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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균전의 나라 미국
1. 전염병과 전쟁
▲ "The Plague in Epirus" 에피루스의 역병
전쟁은 자신의 의지를 상대방에게 무력으로 관철시키는 행동이다. 전쟁에는 역사적으로 인류에 커다란 피해를 끼쳐왔던 세균이 개입되었다. 세균이 규명되고, 바이러스성 질환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인간은 세균을 정복하고 제압하였으며, 이를 무기화하였다.
역사적으로 세균은 침략무기로 사용되었다. 전염병은 언제나 한 지역을 완전히 초토화시켜 전투력을 약화시켰기 때문이다. 세균은 가장 혐오스런 공격무기이며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 적군과 아군도 가리지 않으므로 눈이 없는 공격무기라고 할 수 있다.
누가 이런 치명적 세균의 덕을 가장 많이 보았는가? 바로 제국주의 침략세력들이었다.
세계를 휩쓴 전염병들
전염병은 세균이나 바이러스 등 병원체에 의해 감염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옮아가는 질환이다.
인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전염병이 창궐할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염병이 걸린 환자는 따로 모아놓고 사망하면 사체를 불사르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방역대책은 없었다. 전염병에 대한 예방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되기 이전, 인간이 목숨을 잃는 사망원인 중 1위는 단연코 전염병이었을 것이다.
전염병은 특히 한번 창궐하면 그 일대 지역을 완전히 초토화시켰기 때문에 사람들은 전염병을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기 165년경에는 로마제국에서 변방이었던 시리아 지역에서 근무하던 병사들이 근무지에서 돌아오면서 이른바 안토니우스 역병이 창궐하였다고 한다. 이 역병의 정체는 오늘날 아시아와 무역 과정에서 옮은 천연두로 짐작된다는데 이 때로부터 15년 동안 유럽 전역에서 5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이어 541년부터는 이집트에서 전파된 유스티아누스 역병이 창궐하였는데 콘스탄티노플(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에서는 하루에 1만 명이 죽기도 했다고 한다. 이는 오늘날 페스트로 추정된다.
14세기에 유럽대륙을 휩쓴 페스트는 1347년부터 4년 만에 유럽인구 2500만 명을 사망케 하였는데 이는 전 유럽인구의 1/3에 달하는 규모였다고 한다.
페스트는 쥐벼룩에 의해 감염되는데 환자의 피부가 검게 변하면서 사망한다고 해서 흑사병이라고도 불린다. 유럽에서는 페스트가 창궐해 영국과 프랑스 간의 백년전쟁이 중단되기도 하였으며 유럽대륙의 노동력 감소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최근에 인류에게 심각한 피해를 야기한 전염병은 1918년에 발생한 스페인 독감이다. 1918년부터 1920년까지 2년 동안 전 세계에 걸쳐 2500만에서 5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추정되고 있다. 스페인 독감은 스페인이 아니라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병영에서 환자가 발생하였다고 이야기되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병사들이 귀환하면서 스페인 독감은 미국 전체에 퍼졌다. 1918년에 총 50만 명의 미국인이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스페인 독감은 식민지 조선에도 창궐하여 대략 14만 명이 사망하였다고 추정된다.
전염병은 우리 역사에도 공포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역사서는 대체로 나라에 망조가 들면 각종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으면서 공통적으로 역병이 돌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전염병을 줄인 말이 바로 염병이다. “이런, 염병할!”이란 말에서 볼 수 있듯 전염병은 우리 문화에서도 함께하기 싫은, 매우 혐오스러운 대상으로 통용되었다.
전쟁과 전염병
전염병이 특히 기승을 부릴 때는 바로 전쟁 상황이다. 사람의 목숨이 오가는 전쟁터에서 보건위생은 아무래도 뒤쳐질 수밖에 없다. 적군이 몰려오는 위급한 상황인데 물을 끓여 마실 시간은 없다. 전사한 적군을 땅에 묻어 줄 여유도 없다. 집단생활을 하는 군대에서 빨래와 샤워를 정기적으로 하면서 싸우는 것은 21세기 현대에도 힘든 일이다. 하물며 고대와 중세기, 근대의 전쟁은 이루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무더운 여름철이면 살이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전쟁터에서 죽고 죽이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세균이 증식하고 이들이 군인들의 신체를 감염시키는 것은 다반사이다.
역사적으로 전염병에 의해 전쟁이 좌우되었던 사례는 기원전 430년경 고대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있었다. 당시 아테네가 이끌던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가 이끌던 펠로폰네소스 동맹 간의 싸움이 한창이었는데 기원전 430년과 429년, 427년에 걸쳐 아테네에서 역병이 돌았고 이 역병으로 당시 아테네 군인과 민간인 4분의 1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역병으로 약해진 아테네는 결국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패하게 된다. 투키디데스의 기록에 따르면 환자의 증상에 미루어볼 때 당시 역병은 장티푸스였다는 설이 유력하다고 한다.
전쟁과정에서 전염병은 때로는 교전보다 훨씬 더 많은 목숨을 앗아갔다. 그 대표적 전염병이 바로 티푸스이다. 티푸스는 벌레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리케차에 의해 감염되는데 바로 이와 쥐벼룩, 빈대 등에 의한 감염이다. 온 몸에 붉은 점이 나타나는 발진티푸스가 가장 흔한 병종인데 머리를 감지 못해 생기는 이와 위생적이지 못한 환경에서 서식하는 쥐에 의해 일파만파로 감염되었다.
1489년, 유럽 스페인에서 무슬림을 몰아낼 당시 스페인 남부 그라나다에서는 마지막으로 항거하는 무슬림에 대한 그리스도교도들의 최후의 공격이 준비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 그리스도교도 진영에 티푸스가 창궐했고 이로 인해 1만 7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서 실패하고 퇴각길에 올랐을 때, 정작 프랑스 군대를 전멸시킨 것은 바그라티온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군도 있었겠지만 주된 요인은 동장군과 더불어 프랑스 군대 내에서 만연했던 티푸스였다.
이런 티푸스는 포로수용소와 같이 위생시설이 열악할 수밖에 없는 지역에서 창궐하곤 하였다. 1차 세계대전 이후였던 1918년에서 1922년 사이, 티푸스는 300만 명의 환자를 죽음으로 몰아갔다고 하고 2차 대전 당시 유태인들은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티푸스에 의해 죽어갔다. <안네의 일기>로 유명한 안네 프랑크도 수용소에서 티푸스에 걸려 사망하였다.
