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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潭先生年譜(번역문)
* 명종대왕(明宗大王) 十四년,기미(己未; 1559),十월二일,진시(辰時)에
선생이 군위군 군위읍 외량리에서 태어나다.
선생의 六대조(六代祖) 광흥창사공(廣興倉使公)께서 서울에서,
비로소 영남땅에 내려오셔서 여러번 옮겨 다니다가 군위읍,구지동
(지금의 금구2리)에 정착했는데 선고 우윤공께서 처음 외량리에
주거를 정하였다.
* 명종(明宗)十五년 경신(庚申 ; 1560)년 선생 二歲.
* 동(同)十六년 신유(辛酉 ; 1561)년 선생 三歲.
* 동(同)十七년 임술(壬戌 ; 1562)년 선생 四歲.
* 동(同)十八년 계해(癸亥 ; 1563)년 선생 五歲.
뭇아이들과,장난치고,놀때,기량과,행동이 다른 아이들보다,출중하여
우윤공이 기특이 여겨 <이 아이가 반드시 우리 문호를,빛내리라>고
하셨다.
* 동(同)十九년 갑자(甲子 ; 1564)년 선생,六歲에 처음 글을 배우다.
선생은 자품이 영매하고 총명영오하여 스스로 구독을 받아 능히
글뜻을 해석했다.
* 동(同)二十년 을축(乙丑 ; 1565)년 선생,七歲,소학(小學)을 읽다.
* 동(同)二十一년 병인(丙寅 ; 1566)년 선생 八歲.
* 동(同)二十二년 정묘(丁卯 ; 1567)년 선생,九歲 六월에,명종,승하함
* 선조(宣祖)원년 무진(戊辰 ; 1568)년 선생,十歲 대학(大學)을 읽다.
* 동(同)二년 기사(己巳 ; 1569)년 선생 十一歲 힘써 배우고 읽어
문사가 조성함에 보는이가 칭찬하지 않는이가 없었다.
* 동(同)三년 경오(庚午 ; 1570)년 선생 十二歲.
* 동(同)四년 신미(辛未 ; 1571)년 선생,十三歲 중용(中庸)을 읽었고
능히 큰 뜻을 분별했다.
* 동(同)五년 임신(壬申 ; 1572)년 선생 十四歲.
* 동(同)六년 계유(癸酉) ; 1573)년 선생,十五歲,드디어,학(志于學 ;
十五세를 지학지년<志學之年>이라 함)에 뜻을 두어 경전을 강명
(講明)하여 밤낮 게으름이 없었다.
* 동(同)七년 갑술(甲戌 ; 1574)년 선생 十六歲.
* 동(同)八년 을해(乙亥 ;1575)년 선생,十七歲,선생은,지성으로,어른을
섬김에 혼정신성에 혹이나 허물이,없을가,두려워,했으며,조석봉양에
필히 먼저 맛을 봤다.
* 동(同)九년 병자(丙子 ; 1576)년 선생,十八歲 이때부터 염락성리서
(濂洛性理書)에 잠심(潛心)하여 탐독완미하여 혹 침식을 잊었다.
* 동(同)十년 정축(丁丑 ; 1577)년 선생,十九歲 부인(夫人) 교동인씨
(喬桐印氏)에게 장가들다. 감역지신(監役之信)의 따님이니.보문각
학사(寶文閣學士) 원보(元寶)의 후손(後孫)이다.
* 동(同)十一년 무인(戊寅 ; 1578)년 선생 二十歲.
* 동(同)十二년 기묘(己卯 ; 1579)년 선생 二十一歲 二월에 예물을
갖추어 서애(西厓)선생에 수업을 청하다, 진알하던날 지기제행하는
대방을 얻어 들었으며 이로부터 더욱 뜻을 가다듬어 학(學)에,힘써
경전으로부터 고금 제집에 이르기까지 모두 열람하여 그,사색하고
강론함에 온오함을 많이 발명하니 선생이 크게 칭찬하셨다.
* 동(同)十三년 경진(庚辰 ; 1580)년 선생 二十二歲.
* 동(同)十四년 신사(辛巳 ; 1581)년 선생 二十三歲 十二월에 장자
휘(諱) 종경(宗慶)께서 탄생하다.
* 동(同)十五년 임오(壬午 ; 1582)년 선생,二十四歲 봄에 서애(西厓)
선생을 안동 하회(河回)에 가서 배알하다.
* 동(同)十六년 계미(癸未 ; 1583)년 선생 二十五歲.
* 동(同)十七년 갑신(甲申 ; 1584)년 선생 二十六歲 二월에 이창석
(李蒼石) 입지론(立志論)에 답(答)하다.
* 동(同)十八년 을유(乙酉 ; 1585)년 선생 二十七歲 十二월에 중자
휘(諱) 선경(善慶)께서 태어나다.
