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산 선교 보고서(1892)
게일이 이 해에 혼인을 하고, 서울에서 3년의 사역을 마친후, 원산으로 옮기고서 그곳에 선교를 개척하는 상황과 성경번역 등 활동을 보고했다. 유영식 저, 착한목자 pp312-317
지난해에는 저의 인생에서 두 가지 행복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한 가지는 제가 결혼을 한 것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제가 서울을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내용이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저는 시골이 수도보다 좋은 점도 있지만 수도 역시 시골보다 좋은 점이 있음을 밝혀 두려고 합니다. 건강문제를 제외한 다른 모든 것을 고려해볼 때 도시에 정착한 선교사들은 불행스러운 사역지에 배치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불편한 것은 도시나 시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잠깐 동안 수도에 머무른 적이 있는데 그때 저의 미래의 선교지에 대하여 많이 숙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시골 지역에 영구적으로 머무를 수 있는 선교지를 택하여 가게 된 것을 대단히 만족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 해(1892년)는 원산 탐사 여행으로 시작했습니다. 선교위원회는 우리에게 가능한 빨리 그곳에 정착할 것을 재촉했습니다. 저는 펜윅과 함께 3월 초에 원산에 도착했습니다. 일주간의 탐사결과 원산만 길가에 조그마한 규모의 땅을 구입했는데 주민들,또는 이 지역을 아는 이들이 그 땅은 건조하고 건강에 좋은 지역이라 했습니다. 그 지역은 건물을 건축하기에 적합한 장소일 뿐 아니라,서풍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그 후 저는 서울로 돌아가서 원산만큼이나 선교 처녀지이며 미개발 지역인 곤당골에서 다시 사역에 착수했습니다.
그곳에는 사랑방이라고 하는 특이한 방 하나가 있었습니다. 하루 7시간 정도 저는 그 사랑방에 머물렀고 조선인들은 자유스럽게 그방을 드나들었습니다. 그들 방문자들 중 많은
사람들은 복음서를 읽고 다소 배우기도 하고 복음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두 사람만이 세례를 받았는데 한 사람은 좀 어리벙벙한 사람이라고 여겨지지만, 다른 한 사람은 제가 원산 새 임지로 옮기자 원산에서 저의 조수가 되어 저에게 큰 용기와 위로가 되었습니다.
곤당골에서 우리는 주일에 예배를 드렸고 처음으로 조선의 민속음악을 사용했습니다. 저는 칠음절(七音節)로 된 찬송가를 지어서 조선 사람들에게 보다 익숙한 전통곡조에 맞추었습니다. 그 찬송의 곡조는 외국인이 듣기에는 메들리(접속곡)처럼 들렸으나,조선 사람들은 지금까지 제가 들어본 어떤 다른 찬송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저는 그 찬송을 언문으로 커다랗게 써서 벽에 붙였는데 그 찬송은 모든 사람들에게 일제히 퍼져 나갔습니다. 저는 그렇게 지은 찬송이야말로 어느 정도는 찬양과 기도문으로 모든 신자들이 함께 부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저는 곤당골에서 지은 찬송가들에 좀 더하여 원산에 간 이래 정기적으로 그 찬송가들을 사용했습니다. 예배에 출석한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그 찬송가들의 가사를 베껴 집으로 가지고 가서 불렀습니다.
제 아내는 곤당골에서 남자들이 모이는 시간에 여성들을 위한 모임을 가졌습니다. 종종 그들은 입구에 앉아 남자들이 찬양하고 전하는 말씀을 들을 수도 있었습니다. 저는 여성들의 모임에 가능하면 반드시 참석했습니다. 그러면 어떤 연로하신 할머니가 말하는 것을 들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희가 원산으로 떠날 때 많은 조선인 친구들과 이별하는 것이 제 아내에게는 슬픈 일이었습니다. 특히 노인들과 작별하는 것이 큰 슬픔이었지만 그중에서도 그 할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힘들었습니다. 거리에서 우연히 처음으로 만난 이후 그할머니는 일 년이 넘게 우리 집 화단의 꽃을 잘 가꾸어 주었습니다. 이제 그녀의 신앙의 간증을 더 이상 들을 수 없고 그녀의 얼굴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입니다.
곤당골에서 남씨 부인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지금 기포드 부인과 함께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매우 가난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매우 겸손하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녀를 많이 신뢰하고 그녀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존중합니다.
초봄에 저는 사도행전 번역본의 교정 작업을 해야 했습니다. 이 번역본은 성서 번역심사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인쇄될 예정이었습니다. 이 교정 작업은 6월에 원산으로 떠나올 때까지 계속 해왔고 또 한편으로 저는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I부를 번역하고 있었습니다. 이 책의 더 많은 부분의 번역은 제 아내의 감독 아래 번역이 되었습니다. 《천로역정》의 번역은 수정하고 다시 정정해서 조선기독교서회로 보냈고 원고는 출판되지 않은 채 현재 서회에 있습니다. II부는 원산에 간 후 완성했습니다. 그러나 출판위원회로 발송하기 전 교정을 하고 검증을 해야 합니다.
