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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집 제3권 / [서(書)] / 구암(龜巖)에게 답한 편지
《가범(家範)》은 내용이 매우 좋으니, 전현(前賢)들이 독실히 믿고 힘써 실천하며 자기 몸을 닦고 남을 다스린 뜻을 충분히 볼 수 있습니다. 단, 선생(先生 김굉필(金宏弼) )이 이 절목을 가지고 일찍이 한집안에서 사용하였는지, 아니면 마음에 이렇게 시행하려고 하여 절목만 만들었을 뿐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일찍이 의흥장(義興丈)을 뵙고 그 대강을 물었으나, 의흥장 역시 상세히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옛사람은 노복(奴僕)을 부릴 때에 양식을 주는 규칙이 있었으며 형벌과 포상도 없지 않았으나, 다만 이른바 ‘직급(職級)’이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그 사이에는 자질구레한 조항이 끼여 있으니, 이것은 후세에 밝게 보여 줄 것이 아닐 듯합니다. 선생의 높은 도덕은 실로 동방의 끊어졌던 학통을 이은 창시자가 되니, 학자들이 우러르기를 태산북두처럼 할 뿐만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이 글을 이렇게만 기록한다면 후세 사람들이 볼 때에 너무 자질구레하고 비루하다고 여겨 웃음거리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만일 행장과 기타 의논하신 여러 조항들을 책머리에 기록하고 우선 이 편은 그 아래에 부록하고는, 대략 편집한 뜻을 기록하기를 “선생의 유문(遺文)과 말씀은 산일(散佚)되어서 상고할 수가 없고 오직 이 편만 전록(傳錄)에서 나왔으니, 비록 선생이 힘을 쓰신 실제는 아니라 할지라도 또한 버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것을 기록한다.”라고 한다면, 거의 선생의 도가 이와 같을 뿐만이 아님을 볼 수 있고, 후일에 이것을 보는 자들도 또한 의혹이 없을 것이니 어떻겠습니까? 책머리의 ‘오랑캐〔夷虜〕’라는 두 글자는 너무 직설적인 듯하니 삭제하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단 삭제한다면 글자가 빠져서 말이 완전히 이어지지 못합니다. 또 선현의 문자는 비록 온당치 못한 부분이 있다 할지라도 곧바로 자기의 뜻을 가지고 산삭한다면 후일의 폐단을 열어 놓을 듯하니,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추강(秋江 남효온 )이 기록한 이러이러한 말씀은 내 항상 그 전문(全文)을 보지 못하여 한스럽게 여겼는데, 이제 그것을 얻어 보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다만 그 사이 문자에 자못 의심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실가지외(室家之外)에 일찍이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하였는데, ‘실가지외’라는 네 글자와 “필재(畢齋) 선생과 틈이 벌어지게 되었다.”는 내용의 ‘필재’ 두 글자는 문리가 맞지 않으며, 필재 선생과 틈이 벌어졌다는 내용은 더욱 의심스럽습니다. 옛사람은 스승을 섬길 때에 범(犯)함도 없고 숨김도 없었으니, 스승의 소행에 만일 의심스러울 만한 점이 있다면 어찌 질문하지 않고 숨겼겠습니까. 제자가 선생의 행위에 의심을 품고 질문한 것이 과연 부당한 일이었다면 선생으로서 어찌 반성하지 않고 제자를 미워할 리가 있겠습니까. 가령 선생이 비록 반성하지 않고 제자를 미워한다 할지라도, 제자 된 입장에서 어찌 이것을 가지고 선생과 틈이 벌어질 리가 있겠습니까.
