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묻혀 나라의 통치기반을 다진 태종
이성계의 5째 아들인 방원은 건국과 왕권에 방해가 된다면 혈육도 죽이는 냉혈한이기도 하나, 문인 출신으로 조선왕 중 유일하게 문과에 급제하였고 고려조에서 이색 등과 함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바도 있다. 고려말, 정몽주 등이 신진 세력인 이성계 정도전 일파를 경계하여 제거하려 하였으나 오히여 계획이 새어나가 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러나 방원이 처음부터 정몽주를 살해하려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 유명한 '이런들 어떻하리.."의 하여가(何如歌)로 우군으로 만들려 떠보았으나, 일언지하에 '이몸이 죽고 죽어...'의 단심가(丹心歌)로 답함에 부득이 선죽교에 조영무 등을 보내 척살한다.
이렇게 공이 많았지만, 태조 이성계는 방원을 태자에 앉히지 않고 계비 소생인 방석을 태자로 책봉한다. 이에 방원이 반발하여 제1 왕자란을 일으켜 방석과 정도전 등을 제거하고 대신 형님(후일 정종)을 태자 자리에 앉힌다. 그러나 다른 혈육인 방간과도 충돌하여 죽이는 일(제2 왕자란)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후 정종의 양위로 왕위에 오른 후에도 처남 무구 무질을 사형에 처하고 세종의 장인인 심온도 왕권에 걸림돌이 된다하여 제거한다. 계모인 강씨 부인을 미워하여 정동에 있던 묘를 정릉으로 옮기고 그 유명한 '왕릉은 도성 10리밖 100리 안에 조성한다.'는 원칙을 세운다. 태조 이성계는 계비 강씨 곁에 묻히길 원했으나 일부러 멀리 동떨어진 동구릉에 조성하는 불효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후 200 여년의 '태평성대'는 태종의 이런 정리정돈(?) 때문이라고 할 수있다. 요즘으로 보면 젊은 나이인 56세에 졸.
蛇足 : 태종의 재위기간이 18년(세종은 32년)으로 그리 길다 할 수없는데도 많은 업적과 사고(?)를 친 것은 그의 남다른 추진력도 있겠지만, 실제 그의 통치기간을 선대 정종의 6년과 세종대왕 재임기간 중 태종이 군사 외교 등 실권을 지니고 있던 4년을 합해 10년을 추가해야 마땅하다고 사료됨(필자 생각)
조선왕릉 중 가장 웅대한 헌릉(獻陵)
(해설자의 이바구 내용을 중심으로)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과 함께 가장 크게 그리고 잘 조성된 왕릉이 태종의 헌릉이다. 그리고 선왕의 치적을 기리는 신도비가 있는 능도 태조의 건원릉과 헌릉 뿐이다. 이후 왕의 공적은 여러 기록에 오르기 때문에 신도비가 필요가 없다하여 세우지 않게 된다. 태종의 신도비는 아드님인 세종이 웅장하게 조성하였으나 전란중 일부 파괴되어 숙종이 옆에 다시 같은 크기로 세워 2개의 비가 있다.
세종대왕이 세운 신도비 숙종때 다시 만든 신도비
-태종은 왕권강화의 목적도 있었겠지만 처남들을 죽이는 등의 일로 민씨 부인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세종대왕이 능을 조성할 때 능과 능 사이에 연결하는 다리를 놓아 부모님들이 사후에라도 사이좋게 지내시도록 하였다.
태종과 원경왕후 능침 사이로 작은 연결 다리가 보인다-사후엔 두 혼령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
-태종이 승하하기 전 오랬동안 가믐이 계속되었는데, 죽음에 임박하자 '내 죽으면 천상에서 비를 내리게 하겠노라.' 고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실제로 이틀 후엔가 비가 내렸다고 한다, 그후에도 그때 쯤에는 어김없이 비가 내려 백성들은 이를 태종우(太宗雨)라 불렀다. 태종의 혼유석 뒤편에 네모난 작은 홈통이 있는데 그의 기일인 음력 5월 10일을 전후하여 물이 고인다고 한다.
태종의 혼유석 밑 하전석에 작은 홈통이 보이는데, 그의 기일인 음력 5월 10일 전후로 비가 내려 물이 고인다고..
-세종대왕의 능을 천묘한 이유가 이 부근이 물이 많고 습한 때문인데, 태조의 헌릉도 예외가 아니어서 조금만 비가 와도 능 주위에 물이 찬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 완릉 중 거의 유일하게 능 주위에 배수로를 설치해 놓고 있다.
헌릉 주변이 항상 습해 배수로를 설치해 놓고 있다
-통상 왕릉의 경우 홍살문에서 정자각 사이에 2중의 길(參道)가 나있는데, 왼쪽이 좀 높이 조성된 길로 신도(神道-귀신이 다니는 길)이고 오른쪽 약간 낮은 게 어도(御道-임금이 다니는 길)이다. 그런데 조선 왕릉 중 으뜸이라는 태종의 헌릉에는그 구분이 없다. 해설자에 의하면 현재 홍살문의 위치가 잘못되어 있어 정자각까지 길을 임시방편으로 조성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당연히 있어야할 금천교(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짓는다는 다리)도 없는데, 추후 고증을 거쳐 참도와 함께 복원할 계획이라고..
-헌릉(조선 초기)와 인릉(후기)의 차이 점 :
1)초기 왕릉은 능침이 3단으로 되어있어 맨 위에 묘가 그아랫단에 문인석이 마지막 단에 무인석이
배치되었으나 후기에는 2단으로 문인석과 무인석이 같은 단에 조성됨.
2)헌릉 정자각 내에 있는 젯상의 색은 왕을 나타내는 붉은 색인데 반해 인릉은 순조가 황제로 추증
되었기에 황금색임
3) 문인석과 무인석의 표정이 초기의 경우 눈알이 튀어날 듯한 험상궂은 얼굴로 비현실적임에 반해
후기의 묘엔 보다 실제 사람의 가깝게 조각됨.
헌릉의 무인석(조선 전기)-우락부락한 모습이 실제 사람 모습과 판이함
인릉의 무인석(조선 후기)
첫댓글 유일하게 본 TV 드라마 " 용의 눈물 "이 생각나누나!
이 방원....어쨌건 대단한 친구임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