5월에 우리가 동해안의 원산항에 선교지를 정하고 그곳에 정착하는 것이 최종적으로 결정되었습니다. 그 다음 달에 이사를 했습니다. 나가사키를 출발하는 ‘제물포’ 증기선의 노
선과는 아무래도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들었는데,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다른 방안으로 부산에서 하선 작업을 하고 두 주간을 지체하는 사트쑤마 호를 기다린다는 것은 힘들 것 같았습니다. 시기적으로 이미 장마철에 접어들었고 이사 비용을 계산할 때 육로로 가는 비용과 같거나 아니면 더 저렴하기 때문에 나는 육로로 가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다행히도 우리 모두는 건강한 모습으로 원산에 도착했고, 노트(Knot) 씨 집에 머물렀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지 한 달이 되도록 가구가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노트 씨는 우리에게 의자와 테이블 등을 빌려주었습니다.
우리의 임시 숙소는 중심도로에서 가깝고 항구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고지대에 위치했으며 물도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건강상의 문제도 없었고 서울에서 살인적인 더위를 겪었던 한여름에도 선교사역을 하기에 매우 편했습니다. 저는 곤당골에서 사용했던 것과 비슷한 용도의 방을 마련했습니다. 그 방에서 저는 가능하면 하루 7시간씩 규칙적으로 조선어를 공부하고 번역을 하며 끊임없이 찾아오는 그곳 주민들을 만났습니다.
성서 번역위원회에서 저에게 번역을 의뢰한 갈라디아서와 에베소서 번역을 완성했습니다. 번역위원회가 이미 진행하고 있는 다른 성서 번역을 마치는 대로 저의 번역본을 보낼 예정입니다.
이외에 저는 창세기를 다시 번역했습니다. 창세기 번역은 지난해에 착수하였고,번역 위원회의 위촉 없이 제 스스로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초벌번역을 하였고 지금은 마태복음 번역을 시작하였습니다. 이 번역은 번역위원회가 의뢰한 다른 번역과 마찰을 빚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정규 번역본이 나올 때까지 사용하기 위해서,그리고 조선어 공부시간 일부를 선용하기 위해 그 번역들을 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어를 공부하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을 이용하여 '한영자전'을 만드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한영자전'을 만드는 이 작업에는 외국인들에게 매우 유용한 사항들을 반드시 포함시켜야 하는 추가사항들이 있습니다. 나는 그 추가사항들을 첨부하여 '불한사전' 을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 사전은 지금 공부하는 데 유용하며 앞으로도 다른 사람들에게 보다 더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미래의 유용성을 외면하는 현재의 분위기가 문제입니다.
이 추가사항 중 몇 가지를 보여주는 샘플 한 장을 총무님께 보내드립니다. 이 추가사항들은 언어를 배우는 학생들에게 매우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한자 뒤에 괄호를 달고 그 괄호 속에 한글을 삽입하여 풀이했습니다. 그것은 그 글자의 어원을 알려주고 뜻을 설명해주기 때문에,한문의 뜻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합니다. 이외에도 프랑스 신부들이 무심코 지나쳐 버린 일상생활 용어들을 많이 추가했습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이러한 일들 외에 이른 아침 시간에는 교회에서 지내고, 나머지 시간들은 역사 공부와 그리스어를 공부하는 데 할애하고 있습니다.
원산 사역에서 가장 용기를 북돋아 주는 부분은 전도사역 현장입니다. 이곳 주민들은 협조적이고 진실합니다. 그래서 이들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것은 사회계층 인식으로 꽉 차있
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복음의 메시지에는 무관심한 서울 사람들보다 더 만족스럽습니다.
물론 복음에 관하여 겨우 귀동냥을 하고는 그것이 전부인 양 결론을 내 리고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고도 교회에 들어갈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의주 상인들 같은 얌체족들이 있습니다.
저의 오랜 친구인 김씨의 고향이고,모펫이 방문했던 건생리 (Kon Syeng)에서 온 열성적으로 보이는 한 구도자가 있었습니다. 또한 로마 가톨릭교에 만족하지 못하여 우리 예배에 정기적으로 출석하고 성경을 읽는 몇 사람들이 원산부에서 오고 있습니다. 매 주일 참석하는 이들의 숫자는 15명쯤 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큰 힘이 되는 사람들은 4마일 떨어진 중청리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 사는 김씨 가족입니다. 그들은 농부입니다. 우리의 문지기 고씨 (고찬익)가 그의 부친의 묘소에 다녀오는 길에 그들을 만났습니다. 고찬익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그들은 우리의 모임에 출석하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꾸준히 참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문을 약간 알며 비록 중노동을 하지만 양반으로 보입니다. 복음이 어떻게 이들 가족에게 영향을 미쳤나 하는 것은 제가 조선선교에서 경험한 가장 큰 격려이고 가장 큰 축복입니다.
