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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떠 손목시계를 보니 시간이 5시 반,
다른 때보다 1시간 이상은 일찍 눈이 떠졌다.
출근하는 날도 집 앞에 있는 전철역에서 지하철을 이용하는 출근이고 출근에 걸리는 시간도 한 시간 정도면 충분하기 때문에 6시 반이나 되어야 일어나고 오늘같이 공휴일이나 쉬는 날에는 아무리 빨라야 7시가 훨씬 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평소보다 너무 이른 시간에 깬 잠이라 다시 눈을 붙여보려고 하였으나 벽시계 초침 소리가 오늘따라 귓속을 파고들고 옆에서 가늘게 코를 골며 새벽 단잠에 빠져있는 와이프의 숨소리에도 신경이 쓰여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며 요의를 느끼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있어 다른 때보다 1시간 반 이상이나 일찍 일어난 오늘도 어김없이 소변이 보고 싶어 화장실로 가던 영식은 무엇인가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하였다.
어제저녁 막내아들 녀석이 가지고 놀다 거실 바닥에 놓아둔 작은 장난감 자동차가 영식의 발에 채어 저만큼 굴러가며 차르르 소리를 낸다.
속으로 장난감을 아무 곳에나 놓아둔 아들놈을 꾸짖으며 화장실에 들려 볼일을 해결하고 나온 영식은 탁자 위에 놓여있는 신문에 눈길이 멎었다.
어제는 금요일 회사에서 임원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이사급 이상만 참석하는 회의라 아직 부장인 영식은 관계가 없는 회의였으나 영식의 부서 담당 이사가 출장을 가며 대신 회의에 참석하라는 지시가 있어 회의에 참석하려고 또 처음 참석하는 임원 회의에 늦지 않기 위해 다른 날보다 한 시간 일찍 나가느라고 조간신문을 보지 못했다.
신문에는 늘 그렇고 그런 기사로 가득하다.
특히 신문의 정치면이 무척이나 시끄럽다.
청와대 비서실 인사에 잘못이 있다.
어느 장관의 재산이 얼마라고 하고, 어느 장관은 군대를 무슨 무슨 이유로 면제받았다고 하고, 어느 정당 국회의원은 선거법을 위반하고, 4대강 사업을 하려는 정부의 정책에 어느 정당은 찬성하고 어느 정당 어느 사회단체는 반대하고
한미 FTA, 쇠고기 협상 파동, 촛불시위
집권 정당이 바뀌고 새 정부가 출발한 지 100일이 채 못 되었기 때문인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안정이 안 되고 불안이 가중되고 있다.
아직도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아직도 한 참 멀었나 보다.
문제를 의식하고 협의하고 타협하는 태도는 드물고 자기의 주장만 내세우고 인기에 영합하려는 정치인들, 목소리만 높이는 사회단체가 너무 많은 것 같다.
우리 같은 샐러리맨은 하루속히 사회가 안정되어야 하는데 나라가 이래서 안 되는 데 하는 생각에 새 대통령과 정치 지도자들, 사회의 지도층들이 하루속히 나라를 안정시켜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마음에 든다.
대강 신문기사를 읽고 벽시계를 보니 6시가 채 안 되었다.
재활용품 수집으로 종이류를 모으는 상자에 신문을 넣으려던 영식은 상자안에 보기 싫게 흩어져 있는 지난 신문을 정리하다 신문에 간지로 배달된 등산 안내지가 눈에 들어왔다.
영식은 잠재된 호기심이 무심코 그 간지를 집어 들게 하였다.
안내지는 휴일별로 계획되어 있는 일 개월간의 등산 일정이 기재되어 있고 뜻있는 분들은 가고 싶은 날에 신청하라는 것으로 오늘은 경기도 포천에 있는 운악산으로 산행을 간다는 내용이다.
안내지를 내려놓으며 영식은 나도 오늘은 가까운 산으로 등산이나 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등산을 가려면 우선 날씨가 좋아야 한다는 생각에 거실 창문에 쳐있는 커튼을 여니 5월로는 드물게 구름도 별로 없는 푸른 하늘에 밝은 해가 뜬 맑은 날씨이다.
그러자 이상하게 산 정상에서 느끼는 정복감과 굵은 땀방울을 흘린 후에 시원함과 상쾌함 등의 생각이 들며 등산에 대한 집착이 생기고 오늘은 등산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무슨 책무처럼 느껴져 왔다.
