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구약성경 인용)
마가복음 13장 28-30절『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의 성전을 상징하는 말이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13장 2절에서 돌로 지어진 성전이 무너질 것을 말씀하셨다.『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이 돌 성전은 A.D. 70년 경에 로마에 의해 무너졌다.
예수님이 그 다음에 말씀하시는 내용은 신도의 심령 속에 있는 성전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제자들은 이미 새성전이 심령 속에 세워진 상태였다. 하나님은 첫사람을 만들 때 성전을 두었는데, 이 옛성전은 죄로 가득한 곳이 된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는 열매를 거둘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옛성전도 무너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옛성전의 주인은 누구인가? 바로 자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새성전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옛성전의 주인이 마치 그리스도인 것처럼 속이는 것이다.
교회공동체 안에서 옛사람이 주인인 신도들이 그리스도가 주인인 성도에게 공격을 한다. 그리스도는 아직 재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의 심령 속의 주인은 성령이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핍박한다.
복음은 바로 부활생명을 의미한다.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것을 믿는 것이 복음이다. 이 복음의 핵심은 현재적 부활을 믿게 하는 것이다. 죽었던 육체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육체 속에 갇힌 영이 영의 몸을 입고 하늘로부터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는 것은 육체적 부활을 믿는 자들이 영적 부활을 믿는 자들을 핍박한다는 것이다.
멸망의 가증한 것은 옛성전에 자기라는 존재가 왕노릇하는 신자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유대에 있는 자들은 율법주의자들이다. 율법주의자들은 빨리 옛성전을 버리고 새성전(산)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심령 속의 옛성전은 무너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소돔과 고모라처럼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성전을 태워버릴 것이다. 자기가 주인인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남은 자의 구원을 말씀하신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이는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신도들이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을 의미한다. 율법주의라는 가지가 나오면 나무를 뒤덮어버린다. 즉 율법이라는 열매가 열리므로 복음의 열매는 감추어져 버리는 것이다. 심령 속의 새성전이 세워져야 하는데, 옛성전이 이를 가로 막는 것이다. 따라서 무화과 나무 아래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율법이라는 열매(죄)를 먹고 마시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빨리 무화과 나무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에게로 나가야 한다.
요한복음 1장 48-50절『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향하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말을 했는데, 이 말의 의미는 표면적으로는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을 혼자 묵상하면서 있었는데, 예수님이 그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면적으로는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나다나엘의 존재성에 대해서 보았다는 것이다. 나다나엘은 율법에 충실한 자였다는 말이다. 그는 율법 속에서 희생제사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고, 창세기 3장 15절의 여인의 후손과 연관지어서 앞으로 다윗의 후손인 메시야가 반드시 올 것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요한복음 1장 47절『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돌로스) 것이 없도다』간사하다라고 번역한 돌로스는 미끼, 섞어 버리는 것, 계교 등의 의미를 갖는다. 그는 간사하지 않다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의 심중에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는 자임을 인정하시는 것이다. 나다나엘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자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다나엘은 나사렛 예수에 대해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 라고 비하적인 말을 한 것이다. 선하다라는 말은 메시야를 두고 하는 말이다. 나다나엘이 생각하는 나사렛은 시골스러운 촌 동네의 의미를 갖는가? 그가 생각하는 메시야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는 메시야이지 나사렛이 아니라는 말이다. 베들레헴은 떡집이라는 말로 성전을 의미한다. 그런데 왜 메시야가 나사렛에서 나온다는 말인가?
예수님은 분명히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지만, 나사렛 예수라 칭함을 받았다. 그 이유는 나사렛이 나실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나사렛과 무화과나무는 상반된 영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나실인은 삼손과 사무엘을 떠 올리게 한다. 반면 무화과나무는 율법 아래 있는 이스라엘, 유대지도자를 상징한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너는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지만, 무화과나무에서는 나실인으로서의 메시야를 볼 수 없단다. 그래서 나에게로 와야 한다고 말을 하는 것이다. 분명히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메시야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그 상황을 알고 나다나엘이 궁금해 하던 그 대답, 메시야가 어떤 존재인지를 예수님이 하신 것으로 그는 받아드린 것이다. 이 분이 바로 나사렛 예수 메시야이구나 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보다 더 큰일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1장 51절에서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라고 하셨다. 범죄한 천사의 영이 심령 속의 옛성전으로 들어가고, 그러나 이들이 회개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새성전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을 보여주신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여전히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자들은 부활생명인 그리스도에게로 달려 나가야 한다. 그리스도는 구원자인데, 율법 속에서 구원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오직 복음이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와 함께 현재적으로 부활하여 영생을 얻는 것이 구원이라는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