* 동(同)十九년 병술(丙戌 ; 1586)년 선생,二十八歲 봄에 서애선생을
남계서당(南溪書堂)에서 배알하고 인하여 강학하다 때에 서애옹이
사가(賜暇)를 얻어,향현에,돌아오니,여기는,애옹(厓翁)의,선영이,있는
향리(鄕里)이다. 이때 선인의 뜻을 이어 처음 분암(墳庵 ; 묘소를
지키는 재실)을 선영(先塋)의 남쪽에 세우고 당(堂)을 상로(霜露)
재(齋)를 영모(永慕)라 하여 재거(齋居)의,처소(處所)로,삼고,동쪽에
완심재연어헌(玩心齋鳶魚軒)을 지어 수업하는 곳으로 하니 제생이
조석으로 강론함에 선생은 정우복(鄭愚伏),이창석(李蒼石),노경암
(盧敬庵), 제현(諸賢)들과 도의(道義)로 서로 사귀었다.
여름에,백담(柏潭)선생,구공봉령(具公鳳齡)의,부고가,와서,서애선생을
배옹하고 조곡하다.
* 동(同)二十년 정해(丁亥 ; 1587)년,선생 二十九歲,가을에,향해(鄕解;
지방에서 시행하는 과거)에 합격하다.
* 동(同)二十一년 무자(戊子 ; 1588)년 선생 三十歲 봄에 생원회시
(生員會試)에 합격하다. 신오봉지제(申梧峯之悌) 최인재(崔認齋),
현(晛)과 더불어 반궁(泮宮 ; 성균관 태학당)에서,유학(遊學)하다.
* 동(同)二十二년 기축(己丑 ; 1589)년 선생 三十一歲
七월에(季子),휘(諱) 중경(重慶)께서 태어났다.
* 동(同)二十三년 경인(庚寅 ; 1590)년 선생 三十二歲
봄에 대학(大學)에 유학 제생들과 더불어 날로 중용(中庸) 대학
(大學)을 강론하고 그 지의를 분석 토의하다.
* 동(同)二十四년 신묘(辛卯 ; 1591)년 선생,三十三歲 봄에 이남계보
(李南溪輔)를 려사(驪寺)에 방문하다. 詩二首가 있음.
* 동(同)二十五년 임진(壬辰 ; 1592)년 선생 三十四歲 四월에 왜구
(倭寇)가 대거침범(大擧侵犯)함에 선생은,두,어른을 모시고,태백산에
들어가 피란케 했다. 때에 공사탕연(公私蕩然)하여 봉양(奉養)에
어려움이 심(甚)하여 몸소,수백리 밖에,가서,쌀을,구해다가,봉양했다
언제나 길을 걸으면서도 송독을 폐하지 않아 일찍 난리의,틈바구니
속에서도 학업을 폐하지 않았다. 七월에 길안(吉安)에 있으면서도
적을 방어하지 못함을 계탄하고 시(詩)를 써서 감회를 부쳤다.
때에,대가(大駕)가,의주(義州)로,몽진함에<격분한,神人이,응당,도움이
있어 장차 옛 봉강을 수복하겠지>라는 귀절을 남겼다.
八월에 적이 물러난 틈을 타서 이광영(李光英)과 더불어 본현 유철
(柳澈) 현감을 찾아보고 향교(鄕校)의 열성위패(列聖位牌)를 받들어
은밀한 곳에 묻어두어 마침내 안전할 수 있었다.
여기에 원문(原文)에 누락(漏落)되어 있으나 의병대장 김해(金垓)
선생이 쓴 <향병일기; 鄕兵日記>를 보면 이 해, 九월三일에,김해
(金垓)대장을 따라 전향유사(典餉有司)로 왜적토벌(倭賊討伐)에
참전(參戰)했으며 차항 계사년(次項癸巳年) 正월九일에 인동(仁同)
에서 전투(戰鬪)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음.
* 동(同)二十六년 계사(癸巳 ; 1593)년 선생 三十五歲 二월에 선고
(先考) 우윤공(右尹公) 상(喪)을 당하다. 우윤공이 우거(寓居)하던
곳에서 고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왜적(倭賊)의 표략(飄落)을 받아
굴하지 않다가 살해되었다. 九월에 또 선비,정부인(先妣貞夫人)
상(喪)을 당하여 함동 자좌원(檻洞子坐原)에 합펌(合펌)함에,선생은
연거퍼 변을 당함에 애회하여 쓸어질듯,하면서도 초종양예에,한결
평일과 같았으며 아침,저녁 추위와 더위에도 일찍 호곡을 폐한
적이 없었다.
* 동(同)二十七년 갑오(甲午 ; 1594)년 선생 三十六歲.
* 동(同)二十八년 을미(乙未 ; 1595)년 선생,三十七歲 四월에,참취복
을 마치는날,애통호곡함이 초상당하던,날과,다름이,없으니,보는이도
감동되어 같이 울었다.
* 동(同)二十九년 병신(丙申 ; 1596)년 선생,三十八歲 四월에,왜구가
다시 침범함에 선생은 한탄하여 밤중에 벼게를 치며 시(詩)를,지어
왈 <어버이의 원수요 나라의 적이니 이,몸은,마땅히,죽어야,하는데
일은 빗나가고 때는 어긋나 이,목숨바칠 길 없구나. 이 밤에 내
맘 아는 것은 이 칼 하나뿐인데 五更에 星月을 띠며 홀로 루(樓)에
오르노라>고 했다. 七월에 천병(天兵)이 강을 건넜다는 소식을,듣고
시(詩)를 읆어 기뻐했다,
* 동(同)三十년 정유(丁酉 ; 1597)년 선생 三十九歲
글을 지어 체찰사 오리 이원익(梧里李元翼)에 올리다. 선생은 그때
천장(天將; 명나라의 원병대장)이 왜적과 화친의 뜻을 수락했다는
소문을 듣고 격분함을 참지 못하던 차에 그때 이상공(李相公).
