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으면서 옛날 얘기할 때가 올거야
무진당 조정육
그는 한 때 노비였다. ‘노비’라는 말이 가지는 의미는 사람 목숨이 말 한 필 값 만도 못하다는 뜻이다. 늙거나 병들면 노비의 비교 대상은 말에서 개나 돼지로 대체된다. 노비는 짐승처럼 매매와 양도, 상속이 가능했다. 노비는 그런 존재였다.
노비는 소속에 따라 ‘관노비’와 ‘사노비’로 구분되는데 어디에 소속되거나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양반들의 눈 밖에 나면 누구의 잘잘못인가를 따지기 전에 노비에 대한 폭행과 고문이 뒤따랐고 생명을 잃는 경우도 허다했다. 주인을 배반하고 도망을 쳤거나, 주인의 범죄사실을 알고 있는 경우에 노비는 상전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심지어는 특별한 이유 없이 주인이 개인적인 분을 못 이겨서 노비를 죽이는 경우도 있었다. 관노비에 비해 사노비들이 그나마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사유재산이었고 노비의 죽음은 재산상의 손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노비들은 걸핏하면 목숨을 잃어야 했지만, 노비를 살해한 주인에게 내려지는 처벌이란 고작 60대에서 100대 정도의 매가 전부였다. 아무리 처참하게 노비를 살해해도 주인을 사형시키는 제도는 없었다. 고대부터 반상의 신분이 타파되는 갑오개혁(1894년)까지 끊임없이 노비들의 반란이 일어났던 바탕에는 이런 비참한 현실이 놓여 있었다.
이런 시절에 이상좌는 노비로 태어났다. 노비로 태어났으니 천지가 개벽하지 않는 한 노비로 죽을 운명이었다. 그런데 천지가 개벽할 만한 일이 발생했다. 노비였던 그가 화원(畵員)이 된 것이다.
출신성분이 허름하다보니 그의 생몰년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을 리 만무하다. 어떤 연유로 누구에 의해 그가 화원이 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오세창은『근역서화징』에서 조선 전기의 문인 어숙권의『패관잡기』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이상좌는 선비 아무개의 종이었는데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려서 산수화와 인물화가 한 시대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므로 중종이 특명으로 속량시켜서 도화서에 배속시켰다.’
종에서 중종의 특명을 받은 화원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어떠했을까. 기록이 남아 있었더라면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할 만한 인간승리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도 간단하게 몇 줄만이 확인될 뿐이다.
그의 진품으로 확인되는 작품은 한 점도 없다. 전칭작들만이 있을 뿐이다. 그 중에서 그의 전칭작으로 잘 알려진 <송하보월도>는 비스듬히 배치된 언덕에 비바람에 심하게 꺾인 소나무 한 그루를 그린 작품이다. 척박한 바위틈을 뚫고 나온 소나무가 위태롭게 서 있다. 그나마도 몸을 휘감은 덩굴풀 때문에 뻗어 오르기가 만만치 않다.
이상좌, <송하보월도>,조선, 15세기, 견본담채, 190×82.2cm, 국립중앙박물관
그러나 소나무는 바위틈에서 싹 튼 태생적인 한계와 세찬 비바람과 덩굴풀의 방해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생존을 선택했다. 얼핏 보면 위태로워 보이지만 소나무는 계속 살아 남을 것이다.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포기해야 될 이유가 수백가지가 된다해도 살아야한다는 내면의 목소리가 더 강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조선 초기의 작품 중에서 남송(南宋)의 마하파(馬夏派)화풍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마하파(馬夏派)화풍’은 남송의 화원이었던 마원(馬遠)과 하규(夏珪)에 의해 형성된 화파로 그들의 이름 첫 글자를 따서 ‘마하파’라 부른다. 북송의 산수화는 화북지역의 스산하고 거대한 자연을 대상으로 한 대관산수(大觀山水)가 중심이었다. 이성(李成)과 곽희(郭熙)가 중심이 된 ‘이곽파화풍’이 그것이다. 조선 초기 안견이 그린 불후의 명작 <몽유도원도>는 이곽파화풍이 바탕이 되었다.
