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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빌립보서 3장1~11절
제목 :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
바울은 육체를 신뢰하는 유대주의자들을 경계하며,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에 비하면 육신의 자랑은 배설물과 같고 오히려 해가 될 뿐이라고 말합니다.
1. 주안에서 기뻐하라(1절)
“[1]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 '끝으로'(토 로이폰)는 대부분
'결론적으로', '마지막으로'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가 서신서에서 마지막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된 경우는 극히 드물며(고후13:11), 오히려 새로운 주제를 소개하려고 할 때(살전 4:1;살후 3:1)많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본절의 '종말로'는 바울이 끝을 맺기 위해 사용했다기 보다는 새로운 주제를 소개하기 위해 사용했으며 '이제는', '더 나아가서','덧붙여서'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한편 바울은 본 서신의 여러 곳에서 '기뻐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1:18;4:4,10).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이 옥중에 있을 때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기뻐하라'고 한 것은 기뻐함을 통해서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일치를 해소(解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는 성도들의 이러한 기쁨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가능한 것임을 시사합니다.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
'같은 말'에 대한 해석에는 세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1) '주 안에서 기뻐하라'를 가리킨다.
(2) 3,4장에서 언급된 교회내의 불일치에 대한 경고를 가리킨다.
(3)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고이다.
이 세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합니다.
왜냐하면 (1)은 문맥상 다음에 이어지는 '너희에게 안전 하느니라'와 연결되어지지 않으며 (2)도 2절 이하에 기록된 거짓 교사의 경고와 일치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절은 복음에서 벗어난 사실들을 지적해주는 것이 아무리 지나치다고 할지라도 지루함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2. 유대주의를 경계하라(2~3절)
1) ‘삼가라’는 말을 세 번 반복해 강조한다(2절)
“[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
본절은 유대주의를 따르고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유대주의를 강요하는 자들에 대해 조심하라는 권면입니다.
(1) 개들을 삼가고. - '개들'은 길거리를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덤벼드는 사나운 짐승을 가리키는 것으로 경멸스러운 존재를 가리킬 때 사용했던 상징적 표현입니다(신23:18;잠26:11;사56:10,11).
예수님께서도 이 말을 진리를 거역하는 자들에게 사용하셨고(마 7:6) 이방인을 가리킬 때도 사용하셨습니다(마15:26,27).
본문에서의 '개들'은 성도들을 괴롭히는 유대주의 행악 자들을 지칭합니다.
(2)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 '행악하는 자들'은 문자적으로 '악한 일꾼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지 않고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3)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버리고 인간적 노력의 산물인 의식적인 행위만 중요시하는 자로서 율법을 고수하였습니다.
2) 그들의 주장이 왜 문제인지를 설명한다(3절)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우리가 곧 할례파라. - 본절은 2절에서 경고한 내용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따른 행위만을 일삼는 유대주의자들은 진정한 할례파가 아니고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들이 진정한 할례파입니다(롬 2:25-29;골 2:11).
바울은 진정한 할례파의 특징을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 '봉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라트류온테스'는 유대인들이 공식적인 예배를 드릴 때 사용한 말입니다(눅2:37;행26:7;롬9:4).
진정한 할례파는 전통이나 형식에 지배받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기쁜 마음으로 예배드립니다(시 51:17).
(2)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자랑하였습니다.
그러나 참할례 파는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는 자들로서 모든 만족과 소망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오는 것임을 아는 자들입니다(갈 6:14).
(3)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 '육체'에 해당하는 헬라어 '사르키'는 일반적으로 몸(눅 24:39), 인간의 성품(요 1:14), 타락한 본성(롬 7:5) 등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본절의 '사르키'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것 즉 인간의 의식(儀式)이나 공적 등을 가리킵니다.
본절은 진정한 할례당인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의(義)를 얻을 수 없는 의식과 자랑을 신뢰하지 않으며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함을 시사합니다.
3. 바울의 예(4~9절)
할례주의자에 대한 반박으로 바울은 자신의 경우를 예로 듭니다.
1) 회심 이전 상태(4~6절)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 상태에서 시작합니다.