아메리카 대륙을 휩쓴 유럽인들의 세균
특히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유라시아 대륙으로부터 건너 온 전염병에 의해 인디언의 태반이 목숨을 잃었다. 아메리카 대륙에는 예로부터 대규모 전염병이 기록되지 않았는데 16세기에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몰려 들어가면서 대규모 전염병이 줄을 이었다.
사실 무기의 파괴력이 극대화되지 않은 16세기에 스페인 정복자들이 제 아무리 발군의 전투력을 보인다 하더라도 수십만, 백만에 육박하는 인디언을 모두 도륙하고 정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1518년 멕시코에 상륙한 스페인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 휘하의 부하는 고작 800명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3년 후 인구 30만 명의 도시 테노츠티틀란을 침공했을 때에는 전투가 아니라 그들이 옮긴 천연두에 의해 무려 15만 명의 인디언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16세기에는 카나리 군도의 전 인구가 천연두로 전멸했으며, 히스파뇰라에서는 원주민의 절반이 천연두로 죽었다고 한다.
호주지역의 원주민들도 영국인들과 함께 들어온 전염병 균에 원주민 중 50%가 죽었다고 한다.
오늘날 미국이 있는 북미대륙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초기 북미대륙의 뉴잉글랜드 지역에 유럽인들이 정착하였을 때에는 인디언은 백인들에게 우호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유라시아 대륙에서 함께 건너온 각종 병원균들에게 인디언족들은 전혀 무방비상태였고 전염병의 지속적인 창궐로 인디언 인구는 계속 감소했다고 한다.
북미대륙 전체에 걸쳐 1000만 명 규모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인디언들이 오늘날 수십만 명에 불과한 채로 미국정부가 규정한 보호구역에 사실상 갇히게 된 것도 미국이 자행한 수많은 인디언 토벌정책도 원인이겠지만 기본은 유럽인들이 안고 들어온 병원균에 의한 감염과, 또 하나의 원인은 인디언들의 주된 식량원천이었던 아메리카 들소를 백인들이 마구잡이로 잡아들인 것이었다.
식량원천을 없애고 역병을 계속 퍼뜨리니 인디언들이 남아날 재간이 없었다. 살아남은 인디언에게는 이주를 명령하고, 저항하는 인디언은 도륙하였다. 지구상의 한 대륙에서 인디언이라는 인종이 사실상 멸종하게 된 데에는 전염병이 하나의 커다란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백신 덕택에 무기로 연구된 세균
인간이 전염병에 대해 과학적으로 대응한 첫 사례는 1798년 제너가 종두법으로 천연두를 예방한 것이다. 당시 제너는 종두에 걸린 사람은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민간의 이야기를 과학적으로 추적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종두로부터 천연두를 예방하는 백신을 얻어 접종하였으며 백신을 접종한 아이는 천연두를 접종해도 발병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나아가 파스퇴르는 전염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병원균이란 것을 과학적으로 완전하게 밝혔다. 각종 발효식품에 파스퇴르란 이름이 등장하는 이유가 그가 이 업적으로 지금까지 “미생물학의 아버지”로 불리기 때문이다. 파스퇴르는 1885년, 광견병 병원균을 다른 토끼에게 수차례 감염시켜 그 감염력을 현저히 떨어트린 후에 사람에게 주사하여 광견병을 치료하였다. 그는 1880년 무렵에 탄저균을 연구하기도 하였는데, 오늘날처럼 세균무기로 개발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인간에게 치명적인 탄저균 백신을 개발하기 위해서였다.
파스퇴르가 세균성 전염병의 정체를 완전히 규명하고 백신으로 이를 퇴치한 이후로 전염병은 우리에게 절망적인 질환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암과 뇌졸중 같은 병을 중증질환으로 두려워하지 장티푸스, 콜레라, 결핵에 감염되었다고 절망하지 않는다. 이는 전적으로 초기 미생물학자들의 연구 덕택이다.
이제 인간이 전염병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자, 인간은 전쟁무기로 세균을 본격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그 대표적 경우가 일제 관동군 휘하 731부대가 벌였던 끔찍한 세균전 실험이다. 그리고 그들의 자료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2. 731부대장 이시이가 미국으로 간 이유
전염병과 세균으로 인해 전쟁의 승패가 좌지우지 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세균무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백신의 개발로 인간이 전염병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자, 전쟁에 세균을 이용하려는 욕망은 더욱 커졌다. 아군이 특정 전염병에 대한 백신을 가지고 있다면 인위적으로 특정 전염병을 퍼뜨려 아군의 피해 없이 상대방의 전투력을 무력화 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세균무기 개발의 직접적 피해자가 바로 우리 민족이었다. '731부대', '마루타(통나무)'라는 말은 분노스럽게도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말이 되어있다. 살아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인체실험으로 악명을 떨친 731부대의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만행으로 당시 3000명에 달하는 조선인, 중국인 등이 처참히 목숨을 잃어야했다.
인간이기를 거부한 731부대의 만행
731부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1936년에서 1945년 여름까지 중국 하얼빈에 존재했던 일제 관동군 산하 세균전 부대다. 1942년에는 부대원 총수가 3천명에 달했으며 헤이룽장성(黑龍江省)내 하이린(海林), 쑨우(孫吳), 린커우(林口), 하이라얼(海拉爾) 등지에 지부를 둘 정도로 규모가 컸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뒤 1937년 7월에는 중일전쟁으로 전쟁을 확대해 갔다. 일본은 거대한 중국대륙을 완전히 장악하고 소련과도 대응하기 위해 되도록 적은 물자와 병력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선택된 것이 바로 세균무기다.