그동안 쓰지 않고 다락방에 처박아 두었던 동산 도구를 챙기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등산 장비를 찾으려고 하니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확실치가 않아 쪽방과 다락 여기저기를 뒤져 배낭, 자리, 물통, 등산화, 배대, 등산모, 등산양말, 장갑 등을 와이프에게는 물어보지도 않고 같이 가자고 말하면 와이프도 같이 가겠지 하는 짐작으로 와이프 것까지 모두 찾아 놓고 마지막으로 등산복은 안 입는 옷들을 두어 두던 쪽방에서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고 어디 있는지 알 수도 없어 와이프가 일어나면 챙겨달라고 하기로 하고 챙겨진 물건들을 한쪽에 쌓아 놓으니 무슨 등산장비를 파는 가게에 들어온 것 같고 또 결혼해서 아이를 가지기 전 와이프와 그렇게도 열심히 등산을 다니던 때의 생각도 났다.
그때는 참으로 열심이었는데
거의 매주 산악회에서 하는 등산에 참석하였고 그 산악회에서 20대의 젊은 사람은 영식 부부와 또 한 부부 두 쌍뿐 이고 모두 40대 이상이어서 다른 회원들에게 사랑도 많이 받았던 기억도 난다.
그러던 것이 와이프가 아기를 가지며 등산을 멀리하게 되어 가끔 회사에서 체력단련대회로 하는 등산 외에는 거의 등산가는 일이 없어지게 되었지만, 그때 오른 산이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과 중국여행 중에 오른 백두산 등을 비롯하여 백 개도 넘었다.
등산장비를 준비하고 나니 마음이 급해져 얼른 세수를 하고 방으로 들어가 와이프를 깨웠다.
그러나 전에 그렇게 열심히 산에 다닐 때는 영식보다 먼저 일어나 등산장비를 챙기며 설치던 와이프는 첫아이를 낳고 난 후부터 새벽잠이 많아지더니 이제는 그것이 천성이 되어버려 잘 일어나려 하지 않고 칭얼거린다.
“오늘은 휴일인데 왜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깨우고 난리에요?”
“여보! 일어나봐! 우리 오늘 산에 가자.”
“아이참! 나 새벽잠 많은 것 잘 알면서 왜 그래요?”
“우리 오늘 산에 가자니까. 날씨가 참 좋아.”
장난감 사달라고 조르는 어린이의 심정으로 영식이 다시 와이프를 흔든다.
“산은 무슨 산? 산에 가려면 미리 이야기를 해야지 갑자기 어떻게 산을 가요. 그리고 나 오늘 친구들과 약속 있어요.”
하며 와이프는 다시 잠속으로 들어간다.
영식은 쌓여던 기대가 무너져 김이 빠지고 맥이 풀려 잠시 멍하니 잠속으로 드는 와이프에 얼굴을 본다.
미리 약속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말하고 다시 잠속으로 빠지는 와이프가 야속한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쩐 일일까?
잠든 와이프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온 영식도 마음에 갈등을 느낀다.
처음 마음먹은 것 같이 등산을 가야할지 와이프가 안 간다고 하니 그만두어야 할지.
와이프 없이 혼자 등산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좀 멋쩍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친구들에게 전화해서 같이 등산 가자고 할까 하다가 와이프 말 같이 느닷없이 아침에 전화하여 등산 가자고 하면 좋아할 사람이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나를 무계획적인 사람이라고 놀릴 것 같다.
어쩐다. 하고 생각하던 영식은 커튼이 열려있는 창문으로 다시 눈이 가자 이렇게 맑은 날씨를 집에서 그냥 보내버리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혼자라도 등산을 가야겠다고 마음을 굳히고 와이프의 등산 장비는 도로 다락방에 넣어버리고 자기 것만 골라 다시 한번 점검하고 물이며 커피며 과일 같은 것을 먹을 만큼 챙기어 배낭을 꾸리고 점심 도시락은 가다가 김밥을 사기로 했다.
등산복 이외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자 시간도 어지간히 지나고 또 영식이 등산 장비를 챙기느라 부산떠는 소리에 잠이 깬 와이프가 잠자리에서 일어나 나오며
“휴일인데 아침부터 무엇을 하느라고 그렇게 시끄럽게 해요?”
하고 짜증을 낸다.
“응! 등산 가려고.”
“아니 왜 갑자기 등산을 간다고 그래요?”
“날씨가 죽어 주자나.”
“그래요?” 하며 창밖을 내다본 와이프가 “날씨는 정말 좋으네, 등산가기에 좋은 날이네. 그래 어디로 갈려고요?” 하고 묻는다.
“청계산!”
“누구 하고 같이 가기로 했어요?”
“아니 나 혼자 갈 거야. 당신은 오늘 볼일 있다며.”
“그래요, 친구들과 약속이 없으면 같이 갔으면 좋겠네.”
와이프도 애 낳기 전 등산 다니던 때의 생각이 나는 모양이다.
“그러면 오늘은 바빠서 못 간다고 친구에게 전화하고 나하고 같이 등산이나 가지.”
“안 돼요. 오늘 모임은 빠질 수가 없어요.”
“무슨 모임인데?”
“정숙이 문병 가기로 했어요.”
