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射以觀德사이관덕의 활쏘기 조선철전사법으로 첫 승단을 이룬 조선철전사법연구회소속 신현우 회원의 승단을 축하하며.
한산이 각고의 노력 끝에 조선철전사법을 복원하여 뜻있는 여러 회원님들께 전했습니다.
2020. 7. 4일 오늘 신현우 회원이 조선철전사법으로 쏘아 승단을 이루었답니다.
다소 논란이 될 이야기가 되겠지만, 예기 사의에 의하면 前手撇而後手絶별절로 쏘지 않는 활은 시수에 쳐주지 않았다고 이야기 합니다.
禮記예기 _第四十六_ 射義사의
二.
故 射者(고 사자) : 따라서 활을 쏜다는 것은
進退周還必中禮(진퇴주환필중례) : 진퇴와 주선이 반드시 예에 맞아야 하고
內志正 外體直 然後 持弓矢審固(내지정 외체직 연후 지궁시심고) : 안으로 뜻이 바르고, 밖으로 몸이 곧은 후에야 궁시를 잡는 것이 심히 견고할 수 있다(몸을 똑바로 해야 활을 제대로 잡을 수 있다.)
持弓矢審固 然後 可以言中(지궁시심고 연후 가이언중) : 궁시를 제대로(똑바로) 잡은 후에야 맞히는 것을 말할 수 있고
此可以觀德行矣(차가이관덕행의) : 이것으로써 (활쏘는 사람의)덕행을 볼 수 있다(활쏘는 사람의 수행, 수련 정도를 판가름 할 수 있다.)
持弓矢審固 然後 可以言中 그러니까 撇絶별절로 쏘지 않고 턱밑살대로 아무리 많이 맞추어도 시수로 쳐주지 않았으므로 지금현재 대한민국에 수많은 명궁과 유단자들이 전부 빵단이란 이야기가 됩니다.
활터 턱밑살대 게발각지 유단자와 명궁들은 반발하겠지만 예기 사의에 의하면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예기 사의의 권위와 정통성을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한산 니가 하는 이야기중에 持弓矢審固로 쏘는 활이 어째서 撇絶별절이냐 그것을 증명하라고 윽박지르는 것이 빠를 것입니다.
봉건~왕조시대를 통털어 통치이념인 도성덕립의 완성이 지상최대 과제였고 도성덕립을 이루기 위해서 수양의 덕목으로 수기치인이 제시되었고, 그 방편으로 사예가 최고의 방법이었기 때문에 제후를 뽑고 관리를 선발하면서 연례를 행하고 대사례를 행했으며 지방에서는 향사례를 시행한 것이지요.
사례를 행하면서 제후와 경•대부와 선비를 가려 뽑을 때 활을 쏘게 하고 바르게 쏘아 맞춘 것에 한해서 시수를 쳐주고 등용을 시켰다고 예기 사의는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청교 장언식공의 정사론은 그 철학적 근거를 예기 사의에 두고 있으며 謂之前擧 謂之後執전거후집으로 折弝絶弦절파절현이 되게 쏘아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절파절현은 웅천 이춘기공의 사예결해에서 말하는 前手撇而後手絶별절의 다른 표현입니다.
撇絶별절로 쏘는 궁체가 드러나는 외형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풍석 서유구 선생의 사결의 극력견전에 따르면 활을 쏘고 난 이후에 윗고자가 오른 신발로 향한다는 대목이 책 「조선의 궁술」에서 줌손과 활장이 방사된 후에 필히 불거름으로 져야 하나니, 이것은 줌손등힘이 밀려야 되는 것인즉, 이러하여야 살이 줌뒤로 떠서 들어와서 맞게 되나니, 이것은 사법에 제일 좋은 법이 되나니라. 하는 대목과 일치하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持弓矢審固로 쏘는 활은 撇絶별절로 쏘아지는데 그 모습은 과녁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선 자세에서 흘려서 거듯쳐 잡은 줌손과 높은 거궁에 의한 각지손 어깨위 걸머지기와 쏘고 난 이후에 줌손과 활장이 불거름으로 떨어지고 화살은 줌뒤로 떠서 들어와 맞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렇게 쏘지 않는 활은 전부 엉터리 활이라서 아무리 많이 맞추어도 시수에 쳐주지 않았다고 예기 사의는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봉건~왕조시대를 면면히 이어 내려온 도성덕립의 활쏘기인 射以觀德사이관덕이 근대까지 이어져 내려오다 현대에 우리의 무관심과 시수병의 욕심에 의해 망실됨을 지극히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오늘 조선철전사법연구회 신현우 회원이 射以觀德사이관덕의 활쏘기 조선철전사법으로 승단을 이루었음을 축하하며 만천하에 공표합니다.
앞으로 모든 활은 조선철전사법으로 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