731부대는 세균무기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조선인과 중국인 등을 대상으로 세균주입, 신체해부 등 경악할만한 반인륜적 생체실험을 자행하였다. 소련의 일제전범재판 결과나 중국의 주장 등에 따르면 1940년 이후 해마다 600명의 ‘마루타’들이 생체실험에 동원되어 최소한 3,000여 명의 한국인·중국인·러시아인·몽골인 등이 희생되었다. 2005년 8월 2일 중국 <하얼빈일보>는 지금까지 밝혀진 731부대 생체실험 대상자 1,467명의 명단을 공개하기도 했는데, 여기에는 조선인 6명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에 의한 세균전 피해자도 3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일본은 자신들의 만행의 흔적을 없애버리기 위해 살아남은 150여 명의 ‘마루타’들까지 모두 살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731부대의 생체실험 장면
731부대는 정말이지 인간이기를 포기한 잔혹한 방법을 동원해 세균실험을 자행했다. 주사기로 세균을 인체의 각 부위에 주입한 뒤 신체변화를 관찰했다. 세균을 입에 들이붓거나, 음식에 섞어 식용이라고 속여서 먹게 한 뒤 그 변화를 관찰했다. 백신연구를 위한 혈청을 얻기 위해 산 사람의 몸에서 피를 뽑아 죽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세균실험의 효과를 측정하기 위해 생체를 해부했다. 인체에 세균을 침투시킨 후 해부를 통해 세균의 침투정도를 기록으로 남기는 만행을 저질렀다. 죽거나 실험에 필요 없게 된 사람들은 소각로로 보내졌다.
실험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진행되었고, 임산부에게까지 시행되었다. 수많은 실험과 해부는 산 사람들에게 마취 없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마취가 실험결과에 영향을 주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731부대는 세균무기 실험을 위해 전염병을 옮기는 쥐와 파리, 모기, 빈대, 이 등을 번식시켰고, 인간 생체실험을 위한 혈액재료를 얻기 위해 말, 소, 낙타, 원숭이 등을 사육하는 동물사육반을 설치·운영하였다. 731부대 노무자의 증언에 의하면 731부대가 세균을 전파하는 매개물인 이를 얻기 위해 나이 많은 노무자를 음침한 방에 가두고 겨울이든 여름이든 옷을 갈아입지 못하게 하고 목욕을 못하게 하면서 그들의 몸에서 이가 번식하게 하였다고 한다.
731부대는 세균전을 실험만 한 것이 아니었다. 개발된 세균무기를 실전에 투입하기 전 살아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성능실험 까지 진행했다. 사람들을 야외 나무말뚝에 묶어두고 탄저병, 콜레라, 페스트균 등의 세균이 담긴 폭탄을 투하했다. 야외 세균무기 실험으로 일부 사람들은 사지가 찢겨져 죽어갔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시 부대로 끌고 와 해부를 하고 세균폭탄이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관찰했다.
실제 전투에서도 세균무기를 사용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에 따르면, 1940년 10월 27일에는 난징(南京)의 1644 세균전 부대와 함께 중국 닝보(寧波)에 페스트균을 대량 살포하여 100명 이상을 사망하게 하였고, 1941년 봄에 후난성(湖南省)의 한 지역에 페스트 벼룩을 공중 살포하여 중국인 400여 명을 희생시켰다. 1939년 일제가 몽골과 소련 접경지대인 노몬한에서 소련에 대해 도발하다 대패하자, 소련군의 추격을 막기 위해 강물에 장티푸스균 등을 실제로 살포한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그 외에도 731부대에서는 갖가지 잔인한 실험들이 진행 되었다. 사람들의 옷을 벗긴 채 영하 30~40도 혹은 그 이하의 온도로 동상실험실에 집어넣고 각종 변화를 관찰했다. <미디어오늘>에 실린 “하성봉의 중국이야기”를 보면, 731부대는 사람과 말의 피를 서로 수혈하거나, 소장과 식도를 접합하고 팔과 다리를 절단해 교차 접합하는 실험도 했다. 사람을 고속회전기에 넣어 돌리는 실험과 폐에 담배연기를 주사하는 실험도 했다. 사람의 뇌를 직접 바늘로 찔러 인체의 다른 부위가 어떤 반응을 하는지 보는 실험도 진행됐다.
전범 731부대장에게 면죄부를 준 미국
이렇게 끔직한 일을 저지른 일제가 패망을 했으니, 731부대의 지휘관들과 성원들은 전범재판에 회부되고 응당한 처벌을 받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결과는 그 반대였다. 731부대 부대장이었던 이시이 시로 (石井四郞)를 포함한 대다수 박사들은 생물학자로서의 명예를 계속 유지했다. 이시이는 도쿄대학 학장까지 역임했다. 부사령관이었던 기타노 마사지는 미도리주지 설립자가 되었고, 또 다른 생체실험 부대 책임자였던 와카마쓰 유지로는 니혼이야쿠 공장장이 되는 등 모두 일본 제약업계를 주름잡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우리는 보통 2차 세계대전이라고 하면 '정의로운' 미국이 포악한 제국주의 '독일', '일본'을 무너뜨린 전쟁이라는 이미지를 떠 올린다. 하지만 미국 역시 해외원료기지 확보 등 철저히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전쟁에 개입했고, 전후 처리과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균무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미국은 일제의 세균전 연구경험과 기록을 활용하고 싶어 했다.
미국은 이전부터 생화학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다. 2015년 6월 13일 <한겨레신문> 기사(“메르켈처럼 정색하고 따질 문제”)에 따르면 미국은 1차 세계대전 때 아주까리에서 뽑은 독을 포탄에 실어 나른 뒤 1920년 화학전국(CWS)을 만들어 생물무기 개발에 나섰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인 1943년에는 육군 생물학전실험실을 메릴랜드의 포트디트릭에 설치해서 생물무기 개발의 심장부로 삼았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이, 1차 세계대전 때부터 세균전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졌던 미국으로서는 731부대의 실험 결과들은 결코 놓칠 수 없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자신들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직접 살아있는 인간을 통해 실험한 자료를 얻을 수 있으니 그야 말로 금상첨화였다.
1947년 미 합동참모본부는 일본의 세균전 증거를 전범재판소에 넘기지 않고 관련자들을 기소면제 하는 대신 세균무기실험 자료들을 미국의 정보기관에 넘기기로 731부대장 이시이와 거래를 했다. 2005년 일본 가나가와 대학의 스나이시 게이치 교수가 미 국립문서보관서에서 발견한 2건의 기밀 해제 문서에 따르면,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종전 2년 후 731부대원에게 생체실험 자료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전범재판 기소를 면제해 줬으며, 총 15만∼20만 엔의 돈을 부대원들에게 준 것으로 드러났다. 이 돈은 2005년 화폐가치로 2000만∼4000만 엔(약 4억 원)에 달하는 것이다. 미국은 731부대원들에게 돈 외에도 음식과 선물, 향응 등을 제공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은 이시이 등 일본의 세균전 관련자들이 처벌받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힘썼다. 스티븐 엔디콧 등의 저서『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에 따르면 미국 화학전부대와 극동사령부, 군무국장, 합동참모본부, 전쟁부, 국무부, 법무부, 전쟁범죄 담당 수석검사 등 모두가 이시이와 그 공범자들을 전범 기소에서 면제시켜 주는 데 한몫씩 담당했다. 이시이 개인에 대한 미군 정보 장교들의 평가는 그를 전범에서 면제시키기 위한 길을 닦아 주었다. 정보 장교들은 1947년 한 보고서에서 이시이를 "학구적이고 솔직하며, 인정 많고 친절하다"고 묘사했다. 나아가 "이시이는 친미적이며, 미국의 정신문화와 자연과학을 존경한다"고 적었다.