(1) 사도 바울은 육체를 신뢰하고 있는 유대주의자들을 반박하기 위하여 자신의 간증을 합니다(4절)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
사도 바울은 육체를 신뢰하고 있는 유대주의자들을 반박하기 위하여 자신의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예배하고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자이기도 하지만 육체를 자랑 할 만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육체를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육체를 자랑하지 않은 것은 자신이 육체를 신뢰할 만한 조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만이 자신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확실한 진리이며, 그 어떤 것도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2) 바울은 자신의 육체를 신뢰할 만한 근거들을 제시합니다(5~6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 이스라엘 혈통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난 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아야 했으며(창17:12;레12:3),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는 성인이 되어서 할례를 받았습니다(행16:3).
바울은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과 달랐을 뿐만 아니라 난 지 십삼일 만에 할례를 받았던 이스마엘 족속과도 달랐습니다.
그는 오로지 율법에 정한대로 난 지 팔 일만에 부모로부터 할례 받은 진정한 유대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 바울은 이스라엘 족속의 혈통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여 얻은 선택된 언약의 백성임을 의미하며 '족속'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민족으로 하나님과 약속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거룩한 백성의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에서 개종한 사람이 아니라 순수한 이스라엘 태생으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의 권리와 특권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베냐민의 지파요 - 베냐민은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아들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이 이지파 였습니다(삼상9:1,2). 하만의 음모(陰謀)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또한 베냐민 지파는 왕국이 분열되었을 때 다윗 왕조에 신실하게 충성하였으며 바벨론 포로 때에는 성전 건축을 위해 유다와 레위 지파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느11:7-9).
바울은 이런 베냐민 지파에 속한 것을 매우 자랑하였으며(롬11:1) 이 자랑을 통해서 자신이 베냐민 지파에 속한 순수한 유대인임을 밝히고있습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 본절은 바울 자신이 '아브라함의 씨'로서 이방인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히브리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히브리인 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유대인 방식으로, 히브리말로써 양육을 받은 자였습니다(행22:2,3).
그러므로 그는 혈통은 물론 히브리말과 히브리 관습을 그대로 보존한 순수한 히브리인이 었습니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 바리새파는 가장 엄격한 유대 종파로서 구약의 율법은 물론 구전이나 서기관이 해석한 전승을 연구하며 따르는 자들입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의 아들로 태어나(행 23:6) 바리새파에 입문한 자였으며 그 가운데서도 가장 존경받는 선생 가말리엘 밑에서 수학했습니다(행 22:3).
그러므로 그는 바리새인중에서 가장 신실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자였습니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바울은 유대인이면서 바리새인으로서 예루살렘성 밖에까지 그의 이름이 알려질 정도로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던 자였습니다(행 9:13,21).
그는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어느 누구보다도 떳떳하게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율법의 의'는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명령들과 기준들을 지킴으로 얻어지는 '의'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런 율법을 온전히 지켜서 다른 사람이 볼 때 흠이 없었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지킨 것은 율법에 대한 형식적인 순종에 불과하며 하나님이 진정으로 요구하시는 영적 순종에는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2) 회심 이후 상태(7~9절)
(1) 그가 그리스도를 만난 후부터 이전의 자랑거리가 이제는 아무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7절)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
'무엇이든지'는 단지 앞의 구절(5, 6절)에서 언급된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앞절들(5,6절)에서 언급한 바울이 신뢰할 만한 육체의 조건들은 다만 대표적인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본절의 '무엇이든지'는 바울 자신에게 이익이 되었던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유대교에서 자신의 외적인 것들이 자랑거리가 되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를 만난 후부터 이전의 자랑거리가 이제는 아무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구원이 단지 예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을 깨달았을 때 과거에 구원을 얻을 조건이 되리라 생각했던 외적인 조건들이 해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여길 뿐더러'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게마이'는 완료 중간태로서 해로 여겼을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해로 여기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2) 모든 것을 해로, 배설물로 여겼습니다(8절)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
앞절에 이어 본절에서도 '헤구마이('해로여김')를 반복하여 사용함으로 자신이 해로 여기고 있는 확신이 지속되고 있는 것을 나타내며 '모든것'은 7절의 유익했던 '모든 것'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알아가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가장 고상함'의 헬라어 '휘페레콘'은 '탁월함'이라는 문자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바울 자신이 가장 뛰어난 것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음을 의미합니다. 한편 '내 주'는 그리스도와 바울 자신과의 친밀한 관계를 나타냅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 '내가 그를 위하여'라 함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라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지금까지 그가 귀중하게 여겼던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여기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때는 그의 회심의 때를 가리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배설물'의 헬라어 '스퀴발라'는 개에게 던지는 것으로 '똥'이나 '음식 찌꺼기' 또는 '쓰레기'등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 이전의 삶 전체에 대해서 얼마나 철저하게 버렸는가를 시사합니다.