체찰사(體察使)가 남방으로 옮겨와 화의를 물리치고 싸워서,공격
하는 대책을 듣고 千百言으로 간곡하게 그 시무를 개진했는데
그 말단에 이르기를 <생은 천지간의 한 죄인이외다. 차마 같은
하늘을 받들고 구차이 남은 목숨을 보존하면서 상공(相公)의,충근
(忠勤)에 감동하고 시세의 간란함을 격분하여 삼가 우천한 정성을
다하여---->운운(云云)했는데 이상공(李相公)이 읽고 정색(正色)
하며 왈(曰) <국가에 일이 있을 때 초야(草野)의 말이 태산보다,
무겁구나--->하고 손수 답장을 써서 그 예경을 다하였다.
* 동(同)三十一년 무술(戊戌 ; 1598)년 선생 四十歲.
천장 마제독(天將麻提督)을 보내면서 노래를 지어 칭송했다.
선생은 개선하고 돌아가는 천장(天將)에게 기쁨을 표시하여 이,
시가(詩歌)를 지어 보냈는데 마제독(麻提督)이 그 글을 보고,영입
하여 예우하고 크게 칭찬했다.
* 동(同)三十二년 기해(己亥 ; 1599)년 선생 四十一歲.
三월에 서애(西厓)선생을 옥연서당(玉淵書堂)에 가서 뵙다. 때에
서애(西厓)선생이 탄핵을 받고 고향에 돌아와 옥연서당에,있었는
고로 선생이 찾아가 위로하고 또 우복(愚伏) 창석(蒼石) 왕복서찰에
二公이 일찍 칭찬하여,왈(曰) <재학(才學)과 행의(行誼)가 洪某같은
이는 실로 학자들의 표준이다, 혹 때가 어긋나면 글로서 물어,정정
(鼎鼎)하게 그 좋아하는 정이 지면에 넘쳤다>고 했다.
七월에 첨정(僉正)인 아우 휘 박(諱璞)과 동행하여 도산(陶山)에
들어가 퇴계(退溪)선생 사당에 배알하고 상주(商州)로 길을 바꾸어
정우복(鄭愚伏)을 율리(栗里)에 가서 만나 대학(大學)의 격물치지
(格物致知)의 요강을 강론하다. 八월에 이송오 진(李松塢軫)과
이남계(李南溪)와 더불어 선산에 가서 노경암(盧敬庵)을 방문하고
매학정(梅鶴亭)에 올라 시(詩) 한수씩을 읊었다.
* 동(同)三十三년 경자(庚子 ; 1600)년 선생 四十二歲.
七월에 의인왕후 승하하여 궐하에 나아가 부곡하다.
* 동(同)三十四년 신축(辛丑 ; 1601)년 선생 四十三歲.
四월에 식년(式年;甲子,丁卯,丙午,癸酉年등으로,이,해가,돌아오면
과거를 보이며 호적조사를 함<三년마다 돌아옴>) 문과(文科; 문관
과거이니,생진과,<生進科;小科>와,문과<文科;大科>)에 급제(及第)
하다. 甲午와 丁酉 두 번의 식년에는 왜란(倭亂)으로 과거를 시행
하지못하고 庚子 식년도 행하지 못하다가 늦추어서 사서일경(四書
一經)을 강의(講義)로 입격자(入格者)가 五十二人 이었다.
선생은 친명(親命)으로서 힘써 과업을 닦았으나 뜻은 임천(林泉)에
있었고 다부진 뜻으로 학문했으나 또 전쟁으로 인하여 과거시험을
폐했는고로 이때에,와서야,처음,석갈(釋褐;모포<毛布>를,벗고,관직에
나아간다는 뜻)을 하니 부노(父老)친지들이 모두 너무 늦었음을,
한스러이 여겼으나 선생은 오히려 조진(躁進; 무턱대고 뛰는 것)할
뜻이 없었다. 六월에 성균관 부정자(副正字)에 보직되고, 七월에
종사랑사록에 승진되고 十一월에 성균관정자에 제수되고 十二月에
또 승사랑 의정부사록에 제수되다.
* 동(同)三十五년 임인(壬寅 ; 1602)년 선생 四十四歲.
二월에 다시 종사랑사록을 제수받고 三월에 계공랑사록에,승진되다
十월에 계공랑,성균관정자에 제수되고,十一월에,무공랑봉상사참봉에
승진되다. 十二월에 선무랑봉상사참봉에 제수되다.
* 동(同)三十六년 계묘(癸卯 ; 1603)년 선생 四十五歲.