“그 사람 아직도 병원에 있어?”
“그 병이 그렇게 빨리 낫나요.”
정숙은 와이프 고등학교 동창으로 잘 나가던 연극배우였다.
일 개월 전 갑자기 무대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되었는데 진찰결과 뇌출혈이었단다.
처음에는 많이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단원들이 응급처치를 잘하고 극장 근처에 병원이 있어 빨리해서 병원으로 수송해 치료를 받아 완전히 반신불수는 안 됐겠지만 치료가 끝나도 행동이 많이 부자연하고 말할 때 발음도 정확하게 하지 못할 것이라는 진단이 나왔단다.
그래서 연극배우는 이제 못할 것 같다고
이것은 모두 와이프에게 들은 것이지만
그 후 계속 병원에 있으면서 지금까지 치료를 받고 있는 상태인 모양이다.
“그래, 많이 낳았데?”
“많이 나았지만, 마비된 몸 한쪽 때문에 병원에서 재활 훈련을 받고 있는데 아직은 잘 걷지도 못하고 말도 지금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그것 큰일이군!”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응급처치를 잘하고 빨리 치료를 받아서 전신 마비를 면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정숙이 남편이 전보다 더 잘 해준데요. 전에는 정숙이가 연극 하느라 늘 집을 비우고 둘이 같이 있는 시간이 적었는데 앞으로는 와이프가 늘 집에서 자기를 기다려 줄 것이며 어느 정도 나으면 가끔 나들이도 같이 할 수 있게 됐다며 좋아한데요.”
“그 사람 참 호인이군! 하지만 그게 얼마나 갈까?”
이 때가지는 별 뜻 없이 나눈 이야기고 와이프도 그냥 주고받는 말로 했다.
“정숙이 그러는데 자기 남편은 믿음직 하고 착한 사람이라 변하지 않을 거래요. 우리가 보기에도 그럴 것 같아요. 정숙이 늘 연극에 매달려 집안일에 소원하고 남편과 많은 시간같이 할 수 없었는데도 우리 친구들 중에 정숙이네가 금슬이 제일 좋다고 소문이 났으니까. 정숙의 남편이 정숙이을 끔찍이 사랑하는가 봐요. 어쩌다 친구들 모임에서 남편 이야기가 나오면 정숙이는 늘 자기 남편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자랑해서 친구들에게 여자 팔불출이라고 놀림을 받았으니까요.”
그 말이 영식을 무의식중에 건드린 것 같다.
자기도 나름대로 와이프를 사랑하고 또 와이프에게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와이프가 다른 사람 남편을 칭찬하는 그런 말을 들으니 좀 기분이 상했었는가 보다.
“그 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 긴 병에는 효자 없다는데.”
“정숙이네 집에 놀려갔다가 나도 몇 번 보았는데 정숙이 남편 키도 큰 사람이 참 선량하고 호인답고 꽤 괜찮게 생겼더라고 그리고 내가 보기에도 정숙이에게 잘하더라고요.”
“그러면 좋겠지. 하지만 선량한 것하고 아픈 사람을 오래 견뎌야 하는 것 하고는 다르지.”
영식의 말에 무의식중에 가시가 들어가 있다.
“정숙이 남편이 정숙이를 아주 많이 사랑하다고 하지 않아요.”
“글쎄 두고 볼일이지. 아무리 사랑을 해도 상대가 오래 아프면---”
“내가 보기에도 정숙이 남편은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
“그 사람 진국이더라니까요.”
“진국은 무슨 곰탕인가? 진국이게.”
영식의 말에 작은 가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당신 왜 그래요?”
“내가 무얼?”
“당신의 그 말은 이상하게 들리네요. 정숙이 남편이 변했으면 좋겠다는 투로, 그러니 당신은 내가 정숙이 꼴이 나면 당장 나를 버릴 거예요.”
“이 사람이 왜 이야기를 그렇게 비약시켜.”
“당신 이야기가 그렇지 않아요.”
“무슨 소리야. 나는 그냥 걱정이 돼서 해본 말인데.”
“무슨 걱정이 되는 소리가 그래요? 계속 비양거리고 있잖아요.”
그 말에 머숙해진 영식이
“비양거리기는 무슨 그냥 이야기가 그럴 수 있다는 소리지.” 한다.
“평소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어떻게 그렇게 말을 해요.”
“두 사람이 잘 지내면 좋은 일이지만 안 그럴 수도 있다는 뜻에서 한 말인데 그걸 왜 그렇게 비약시켜 생각해.”
“그게 그 말 아니에요? 아무리 사랑해도 상대가 오래 아프면 변할 수도 있다는.”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지 꼭 그렇다고는 것은 아니잖아.”
“아니요, 당신이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요약하면 내가 오래 아프면 당신은 변한다는 이야기에요.”