(3) 의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입니다(9절)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 본절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재림의 날에 구원 얻는 것을 나타냅니다.
'발견되려'는 앞절의 '그리스도를 얻고'와 동등하게 '히나'('...하기 위하여')에 연결된 목적절로서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음이 발견되려'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와 긴밀한 연합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를 힘입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 '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카이오쉬넨'은 법정에서 사용된 용어로 두 부류 가운데서 한 쪽은 '옳다'고 인정하고 다른 한 쪽은 '정죄'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본절은 믿음을 통하여 '의'를 얻으며 율법을 통해서 의를 얻지 못한다는 의미로, 바울 자신이 갖고 있는 의가 자신의 노력이나 율법을 지키는 행위에 의해서 온 것이 아님을 시사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하나님께부터 의롭다고 인정되는 것은 오로지 십자가에서 죄를 속량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유일한 조건인 '믿음'은 '행위'와 반대되는 것으로 자신의 노력이나 행위로는
'의'를 얻을 수 없음을 인정하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4. 그리스도 본받아(10~11절)
1)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10절)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 여기서 '알고자 하여'의 헬라어 '그노나이'는 지적지식 뿐 아니라 경험적 지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과거나 현재처럼 앞으로도 계속해서 알기를 원한다는 강한 의지를 시사합니다.
그 부활의 권능 - 바울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알기를 원했던 것 '그 부활의 권능'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역사적 부활이나 그리스도인이 죽음 이후 경험하게 될 육체적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셔서 믿는 자의 삶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이 부활의 권능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합니다(롬 6:4). 바울은 그리스도를 단순히 역사적 사실로서만 알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부활하셔서 영원히 살아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를 그의 개인적 삶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경험하기를 원했습니다.
그 고난에 참예함 - 본문은 '부활의 권능'과 분리된 전혀 새로운 경험이 아니라 같은 경험의 또 다른 측면입니다.
이것 역시 단순히 그리스도의 대속적 고난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경험하게 되는 내외적인 고난을 말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삶을 영위하는 가운데 자신을 그리스도와 동일시함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골 1:24).
이러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장차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롬 8:17-18;고후 4:7-11).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 본문은 앞서 언급한 '그 고난에 참예함'을 보다 직접적이고 심도 있게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에 참예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 자신의 옛사람을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내고(롬6:5,6;고전15:31;갈2:20), 그리스도의 새로운 부활의 생명으로 연합(聯合)하여 계속 성장해야 함을 시사합니다.
2)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였다(11절)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어찌하든지...이르려 하노니'의 헬라어 '에이 포스 카탄테소'는 부활에 대해 다소 의심을 내포하는 듯합니다.
이에 대해서 혹자는 바울이 부활 자체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방법에 대해 의심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것은 그의 깊은 겸손과 조심스런 바람의 표현으로서 자기 신념을 배제하는 것으로 보아야합니다.
한편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에 해당하는 헬라어 '텐 엑사 나스타신 텐 에크 네크론'은 신약성경에서 찾아보기 힘든 아주 드문 표현입니다.
일반적으로 의인과 죄인 모두의 부활을 나타낼 때는 '아나스타시스 톤 네크론'을 사용합니다.
이러한 일반적 표현과는 달리 본절에서는 전치사 '에크'(...로 부터')가 두 번씩이나 사용된 것으로 보아서 의인의 부활 혹은 영광의 부활을 뜻하는 부분적인 부활로 보아야 합니다.