三월에 성균관 저작(著作)을 겸직하다.이,해에 비로소,남양홍씨,세보
(世譜)를 편찬(編纂)하다. 선생은 병화뒤에 세보파계(世譜派系)가
산일(散逸)하여 전함이 없음을 개탄하여 항상 가장(家藏)한,구보
(舊譜)에만 의존하다가 이,해에 와서 우연히 홍중추(洪中樞),휘,일동
(諱逸童)의,족보,서문(族譜序文)과,서천,정곤수(西川鄭崑壽)의,가보등
(家譜等)을 참고로하여 고증,수집,선수(考證蒐集繕修)하여 남양홍씨
족보를 편찬하고,겉들여,권말(卷末)에,시,일수(詩一首)를,써서,부쳤다
* 동(同)三十七년 갑진(甲辰 ; 1604)년 선생 四十六歲.
봄에 전하(殿下)를 배알하고 중용(中庸)을 강론,입격(講論入格)하야
내각,성리,군서(內閣性理군書)를 하사(下賜)받다. 五월에 세보계통을
서애(西厓) 선생에게 고증 질의(考證質疑)하고 서문(序文)을 받다.
서애 선생은 이미 외손(外孫) 대열에 있어 그 노고를 치하하고,
서문(序文)을 지은 것이다.
* 동(同)三十八년 을사(乙巳 ; 1605)년 선생 四十七歲.
八월에 선교랑박사에 승진하다. 九월에 성극당 김홍징(金弘徵)의
부고(訃告)가 와서 곡하다. 金公은 문장행이가 세상에 알려졌고
선생과도 교분이 두터웠는데 이때 강릉,임소(江陵任所)에서,서거
하여 선생이 더욱 애석히 여겼다.
* 동(同)三十九년 병오(丙午 ; 1606)년 선생 四十八歲.
正월에 승의랑박사에 제수되다. 四월에 봉훈랑박사에 승진되다.
六월에 봉훈랑감찰에 제수되고 八월에 시학예강을 장감할 때 한
선비가 강의 불통함으로 선생께서 내쫓았는데 동료가 이르기를
기상,자헌(奇相自獻)의 조카라 했다. 그러나 선생은 끝내 듣지
않았다. 기상(奇相)이 이 말을 듣고 칭찬하며 이 사람의 법집행이
공정하니 장차 크게 세상에 쓰이리라 했다.
十二월에 공조좌랑(工曹佐郎)에 제수받고 곧 예조좌랑으로,옮겼다
* 동(同)四十년 정미 (丁未 ; 1607)년 선생 四十九歲.
二월에 병조좌랑(兵曹佐郎)으로 옮기다. 때에 칙명으로 천사가
왔으므로 선생이 기랑에 뽑혀 들어가 시위함에 주선 진퇴함이
예법에,맞아 천사(天使)가 크게 칭찬했다 四월에 충무위 사과
(司果)에 제수되다. 五월에 서애(西厓)선생의 부고(訃告)가 와서
영위를 설치하고 곡하다. 七월에 서애(西厓)선생을 안동 현서,
수동산(安東縣西壽洞山)에서 회장(會葬)하다.제문만사(祭文輓詞)
가 있으며 때에 서울에서 봉직(奉職)중에 있었으므로 이때에
회장(會葬)하다.
* 동(同)四十一년 무신(戊申 ; 1608)년 선생 五十歲.
正월에 과의교위(果毅校尉)를 받고 용양위,사용(龍驤衛司勇)을
제수받고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승진되고 병조좌랑(兵曹
佐郎)에 옮겼다가 통제사종사관에 옮겨 차출되다. 때에 겨우
전란을 겪은 뒤인지라 조가에서 더욱 남방이 걱정이 되어,임금
께서 명하여 문무재능이 있는 자를 선발하여 총영종사관으로
삼았으니 북평사(北評使)와 같은 예이다.선생은 수석(首席)으로
선발에 뽑혔고 이미 부임하여 그,원수에게 진언하여,왈,안위
(安危)의,대계(大計)가 비록 조선(造船)에 있으나 잔민(殘民)의
농사를 폐하게 됨을 또 유념해야 할것이라고,하고,그,주획함이
오직 이선무졸(理船撫卒)에 힘쓰니 통제사 이운룡(李雲龍)이 또한
마음을 기우려 조심하여 응접하고 매사에 반드시 선생의 결재를
기다려 시행했다. 二월에 선조대왕(宣祖大王)이 승하(昇遐)하여
궐하(闕下)에서 부곡하다. 六월에 남계(南溪)선생 부고에 접하여
곡(哭)하다. 七월에 이학동,광준(李鶴洞光俊)의 부고가 와서,곡하다
남계학동에 모두 제문,만사(祭文輓詞)가 있음.
* 광해군,원년(光海君元年) 기유(己酉 ; 1609)년 선생 五十一歲.
正월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배수(拜受)하고 춘추관기주관
春秋館記注官)을 겸직하고 간원소(諫院蔬)를 올리다. 선생은,일심
(一心)으로 봉공하고 의연히 정도(正道)를 지켜 대원에 출입하면서
못할 말이 없다는 것을 알고 이미 언책을 얻었음에 임금이 새로
즉위함에 려각(려刻) 상소(上疏)하여 사(邪)와 정(正)을 분변하고
기욕(嗜欲)을 끊고 군자(君子)를 친히 하고 소인(小人)을 멀리하며
성학(聖學)을 넓히고 치도(治道)를 일으켜야 한다는 것을 극언하니
갖가지의 모든 말이 모두 충성과 정성에서 우러났다.
