 바쳤다고 부끄러워할 것도 없습니다. 형편이 넉넉하면 많이 바치는 것이고, 많이 바칠 수 있음을 감사드려야 합니다. 반대로 형편이 어려워서 적게 바칠 수밖에 없더라도 무슨 죄를 지은 것처럼 주눅들 이유가 없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에 나오는 과부의 경우에, 그 과부가 바친 ‘렙톤 두 닢’은(마르 12,42) 아마도 성전에서 준 생계 보조비였을 것입니다. 성전에서 준 생계 보조비를 다시 성전에 바치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 과부는 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정성과 사랑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니 하느님께 돌려드린다는 마음으로...) 그러면 큰돈을 바친(마르 12,41) 부자들의 경우는 어떤가? 부자들이 바친 돈도 사실은 하느님께서 주신 돈입니다. (가난하든지 부유하든지 간에 우리가 가진 것은 모두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고, 자기 돈을 바친다고만 생각했고, 정성도 사랑도 없이 바쳤고, 그리고 자기들이 큰돈을 바쳤음을 생색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과부를(과부만) 칭찬하신 것은 사실상 부자들을 꾸짖으신 일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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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황태웅 요셉 신부님]
<메시아의 비밀 그리고 성전세>
복음말씀에서 예수님은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그 한 가지는 당신의 수난예고입니다. 그 내용을 다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나는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왜 그렇게 되어야 되는지 또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반응은 그들이 기대했던 주님께 대한 실망이었고 낭패였습니다.
예수님이 늘 함께 계시며 기적도 행하고 가르침도 주시기를 바랐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하루빨리 당신 왕국을 세우고 자기들을 등용해주시기를 바랐습니다.
세상을 구원해 주실 메시아 주님께서 수난하시게 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주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하고 만류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를 대단히 나무라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네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셨습니다.
우리는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남을 위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아니니까요. 또 부활이야기를 하시지만 수난하게 될 예수님을 미리 알았다면 그 제자가 되었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 신앙생활은 마음도 편하고 또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가 원하는 것이 좀 잘되기 원해서 아닙니까?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야 된다고 하지만, 십자가는 피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제자들을 잘 알고 계시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십자가 이야기를 미리 하신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이신지 또 어떤 분이신지를 제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수난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미리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는 당신의 참모습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 빼놓고 다른 가르침이나 기적으로만 으로는 당신이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도 알 수 없고, 우리 모두를 어떻게 구원 해주실지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적을 보고 예수님께 “당신이 주님이십니다”하고 외쳤을 때 “입 다물어라” 하셨습니다.
아무에게도 이 사실조차 말하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리신 것도 몇 번이나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메시아의 비밀” 이라고 합니다.
사도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메시아의 비밀은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베드로 일행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체험한 후 성령의 내려오시자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난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알게 되고 그분의 사랑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합니까?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십자가를 지기를 원하십니다. 올바르게 살아가면서 져야하는 우리자신의 모든 어려움, 이것을 이겨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것을 피하고서는 즉 우리의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는 주님을 제대로 알 수도 없고 또 주님의 제자도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주님의 수난을 만류했다가 야단맞았지만 나중에 자신의 십자가를 끝까지 졌습니다. 그래서 자기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십자가 피하고서는 참된 신앙인이 될 수도 없고, 주님의 질책을 피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메시아의 비밀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 중에 두 번째는 성전세금을 내는 문제입니다. 그 당시 유대에서는 남자가 20세가 되면 매년 성전세를 냈습니다. 세금을 내는 돈도 정해져 있었습니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그리스 돈 드락메가 아니라 유다 자기나라 돈 세겔이었습니다.
자기 나라 돈으로만 성전세를 냈던 이유가 있습니다. 우상숭배를 하지 않으려하던 그들이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다른 돈은 일상생활에서는 어쩔 수 없었지만 성전세금을 내는 데는 불가했기 때문입니다. 황제도 신으로 숭배되었으니 당연히 우상입니다.
