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롬보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지
1836년 12월3일 서울을 떠난 지 6개월여 간의 고생 끝에 1837년 6월7일 마카오에 당도한 김대건 일행은 긴장이 채 풀리기도 전에 파리외방전교 회원들과 함께 마카오를 떠나야만 했다. 포르투갈 식민정치에 불만을 품은 청국인들이 8월에 민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김대건 일행이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 함께 오른 피난길의 기착지가 바로 마닐라였다.당시 마닐라는 마카오보다 훨씬 규모가 큰 국제 무역도시였고 포르투갈인이 아닌 스페인 선교사 즉 예수회원들이 진출해 있던 곳이다.
다행히 1837년의 마카오 민란은 그래 겨울이 진압돼 다음해 1838년 마카오로 귀환하게 됐으나 11월 26~27일 밤 사이에 김대건 일행의 맏형이던 최방제가 열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처럼 두려워하던 죽음이 드디어 들이닥치고 만 것이다.
동기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채 아물기 전인 다음해 1839년 4월6일 마카오 민중이 재봉기하자 김대건과 최양업은 칼레리, 데플레슈 신부 등과 함께 다시 마닐라로 피난길에 올랐다.
마닐라로 피난 온 김대건 일행은 다행히 성 도미니꼬 수도회 원장 초청으로 마닐라 인근의 롤롬보이(Lolomboy)에 있는 성 도미니꼬 수도원 별장에서 11월 마카오로 귀환할 때까지 약 6개월간 피난살이를 했다.
그 후 1842년2월28일(2.15일 메트로신부와 에리곤 호 탑승 마카오출발) 대만으로 가시기 위해 다시 이곳에 들러 10일정도 머무시다, 가신 인연 깊은 곳이다.
롤롬보이 623번지, 지주 멘도사(Mendosa)가문의 사유지였다.김대건 신부 시성을 기념해 멘도사 여사가 옛 수도원 터 일부를 1986년에 한국 천주교회에 기증해 이곳에 김대건 신부 동상을 세울 수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과, 마롤로스 교구장 알마리오 주교 임석하에 고, 오기선 신부님 주선으로1986년 5월 22일 동상 봉헌식을 올린데 이어 2002년부터 성 안드레아 수녀회 수녀들이 파견돼 성지 관리 등을 맡고 있다.
수녀회는 2000년 가을 필리핀 방문 길에 롤롬보이 성지를 순례하던 중 사유지인 이 부지를 주인이 팔려고 내놓았다는 소식을 접하고 2002년 10월 이곳 부지 550여평을 매입하고 필리핀 정부와 현지 교구청 인가를 받아, 성당을 건립, 봉헌식을 거행한 후 예수성심상, 김대건 성인 유골이 모셔진 봉헌소, 성모당, 7궁방(7층탑)을 차례로 건립했으며, 현재는 피정의 집까지 필리핀 현지에 세운 한국의 성지이다.
1988년 창립해 91년 수원교구 인준을 받은 수녀회는 2000년 현재의 '성안드레아수녀회'로 수도회 명칭을 변경했다. 수녀회는 하느님을 향한 김대건 성인의 열정적 사랑을 본받아 그 정신으로 이 시대에 절실한 가정성화와 생명수호를 위한 어린이 집, 미혼모의 집, 복지관 등을 운영하고 있다.
이곳 사적지에는 김대건과 최양업의 피난생활을 회상시키는 「망향의 망고나무」가 있다. 망향의 망고나무는 이곳에 피난 와 있던 김대건이 그해 여름(1839년 8월) 아버지 김제준으로부터 뜻하지 않은 편지를 받아보게 돼 고향을 그리는 김대건의 마음을 생각해 붙여진 이름이다.
중국으로 가는 동지사 일행 속에 숨어들었던 한 신자가 북경까지 그 편지를 갖고 와 뭍으로 바다로 해서 몇 만 리를 지나 김대건의 손에 닿은 부친의 편지였다.
아버지 김제준이 쓴 편지의 발신일자는 1837년 가을, 롤롬보이에 있는 김대건의 손에 닿기까지 무려 네해가 걸렸다. 편지 내용은 희소식밖에 없었다. 집안도 무사하며 앵베르 범 주교, 모방, 샤스탕 신부 모두가 안녕하다는 소식이었다.
김대건과 최양업은 이 편지에 뜨거운 눈물을 적시며 망고나무 그늘 아래서 읽고 또 읽고 한 자도 빠짐없이 외울 정도로 거듭 거듭 읽었다.
그러나 김대건이 편지를 받고 감격해할 무렵 조선에선 기해박해가 터져 그의 아버지 김제준과 최양업의 부친 최경환은 옥고를 치르고 9월 장엄히 순교했다.
김대건이 받은 부친의 편지는 이역만리 떨어진 아들에게 희망과 위안, 기쁨을 주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김대건 신부의 사적지에서 약 3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는 성 김대건 신부를 주보로 모시고 있는「성 십자가와 성인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성당」이 있다.
이 성당에서 롤롬보이 주민들 모두가 매주일 주보인 김대건 신부를 현양하며 그의 영성을 본받고 있다. 이곳 에는 성인께서 순교를 하신 시점부터 밤이면 목이 없는 사람이 나타나, 동네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쳤고, 개들까지도 자지러지도록 짖어댔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이런 일이 계속되자 이곳에 거주하던 주택의 식모들이 무서워 견디지를 못하고 도망갔다고 하며, 그 후 그 집은 동네사람들이 귀신이 나오는 집, 즉 흉가로 알려졌다.
사람들은 성인께서 한국에서 목이 잘려 순교하셨다는 소리를 듣고, 성인의 영혼이 나타나시는 것으로 믿었다고 한다.
[평화신문 2004-07-04 이연숙 기자] [평화신문, 2010년 3월 21일, 이창훈 기자]
[가톨릭신문. 발행일1996-05-19 [제2003호, 18면] 리길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