다시 병조좌랑에 옮기고 또 시강원 사서(司書)에 제수되다.
조경대부,사간원 정언(朝敬大夫司諫院正言)으로 승진하다.
봉열대부,사헌부,지평(奉列大夫司憲府持平)에 승진 춘추관기주관을
겸직하다. 一년중에 정언을 세 번,지평을 두 번하면서 일에 따라
반드시 직언으로 숨김없이 간하니 그때 사람들이 쟁신(諍臣)의
기풍(氣風)이 있다고 했다.
* 동(同)二년 경술(庚戌 ; 1610)년 선생 五十二歲.
二월에 용양위,사과(龍驤衛司果)를 제수받고 춘추관기주관을,겸직
하다. 三월에 송경에 가서 양선생(兩先生) 순국,고사(殉國故事)에
감격했는데 특히 대간(臺諫)으로 혼조(昏朝)와 뜻이 맞지 않아,
호연히 돌아오는 길에 서화땅에 임하여 정헌,선조(靜軒先祖)의,유촉
(遺囑)을 앙모(仰慕)하고 인하여 포은사(圃隱社)에 배례(拜禮)하다.
시(詩)가 있었으나 실전(失傳)하다.四월에,휴가를,얻어 성묘차,오는
길에 상산(商山)에 이르러 횡폭자(橫暴者)를 만나 매질할 것을,명령
했는데 그 사람이 갑자기 병으로 죽었는데,이를,규탄하는,자가,있어
무고한 사람을 죽였다하여 사건이 되었다. 그때 친구가 적당히,
무마하라고 하니 선생은 웃으면서 신하된 자 어찌 임금을,속이겠나
그 사람은 운이 다했음이고 나는 큰 화(禍)를 당함이니 비록,내가
죽인 것은 아니나 나로 인하여 죽었다는 말로 진언했다.
이오봉(李五峯)이 깜짝 놀래며 왈(曰) <이렇게도 충직(忠直)하냐,
어찌 찬개(竄改)를 할 수 없느냐>하니 선생왈 <하늘이 조림한데,
어찌 속여서 은폐하여 요행을 바라겠나>하고 사실대로 아뢰니
사람들이 모두 위험하다고 했다. 임금이 그 무죄함을 알고 특별히
고려하여 흥양으로 유배,시켰다.때에,이창석,신오봉,조과재,이감곡이
모두 별도의 글을 증(贈)하였다. 흥양읍의 수십명의 아이들이,모두
책을 끼고 와서 학(學)을 청함에 선생은 가르침을 게을리 하지,않고
재주에 따라 훈도하니 자못 진취가 있었다. 돌아오게됨에 시(詩)를
지어 제생에게 주었다. 제생이 각기 한통씩을 베껴, 경성(警省)의
자료(資料)로 준비하고 맨발로 전송하는 자 수십인이었다.
九월에 사제,찰방공(舍第察訪公) 부고(訃告)를 받고 제수(祭需)와
제문(祭文)을 갖추어 중자,휘,선경(仲子諱善慶)을 시켜,대곡(代哭)
하다. 때에 찰방공이 무고의 화(禍)로서 옥살이를 하는 중 선생이
적소로 가게됨에 형제(兄弟)가 분리(分離)되었다.
선생은 평생에 돈독한 우애로 더욱 불쌍히 여기고 상심하여,가향은
멀리 낙낙하여 떨어져 다만 스스로 남을 향해 눈물을 흘렸다.
이미 흥양에 있어 仲子가 와서 상고를 보고 하니 적소에서의,정사
(情事) 더욱 침통했다. 드디어 제수를 갖추고 제문을 지어,仲子로
하여금 대곡했다. 十月에 방환했다.
* 동(同)三년 신해(辛亥 ; 1611)년 선생 五十三歲.
현서,모로동전(縣西慕魯洞前)에 천석(泉石)이 기승한 곳을 얻어
조그마한 대(臺)를 쌓고 서담(西潭)이라는 호(號)를 부쳤다.
흥양(興陽)으로부터 돌아와 보니 세상은 날로 어지러워 벼슬길에
나갈 이사는 없고 전원(田園)에 물러앉아 양암대(兩巖臺)를,세우고
좌우에 도서를 갖추고 고요히 그 사이에 앉아 정신을 맑게 하고
성정을,기루어,활연히,자득하여,날로,책읽는,것을,일삼았는데,더욱이
주자서(朱子書)를 즐겼으며 항상 마을 늙은이와 그 자여질과,경적
(經籍)을 강론하면서 힘써 귀취(歸趣)를,얻었고,또,동쪽,언덕에,山을
깎아 대(臺)를 만들어 가히 수십명(數十名)이 앉을만하고 四方의
들판을 통해 바라다보고 구부려 긴내를 내려다 보면 그윽하고,고요
하고 기이하고 상쾌하여 풍경이 절승했다.