우상이 새겨져 있는 돈, 말하자면 오늘날에는 우상이 된 돈이 성전마당에까지 들어온 것입니다. 돈 그것은 하느님을 공경하는데 도움이 되어야 하는데, 하느님이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전마당의 환전상 자판을 뒤집어 버리신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는 줄은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성전세를 바치게 하셨습니다. 또 바칠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그 당시 성전에서 봉사하던 제관들과 다른 종사자들은 성전세를 면제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시몬아 세상 임금들은 누구에게서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냐, 아니면 남들이냐?” 베드로는 “남들입니다”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하고 확인하십니다.
그러니 주님도 또 베드로도 성전세를 면제 받는 것은 확실해졌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 없다”하시고 성전세를 바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이웃사랑의 실천입니다. 우리가 정해진 세금을 바치지 않으면, 그것이 교회 내 일 때는 교무금이 되겠습니다만 해야 할 일을 하지 아니하는 잘못도 범하겠지만, 이웃사랑을 실천하지 아니하는 사람도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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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성전 세 납부 문제로 논란이 일어납니다. 당시 스무 살 이상의 유다인 남자들은 성전 세를 낼 의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세상 임금들이 세금을 자녀들에게도 거두느냐고 질문하시자, 베드로는 남들에게서만 받는다고 대답하지요.
이에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은 세금을 면제받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니 하느님께 성전 세를 낼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지요.
그러고는 말씀을 이어 가십니다.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 이 말씀은 ‘남들을 걸려 넘어뜨릴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어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성전 세 몇 푼을 내려고 기적을 베푸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분은 당신을 위해서 기적을 베푸신 적은 결코 없으셨지요. 이는 성전 세를 내려고 나름대로 일을 하라는 뜻으로 쓰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고기 잡는 어부였지요. 그러기에 베드로가 어느 하루, 고기를 잡아 팔면 세금 낼 돈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까? 이를 극적으로 표현하려고 예수님께서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각자의 직업이나 고유한 일에 먼저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숭고한 노동과 활동을 통해 하느님에 대한 의무를 다하도록 더욱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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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성 안토니오 수도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마음이 없는 사람, 그런 사람도 있나?>
신명기 10장은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주신 것과 하느님께서 해주신 것에 대한 응답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주신 것은 그들만을 사랑해주신 것이고 그들만을 사랑하셨기에 그들만을 따로 뽑아 마음을 주셨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너희 조상들에게만 마음을 주시어 그들을 사랑하셨으며, 오늘 이처럼 모든 백성 가운데에서도 그들의 자손들인 너희만을 선택하셨다.”
그런데 그들에게만 마음을 주셨다니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리고 마음을 가진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마음이 없는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까?
이 말씀을 처음 읽으면서 마음이 없는 사람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얼마간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마음이 없는 사람. 이는 마치 무뇌 인간, 곧 뇌가 없는 아이로 태어나는 경우가 있다는데 그 무뇌 인간처럼 마음이 없는 사람도 있다는 뜻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우리도 무심하다는 말을 흔히 쓰잖아요?
그렇습니다. 우리 중에도 마음을 가졌으되 마음이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일할 마음이 없는 사람. 도와줄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 용서해줄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 축하해줄 마음이 조금도 없는 사람.
그러니까 우리의 말 쓰임새를 보니 마음이 없다는 것은 착한 마음, 좋은 마음, 사랑의 마음, 곧 관심이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죽일 마음, 저주하는 마음이 없는 경우에는 마음이 없다는 표현을 쓰지 않는 것으로 보아 좋은 마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어지는 신명기의, “그러므로 너희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더 이상 목을 뻣뻣하게 하지 마라.”는 말씀은 이웃의 사정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무딘 마음에 할례를 거행하여 이웃의 사정에 나긋나긋하고 따뜻한 마음을 갖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이 정도만 되어도 마음의 할례를 받는 것이고,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고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진정한 뜻, 속뜻은 그 이상일 것입니다.
그 이상이라면 어떤 마음입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오늘 신명기는 그래서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고 한 다음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고, 이방인을 사랑하시어 그에게 음식과 옷을 주시는 분이시다.”
어제는 조선족 동포 미사를 봉헌하고 한글학교를 시작하기 위한 교사들의 공부 모임을 가지며 준비사항을 점검하였습니다.
어떤 교재를 가지고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를 얘기하다가 교재를 가지고 가르치는 기술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분들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는 얘기를 나눴습니다.