이리저리 생각해 볼 때에 선생께서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을 듯하오니,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두 선생께서 서로 주고받은 시(詩)에 타이르고 간한 내용이 있음을 보고는 마침내 서로 틈이 벌어졌다고 의심하였는데, 남추강(南秋江)이 이것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추강의 높은 절개는 한 세상을 크게 감동시키는데 의논에 있어서는 혹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으니, 추강의 이 기록을 근거하여 그대로 믿을 수는 없을 듯합니다. 만일 이것을 그대로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 별도로 상고하여 바로잡는 일이 없다면, 선현에게 누가 되게 하고 후학을 의심하게 함이 또한 심하지 않겠습니까. 내 생각에는 온당치 못하다고 여기는데 어떻습니까? 더구나 끝에 기록되어 있는 말 중에 “사제(師弟) 간에는 의리가 매우 엄격하다.”는 말은 어세(語勢)가 고단(孤單)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주-D001] 구암(龜巖)에게 답한 편지 : 이 편지는 구암 이정(李楨)이 《경현록(景賢錄)》을 편저하면서 의심나는 부분을 물은 것에 대해 고봉이 답한 것이다. 《경현록》은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순천(順天)에 유배된 김굉필(金宏弼)과 조위(曺偉)의 실기(實記)로써 이정이 순천 부사로 있던 1565년(명종20)에 편집ㆍ간행하였는데, 순천에서 수집한 자료를 기반으로 하여 김굉필의 손자 김립(金立)과 외증손 정곤수(鄭崑壽) 등이 수집한 자료를 보태고 스승인 이황(李滉)에게 편차에 관한 의견을 물어서 편찬하였다. 2권 1책으로 구성되었다. 이 책은 사화(士禍)로 희생되어 유문(遺文)이 별로 남지 않았던 김굉필의 문집을 만드는 데 자료로 활용되기도 하였다.[주-D002] 필재(畢齋) 선생과……않으며 : 필재는 점필재(佔畢齋)의 약칭이다. 고봉은 필재 두 글자로 쓰는 것은 문리가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였으나, 그 후 퇴계(退溪)는 “필재는 점필재의 약칭으로써 하등 문제 될 것이 없다.” 하였으므로 그대로 두었음을 밝혀 둔다. 《景賢錄 卷1》[주-D003] 어세(語勢)가……모르겠습니다 : 원문에는 “如語勢孤單 無可已得俾處 未知如何如何”로 되어 있으나 ‘無可已得俾處’ 6자는 문맥이 이어지지 않으므로 빼고 번역하였음을 밝혀 둔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성우 (역) | 2007
答龜巖
家範。意思甚好。足見前賢篤信力行修已治人之意。但未知先生用此節目。常行之一家否乎。抑意欲如是行之。著爲節目而已耶。曾見義興丈。問其大槪。亦不能詳云。古人御童僕。頗有賦食之規。而其刑賞亦不可廢。獨無所謂職級云者。且其間。亦有猥瑣之條。恐非所以昭示來許也。夫以先生道德之高。實爲東方絶學之倡。學者仰之不啻如山斗。而今錄其書只如此。使後人觀之。無乃以爲剪剪物物而近於笑耶。若以行狀及議得諸條。錄之卷首。姑付此篇于其下。略敍編緝之意。以爲先生遺文餘說。散漫無可考。獨此篇出於傳錄。雖非所以用力之實。而亦不可棄。故錄之云云。則庶可以見先生之道。不但如是。而後之觀者。亦足以無惑矣。如何如何。篇首夷虜二字。太似直改。刪之亦可。但刪之則文闕而語不完。且前賢文字。雖有未安處。直以已意刪之。恐啓後弊。如何如何。秋江所錄云云之語。常恨不見其全。今得見之。良以爲幸。但其間文字。頗有可疑。如室家之外。未嘗近色。室家之外四字。似貳畢齋先生。畢齋二字。不成文。而異於畢齋之云。尤爲可疑。古人事師。無犯無隱師之所行。若有可疑寧可不質而隱之耶。質之而其事果爲不當。寧可不省而惡之耶。假使師雖不省而惡之。爲弟子。豈有以此自貳之理乎反覆思量。恐非先生之所宜有者。無乃以一時之人。見其相遺之詩。語涉規益。遂疑其有相貳者。而秋江謾筆之耶。秋江高風峻節。聳動一世。而其議論之際。或有不可曉處。恐未可據以爲信也。今若錄傳之。而別無考訂之實。則其爲累前賢。而疑後學。不亦甚乎。鄙意以爲未安。如何如何且錄末所記語中。分義甚嚴。如語勢孤單。無可已得俾處。未知如何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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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사록 상권 / 정묘년(1567, 선조 즉위년) 10월 23일 선종조
상이 사정전(思政殿)에서 행한 조강(朝講)에 납시어 《대학(大學)》을 진강(進講)하였다. 선생이 집의(執義)로 입시하여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천하의 일이란 옳고 그름이 없을 수 없으니, 옳고 그름이 분명해진 뒤에야 인심이 복종하여 정사가 순조로워집니다. 옳고 그름은 비단 인심에서 나올 뿐만 아니라 실로 천리(天理)에서 나온 것이니, 일시적으로는 비록 엄폐하고 처형하여 입을 막을 수 있다 할지라도 그 시비의 본심은 끝내 없앨 수 없는 것입니다. 중종대왕(中宗大王)께서 즉위한 초년에 정신을 가다듬어 훌륭한 정치를 이루고자 하시어 어진 선비들을 등용하였습니다. 이에 현사(賢士)라고 일컬어지던 이들이 또한 기꺼이 등용되어 요순 시대와 삼대(三代)의 정치를 다시 이룩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는데, 불행히도 참소하는 말이 한 번 들어가매 모두 큰 죄를 입었습니다.