선생은 아침저녁 소영(嘯詠)하면서 종로의 계책으로 삼았고 일찍,시
(詩)가 있었으니 거기에 <구름은 열리고 비개인 저녁노을에 버들을
따라 꽃을 찾아 물가에 다달으니 싫컷 연어(鳶魚)의 무한한 뜻을
알겠노라. 이가운데 참된 락(樂)을 누가 알겠나 >고 썼다.
가을에 망선대(望先臺)를 축조했는데 대(臺)는 현서,봉계산(縣西
鳳溪山) 중턱에 있는데 덕동,선영(德洞先塋)이 바로 보이는,곳이다.
이 때문에 여기에 대(臺)를 쌓고 등림하면서 첨모의 감회를,부쳤다.
때에 정인홍(鄭仁弘)이 주자(朱子),퇴계(退溪) 양선생을 극도로,비방
한다는 소문을 듣고 선생은 악연 놀래며 탄식하여 왈 간극함이
이같으니 이 일을 장차 어쩌나,하고 분연히,시(詩)를 썼으니,거기에
추인,가야,살기다시랑장학로차아(秋人伽耶殺氣多豺狼藏壑路嵯峨)
라고 했다.
* 동(同)四년 임자(壬子 ; 1612)년 선생 五十四歲.
* 동(同)五년 계축(癸丑 ; 1613)년 선생 五十五歲.
이때부터 광해군(光海君)의 정사(政事)는 어지럽고 간신 소인배들이
날뛰며 옥사는 이어지고 화(禍)가 영창대군에 미치니 선생은 이,
소식을 듣고 측은히 눈물을 흘렸다. 비록 재야(在野)의 몸이지만
그나라 걱정함이 이러했다.
* 동(同)六년 갑인(甲寅 ; 1614)년 선생 五十六歲.
* 동(同)七년 을묘(乙卯 ; 1615)년 선생 五十七歲.
* 동(同)八년 병진(丙辰 ; 1616)년 선생 五十八歲.
봄에 仲子 휘,선경(諱善慶)을 서울 과거시험에 보내다. 때에 권신
이이첨(李爾瞻)이 유학오러온 학자들을 불러들여 그 날개를,펴려고
할 때 이를 소개하는 자 가서 배알하기를 권유했지만 선경(善慶)은
부형(父兄)이 있으니 맘대로 갈 수 없다하고 사절했다.
협박이 심하면 병을 칭탈하고 꼼짝하지 않았다. 돌아와,그,사정을
아뢰니 선생은 기뻐하며 왈,선비의 행동거지는 반드시,그,이수를
살피는 것이 옳으니 너는,능히,본래의,뜻을,굳게 지켜,이세(利勢)에
굴한바 없다면 너의 조상에 욕됨이 없으리라 했다.
오봉,이상공(五峯李相公)이 이 소문을 듣고 칭찬하여 왈,<또한,이미
이만한 아들이 있었구나하고 사람이,현부형,즐거움이,있다고,했는데
실로 믿을만한 말이다 >고 했다. 이 가을에 휘,종경(諱宗慶)이 진사
(進士)에 합격하다.
* 동(同)九년 정사(丁巳 ; 1617)년 선생 五十九歲.
정침동쪽에 가묘를 세우다. 가묘(家廟)의 제도는 오로지 주문공
(朱文公) 가례(家禮)에 준하나니 신문(神門)밖에 좌우로 나누어,
방하나 고방하나를 두어 제수용기명 등을 모두 이 고방안에
두었다가 제사날에 내다가 썼고 전기하여 방안에서 빗질하고
목욕제기하여 제사하고 사계절 행사이외에 시물이 생기면 반드시
바쳤다.선생이 자여손을,가르침에 항상,주경(主敬)두자에 힘쓰도록
하며 왈 < 성현의 공부가 여기에 지나지 않으니 과연 힘써 실천
한다면 만사에 시행하여 어찌 부당함이 있으리요 >하고 인하여
시(詩.)를 써서 훈계하다. 원집에 있음.
* 동(同)十년 무오(戊午 ; 1618)년 선생 六十歲.
봄에 선산,송정(善山松亭) 모임에 참석하다.때에 장여헌(張旅軒)이
전,지평(前持平)으로 양덕남산하고 김운천용(涌)은 선산부사이고
김동리 윤안은 대구부사이고 노경암 경임은 영해부임중이며,선생
또한 전직 지평으로 자리에 있어 도의를 강론하면서 종일,즐겼는데
이공,경절(李公景節)이 시(詩)를 지어 좌중삼부사송하,양지평평차
회천추후난정탈승명(座中三府史松下兩持平此會千秋後蘭亭奪勝名)
이라고 읆었는데 그때 사람들이 모두 연모하여 전해졌다.
< 동이집 >에는 선산부백 유시회는 있고 김운천의 이름은 없고
< 가장 >을 보니 김운천은 있고 유부백은 없다. 여기는 가장에
의하여 기록한다. 여름에 서궁변(西宮變)을 듣고 평상시에도 몰래
눈물을 흘렸다. 선생은 경술이후 경낙에 자취를 감추었지만 때로,
조정이야기에 미쳐서는 번번이 한탄하고 한숨지었으며 이변에
이르러서는 더욱 비통해함이 심했다.