소련이 731부대원들에 대한 전범 기소를 줄기차게 요구했지만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소련은 1949년 12월 하바롭스크 전범 재판을 별도로 열어 일본 패망 후 신병을 확보한 생체실험 실무 관련자 12명 전원에게 최고 25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를 두고 ‘보여주기 식 재판’, ‘이미 지나간 이슈’ 등으로 평가 절하했다.
일본과 관련된 전범재판은 2년 반에 걸쳐 진행됐고, 수많은 전범들이 중형을 받았다. 하지만 731부대의 총책임자 이시이 시로는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당시 전범재판 총 책임자였던 맥아더 장군은 이시이에 대해 면죄부를 줬다. 1980년 미국의 저널리스트 존 윌리웜 파월은 맥아더 장군이 미 국무부, 전쟁부, 해군부 등의 관련자들과 주고받은 비망록을 입수함으로써 미국과 일본의 검은 커넥션을 폭로하기도 했다.
이시이는 1949년 미국으로 건너가 첨단 시설이 갖춰진 육군기지 ‘포트디트릭’에서 세균무기 개발에 참여한다. 이 기지 정문에는 ‘731’이라는 동판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미국으로 건너간 731부대 데이터
이시이 등 세균전 실험자들에게 면죄부를 주고 그 대가로 미국이 가져간 것은 무엇일까?
미국은 모두 4차례에 걸쳐 731부대에 대한 비밀 조사보고서를 작성했다. 1945년 9월 미군 정보장교 머레이 샌더스 중령이 작성한 1차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일본은 공격용 세균무기 개발은 인정했으나 생체실험은 철저히 은폐했다. 1946년 3월에 나온 2차 톰슨보고서에는 세균폭탄 설계도와 제조법, 세균의 대량 배양기술 등이 담겨 있었다. 1947년 4월 로버트 펠에 의한 제3차 펠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이 시기에 일본의 생체실험 사실을 확인했다. 그 이후 1947년 12월 에드윈 힐이 조사해 작성한 제4차 힐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731부대의 생체실험 표본 및 각종 실험 데이터를 완벽하게 확보했다고 한다. 이 보고서에는 인체에 세균을 투입했을 때 세포가 변하는 것을 기록한 자료도 포함돼 있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 이시이의 검은 커넥션에 따른 이시이의 진술 등은 미국이 731부대의 세균 실험결과를 완벽히 입수하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했을 것이다.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의 내용에 따르면, 미국 문서보관소에서 이용 가능한 기록을 보면 이시이 장군과 그의 부하 과학자들에 대해 최소 24차례의 인터뷰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시이는 자신이 직접 연구한 보툴리누스 중독증, 브류셀라증, 가스 괴저, 비저, 인플루엔자, 페스트, 천연두, 파상풍, 야토병 등에 대해 보고했다. 키타노 마사지 중장은 출혈열, 선페스트, 탄저병, 진드기 뇌염, 발진티푸스, 이질, 장티푸스 등에 대해 진술했다. 파상열, 콜레라, 복어 독, 뮤신, 살모넬라, 쓰쓰가무시병(털진드기병), 결핵 그리고 각종 식물 병 등에 대한 진술도 있었다.
일본 과학자들은 35건 이상의 보고서를 미국에 제출했다. 보고서에는 8백 차례 이상 실시된 인체실험 관련 슬라이드 8천여 개가 딸려있었다고 한다. 인체실험과 관련해서는 350쪽에서 800쪽 이상 되는 비저병, 페스트, 탄저병 등에 대한 3건의 검시 보고서도 포함돼 있었다.
미국은 3천명의 살아있는 인간을 대상으로 한 9년간의 방대한 실험결과를 송두리째 확보한 것이다.
이렇게 세균무기에 관심을 가지고 일본으로부터 실험결과를 입수한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생화학무기를 실제 사용했다는 주장들이 이곳저곳에서 제기되고 있다.
3. 최초로 폭로된 세균전, 한국전쟁
“한국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던 1952년 1~2월,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 병사들 사이에서 일련의 심상치 않은 보건 문제가 발생했다. 그 지역은 이천, 철원, 평양 등이었다.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은 미군기가 나뭇잎, 깃털, 면화 솜, 마분지, 콩 줄기와 꼬투리 등 이상한 물질을 떨어뜨린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미군기가 떨어뜨리는 물질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여러 종류의 살아 있는 곤충, 썩은 생선과 돼지고기, 개구리, 쥐 등을 채운 폭탄도 있었다. …… 2월 그 곳의 평균 기온은 영하 7.2도에서 영하 9.2도 사이의 혹한이어서 통상 곤충이 생존할 수 없고 자연적으로 번식할 수 도 없었다.”
이 내용은 토론토 요크대학 역사학과 교수이자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사관학교와 미 공군사관학교 교과서 집필에 참여했던 에드워드 해거먼의 저서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이 전하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과 중국 군 당국과 보건당국의 조사 보고서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 미국은 한국전쟁 중 북한에 세균전 실험을 명령했다.
1952년 2월 22일, 북한은 외무성 성명을 통해 미국이 한국에서 세균전을 펼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미군이 1952년 1월 28일부터 세균에 감염된 곤충을 대량으로 한반도 상공에 살포하고 있다면서 유엔 측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중국의 총리 주은래 역시 같은 해 3월 미국의 비행기가 중국의 화북지역 및 동북부에서 세균전을 수행하고 있다고 발표하며 미국을 비난했다. 북한과 중국의 주장은 질식작용제, 독성가스, 세균학적 수단을 전쟁에 이용하지 못하도록 규정한 1925년의 제네바 의정서에 기초하고 있었다.