반면 강남으로 수도를 옮긴 남송의 산수화는 경물이 한쪽으로 치우치는 변각구도에 인물을 부각시켜서 강조하는 근경중심의 산수화가 발달되었다. 이것이 마하파화풍이다. 강이 많다보니 안개가 자주 출몰하게 되고 안개속에서는 먼 산보다 가까이 있는 경물만이 보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환경의 영향을 받는 것처럼 그림도 자연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렇게 조선초기에는 이곽파화풍, 마하파화풍, 절파화풍 등 중국의 다양한 화풍들이 전래되어 조선적인 화풍 형성의 바탕에 도움이 되었다. 중국에서는 다양한 화풍들이 시간차를 두고 형성되었던 반면 조선에 수입될 때는 동시다발적으로 상륙했다. 그 중에서 이상좌가 선택한 화풍이 마하파화풍이다. 여러 화풍 중에서 이상좌가 굳이 마하파화풍을 선택한 것은 그의 감성과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송하보월도>는 손상이 심한 작품이지만 오른쪽 하단을 보면, 시동을 데리고 온 선비가 절벽 위에 위태롭게 뻗어있는 소나무를 감상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모티브는 동양화에서, 중심이 되는 경물을 강조하기 위해 흔히 써 먹는 기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좌의 그림에서 선비가 유독 눈에 띄는 것은 그가 살아 온 생애가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이상좌가 선비를 그릴 때 누구를 생각하며 그렸을까? 그의 재능을 알아 본 주인일까. 아니면 소나무의 나이테처럼 굴곡이 심한 자신의 모습일까.
그는 1545년 중종이 승하한 후 임금의 초상인 ‘어용(御容)’을 그렸다. 1546년에는 공신들의 초상화를 그린 공훈으로 원종공신에 참예하게 된다. 원종공신이란 국가나 왕실에 공훈이 있는 공신과 그 수종자에게 주는 칭호인데 그들 대부분이 뼈대있는 가문의 정공신(正功臣)이나 그 집안 사람들이었던 것을 생각할 때 이상좌에게 취해진 조치는 매우 이례적이고 파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전칭작이 산수화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관한 기록은 그가 인물화의 대가였음을 말해준다. 1543년 예조에서 중국 한대(漢代)의 『열녀전』을 국역할 때 이상좌가 그림을 모방하여 그렸다는 기록이나, 거문고를 잘 타는 기생 상림춘이 자신을 사랑한 참판 신종호의 시를 그림으로 부탁했다는 기록 등이 그것이다. 신종호의 시의 내용 또한 ‘수양버들 휘늘어지는 늦은 봄에 옥 같은 사람’이 주인공이다. 현재 남아 있는 그림으로 당시 그가 활약했던 시대의 상황을 유추해보는 것은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로지 그림 재주 하나로 이름 없는 종에서 훈장을 받는 화원이 된 이상좌의 영광은 그의 아들과 손자로 이어진다. 두 아들 이흥효와 이숭효도 그림을 잘 그렸고, 손자 이정은 다섯 살 때에 스스로 그림을 그릴 줄 알았고 열 살 때는 벌써 그림으로 ‘대성’하였다고 전해질 정도였다. 이로써 이상좌 집안은 그림으로 대를 잇는 화원집안이 되었다.
노비출신으로 성공한 사람 중 세종시대에 장영실이라는 과학자가 있었다면, 중종시대에는 이상좌라는 화가가 있다. 지금은 두 사람 모두 저세상 사람이 되었지만 한 사람은 해시계를 통해, 다른 한 사람은 그림을 통해 우리에게 얘기한다.
지금 힘든가. 그래도 힘을 내게.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웃으면서 옛날 얘기할 때가 올걸세. 그래도 그대는 말 한 필 값보다는 비싸지 않은가.
이흥효, 설경산수, 16세기후반 |
이정, 한강조주도, 16세기 후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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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무진당님 윤거사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잘보구 갑니다..감사합니다.... 아미타불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