당시에 조광조(趙光祖 : 1482~1519)는 선인(善人)으로 사림의 존경을 받아 물망(物望)이 높았고, 중종께서도 또한 정성을 미루어 신임하셨습니다. 소인들이 조광조를 참소하여 이간질하려던 참에 조광조 등이 ‘정국 공신(靖國功臣)들이 외람되다.’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조광조가 인심을 수합(收合)하여 역모를 계획한다.’ 하고 모함하여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이 죄를 얽어 혹은 이들을 사형에 처하고, 혹은 축출하여 멀리 유배하였습니다. 중종이 이를 즉시 깨닫지 못하셨기에 20여 년 동안 유배지에서 세상을 마친 자도 많았습니다. 중종께서 말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들의 진실을 아시어 기묘년(1519)에 죄를 입은 사람들이 혹은 석방의 은전을 입거나 혹은 수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선왕(先王 명종 ) 초년에는 국가에 일이 많았는데 이때에 높은 학식과 훌륭한 행실이 있는 자들이 패망(悖妄)하고 탐오(貪汚)한 자들을 보고는 때로 탄핵하여 논박하였으니, 모두 국가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소인들은 이것을 기회로 삼아 ‘부박(浮薄)한 무리들이 다시 기묘년의 나쁜 버릇을 창도한다.’ 하면서, 처음에는 부박한 죄로 논박하다가 끝내는 난역(亂逆)의 죄율로 다스렸습니다. 지금은 죽은 자들은 복직되고 살아 있는 자들은 서용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옳고 그름이 여전히 분명하지 않으니, 옳고 그름이 분명해진 뒤에야 인심이 기뻐 감복할 것입니다.
이언적(李彦迪)은 근고(近古)에 없었던 유자(儒者)로서 조행이 방정하고 또 옛 서적을 깊이 알고 있던 분입니다. 이런 사람이 당시에 죄를 얻어 멀리 강계(江界)로 귀양 가서 죽었습니다. 송인수(宋麟壽) 역시 부박하다는 죄목으로 끝내 대죄(大罪 사형 )를 받았으며, 노수신(盧守愼), 유희춘(柳希春), 정황(丁熿) 등도 부박하다는 죄를 받았습니다. 부박이라는 말은 다른 죄를 가할 수 없자 둘러댄 변명입니다. 선왕께서 어린 나이에 어찌 이것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뒷날 조정에 그 시비를 분명히 알아서 말할 수 있는 자가 어찌 없었겠습니까. 다만 윤원형(尹元衡)과 이기(李芑) 등이 국정을 담당하면서 매양 ‘역신을 비호한다.’고 죄를 가하여 살육하였기 때문에 마음속으로만 말하고 감히 입을 떼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선왕께서 말년에야 비로소 이러한 사정을 아셨기 때문에 혹 추방하거나 혹 서용하였으며 혹 이배(移配)하였습니다. 기묘년 이래로 남곤과 심정 등이 중종을 속여 총명을 가린 것이 몹시 심하였고, 을사년(1545) 이후로는 다시 옳고 그름을 의논하는 자가 없어졌습니다. 옳고 그름이 밝혀지지 못하면 비록 선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은들 국사에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지난날 이황(李滉)에게 글을 내려 올라오게 하셨습니다. 이황은 어렸을 때부터 독서하였으나 당초에 선인들이 죄를 받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물러갔으니, 이제는 그의 나이가 이미 칠십이고 또 질병이 많습니다. 그것은 대체로 옳고 그름이 밝혀지지 못함을 보고 벼슬아치들의 뒤만 따라다니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차라리 초야에 물러나 거처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지금 새로운 정사를 베풀 때에 어진 이를 초빙함은 가장 훌륭한 거조입니다. 그러나 어진 자를 등용하려고 한다면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외진 나라인지라 풍기(風氣)가 또한 혼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재지와 학식이 있으면 모두들 화를 입었습니다. 고려 말엽에 정몽주(鄭夢周 : 1337~1392)는 충효의 대절이 있었고 정주학(程朱學)으로 학문을 하여 동방 성리학의 조종(祖宗)이 되었는데, 불행히도 고려가 멸망할 때를 당하여 살신성인(殺身成仁)하였습니다.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서 정몽주의 학문을 전습(傳習)한 자는 김종직(金宗直)입니다. 