물론 당시 미국은 세균전에 대한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미국은 세균전 의혹이 공산국가인 북한과 중국에 의해 근거 없이 날조된 것이라고 선전했다. 미국은 북한과 중국이 제기한 세균전 의혹이 휴전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공산국가의 악의적인 선전에 불과하다며 의혹 제기를 이념공세로 치부했다.
북한과 중국, 그리고 미국의 주장 중에서 어느 것이 진실이었을까. 지금까지 조사된 사실과 여러 비공개 문헌들에 의하면, 한국전쟁은 미국의 세균전이 최초로 폭로된 전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자.
1945년, 세균으로 도배될 뻔 했던 일본열도
미국의 세균전 능력은 언제부터 준비되어 있었던 것일까.
에드워드 해거먼 교수에 따르면, 미국은 2차 세계대전 후반에 이르러 세균전을 수행할 수 있는 기술적인 토대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창설한 화학전부대 책임 장교인 윌리엄 포터를 중심으로 생물학전위원회를 꾸렸다고 한다. 윌리엄 포터는 1944년 6월, 4파운드짜리 폭탄 50만개를 만들어 달라는 영국의 주문에 맞추기 위해 탄저균 대량 생산 프로젝트에 박차를 가했다. 윌리엄 포터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세균탄을 이용해 일본의 벼 농작물을 광범위하게 오염시킬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당시 미 백악관은 일본 열도가 그들의 대 공산권 군사작전의 ‘불침항모’로써 기능해야 할 것을 예견하고 있던 상황에서, 통제가 불가능한 광범위한 세균전을 일본 본토에 벌이는 것을 승인하지 않았다.
미국의 세균무기 실전 투입은 자연스레 다음 전쟁으로 연기되었다. 2차 세계대전에 뒤이은 전쟁은 바로 한국전쟁이었다.
한반도 세균오염대 설치 시도한 미국
미국은 한국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던 1951년, 한반도에서 세균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한다.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중 ‘일급비밀-미국의 세균전’편을 연출한 김환균 PD에 의하면, 미국은 1951년, 트루먼 대통령이 참여하는 화학전-방사능전-세균전 같은 특수전의 최고 결정기구이자 지휘기구인 ‘심리전략위원회(PSD, Psychological Strategy Board)’를 구성했고 한다. 이 위원회에서 최초로 내린 결정은 1951년 7월 이후 시작된 휴전회담이 실패할 경우를 상정한 ‘이륙작전(Operation Take-Off)’, 즉 세균폭탄을 투하하는 것이었다.
▲ 일명 '니덤보고서' 원문
일명 ‘니덤보고서’로 불리는 ‘한국과 중국에서의 세균전에 관한 국제과학위원회의 사실조사 보고서’에는 당시 한반도에서 감행된 미국의 세균전 목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미 공군포로 쉐이블 대령의 진술에 의하면, 미국은 청천강을 중심으로 한반도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세균오염지대를 설치하려 했다고 한다. 이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맥아더의 최후의 계획과 일맥상통한다. 압록강의 남쪽 연안에서 한반도를 가로질러 원폭을 제조하고 남은 부산물인 폐기물을 뿌려 ‘방사능 오염대’를 만든다는 것이 맥아더의 구상이었다. 세균오염대나 방사능오염대는 모두 후방 병력의 진출을 저지하고 보급선을 차단하겠다는 기본 목적을 갖는다. 니덤보고서를 분석한 김환균 피디는 미국이 이와 같은 목적에 따라 휴전협정 개시 이후 세균전을 벌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니덤보고서는 당시 영국의 대표적 화학자였던 조셉 니덤과 원자폭탄 개발자로 유명한 로버트 오펜하이머 등이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었던 국제과학위원회가 1952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세계평화회의의 결정에 따라 북한과 중국에 세균전 공식조사단을 파견해 작성한 보고서다. 여기에는 600여 페이지 분량의 세균전 의심 현장 사진, 세균전을 수행한 미군 포로들의 진술서, 세균 배포 경로 비행지도, 피해 의심지역 주민 인터뷰 등의 자료가 실려 있다. 미 공군포로 쉐이블 대령의 진술도 니덤 보고서의 내용 중 일부이다.
미국, 1951년 세균전에 본격 돌입하다
미 당국의 특수전 최고 결정기구인 ‘심리전략위원회’의 결정은 곧바로 실행되었다. 1951년 미 합동참모본부는 작전 상황에서 세균전을 위한 특정 병원체가 얼마나 효과를 발휘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대규모 현장 실험(field tests)를 해보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1951년 9월21일에 작성된 이 문서에는 “작전 상황에서 특정 병원체의 효과를 알아보기 위해 대규모 현장 실험을 시작할 것”이라고 적혀있다.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에 따르면, 1951년 당시 미국 합참은 “세균을 전술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현실적인 요구가 존재한다”면서 “이러한 세균을 개발하는 데 최우선 순위를 둬야 한다”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미국은 세균전을 다양한 형태로 수행하기 위해 세균이 담긴 폭탄을 투하하는 방식 외에도 일반 전투폭격기의 외부에서 발사하는 형태의 폭탄도 개발하여 전쟁에서 사용하였다.
▲ 1952년 당시 미군이 세균을 살포한 38선 이북 지역 지도(자료 :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
미군이 한국전쟁에서 사용했던 세균탄의 실체는 일본 정강대학 모리 마사타카 평화학 강사에 의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그가 2002년 열린 ‘동아시아 평화·인권 국제학술회의 여수대회’에서 발표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전쟁 시 사용됐던 세균탄은 두께가 3cm 정도의 철제로, 길이 1m20cm, 직경 37cm, 무게 70kg이다. 4칸으로 나뉘어진 세균탄은 페스트, 콜레라, 장티푸스, 이질 등에 감염된, 서로 다른 종류의 곤충이나 나뭇잎 등으로 채워진다. 세균탄이 투하되면 30m 정도 높이에서 뚜껑이 열리고, 내용물들은 직경 1백m 면적으로 확산된다고 한다.