자기 시간을 내어 교사로 자원봉사 하겠다는 분들이니 사랑의 마음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임하시겠지만 사랑의 마음일지라도 나는 베푸는 사람이고 너희는 받는 사람이라는 마음이 작용할 수 있고, 머리로서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차별의 마음이 자기도 모르게 있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무차별 공격은 안 좋은 뜻으로 쓰이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무차별임을 다시 한 번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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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삶>
마태오 17,22-27 (수난과 부활에 관해 두 번째로 예고하시다, 성전 세를 바치시다)
제자들이 갈릴래아에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슬퍼하였다.
그들이 카파르나움으로 갔을 때,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다. 베드로가 “내십니다.” 하고는 집에 들어갔더니 예수님께서 먼저,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면 남들에게서냐?” 하고 물으셨다. 베드로가 “남들에게서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삶>
속된 사람과 다르되
속된 사람과 더불어
밝고 뚜렷하게 존재하되
드러나지 않게
모든 선한 것을 기꺼이 이루되
아무 것도 아닌 듯
쉼 없이 앞서 나가되
뒷사람과 함께
나만이 지닌 가치를 깨닫되
다른 이와 똑같이
아낌없이 내어주되
되받음에 미련 없이
매순간 살리기 위해 죽되
죽음을 넘어 부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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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한 말씀만 하소서>
염소 두 마리가 좁은 낭떠러지 길에서 만났습니다.
밑으로는 낭떠러지고, 위로는 가파른 절벽이었습니다. 돌아설 공간도 없었고, 뒷걸음을 하면 떨어지게 됩니다. 그때 두 마리 염소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두 염소가 길을 비키라고 서로 싸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두 마리가 떨어져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 마리가 살아서 자기 갈 길을 가는 것입니다. 염소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가능한 한 납작 엎드립니다. 그러자 다른 염소가 그 위를 넘어서 지나가고, 그리고 또 다른 염소는 일어나 가던 길을 갔습니다. 서로 비키라고 주장하고 고집을 부렸더라면, 두 마리 염소가 싸우다가 다 죽을 뻔했는데, 한 염소가 순종(양보)함으로써 두 마리가 다 살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성전 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전이 누구의 것입니까? 하느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기에 성전 세를 내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대신에 성전 세를 받으실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성전 세를 내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성전 세를 내지 않음으로써 다툼이 일어나고,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이 성전 세를 내지 않아 고통받고 어려움에 부닥쳐 질까 봐 당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리를 양보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배려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묻지도 않고 성전 세를 ‘내신다.’ 하고 집에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벌써 아시고 베드로에게 먼저 성전 세에 대해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자가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면 남들에게서냐?”
예수님은 베드로가 들어오기 전에 알고 계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신 예수님이심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벌써 알고 계십니다. 물론 이미 알고 계시지만 청하기 원하십니다. 기도는 그 사람의 믿음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기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머리카락 한 개 한 개 다 알고 계시는 예수님께서 저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시고 주님 앞에 나아가 필요한 것과 어려운 문제를 청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예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은 자연 만물도 말씀 한마디면 이루어졌습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그리고 베드로를 회개시키기 위해 닭을 울게 하십니다.
이제 그 예수님의 한 말씀을 생각하십시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갈 때, 도무지 풀리지 않는 문제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 문제로 꼬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앞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 만물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을 의지하고, 우리 고운님들의 인생을 맡기신다면 고운님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심을 믿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동전(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베드로가 고기를 잡으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이렇게 주 예수님께서 원하시면 고운님들의 문제도 “먼저…. 즉시…. 빨리, 그것도 한순간에 살맛 나는 기적을….” 이루어주셨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심을 믿음으로, 그 믿음은 거룩하고 성령 충만한 은총의 마음으로, 그리고 베풀어주신 은총 가득한 그 마음은 고운님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능력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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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221)
** 시편 42편 4절….
사람들이 제게 온종일 “네 하느님은 어디 계시느냐?” 빈정거리니 낮에도 밤에도 제 눈물이 저의 음식이 됩니다.
* 네 하느님은 어디 계시느냐?