즉 본절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과 그의 고난에 참예하고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와 같이 된 그리스도인들이 누리게 될 영광의 부활을 시사합니다(계 20:4-15).
묵상 Point
1) 육체가 아닌, 주 안에서 기뻐하라.
바울은 교회 안의 갈등과 거짓 가르침으로 인해 어려움에 처한 빌립보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권면한다.
할계를 받고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육체를 신뢰하고 스스로 선민과 의인으로 자부하던 유대주의자들을 도리어 ‘개들, 악인, 물만 상해하는 자’라고 비난ㄴ하며 조소한다.
그들의 주장과 달리, 하나님의 참된 백성은 성령을 따라 살며,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마음의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다.
2) 육체가 아닌, 그리스도를 아는 자식을 자랑하다
육체를 신뢰하라고 부추기는 자들에 맞서 바울은, 유대적 관절이나 율법의 기준으로 볼 때 자신은 더 많은 자랑거리가 있고 더 흠이 없는 자였다.
하지만 그것이 주 앞에서 무익하다는 것을 알기에 그들처럼 헛된 자랑과 기만에 빠지지 않았다.
심지어 유대주의 안에서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들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배설물에 지나지 않고, 그를 믿고 나아가는 데 오히려 장애와 해(害)가 된다고 까지 말한다.
그의 가치와 인식에 이런 변화를 가져온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었다.
바울은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의’는 오직 그리스도뿐이며, 그분과의 관계와 바꿀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었다.
3) 육체가 아닌, 하나님의 의로 구원을 이루다
바울은 자기에게 주어진 의(義,9절)가 부활의 소망으로 이끈다는 것을 확신했고, 육체를 신뢰하던 과거를 뒤로하고 주께서 부르실 날을 고대하며, 날마다 주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본받으며 살았다.
또 그것이 진정 그리스도를 아는 길이요 부활의 권능을 경험하는 길임을 알았다.
주 앞에 서는 날 우리가 기댈 것은 우리가 한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다.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절 바울의 삶은 고단했지만 그는 늘 기쁨의 이유를 찾아냈습니다.
옥에 갇힌 상황에서도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 때문에 기뻐하고(1:18), 성도의 믿음을 위한 희생을 기뻐한다고 고백합니다(2:17).
그리고 자신이 기뻐하는 것처럼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반복하여 권면합니다(2:18; 3:1; 4:4).
요즘 내가 기뻐하는 이유, 혹은 기쁨을 잃은 까닭은 무엇입니까?
2,3절 육신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해야 합니다.
자랑하는 대상은 곧 의지하는 대상이기도 합니다.
빌립보 교회 안에는 몸의 할례를 구원의 표지로 여기며 자랑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개들, 행악하는 자들이라며 독설을 퍼붓습니다.
육체에 새긴 선민의 지위와 신분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일에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4-8절 열정적인 유대인, 박식한 바리새인, 철저한 율법주의자였던 바울은 유대 사회에서 존경받을 만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해박한 지식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저주받은 죄인으로 규정했고, 특별한 열정으로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를 만난 후에는 그가 자랑하던 이 모든 것을 해롭게 여기고 오물처럼 버렸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그를 구원했고, 주 안에서 얻은 새로운 신분이 가장 귀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전히 옛 경력과 배경을 자랑거리로 여기지 않습니까?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에 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속히 폐기처분 합시다.
9절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 곧 의를 얻는 길은 ‘율법 준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입니다.
할례를 행하고 율법 조항을 준수하여 내가 ‘의’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순종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를 주시는 것입니다.
선물로 받은 구원이니 자기 행위를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10,11절 바울은 관념적 지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에 참여함으로 얻는 인격적 앎(관계)에 이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의 죽으심을 본받으며, 마침내 그의 부활에 이르기를 소망합니다.
정해진 종교 행위를 넘어 그리스도의 삶에 참여하는 이들이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
공동체-저를 높이려고 육신을 내세우지 말게 하시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 자랑하게 하소서.
열방-스리랑카의 내전은 종식되었지만 종교인들의 갈등과 증오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용서와 사랑으로 종교적 증오와 편견이 사라지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