미국은 이와 같은 세균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일제 731부대의 책임자인 이시이 시로(石井四郞)를 이용했다는 비난도 받았다. 니덤 보고서는 생체실험을 자행해 악명이 높았던 이시이 시로 731부대장이 1952년 초 두 차례 연거푸 방한했고 같은 해 3월에도 한국에 있었다는 언론보도를 거론했다. 1952년 초면 미국이 한국과 중국 동북부에서 세균전을 벌였다는 의혹이 일던 시기와 일치한다. 이 때문에 당시 미국이 이시이 전 731부대장으로 하여금 세균전을 지휘토록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세균전에 대한 국제사회의 조사, 그리고 폭로
한국전쟁 당시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은 미군이 항공기 등을 이용한 세균전을 벌이자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를 즉각 조사하여 폭로했다. 세균전이 감행되었다는 전쟁 당사자의 주장이 잇따르자, 전쟁 중 반인륜적인 불법행위를 감시하는 국제사회의 움직임도 가시화되었다. ‘니덤보고서’를 발간한 국제과학위원회 외에도 국제민주법률가협회가 한반도에서 조사에 들어갔다. 국제민주법률가협회는 1946년 프랑스에서 조직된 비정부기구이자 UN의 자문기구로써, 오늘날까지 인권보호와 UN헌장 준수를 위한 활동을 벌이는 권위 있는 기관이다.
박태균의 《한국전쟁》에 따르면, 1952년 국제민주법률가협회는 당시 미국이 벌였던 세균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조선인민군 및 중국 인민지원군 부대와 지방 항공 감시소들의 보고에 의하면 북한 169개 지역에서 여러 가지 종류의 곤충들이 발견되었다. (중략) 많은 경우에서 특별한 종류의 파리, 벼룩, 거미 딱정벌레, 빈대, 귀뚜라미, 모기와 기타 곤충들이 발견되었으며, 그 대부분은 지금까지 한국에서 볼 수 없던 것들이었다. 곤충들은 많은 경우 인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 예컨대 눈 위와 강의 얼음 위, 그리고 풀과 돌 사이에서 발견되었다. (중략) 전문 조사 결과 곤충들이 병균에 감염되어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르면 이 곤충들은 인공적으로 배양된 것으로 생각된다.”
“[결론] 미국 군대는 북한 인민군을 반대하며 북한의 일반에게 죽음과 질병을 만연시킬 목적으로 인공적으로 세균을 감염시킨 사례와 파리와 기타 곤충들을 고의적으로 살포함으로써 1907년 육전법규와 관습에 관한 헤이그 협약의 조문을 위반했으며 1925년 제네바 의정서에서 재확인한 세균전 금지 조항을 위반하는 가장 엄중하고 전율적인 범죄를 한국에서 범하였다.”
38선 남쪽에서도 벌어졌던 세균전
미군의 세균전은 38선 이북 지역과 중국 동북부에서만 수행된 것이 아니라 지리산과 무등산 등 38선 이남의 주요 전장에서도 이루어졌다. 이는 2001년 8월, ‘미군양민학살 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이하 전민특위)’의 램지 클라크 전 미국 법무장관 등 국제조사단 일행이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이었던 정운용씨를 전격 조사하면서 사실로 확인되었다.
정운용 씨는 당시 조사에서, "51년 초가을께(3월이라는 주장도 있음) 무등산 자락인 규봉암 일대에 당시에는 `연습기`(쌍엽기로 추정)라 불렀던 작은 비행기에서 하얀 분말액을 뿌린 후 계곡 물에 세수하거나 물을 마신 빨치산과 마을 주민들은 온몸이 새까맣게 변하고 열이 나는 재귀열병에 걸려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또 "비행기가 처음에 낮게 비행해 추락하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분무액을 뿌리기 위한 저공비행이었던 것 같다"며, “분말액을 뿌린 며칠 뒤 토벌대들이 외서 빨치산과 주민과 피난민들을 향해 총격을 가해 사살했다"고 주장했다.
<민족정기구현회> 2대회장을 역임했던 역사연구가 홍갑표 선생도 한국전쟁 당시 경기도 양주시에서 자신이 당했던 세균전 피해에 대해 증언한 바 있다. 그는 “51년 초봄인가 별안간 우리 동네를 염병이 휩쓸었다”며 당시 많은 마을 주민들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전염병에 노출되어 죽어갔다고 했다. 홍갑표 선생은 훗날 당시 겪었던 병이 장티푸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전염병이 창궐했던 시기가 미군이 세균전을 벌였던 시기와 일치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이들 외에도 미국이 38선 이남에서 벼룩 등을 이용한 세균전을 감행했다는 증언은 다수 존재한다. 장편소설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도 한국전쟁 당시 지리산 등지에서 감행된 미국의 세균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다만 미국이 38선 이북에서 감행한 세균전이 주로 1952년 초인데 반해, 38선 이남에서 감행한 세균전의 시기는 1951년으로 증언되고 있다. 이러한 시기적 차이를 보이는 미국의 세균전에 대해서는 더 많은 실증 조사와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38선 이남에서도 세균전을 했다는 정황은 뚜렷하게 남아있다.
국제사회의 비난에 시치미 떼기로 일관한 미국
미국은 한국전쟁 당시 반인륜적인 세균전을 감행한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국제사회의 비난에 시치미 떼기로 일관했다. 미국의 심리전략위원회(PSB)가 작성해 1953년 7월 7일 알렌 덜레스 CIA 국장에게 보고된 비밀문서에는 당시 세균전 의혹을 강하게 받고 있던 미국의 처지가 잘 드러나 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세균전에 관한 북한과 중국의 공세가 계속되자, 유엔에 현장 조사를 요구하였다. 니덤 보고서의 내용을 현장 조사를 통해 검증하자며 시치미를 뗀 것이다. 그런데 CIA 보고서를 보면, 미국의 현장조사 요구는 정치공세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미국은 현장 조사 제안을 선호하고 있지만, 미국의 정책은 실제 조사를 선호하고 있지 않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현장 조사 위원회가 불가피하게 미 8군의 준비나 작전(예를 들어 화학전)을 알 수 있게 되어, 그것이 공개되면 우리에게 심리적이고 군사적인 차질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이 주장했던 UN의 현지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CIA 보고서에 나와 있듯이, 당시 미국의 속내가 현장조사를 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감행한 세균전은 이를 일선에서 직접 수행했던 미 공군 장교들에게 조차 납득되기 어려운 반인륜적인 것이었다. 오마이뉴스가 최초로 보도한 니덤보고서의 내용 중 플로이드 오닐 미 공군 중위의 진술을 보자.
"나는 (미국의) 세균전 사용을 고발한다. 민간인들에게 소름끼치는 대량 살상 무기를 사용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러나) 세균전은 아직도 미군에 의해 한국과 중국 동북부에서 수행되고 있다. 이런 참혹한 전쟁이 지속되면 더 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이 사라질 것이다."