자신이 의지하던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 아니냐? 는 다윗에 대한 사람들의 조롱과 모욕의 말입니다. 이는 곧 다윗이 참으로 하느님을 의지하였다면 어찌 하느님의 버림을 받아 이 같은 조롱을 받을 수 있겠느냐?는 강한 의혹이 그 배경에 깔린 것입니다. 이는 다윗의 직분에 대한 하느님이 주신 권위는 물론 다윗의 신앙까지도 사람들에 의해 철저히 모욕을 당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 낮에도 밤에도 제 눈물이 저의 음식이 됩니다...
이는 다윗이 사람들의 조롱의 말을 듣고 식음을 전폐한 상태로 탄식하며 주님께 호소하였음을 나타냅니다. 주님께 호소하는 다윗의 심정은 사람들의 조롱의 말처럼 결코 지금까지 자신이 의지하던 하느님이 자신을 버릴 리 없다는 확신과 함께 더욱 야훼 하느님 신앙으로 구원을 호소하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 시편 42편 5-6절….
영광스러우신 분의 초막, 하느님의 집까지 환호와 찬미 소리 드높이 축제의 무리와 함께 행진하던 일들을 되새기며 저의 영혼이 북받쳐 오릅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녹아내리며 내 안에서 신음하느냐? 하느님께 바라라. 나 그분을 다시 찬송하게 되리라. 나의 구원, 나의 하느님.
* 영광스러우신 분의 초막... 저의 영혼이 북받쳐 오릅니다...
이 구절에서 다윗은 지난날 자신이 많은 사람을 인도하여 주님의 궤를 안치한 다윗 성 천막에서 함께 하느님을 경배하며 절기 때마다 기쁨으로 하느님을 찬양했던 일을 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과거에 대한 회고는 원수들에게 쫓겨 예루살렘을 떠나 있으면서 사람들의 조롱을 받고 있는 당시의 다윗의 심정을 더욱 애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통해 이 시편 42편의 배경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예루살렘을 떠났을 때(사무엘 하권 17장 24절-19장 40절. 참조), 마하나임에서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면서 지은 시입니다.
* 하느님께 바라라. 나 그분을 다시 찬송하게 되리라. 나의 구원, 나의 하느님...
다윗은 여기서 과거의 일을 생각할 때 더욱 처량해지고 서글퍼지는 심정을 떨쳐버리고, 오히려 야훼 하느님 신앙으로 더욱 굳건하게 하여 하느님의 은총을 갈급해 하는 심정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는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는 두려운 상황 속에서도, 다윗은 지금까지 자신에게 끊임없이 은총을 베풀어주신 하느님께서 현재의 고난도 반드시 이기게 하시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이 구절은 마치 후렴구처럼 사용되어 12절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되며, 시편 42편과 본래 한편의 시인 43편 5절에서도 반복되어 환난 중 다윗이 야훼 하느님께 의지하고 신뢰하는 신앙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내일은 시편 42편 7-9절을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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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서울에서 강의를 마치고 식사를 하러 어느 분식점에 들어갔습니다. 자리는 많이 비어 있지만 치우지 않은 그릇들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어서 어디에 앉아야 할지를 모르겠더군요.
더군다나 손님이 왔는데도 반기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직원이 하나도 없습니다. 주인으로 보이는 분께서 주방에서 열심히 음식을 만들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냥 ‘다른 곳으로 갈까?’라는 생각도 했지만, 강의를 마친 뒤라서 여유도 있었기에 ‘곧 치워주겠지’ 하면서 자리에 앉았습니다. 적지 않은 손님들이 있었음에도 혼자 운영하는 모습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제자리에 놓여 있던 그릇을 정리해서 주인아주머니께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이때 음식을 주문했지요.
