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오하이오 주 오벌린대학을 졸업한 후 뉴욕의 유니온신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이 무렵 구한국 정부에서 근대 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 Royal College)을 설립하고, 교사를 미국 측에 요청하였는데, 당시 주한 미국 공사 푸트를 통해 이러한 요청을 받은 미(美)국무성은 유니온신학교에 교사 신청을 의뢰하였고 유니온신학교는 이에 졸업반인 벙커와 길모어(G.W. Gilmore), 재학생인 헐버트(H.B. Hulbert) 등 세 명을 추천하였다. 이들 세 명의 교사는 1886년 5월 의료선교사인 엘러스(A. Ellers)와 일행이 되어(길모어 부인이 포함되어 일행은 5명이었다) 미국을 출발해 그 해 7월 4일 내한하였다. 내한 즉시 그는 육영공원 교사로 영어를 교수하였으며 이듬해(1887) 엘러스와 결혼하였다.
벙커는 1890년 6월에는 한국성교서회(The Korean Tract Society) 창립위원으로도 활동하였으며, 1894년 육영공원이 폐쇄되기까지 8년간 고관자제와 현직 고급관리들에게 영어를 가르쳤으며, 1892년 3월 구한국 정부로부터 교육의 공로를 인정받아 통정대부 호조참의(정3품)라는 벼슬을 받았다.
육영공원이 폐쇄되고 학생들은 배재학당 교사로 옮기면서 미감리회 선교사로 정식임명 받았다(1895). 그는 그 해 배재학당 내에 대학부가 설치되자 초대 부장이 되어 고등교육을 실시하였으며, 1902년에 선교여행 중 순직한 아펜젤러의 뒤를 이어 2대 학장이 되어 1912년 신흥우에게 물려주기까지 학당 발전에 큰 공헌을 세웠다. 그는 또한 한국의 청년운동, 민족운동, 교회연합운동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한국YMCA의 창설부터 관여하여 이사를 역임하였으며, 그가 육영공원 및 배재학당에서 가르친 학생들이 민족운동의 중추세력으로 등장하기까지 큰 힘이 되어주었다.
그의 선교 업적 중에 특기할 만한 것은 한국 최초로 옥중전도(교도소선교)를 실시한 것이다. 1899년 진보적 민간 정치단체인 독립협회가 해산당한 후, 보수 세력에 의해 진보적 지식인ㆍ정치인들이 대거 체포되어 한성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독립협회 사건으로 이상재, 홍정후, 남궁억, 정교 등이 투옥되었고, 배재학당 출신인 이승만(李承晩)과 신흥우(申興雨)도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 이에 벙커는 정부의 특별허가를 받아 한성감옥을 자유로이 출입하였는데, 선교적 관심에서 옥중에 있는 이들을 방문하였고, 그들을 위해 서양과학과 철학 및 역사에 관한 서적, 그리고 성경을 비롯한 기독교 전도문서들을 넣어주었다. 벙커가 시작한 이 일에 언더우드ㆍ게일 등 장로교 선교사들도 동참하였고, 한성감옥에는 선교사들이 넣어준 책으로 "옥중도서실"이 설치되었다. 정치범들이 이 도서실에서 책을 빌려 읽는 동안 기독교 신앙을 접할 수 있었으며, 1902~1904년 무렵에는 상당수 지식인들이 옥중에서 개종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때 이승만, 신흥우를 비롯하여 유성준(兪星濬), 이상재(李商在), 이원긍(李源兢), 김정식(金貞植), 안국선(安國善), 홍재기(洪在箕), 이승인(李承仁) 등 지식인ㆍ상류 계층 인사들이 옥중에서의 집단개종을 거쳐 기독교인이 되었던 것이다. 세례 받은 이도 12명이나 되었다. 유성준은 이들 옥중 개종자들의 옥중 신앙집회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이 해(1903) 12월 말에 피수된 여러 동지들이 모여 서로 말하기를 우리 오늘날 이와 같이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을 얻음은 모두 리근택씨의 덕이라. 출옥한 후에는 그를 심방하고 치사함이 옳다 하고 원수 갚을 생각이 이같이 변한 것을 일동이 감사하는 뜻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는 또 1905년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각 교파 선교사들이 모여 재한복음주의선교부연합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 in Korea)를 구성하여 교파를 초월한 기구를 조직하였는데, 그때 초대 서기 겸 회계 및 찬송가 편찬위원을 역임하여 교회연합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이처럼 다양한 활동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면서도 벙커는 1896년 이후 담임한 동대문교회 목회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노병선, 이경직, 김우권 등 한국인 목회자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동대문교회를 거점으로 동대문 밖, 서울 동부지역 선교 확장을 추진하였다. 특히 그가 가르친 신흥우가 1911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자 그에게 배재학당 일을 맡기고 벙커는 보다 많은 시간을 목회와 전도사업에 할애할 수 있었다. 그는 서울과 인천지방을 총괄하며 선교사업을 추진하였다. 그에 대한 동료 선교사 밴버스커크(J.D. Vanbuskirk)의 증언이다.
""배재 아이"(A Bai Chai boy) 신흥우 박사가 학당장으로 임명된 후 벙커는 자기 시간을 서울과 인천지방 전도사업에 쓸 수 있었다. 그는 몇 년 동안 매주일 동대문교회에 나가 동대문교회 주변에서 전도사업을 전개했다. 그의 지도력과 헌신적인 사업의 결과로 13개 마을에 교회가 조직되었고 성장했다. 지금도(1933) 이곳 교회들에서 한국인 목사 여섯 명이 사역하고 있다."(The Korea Mission Field, Feb. 1933, p.32)
이처럼 벙커는 배재학당 당장직에서 벗어난 후 서울의 동대문 밖과 인천ㆍ강화지역의 선교를 관장하다가 1926년 7월에 73세 나이로 은퇴하였다. 벙커가 은퇴할 때 초교파 기독교신문인 〈기독신보〉는 그의 선교 업적을 이렇게 정리해 소개했다.
"씨는 일청전쟁시에 본 '육영공원' 교사의 직을 사면하고 그 후(一八九五年) 북감리교 경영인 경셩 배재학당 당장으로 피임되여 一면으로 학교교육과 一면으로 복음 션젼에 졍신과 힘을 다하니 현재 죠션 교회나 샤회에셔 유력히 활동하는 쟈 만히 그 교문으로부터 나왔고 또 동대문 모교회(母敎會)를 비롯하야 삼청동 중곡 룡두리 왕십리 한강 소귀 두무개 미아리 납대울 번리 각심사 十三처 교회가 씨의 힘으로 건설되여 슈쳔의 생명을 구원하였다."(〈긔독신보〉, 1926. 6. 23)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그의 목회와 선교사업을 통해 동대문 바깥 13처 교회 개척이 모두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또한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1896년 독립문 정초식이 거행될 때 그는 윤치호가 지은 국가를 스코틀랜드 민요 로렐라이 곡에 맞게 학생들에게 가르쳐 부르게 하여 한국 최초의 애국가를 만들기도 하였다.
벙커는 1926년 한국 선교 근속 40년 표창을 받았고, 73세의 고령으로 은퇴 후 부인과 함께 귀국하여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1932년 11월 26일 별세하였다.
"나의 유골이나마 한국에 묻어 달라"는 유언에 따라 그의 유골은 그의 부인에 의해 한국에 도착하여 1933년 4월 8일 정동교회에서 고별예배를 가진 후,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다. 부인도 1938년 한국에서 별세하여 합장되었으며 묘비엔 "날이 새이고 흑암이 물러날 때까지"란 의미심장한 어구가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