선고(先考) 우윤공(右尹公)의 묘갈문을 찬(撰)하다.
* 동(同)十一년 기미(己未 ; 1619)년 선생 六十一歲.
二월에 정우복(鄭愚伏),이창석(李蒼石),노경암(盧敬庵) 제현(諸賢)
등과 병산서당(屛山書堂)에서 모여 서애(西厓)선생 문집을,찬수하다
이때 조야(朝野)가,모두,시끄러워,미처 찬집을,못했다가,사론(士論)이
때에 맞춰 수정(修正)해야 된다고,하여,도내에 이름있는 선비 및
본손(本孫)이 모여 문집(文集)을 찾아 편수하게 되었다.
* 동(同)十二년 경신(庚申 ; 1620)년 선생 六十二歲.
十월에 김운천(金雲川) 부고(訃告)를 받고 곡(哭)하다.
* 동(同)十三년 신유(辛酉 ; 1621)년 선생 六十三歲.
五월에 김동리(金東籬) 부고를 받고 곡하다.
* 동(同)十四년 임술(壬戌 ; 1622)년 선생 六十四歲.
봄에 남계서원에 관하여 의논했으나 의론이 일치되지 않아서,
여러번 글을 이오봉(李五峯)에게 보내어 품의하다.
선생은 남계일구(南溪一區)가 서애(西厓)선생의,재거독서(齋居讀書)
하던 곳으로 비록 백년이 가도 유풍여운이 완연 불민하니,마땅이
조두의 향사로 갱장의 추모를 부침이 가하다하여 드디어,동문(同門)
친구들과 우복(愚伏) 창석(蒼石) 동리(東籬),및,본향의,여러,선비들과
서원으로 하기로 건의했으나,모든,의론이,일치되지,않고,혹은,재력이
넉넉하지 못하니 옛 주초에 의하여 중수함이 마땅하다고 했다.
선생은 오히려 사가(私家)의,재실에,불과(不過)하고 일읍이,동심하여
같이 이루어짐도 꼭이 기필할 수,없었고,또,학봉이,일찍이,터를,보고
위면(位面)이 좋지 못하다고 했으니,학노(鶴老)가 모르고,한말이겠나
차라리 점차로 재물을 늘려 위면(位面)을 정하고 먼저 묘우(廟宇)를
세운 연후에 재방(齋房)을,차례대로,세우고,금년에 한 재사를,명년에
또한 재사를 세운다는 뜻을 오봉(五峯),이선생에게 품의하여,정하다
二월에 仲子 휘,선경(諱善慶)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제수받다
十二월에 長子 휘,종경(諱宗慶)이 별세(別世)하다. 제문(祭文)이
있으며 복제(服制)를 장여헌,현광(張旅軒顯光)에게 문의하다.
* 인조 원년(仁祖元年) 계해(癸亥 ; 1623)년 선생 六十五歲.
四월에 병조정랑(兵曹正郎)에 제수되다. 때에 이오봉(李五峯)의
아들 경엄(景嚴)이 참판(參判)으로서 마침 하반(賀班)에 있어 글을
보내 권하며 < 초야(草野)의 군현이 성대(聖代)를 기다려 일어나니
존형(尊兄)이 다시 기성(騎省)에 들어오는 것도 오늘에 있으니
백수랑(白首郞)이라하여 깨름직하기 여기지 말고 이 구구한,바람을
버리지 말라 >고 함으로 드디어 부임하다.
五월에 성균관 사예(司藝)를 배수하고 다시 병조정랑에 배수하다.
六월에 계자(季子) 휘,중경(諱重慶)이 별세하다. 때에 선생께서
봉직차 서울에 있었는고로 공(公)이 올라와 시성하면서 역질을
다스리지 못했음이다. 안동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인하여 예천군수에 제수되다. 때에 선생이 아들 상(喪)으로,서울에
있었음으로 조정의논이 남쪽 지방이 아니면 반친이 어렵다하여
안동부사에 임명했으나 부임하지 않음으로 예천군수에,제수되었다
七월에 부임하여 관가(官家)에 이르러 먼저,관내의,고질병의,형세를
묻고 이어서 민간(民間)의,괴로운,폐단을,물어 갈심진력,그,유행병을
일소하는데 전력을 기우려 수개월내에 은신(恩信)이 주효하고,이민
(吏民)이 모두,화평을,이룩했다.八월에,우도,감시시관(右道監試試官)
으로 차출(差出)되다. 十一월에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오다.
이에 앞서 어사(御史)가 군(郡)에 와서 첨안(簽案)이 잘못 기록됐다
하여 죄를 씌우니 읍이중(邑吏中)에,좋아하지,않는,자가,있어,어사를
시켜 사고를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선생은 호연(浩然)한 마음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행장이 소연하니 길가에서 보는 자 모두 그,
청렴함을 칭찬했고 임금도 그 사실이 아님을 알고 원점으로 돌릴
것을 명하였다.
* 동(同)二년 갑자(甲子 ; 1624)년 선생 六十六歲.