알고 보니 함께 일하던 분이 급하게 일이 생겨서 혼자서 하고 있는데, 오늘따라 손님이 끊이지 않고 와서 이렇게 바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미안하다며 연신 사과를 하시더군요. 저는 “바쁘면 서로 도와야지요.”라면서 미안해하실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 주문한 음식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서비스라고 하면서 떡볶이 한 접시까지 주시는 것이 아닙니까?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만약에 주문을 받지 않는다고, 음식이 늦게 나온다면서 화를 냈다면 어떠했을까요? 우선 기분 좋게 식사를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서비스는 전혀 기대할 수도 없겠지요.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왜 이 일을 하지 않는 거야?’라면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자신이 하면 왜 안 될까요? 그러한 모범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이 만족스러운 상황에 설 수 있게 됩니다. 성전 세를 거두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이 성전 세, 반 스타테르는 부자와 가난한 이를 막론하고 영혼과 육신의 구원을 위해 성전을 드나드는 이는 누구나 내야 한다고 율법이 규정한 액수였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굳이 내실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없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또한 하느님의 집, 그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집이라고도 말할 수 있기에 굳이 성전 세를 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원리 원칙을 따지지 않으며, 당신 집에 대한 당신의 특권을 내세우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매우 신중하게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필요한 세금을 마련하시려고 당신의 능력을 이용하십니다. 주님께서도 원리 원칙을 따지지도 않고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을 드러내지도 않습니다. 이 모범을 우리도 따라야 합니다.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희생과 나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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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어제 어느 카페에 들어갔다가 어떤 장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엄마가 아들에게 수학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엄마와 아들의 표정이 아주 심각합니다. 엄마의 심각한 표정은 ‘이렇게 쉬운 문제도 못 푸느냐?’는 것 같더군요.
그런데 그들 앞에는 아빠와 동생이 있었는데, 아빠는 앉아서 눈을 감고 졸고 있었고 어린 동생은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지요. 엄마와 아들은 심각한데 아빠와 동생은 전혀 심각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나와 상관없다는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수학 문제 풀이는 엄마와 아들만의 문제였으니까요.
그런데 엄마가 이 둘에게 화를 버럭 냅니다. 자는 아빠에게는 “지금이 잘 때야?”라고 말하고, 동생에게는 “너 게임 하지 말라고 했지?”라면서 화를 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화가 근처에 있는 사람에게도 전달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화가 나다 보니 그냥 모든 것이 다 불만이고 그래서 더 화를 내는 것이었지요. 삶 안에서 화가 나는 경우가 전혀 없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화가 났을 때 그 화의 원인을 먼저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도 그 화가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다시 한번 생각하고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화는 계속해서 확장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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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혼자 가면 빨리 가고 같이 가면 멀리 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산행 첫날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먼저 길을 나섰습니다. 그러나 길을 제대로 찾지 못했고, 기다리는 일행과 합류해야 했습니다. 혼자 가는 것보다는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행 16명 중에서 4명이 남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산장에 자리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4명이 자원했습니다. 나중에 다시 합류하였지만, 기꺼이 희생하였던 분들이 있었기에 산행은 즐거웠습니다. 산행은 많이 불편하고, 많이 힘이 듭니다. 그러나 산행은 도시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을 보여 줍니다. 작은 꽃, 흘러가는 구름, 넉넉한 산, 가끔 내리는 비, 모든 것이 새롭습니다. 또한, 산행은 느림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줍니다.
오늘 제1 독서인 신명기는 우리가 함께 가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느냐? 그것은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모든 길을 따라 걸으며 그분을 사랑하고,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섬기는 것, 그리고 너희가 잘되도록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님의 계명과 규정을 지키는 것이다. 그분은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고, 이방인을 사랑하시어 그에게 음식과 옷을 주시는 분이시다. 너희는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교회의 성직자와 사찰의 스님에게도 세금을 걷는다고 합니다. 가톨릭은 이미 성직자들이 세금을 내고 있습니다. 종교인들이 가난한 모습으로 살았다면, 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모습으로 살았다면, 종교인들이 희생과 봉사의 모습으로 살았다면, 종교인들에게 세금을 걷을 것이 거의 없다면 종교인들에 대한 과세를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의 몸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마음과 몸이 따로인 삶은 없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는 이치입니다. 종교인들의 몸이 어디에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굳이 종교인들의 과세를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종교인들의 삶이 그들에게는 등대와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굶주린 이들을 위해서 꽃동네를 세우신 신부님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꽃동네를 후원합니다. 그런 분에게 과세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님이 있습니다. 역시 병들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평생을 사셨습니다. 그분에게는 노벨 평화상도 큰 영광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충실하게 사셨을 뿐입니다. 우리 사회에 뜨거운 감동을 주었던 이태석 신부님이 있습니다. 멀리 아프리카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전하며, 자신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살았습니다. 그런 분에게 누가 과세를 이야기하겠습니까?
