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삼석 이력서] <36>기업공개 압력
1974년 3월21일 모나미는 상호를 모나미화학공업주식회사에서 ㈜모나미로 변경했다. 성수동에 제2공장도 신축했고, 자본금도 대폭 늘리는 등 새로운 도약을 준비했다. 생산품목도 볼펜, 크레파스, 그림물감, 사인펜, 플러스펜, 매직펜, 샤프연필, 연필깍기 등 수십가지로 다양해졌다.
그야말로 국내 최고의 문구 종합 메이커로서 발돋음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상호를 바꾼 지 3개월도 지나지 않아 모나미는 거스를 수 없는 변화에 직면하게 됐다.
그해 6월초 홍승환(洪承丸) 재무부 차관보로부터 전화가 왔다. "모나미에게 좋은 소식이 있으니, 지금 내 사무실로 좀 와달라"는 것이었다. 재무부의 주된 업무는 각종 금융정책을 수립하고 금융기관을 감독하는 일 등이었다.
모나미는 당시 재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또 특별히 재무부와 부닥칠 일도 없던 터여서 홍 차관보의 연락은 다소 의외였다. 더구나 '좋은 소식'이라는 말 한마디가 웬지 역설적으로 들려 마음에 걸렸다. 아니나 다를까, 정부 청사 사무실에서 홍 차관보를 만나 들은 이야기는 '좋은 소식'이기는 커녕 날벼락이었다.
"정부는 지금 산업자금을 효율적으로 조달하기 위해서는 직접 자본시장이 커져야 한다고 보고 증권시장 육성 방안을 수립해 추진하고 있습니다. 아직 문구업계에서는 상장 기업이 단 한 곳도 없는데, 우리나라 문구업계의 대표주자인 모나미가 기업을 공개한다면 모나미로서는 자금 조달을 쉽게 할 수 있게 되고 국가적으로도 자본시장이 튼튼해지는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해서 모나미의 증시 상장을 추진중이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요즘이야 일정 요건을 갖춘 기업이라면 모두 증시 상장이나 코스닥 등록을 통해 자본을 조달하려 하지만 당시 증시 상장은 기업에게 큰 모험이자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기업들이 증시 상장을 극구 꺼렸던 것은 다름 아닌 무자료 거래 때문이었다. 모나미를 비롯해 웬만한 기업들은 무자료 거래를 많이 하고 있었다.
모나미가 주식을 증시에 상장해 기업을 공개할 경우 모든 거래 자료는 만천하에 드러나게 될 것이고, 모나미와 거래하던 도매상들은 거래를 끊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렇게 되면 모나미 제품은 아예 시장에 빛도 보지 못한 채 사장될 게 뻔하다는 걱정이 앞섰다. 또 문구업계의 다른 업체들마저 기업을 공개하게 되면 도매상들은 설 자리를 잃게 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홍 차관보의 통보에 가까운 권유를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잘 생각해 보겠다"는 말로 면담을 끝낸 뒤 나는 재무부 담당 실무자를 찾아갔다. 나는 모나미의 기업 공개가 문구업계에 가져올 파장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것은 모나미만의 문제가 아니라 문구업계 전체의 문제였다. 그러나 재무부는 업종별 대표 기업들을 증시에 상장시켜 자본시장을 육성한다는 목표를 정해놓고 하나씩 하나씩 대상기업을 선정해가고 있었다.
재무부로서는 기업을 하나라도 더 상장시키는 게 급선무였던 셈이다. 재무부 실무자는 "모나미의 입장은 알겠지만 이유 불문하고 문구업계의 대표기업 한 곳을 상장시킨다는 것이 정부 방침"이라며 막무가내였다.
나는 정부 방침이라는 말에 기가 질려 버렸다. 유신헌법의 서슬이 퍼렇게 살아있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정부 방침'을 어긴다는 것은 기업을 아예 포기하겠다는 의미나 마찬가지였다. 상황을 헤쳐갈 수 있는 돌파구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기업 공개를 약속할 수 밖에 없었다. 재무부를 빠져나오면서 나는 심한 어지럼증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