그는 학문에 연원(淵源)이 있었고 행실 또한 단정하고 방정하였으며, 후학을 가르침에 지극한 정성을 쏟았습니다. 성종께서 그의 어짊을 알고 판서로 발탁하였으나 세상과 뜻이 맞지 않았습니다. 연산조에 이르러 사화(史禍)가 일어나 사림(士林)들이 죄를 입자, 참화가 그 문도에게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김종직에게까지 화가 미쳤습니다. 또 김굉필(金宏弼)이라는 분이 있었으니, 이는 김종직의 제자입니다. 김종직은 대개 문장을 숭상한 반면, 김굉필은 실행에 힘쓴 사람입니다. 성종께서는 그를 소중히 여겨 좌랑으로 삼았는데, 연산조에 이르러 김종직의 문도라는 이유로 귀양 갔다가 갑자년(1504, 연산군10)에 끝내 대죄(大罪 사형 )를 받았습니다. 중종께서 즉위하시어 그의 어짊을 애석히 여겨 표창하고 우의정을 추증하였습니다. 조광조는 또 김굉필의 제자입니다. 독학(篤學)의 공부가 있어 세도(世道)를 만회하여 이욕의 근원을 막고자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조정에서는 옳고 그름을 밝히지 못하고 있으니, 반드시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한 뒤에야 인심이 기뻐 감복할 것입니다.
이언적은 벌써 사면을 받았으니 죄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학문과 조행은 근대에 없는 바입니다. 지난번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 다른 이는 볼만한 저술이 없으나 이언적은 저술한 것이 있었던 까닭에 그의 저술을 가지고 와서 보여 주었습니다. 그가 배운 바는 정주학이기 때문에 그의 말은 다 도리에서 나왔으며, 또 그의 저서를 보면 젊은 시절에 지은 것입니다. 젊은 시절의 저술이 이와 같았다면 말년의 성취를 어찌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집안에 남아 있는 유서(遺書)들을 찾아내게 해서 후학으로 하여금 존경하고 본받게 하여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리고 조광조와 이언적을 만약 표창하여 추종하고 존숭한다면 아마 인심을 흥기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번 이기와 윤원형이 국정을 휘두를 때에 선인들이 죄를 받았고, 뜻을 얻은 자들은 다 새매나 개처럼 포악한 그의 졸개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탐오(貪汚)함이 습관이 되어 지금은 온 세상이 다 그러합니다. 지금의 이른바 염근(廉謹)하다는 자들도 역대 조종조의 염근한 자들과 견주어 본다면 모두 탐오한 자가 되고 맙니다. 수령들의 무절제한 탐욕이 곳곳마다 모두 이러하나, 맹자가 말한 바 “베려고 한다면 이루 다 벨 수 없다.〔誅則不可勝誅〕”는 것과 같습니다. 비록 수령뿐만 아니라 조정에도 또한 이러한 자들이 많으니, 탐오한 인물을 반드시 통렬히 끊은 뒤에야 풍속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주-D001] 남곤(南袞) : 1471~1527.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사화(士華), 호는 지정(止亭)ㆍ지족당(知足堂)이다. 1519년 심정(沈貞) 등과 함께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 등 신진 사림파를 숙청하였다. 저서에 《유자광전(柳子光傳)》, 《지정집》 등이 있다.[주-D002] 심정(沈貞) : 1471~1531.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정지(貞之), 호는 소요정(逍遙亭)이다.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으며, 조광조 일파의 탄핵으로 파직되자 남곤 등과 기묘사화를 일으켰다.[주-D003] 이언적(李彦迪) : 1491~1553.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ㆍ자계옹(紫溪翁)이다. 양재역 벽서 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저술을 남겼으나 63세로 죽었다. 저서에 《구인록(求仁錄)》,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봉선잡의(奉先雜儀)》 등이 있다.[주-D004] 송인수(宋麟壽) : 1499~1547.