正월에 신오봉(申梧峯)의 부고를 받고,곡하다.만사二수(輓詞二首)가
있음. 二월에 이괄(李适)변으로 대가(大駕)가 파천하여 공주(公州)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선생은 즉시 향유(鄕儒) 이립가(李立可)등과
더불어 장사(壯士)를 불러모아 군량(軍糧)을 준비하여 힘껏 달려
갔으나 적은 이미 항복하고 어가는 돌아갔는지라 궐하(闕下)에
나아가 징전비후 출척수양의 뜻으로 상소하니 그말 뜻이 심히
정직하였다. < 슬프다 서울을 못지키고 어가가 파천하니 신민의
아픔을 다 말할 수 있겠나, 흉적은 소탕되고 종정이 아직 옮기지
않았으니 종사의 경사를 어찌 다 말하리요.이는 진실로 무강유휼
이무강유휴(無疆惟恤而無疆惟休)라는 것이위다. 신(臣)등은,모두
부패한 선비 천한 신하로 한쪽 영외에 있으나---이하결(缺)>上이
감탄하고 불렀으나 병으로 배알하지 못했다.
그후로 병이 더욱 심하여 문을 닫고 조양하면서 세로(世路)에,뜻이
없었다. 八월 二十一일 유서(遺書)로 자여질(子與姪)에게,훈계하다
때에 선생의 병이 심하여 자질(子姪)을 불러 훈계하여 왈,< 내,병이
더하기만 하고 차도는 없어 명(命)이 다함이니 죽은들 무슨 한이
있겠나만은 충효의 실천이 없어 위로는,능히,국은(國恩)에 보답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선인의 덕을 천양하지 못했으니 이것이 내 평생의
마음에 맺힌 것이다. 너희들은 모름지기 내 뜻을 체득하여
언충신행독경(言忠信行篤敬)으로 종신(終身)의 패복(佩服)으로 삼을
것이며 또한 족보 권말(卷末)에 써놓은 시(詩)의 뜻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효도가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을 것이다 >고 했다.
八월 二十二일에 명하여 의건(衣巾)을 씻고 자리를 바로하고 또,
자질(子姪)에 명하여 빈객(賓客)의 래방(來訪)을 사양토록 했으니
때에 선생이 병이 위중(危重)하여 문병온 손님에 억지로 일어나
수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날 신시(申時)에 정침(正寢)에서
고종(古終)하다. 十二월 某일에 현서(縣西),덕동(德洞),자좌오향원
(子坐午向原)에 장례(葬禮)하니 유생모인 자,二百여인이었다.
묘갈을 세우다. 이창석(李蒼石)이 비문을 찬(撰)하다. 그 후
二十六년만인 기축(己丑; 1649)년에 숙인,인씨(淑人印氏)가 별세
(別世)함에 선생의 택조(宅兆)가 불리하다 하여 묘(墓)를 옮겨,현서
두건곡 태자원(兌坐原)에 합장(合葬)하고 그후 二百三十二년 경오
(庚午)에 묘갈(墓碣)을 다시 세우고 계당(溪堂) 유주목(柳疇睦)이
서문(序文)을 짓고 석산(石山) 김익용(金益容)이 전서(篆書)를 쓰다.
*정조(正祖)대왕九년,을사(乙巳;1785)년,선생,문집(文集)을,찬수(纂修).
하다,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이 교정(校正)했고 발문(跋文)이 있음.
* 동(同)十년 병오(丙午 ; 1786)년에 사림(士林)들이 위판(位版)을
양천서원에 봉안(奉安)하다. 서원은 양곡리(良谷里 ; 현 내량2리
양천<良川>)에 있다. 동편에 문정공(文正公) 양파(陽坡) 선생과,
배향(配享)하니 조손(祖孫)이,합철하여,정문(情文)에,화협(和協)되다
이소산(李小山)이 봉안문(奉安文)을 짓고 상향 축문(常享祝文)도
찬(撰)하였다.
* 순조(純祖)대왕十一년 신미(辛未 ; 1811)년에 서담(西潭) 二字를
양암대(兩巖臺)에 새기다. 대(臺)는 현서(縣西),모로동(慕魯洞),병수
(幷水)위에 있으며 六대손(六代孫),국자생(國子生) 휘(諱) 문표
(文杓)가 쓰다.
*고종(高宗)三十四년,정유(丁酉 ;1897)년에,양암정(兩巖亭)이,세워지다
九대손 휘(諱),구섭이,개기(開基)축문을,찬(撰)하고,판서(判書),장석용
(張錫龍)이,상량문(上樑文)을,찬(撰)하고,도사(都事),유도헌(柳道獻)이
기문(記文)을 찬(撰)하다.
* 동(同)三十六년 정해(丁亥 ; 光武三년 1899)년 양암정(兩巖亭)에서
수계(儒楔)를 닦다. 유자인(柳慈仁),도석(道奭)이 수계할 것을 발의
(發議),수찬(修撰)하다
자료제공 ; 국역 서담선생 문집(전)
국 역 ; 태사공 34세손 홍 원 표
역 해 ; 대구화수회 전 감사 홍 현 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