1952년 한국전쟁 와중에 북한 상공에서 격추돼 포로가 된 그는 국제과학위원회 조사에서 본인이 세균전에 참여한 끔찍한 경험에 이와 같이 토로했다.
이처럼, 한국전쟁은 세균전을 감행했던 미국의 행위가 최초로 폭로된 정규전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4. 주피터 프로그램이란?
▲ 미군은 주피터 프로그램을 위해 2014년 3월부터 살아있는 탄저균 표본을 주한미군에 제공했으며 9월에는 환경감시평가 장비 4대를 반입, 2대를 오산공군기지에, 다른 2개를 60m 길이의 터널에 설치하였다.
주피터(JUPITR) 프로그램은 Joint United States Forces Portal and Integrated Threat Recognition의 약자로 번역하자면 ‘연합 주한미군 포털 및 통합위협인식’쯤 된다.
미군은 주피터 프로그램이 생화학전에 대비해서 전문지식 없는 군인들도 전장에서 생화학물질 샘플을 채취해 4~6시간 안에 물질의 종류를 알아내기 위한 프로그램이라고 주장한다. 지금까지는 생화학전이 발생할 경우 전문 인력이 투입돼 샘플을 채취한 후 미국 본토에 보내 분석해야 하기 때문에 대응에 며칠씩 걸리고 그 기간 미군은 타격을 입어야 했다.
주피터 프로그램은 미국 생화학방어 합동참모국(JPEO-CBD)이 이끌고 미국 육군 에지우드 생화학센터(ECBC)가 지원하는 프로그램으로 이매뉴얼 박사가 이 프로그램을 이끌고 있다. 이매뉴얼 박사가 2013년 3월 19일 ‘화학 생물학 방어 계획 포럼’에서 발표한 내용과 2014년 12월 ‘화생방·핵 포털’(CBRNe Portal)이란 미 군사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주피터 프로그램에 대한 부분적인 정보가 드러났다.
이 프로그램은 2013년 6월 시작됐다고 하지만 오산미군기지에 탄저균 실험시설을 갖춘 때는 1998년이며 부시 미 대통령의 2002년 바이오실드 프로젝트, 2007년 국토안보대통령지시(HSPD-21), 2009년 오바마 미 대통령의 정책지시(PPD-2)의 연장선에서 보는 것이 합당하다.
주피터 프로그램은 4가지 영역의 연구를 수행한다. 첫째는 생물감시포탈(BSP)로 생물무기를 감시하는 기관을 연결하는 기구를 확립하는 것이다. 둘째는 생물식별능력세트(BICS) 개발로 전장에서 휴대장치나 이동분석장비를 통해 세균 종류를 확진하는 것이다. 셋째는 환경감시평가(AED)로 개발한 탐지장비가 전장에서 얼마나 잘 작동하는가를 알아보고 최소비용으로 최대효과를 내는 진단장비를 주한미군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넷째는 조기경보로 모든 생화학적 정보를 하나의 통합감지 및 경보시스템으로 집중해 생물무기 관련 대응을 높이는 것이다.
주피터 프로그램은 1단계로 탄저균과 보톨리눔 A형 독소를 실험했으며 페스트균, 바실리스균에 대해서도 실험했다. 이매뉴얼 박사는 인터뷰에서 “아무도 이 정도의 규모로 생체관측을 시도한 적이 없었다”면서 “이것은 정말 큰 조직적인 시도였다”고 밝혔다.
미군은 주피터 프로그램을 위해 2014년 3월 이후, 살아있을 수 있는 탄저균 표본을 주한미군에 제공했으며 9월에는 환경감시평가 장비 4대를 반입, 2대를 오산공군기지에, 다른 2개를 60m 길이의 터널에 설치하였다. 이 터널의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 특히 미군은 이 터널에서 탄저균, 페스트, 보톨리눔, 바실리스균 등 4가지 세균을 152가지 기체 미립자 형태로 만들어 살포한 후 성능 실험을 했다. 이 실험은 2014년 12월 12일에 끝났다.
또 생물식별능력세트 개발이 완성 단계에 이르자 2015년 6월 5일 한국 국방부와 보건복지부 산하 질병관리본부를 불러 새로운 유전자 분석 장비를 시연할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미국 더그웨이 육군 생화학 실험기지는 5월 초 민간 배송업체인 페덱스를 통해 살아있는 탄저균을 주한미군에 보냈다. 그러나 5월 27일 탄저균 표본이 살아있다는 통보를 받고 폐기하면서 시연은 연기되었다.
한국은 최적의 생물학전 실험장
주한미군의 세균전 실험실은 서울 용산미군기지, 오산미군기지, 평택 캠프 험프리, 군산미군기지, 장소 불명의 미 육군공중보건국 산하 환경실험실 등 여러 곳에 있다. 그런데 왜 미군은 본토가 아닌 한국에서 세균전 실험을 했을까?
이매뉴얼 박사는 인터뷰에서 “주한미군 지도부에게 그런 능력이 요구되고 있고,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미국의 자산이 집중된 우방 국가”라는 이유를 들었다. 또 그는 원한다면 한국 내 주한미군 어디에서나 실험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또 2014년 3월 ‘ECBC 커뮤니케이션’의 보도에 따르면 미 국방부의 태평양 중시전략(Pivot to the Pacific) 덕분에 주피터 프로그램의 근거지를 한국에 두기로 한 것은 어렵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한다. 아울러 제반 상황은 주한미군의 지도부가 요구하였다고도 밝혔다.
이를 통해 볼 때 주피터 프로그램은 주한미군이 먼저 요구했고 미군도 필요성을 인정했기 때문에 한국에서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주한미군에게 세균전 능력이 필요한 이유는 물론 미국은 ‘북한의 세균무기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나라든 세균무기를 개발할 때는 방어용이라고 주장한다. 적국이 세균무기로 공격할 것에 대비해 백신 등을 개발해야 하며 이 때문에 세균을 배양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세균 증식 속도가 매우 빠르기 때문에 방어용 연구도 마음먹기에 따라 언제든 공격용 세균 배양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점이다.