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미수(眉叟) 또는 태수(台叟), 호는 규암(圭菴),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한성부 좌윤으로 있다가 탄핵을 받고 파직당한 뒤에 청주에 은거하여 지내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성리학에 밝고 성리학을 보급하기에 힘썼다. 평생 학문을 좋아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으며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규암집》이 있다.[주-D005] 노수신(盧守愼) : 1515~1590.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 또는 여봉노인(茹峯老人), 암실(暗室), 이재(伊齋) 등을 쓴다. 을사사화로 유배되었다가 복귀하여 영의정에 올랐으나 기축옥사로 파직되었다. 온유하고 원만한 성격을 가진 문신이자 학자로서 사림의 중망을 받았으며, 특히 선조의 지극한 존경과 은총을 입었다. 충주의 팔봉서원(八峯書院),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소재집》이 있다.[주-D006] 유희춘(柳希春) : 1513~1577.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眉巖),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부인은 여류문인인 송덕봉(宋德奉)이고, 김인후(金麟厚)와는 사돈간이다. 1547년 양재역(良才驛)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곧 함경도 종성에 안치되었다. 그곳에서 19년을 보내면서 독서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만년에는 왕명으로 경서(經書)의 구결 언해(口訣諺解)에 참여하여 《대학》을 완성하고, 《논어》를 주해하다가 마치지 못하고 죽었다. 담양의 의암서원(義巖書院), 무장의 충현사(忠賢祠), 종성의 종산서원(鍾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미암일기(眉巖日記)》, 《주자어류전해(朱子語類箋解)》 등이 있다.[주-D007] 정황(丁熿) : 1512~1560.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계회(季晦), 호는 유헌(遊軒),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인종의 장사(葬事)를 서둘러 갈장(渴葬)으로 치르려고 하는 데 대하여 당시 모든 관원들이 그 기세에 눌려 침묵하고 있을 때 극력 반대하여 의례대로 장사를 거행하게 하였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파직당하고 남원으로 돌아갔다. 1547년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곤양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거제로 이배되었고 배소에서 죽었다. 남원의 영천서원(寧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유헌집》, 《부훤록(負暄錄)》 등이 있다.[주-D008] 김종직(金宗直) : 1431~1492. 본관은 선산, 자는 계온(季昷), 호는 점필재(佔畢齋),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와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은 아버지 김숙자(金叔滋)로부터 수학하고 후일 사림의 조종이 되었다. 문장과 사학(史學)에 두루 능하였으며, 절의를 중요시하여 조선 시대 도학(道學)의 정맥을 이어 가는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무오사화로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으며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었다. 밀양의 예림서원(禮林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柏淵書院), 김천의 경렴서원(景濂書院), 개령의 덕림서원(德林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점필재집》, 《유두류록(遊頭流錄)》, 《청구풍아(靑丘風雅)》, 《당후일기(堂後日記)》 등이 있으며, 편저에 《일선지(一善誌)》, 《이존록(彝尊錄)》,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이 전해지고 있다.