종교인들이 오늘 제1 독서의 가르침대로 산다면 세상 사람들은 종교인들에게서 위로와 기쁨을 얻을 것입니다. 종교인들에게서 희망과 평화를 얻을 것입니다. 그것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병든 이들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살아가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의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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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적절한 순서와 아량>
“똥이 무서워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행동이 좋지 않은 사람은 서로 상종할 수 없으니 이쪽에서 삼가서 피하라는 뜻입니다.
물론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도 없고, 완벽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상대가 되지 않으면 때로는 기다려야 하는 아량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전세를 거두는 이가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세금은 로마 총독이 로마제국을 위해 거둬들이던 세금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자체적으로 징수하던 인두세였습니다. 스무 살 이상 성인 유다인 남자라면 누구나 해마다 영혼의 속죄를 위해서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임금들은 관세나 인두세를 남에게서 받아내지 자기 가족에게 부여하지는 않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세금을 내셔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성전의 참 주인이시며 “성전보다 더 큰 분”(마태12,6)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속죄받을 필요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세도 바치셨습니다.(마태 17,27) 성전의 참 주인이신 분께서 성전세를 내신 까닭이 어디 있을까요? 그야말로 요즘 표현으로 스캔들이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세금을 바치십니다. 그런데 예기치 않았던 돈으로 성전 세를 내십니다. 호수의 고기를 잡아 그 입안에 있던 돈으로 베드로의 몫과 주님의 몫으로 주도록 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다.’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시라는 모습에는 손상을 입지 않으시면서, 하느님께는 영광이 드려지며 인간의 비위는 조금도 건드리지 않는 모습에 참 지혜를 만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꼬인 사람에게는 우선은 한발 물러서는 것이 좋습니다. 원리(原理)는 소중합니다. 그러나 실천하며 살아가는 데는 적절한 순서와 아량이 필요합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할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일상 안에서 많은 일들을 접하면서 그때마다 다른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지 않은지 신중히 고려해야 할 상황들이 있습니다. 아주 분명하고 명확하게 말하거나 일관되게 행동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릇이 되지 않는데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더욱 비굴하게 물러서는 것 같이 보이는 때 정말 참 지혜가 필요함을 절감합니다.
때로는 비유를 들고, 때로는 비유를 해설해 주시던 예수님, 손가락에 침을 발라 눈을 닦아주시고, 귀 구멍을 열어주시던 예수님, 일어서라고 하시며 손을 잡아주시던 예수님,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라 하시던 사랑의 예수님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내 생각을 앞세우지 않고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넉넉한 마음으로 지혜를 갈망하는 날 될 수 있길 희망하며 눈높이를 맞춰가는 가운데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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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말씀들은 하느님께 바쳐야 할 의무들을 상기시킵니다.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모든 길을 따라 걸으며 그분을 사랑하고,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섬기는 것, 그리고 ... 주님의 계명과 규정들을 지키는 것이다."(신명 10,12-13)
하느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요구되는 건, 곧 "경외심, 따름, 사랑, 섬김, 계명 준수"입니다. 이는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면서 이스라엘에게만 "마음을 주시고 사랑하시고 선택하신"(신명 10,15) 하느님께 응당 드려야 하는 응답입니다. 이집트 탈출 때 하느님의 권능과 돌보심을 생생히 체험한 그들로서는 당연한 의무일 겁니다.
복음은 성전세를 언급합니다. 마침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로 "그들은 몹시 슬퍼하였다"(마태 17,22)는 대목 뒤에 바로 이어서 성전세 납부 요구가 이어지니 다소 긴장감을 유발시키지요. 베드로가 스승께 여쭈어 보지도 않고 서둘러 "내십니다"(마태 17,25)고 답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먼제받는 것이다."(마태 17,26)
예수님은, 세상의 어느 임금도 제 자녀에게서 세금을 거두지 않듯, 하느님의 아들이며 성전 자체이신 당신께는 성전세를 납부할 의무가 없다는 걸 명백히 하시지요 다만,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마태 17,27) 예수님은 당신의 때가 오기 전에 섣부르게 당신의 신원을 드러내실 필요가 없음을 아시기에, 그것이 하느님 앞에 별 의미가 없다 하더라도, 당장의 제도적 요구를 수용하십니다. 그리고 그 세금은 물고기 입에서 나온 동전으로 지불될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셈이지요.