저희는 원주민의 성실함을 판단할 때에,그가 얼마나 귀한 것을 희생하느냐를 기준 삼아 판단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다른 것보다 그에게 세속적으로 유익하기 때문이라고 판단하며 종종 그 신앙이 진심인지 의구심에 빠지곤 합니다. 하지만 이 김씨 가족은 특별히 어른과 아이들이 처음부터 그들에게 안식을 줄 수 있는 것을 추구했습니다. 고씨는 그들에게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책이고 그 책은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는가를 알려주는 책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얼마 후에 그들은 믿음을 입증했고 그 믿음만을 따르고 복음의 가르침에 맞지 않는 자신들의 가장 소중한 관습까지 버리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들이 마을에 일으킨 소동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이 제게 알리지 않아서 저는 몇 주 후에야 알게 됐지만,그들은 두 달 동안 계속 우리 모임에 빠지지 않고 출석하고 여러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10월에 귀신숭배에 사용하는 자신의 조상들의 부적과 위패 (位牌)와 만장(祝丈)을 모두 모아놓고 마을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집 앞에서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이 물건들은 귀신 숭배를 위한 것이므로 영원히 인연을 끊겠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런 행동을 하라고 그들을 부추기거나 넌지시 암시를 준 적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행동은 더 바람직한 것이었고 사실상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러한 행위는 고향 주민들과 친분을 잃게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희생에 대해서 그들에게 축복했고,그들의 입을 열어서 그들의 이웃에게 명료하게 말하게 했습니다. 그것은 실지로 그렇게 하기에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가족 중 최고 연장자는 약간 무뚝뚝하게 보이는, 50세 정도 되는 사람입니다. 그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직접 열심히 일했고 진심으로 복음을 믿는 것 같았으며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우리 선교사들이 고용한 조력인들에게 사실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으며 우리가 채용한 문지기나 하인들의 절반도 복음 전도자로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고씨는 이 김씨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한 첫 번째 사람이었고 그의 복음의 초청을 받고 김씨 일가가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조선인과 외국인 중에서 이들보다 더 열심인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떠나기 한 주 전에,김씨를 처음으로 만난 펜윅은 “복음이 제가 말했던 그 사람을 사로잡아서 제가 이전에 봤던 것과 다른 사람을 만들었다. 그는 일요일 오후에 제 방에서 젊은이의 눈을 뜨게 했다”고 말했습니다. 원주민이 허풍을 떠는 게 아니라,복음의 모든 진리에 일생을 걸었다고 말하는 것은 내게 있어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언급한 세 명의 김씨 가족,제 아내의 전직 문지기 였던 고씨에 대한 저의 즐거움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제 제가 매입한 ‘미션 하우스’ 부지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한 주일 남짓 원산에 머무르며, 여름철의 밝은 태양 아래서 구입한 토지를 자세히 관찰해 보니, 집을 짓기 전에 더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노트 씨가 팔려고 내놓은 토지가 선교본부를 짓는데 적합한 장소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저는 현지 선교위원회에 뉴욕의 선교본부에 편지하여 노트 씨의 토지를 구입하지 말고 기다렸다가 그 지역이 여전히 가장 좋은 지역이라고 판단되면 구입하도록 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현지 선교위원회는 그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거부한 이유는 그 지역이 일본인 거주지역과 너무 가깝다는 것입니다. 칭만(Ching Bay)에서와는 달리 원산에서는 일본 사람들이 우리 선교사역을 간섭하지 않는다는 점 등 현지 사정에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선교본부가 내린 거부결정은 최종적인 것입니다. 현지 선교위원회는 처음 구입한 지역이 생활하기에 적합하지 않으며 습기 찬 지역으로 가옥을 건축하기에는 적합지 않다는 확실한 판단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땅을 구입하는 데 사용한 비용 전부를 다시 지불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중심 도로에서 몇 야드 떨어진 노트 씨의 토지 옆 언덕 지역을 구입했습니다. 저는 제가 산 곳이 이 지역에 비어있는 땅 중에서 구입해서 살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라고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인들과 러시아인들이 그 땅을 사려고 애썼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지역을 저의 책임하에 매입했습니다.
6개월간 그 토지를 철저히 조사하고 정밀하게 검사한 후에 저는 이 지역이 원산에서 최고로 좋은 지역이므로 구입하라고 권했습니다. 그 지역은 원산 중심에 위치해 있어서 사방에 있는 주민들에게 다가서기에 적합했고 구입할 수 있는 지역 중에서 가장 건강에 좋은 최적의 지역이었습니다. 토지구입과 건축 등 이후에 진행되는 앞으로의 움직임은 지금 현지 선교위원회 손에 달려 있습니다.
1892.
존경하는 마음으로 제임스 S.게일 드림
첫댓글 고찬익이라는 이름이 나오는에 이 분이 그당시 우리교회 장로님 맞나요?
예 그분이 초대 장로이신데요, 신분이 하층민으로써 장로가 되었다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임희국 목사께서 연동교회와 게일 목사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 중에 그런 신분 철폐에 앞장선 개혁교회라는 것이었고요, 그걸 게일이 독단으로 결정한게 아니고, 추천을 했고, 신도들의 자율 투표를 통해 결정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조선 최초의 민주주의 투표가 이뤄진 곳이 연동교회라고 말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