[주-D009] 사화(史禍) : 1498년(연산군4)에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를 말한다. 김일손(金馹孫)이 사초(史草)에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수록한 것이 빌미가 되어 일어났으므로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주-D010] 김굉필(金宏弼) : 1454~1504. 조선 전기의 문신ㆍ학자로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簑翁) 또는 한훤당(寒暄堂),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소학》을 배운 것을 계기로 평생 《소학》에 심취하여 스스로 ‘소학동자’라 일컬었고 《소학》의 화신이라는 평을 들었다.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당인이라는 죄목으로 극형에 처해졌다. 이후 조광조를 비롯한 제자들의 정치적 성장에 힘입어 성리학의 기반 구축과 인재 양성에 끼친 업적이 재평가되었다. 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趙光祖)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과 함께 오현(五賢)으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저서에 《경현록(景賢錄)》, 《한훤당집》, 《가범(家範)》 등이 있다.[주-D011] 베려고……없다 : 《맹자》〈양혜왕 하(梁惠王下)〉에 나오는 말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성백효 (역) | 2007
丁卯十月二十三日宣宗朝
上御朝講于思政殿。進講大學。先生以執義入侍。進啓曰。天下之事。不可無是非。是非分明。然後人心服而政事順矣。是非不但出於人心。而出於天理也。故一時雖有蒙蔽斬伐。而其是非之本心。則終不泯滅也。中宗大王卽位之初。勵精求治。登庸賢士。其所謂之賢士。亦樂爲之用。以唐虞三代之治。爲可復致。而不幸讒言一入。皆被大罪。當時趙光祖善人也。取重士林。大有物望。自上亦推誠信。小人之徒。欲爲讒間之際。趙光祖等有靖國功臣猥濫之論。以此謂光祖收合人心。圖爲不軌。南袞沈貞構成其罪。或致之死。或黜而遠謫。中宗不卽覺悟。二十餘年間。終于謫所者亦多。至於末年。始知其實。己卯被罪之人。或蒙恩宥。或見收用矣。先王初年。國家多事。其時士林有學識行實者。見其悖妄貪汚之人。則時或彈論。無非爲國事也。而小人媒孽。以爲浮薄之徒。倡起己卯之習。初論浮薄之罪。終置亂逆之律。今則死者復職。生者收敍。而是非猶不分明。必是非分明。然後人心悅服矣。李彦迪近古所無之儒者也。行已有方。且知古書。如此之人。得罪當時。遠謫江界而死。宋麟壽亦得浮薄之名。竟受大罪。如盧守愼,柳希春,丁熿。亦受浮簿之罪。浮薄云者。不能加他罪。而爲之辭也。先王於幼沖之年。豈能知之乎。後日朝廷之間。豈無明知。是非。而能言之者乎。以尹元衡,李芑當國。而每以庇護逆臣。殺戮加焉。故心語而不敢開口者久矣。先王末年。始能知之。故或放或敍。而或爲移配矣。自己卯年。南袞沈貞欺罔中宗。蒙蔽已極。乙巳年以後。則更無有言是非者矣。是非不明。則雖有好善之心。何益之有。頃日下書于李滉。使之上來。其人自少讀書。當初見善人受罪。故退去。今則年已七十。且多疾病。大槪則見其是非不明。而恥其隨行逐隊。寧欲退處草野也。新政招賢。最善擧也。然欲用賢人。則不得已使是非分明也。我國偏邦。風氣亦不渾全。故少有知識。無不被禍。高麗末。鄭夢周有忠孝大節。以程朱之學爲學。爲東方理學之祖。不幸値高麗將亡之際。殺身成仁。入我朝。而傳習鄭夢周者。金宗直也。學有淵源。行又端方。誨諭後學。用其至誠。成廟知其賢。以爲判書。而猶不能與世偕合。至於燕山朝。其時有史禍。士林被罪。而禍出於其門徒。故宗直及焉。又有金宏弼。是宗直弟子也。宗直則大牴尙文章。而宏弼則力行之人也。成廟重之。以爲佐郞。至燕山朝。以宗直門徒被謫。甲子終受大罪。中廟卽位。惜其賢而表章之。贈職爲右議政。趙光祖又金宏弼弟子也。有篤學工夫。欲挽回世道。防其利欲之源。而不得而死。至今朝廷之上。不能明知是非。不得已是其是而非其非。然後人心悅服矣。李彦迪旣蒙赦矣。但非徒無罪。且其學行。近代無之。頃日天使來時。他人則無著述。而李彦迪有所著述。故取來以示之。所學程朱。故其言皆出於道理。且見其爲書。則乃少年所著也。少時所著如此。則晩年所得。其可量乎。遺書之在其家者。宜今搜訪。使後學矜式。而趙光祖,李彦迪若表而追尊之。則庶乎其興起人心矣頃者李芑,尹元衡當國。善人受罪。而得志者皆其鷹犬。故貪汚成風。今則擧俗皆然。今之所謂廉謹者。以祖宗朝廉謹者比之。則皆未免貪汚者也。守令汎濫。滔滔皆是。如孟子所謂誅之則不可勝誅也。非但守令。朝廷之間。亦多有之。貪汚之人。必爲痛絶。然後可以變化風俗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