성전세는 성전을 유지, 보수, 관리하기 위해 걷는 세금입니다. 이는 집회와 경신례, 각종 축제와 제사 때마다 필요한 인력과 자원의 수급을 위해서, 또 사제 계급을 비롯한 레위인들, 성전에 기대어 권위와 권력을 누리며 살아가는 종교 지배층들을 위해 사용되었지요. 시중에 유통되는 화폐와 성전세로 내는 화폐가 달라서 환전 과정에서 차익이 발생했고 이를 불의하게 착복하는 무리도 존재했고요. 그러니 이런 부정이 거리낌없이 벌어지고 있음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실 때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신 것은 괜한 행동이 아니었습니다.(요한 2,13-22)
어쩌면 보통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업에 종사하느라 다할 수 없는 의무를 성전세를 통해 레위인들, 종교 지도자들에게 위임하는 구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누군가는 때 맞춰 축제를 준비하고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올리고 성전을 보살펴야 하니까요.
그렇지만 아무리 성전세를 내더라도 결코 면제될 수 없는 의무가 존재합니다. 바로 오늘 독서에서 모세의 입을 통해 전달된 의무들, 즉 하느님께 드려야 할 "경외심, 따름, 사랑, 섬김, 계명 준수" 등이지요. 이는 유형의 물적 금전적 봉헌으로 대체될 수 없는 영적 관계를 형성합니다. 마음 없이 잣대를 들이대어 힘 없는 백성들을 죄인으로 만든 탓에 예수님의 꾸지람을 들은 율법주의, 문자주의의 맹점이 이를 간과한 결과물이겠지요.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주님께 우리가 진정으로 바쳐야 할 세금이 있다면 그건 사랑입니다. 사랑은 백만금, 억만금으로도 대납할 수 없는 진정한 의무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버지의 자녀로서 우리가 지닌 아름다운 특권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나누는 열렬한 사랑은 영혼 안에 갇혀 있지 못합니다. 불길은 어떻게든 번져나오게 되어 있으니까요. 벗님, 오늘 하느님께서 모세의 입을 통해 고아, 과부, 이방인으로 대변되는 가난하고 힘없고 소외된 이들의 보호자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들의 보호자이신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마음이 혼자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연민의 사랑입니다.
벗님, 그러기에 우리가 진정으로 바쳐야 할 성전세, 하느님의 거처이며 성전인 우리 영혼을 위해 바쳐야 할 의무는 우선 무엇보다 하느님께 드리는 사랑입니다. 모세가 전한 "경외심, 따름, 사랑, 섬김, 계명 준수"가 그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자연스레 이웃 사랑으로 번질 겁니다. 우리는 다만 그 불길을 막지 말고 사랑이 하느님의 보물을 찾아 타오르도록 길을 터주면 됩니다. 설령 우리 자신이 외적으로 볼품없고 흠투성이인 초라한 성전일망정 이렇게 봉헌한 제사는 주님께 영과 진리 안에서 바치는 가장 진실되고 아름다운 제사가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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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사랑의 그물망>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것은 없으니"
사랑은 계산하면 그 힘을 잃고 맙니다
손해보는것을 감수할 수 있을 때
사랑이 가능합니다.
굳이 비위를 건드려서 좋을것이 없다면
오늘 예수님께서 하시듯이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해주면
지는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손해봤다 생각되면
주님이 더 큰 손해를 막아주시고
앞으로 더 좋은것을 주시겠구나
긍정적으로 생각합시다.
사랑의 그물망이 촘촘하다면
살기 어렵습니다.
그물망을 넓히면 나도 상대도
살기가 편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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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마태 17, 25)
가장 가까워야 할
아버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사랑의 관계안에서
우리가 누군지를
깨닫게 됩니다.
무엇을 해야지만
사랑받는 자녀들이
결코 아닙니다.
모든 순간순간이
은총이며
축복입니다.
생명이라는
불가분의
관계안에서
뜨거운 감사를
배웁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게하여 주십니다.
이 모든 것은
아버지 하느님의
것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할
사랑의 시작입니다.
사랑의 근본이
아버지 하느님께
있음을 고백하며
사랑으로 오늘을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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