2010년 오바마 미 대통령은 실행명령 EO-13546에서 “생물학적 작용제와 독소를 활용하기 위한 강력하고 생산적인 과학적 모험은 국가안보의 핵심”이라고 하였다. ‘공격용’이냐 ‘방어용’이냐를 따지지 않고 일단 ‘활용’하기 위해 연구하겠다는 것이다. 주피터 프로그램이 ‘북한의 세균무기 공격에 대비’하는 목적인지, ‘북한을 세균무기로 공격’하는 목적인지는 확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얼마 전 미 공영방송 NPR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미군 6만 명을 대상으로 비밀리에 화학가스 실험을 했다고 한다. 어떤 민족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주는지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한국에서 세균전 실험을 한다는 것은 결국 한국인들에게 세균무기가 얼마나 효과를 발휘하는지 실험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미군이 한국에서 주피터 프로그램을 가동한 또 다른 이유는 한국을 손 쉽게 설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매뉴얼 박사 말처럼 미군은 원한다면 한국 내 어디에서나 세균전 실험을 할 수 있다. 세균 샘플이 드나드는 것을 한국 정부에 일일이 통보하고 허가를 받아야 할 필요도 없고, 미군기지 내에서 실험하는 것 역시 통보하거나 허가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번처럼 사고가 나도 한국 정부의 미군시설 방문을 통제할 수도 있다.
주피터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미군 더그웨이 연구소는 유타 주의 사막 한가운데 있다. 세균무기가 유출될 사고에 대비해서 사막 한가운데서 실험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인구밀집지역에 있는 용산미군기지나 오산미군기지에서 실험을 한다. 그래도 한국 정부가 항의하지 않는다. 미군 입장에서는 한국이야말로 세균전 실험의 최적지인 것이다.
돈 되는 세균전 장사
주피터 프로그램이 순수하게 군사적 목적에서만 진행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국은 원래 군산복합체라는 말이 상징하듯 군부와 자본이 밀접히 결탁한 나라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주피터 프로그램을 운용했다면 당연히 관련 자본의 이윤이 어딘가에서 나와야 한다.
우선 이매뉴얼 박사는 인터뷰에서 “여러 가지 생화학 방어 시스템을 (한국군 수뇌부에게) 사용해 보도록 한 뒤, 직접 고르게 했다”고 말했다. 이미 한국군이 미군 생화학 장비들을 구입하고 있다는 말이다. 생화학전 위험이 증가할수록 관련 장비 수입도 급증할 것이다.
이보다 더 수익이 확실한 건 탄저균 백신이다. 탄저균을 탐지하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끝나지 않는다. 결국 탄저균 백신과 치료제를 구입해야만 한다. 문제는 탄저균 백신이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한 번 맞으면 끝이 아니라 18개월 동안 6번 백신을 맞고 매년 추가 백신을 맞아야 한다는 점이다.
현재 주한미군은 모두 탄저균 백신을 맞았지만 한국군은 아니다. 한국군 전체에 탄저균 백신을 맞추려면 어마어마한 양의 백신이 필요하다. 거기에 세균전은 군인만 피해를 입는 게 아니니 전 국민을 대상으로 백신을 비축하려면 그 양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미국의 관련업체 입장에서 한국은 매우 흥미로운 시장이다.
끝내 터진 탄저균 배달사고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다. 1년 넘게 살아있는 탄저균을 국내에 반입하던 미국은 끝내 사고를 치고 말았다. 이 사고는 미군의 허술한 관리 시스템과 법규 무시 관행이 중첩되면서 터졌다. 사고가 나고서야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땅에서 세균전 실험이 진행 중임을 알 수 있었다.
일단 사건 개요는 다음과 같다.
미군은 새로 반입한 중합효소연쇄반응(PCR) 유전자 분석 장비를 시연하기로 하고 이를 위해 4월 말에서 5월 초 즈음에 탄저균 표본을 오산공군기지로 보냈다. 이 표본은 포자 형태의 액체 1ml 분량이며 냉동 상태에서 3중으로 포장이 되어 민간 배송업체 페덱스를 통해 운송됐다.
오산공군기지에서는 이 표본을 냉동고에 보관하다가 시연일인 6월 5일을 앞둔 5월 21일 사전처리를 위해 해동하였다. 그런데 5월 27일 미 국방부가 표본이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알려오면서 표본을 락스 성분의 표백제에 넣어 폐기하고 실험실을 제독했으며 연구에 참여한 22명을 검진하고 예방약을 복용시켰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문제점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미군의 생화학무기 관리에 허점이 있으며 따라서 안전하게 실험하겠거니 하며 미군만 믿고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이번에 들어온 탄저균 표본이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었던 것은 더그웨이 연구소 측에서 탄저균을 방사선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미국 매릴랜드 주에 있는 민간세균실험실에서 자기들이 더그웨이 실험기지로부터 받은 탄저균 표본 속에 살아있는 탄저균이 있음을 발견하고 미국질병통제예방센터에 신고했기에 참사를 막을 수 있었다.
둘째, 미국이 법규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으며 이는 명백한 주권침해라는 점이다. 탄저균 같은 1급 병원체의 국내반입은 ‘화학무기·생물무기의 금지와 특정화학물질·생물작용제 등의 제조·수출입 규제 등에 관한 법’, ‘생화학무기법’,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 등 국내법은 물론 생물무기금지협약(BWC) 등 국제법으로도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특히 민간 배송업체가 1급 병원체를 배송하는 것은 안전보건법 위반이며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 된다.
더욱 한심한 것은 한국 정부가 미국의 법률 위반에 대해 일언반구 항의조차 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주권을 포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주피터 프로그램 가동 중에 한국인이 심각한 피해를 입을 수 있었지만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미군은 2014년에 이미 위치 불명의 지하 터널에서 4가지 세균을 가지고 테스트를 했다. 만약 지진이 나거나 부실공사로 인해 지하 터널에 균열이라도 발생한다면 세균이 새어나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환경감시평가 장비 2대는 오산공군기지 야외에 설치했는데 혹시 야외 살포실험을 계획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979년 구 소련의 스베르들롭스크(현 예카테린부르크) 지역 인근 탄저균 실험실에서 측정할 수도 없을 만큼 적은 양의 탄저균 포자가 유출되어 바람을 타고 도시로 흘러들어가 약 2천 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한국에서도 동일한 일이 반복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러나 주피터 프로그램과 관련한 상세한 정보를 한국인은 알 수도 없다.
자칫 대참사로 이어질 수 있는 세균전 실험. 지금이라도 한국 정부는 주피터 프로그램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확보해 국민에게 공개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