“그런게 아니고.”
“아니긴 무어가 아니에요. 당신이 날 사랑한다는 건 내가 건강할 때 이야기이고 아프면 변한다는 이야기 아니에요.”
이렇게 톡 쏘고 와이프는 자리를 뜬다.
“아니 이 사람이, 그게 아니라고.”
방안으로 들어가는 와이프를 보며 영식 한 말이다.
생각해 보니 자기가 좀 지나쳤던 것 같다.
와이프 말에 그냥 '오! 그래, 그 사람 참 괜찮은 사람이군.'
하고 동의를 하였으면 좋았을 것을 와이프가 남의 남편을 너무 좋게 말하는 것에 좀 마음이 비틀려 공연히 와이프 말에 토를 달고 비판적인 말을 해서 와이프를 토라지게 만든 것이다.
아무래도 와이프에 마음을 풀어주어야 할 것 같아 영식이 방으로 따라 들어가
“내말은 그런 듯이 아니라 그여자 남편이 많이 힘들 것 같다는 소리야. 내가 당신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잖아.”
“말로만. 공연히 애쓰지 말아요. 이제 당신 마음 다 알았으니까.”
“이 사람이 그게 아니래도 내 마음을 그렇게 몰라.”
그러나 토라진 와이프에게는 영식이 이렇게 변명을 해도 소용이 없다.
그 후로 한 두 마디를 더 했지만 와이프는 아침 내내 샐쭉해서 말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
남의 이야기를 하다 우리 싸움이 되고 말았다.
아침부터 집안에 냉기가 돌게 한 것을 후회하며 와이프가 아침밥을 하는 동안 그리고 밥상에서는 물론 등산복을 찾아 주는 동안 영식이 와이프에 마음을 풀어 주려고 ‘나는 그런 뜻에서 한 말이 아니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않느냐’ 하고 일부러 몇 차례 너스레를 떨었지만 소용이 없다.
원래 와이프는 잘 토라지지 않지만 토라지면 쉽게 풀리지 않는 성미인데 오늘 아침엔 너무 쉽게 토라진다.
부부의 믿음과 사랑에 관한 일이라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 같다.
하지만 와이프가 자기를 옹졸하다고 생각할까 보아 와이프가 다른 여자 남편을 칭찬하는 것에 샘이 나서 그랬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처진 기분 때문에 등산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런 분위기로 와이프와 같이 집에 있는 것이 더 안 좋을 것 같아 집을 나섰지만 그런 일로 늦어져 10시 반도 넘어 출발하게 되었고 등산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설 때에도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나왔다.
아직도 아침에 출근할 때면 언제나 현관까지 따라 나와 가벼운 포옹을 하며
“즐겁고 활기찬 하루 되세요.”
하던 와이프가
“잘 갔다 올게, 당신도 오늘 즐겁게 보내.”
하는 영식의 인사에
와이프는 방에서 “다녀오세요!” 했다.
김밥을 사고 청계산 행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내내 기분이 별로고 뿌루퉁하게 부은 와이프의 얼굴만 눈앞에 어른거린다.
버스에 올라 버스 안 가득한 등산객들의 활기찬 말소리, 웃음소리에서 풍기는 다소 들뜬 것 같은 분위기에 싸이며 조금은 마음이 풀리는 것 같았고 등산복을 입고 같이 등산에 나선 부부나 연인을 보곤 자기도 와이프와 같이 왔으면 좋았을 걸 하는 실없는 생각도 했다.
청계산 입구에서 우루루 내리는 등산객들 틈에 끼어 영식도 차를 내렸다.
산 입구에는 여기저기 모여 아직 도착하지 않은 동료를 기다리기도 하고 길가에서 장사하는 이들에게서 물건을 사기도 또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산을 오르는 울긋불긋한 등산복을 입은 등산객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다.
좋은 날씨로 많은 등산객들이 청계산을 찾은 모양이다.
영식은 푸른 하늘을 다시 한 번 올려다보았다.
몸에 와 닿는 바람이 싱그럽게 느껴졌다.
차츰 마음도 안정이 된다.
배낭을 추스르며 등산객들 무리에 들어 등산을 시작했다.
청계산은 618m의 높이로 주위에 376m의 옥녀봉, 582m의 매봉, 그리고 545m의 이수봉을 거느리고 있는 산으로 청계산에서 제일 높은 618m의 망경대에는 군부대시설이 있어 출입이 통제 되고 있다.
청계산의 주 등산 코스는 원터골 청계산 입구에서 시작하여 위에 순서대로 옥녀봉을 거쳐 매봉으로 해서 만경대를 돌아 이수봉으로 해서 옛골로 내오는 코스로 등산 시간은 4시간 내지 4시간 반이 걸린다.
물론 역코스도 가능하고 중간에서 돌아내려 올 수도 있지만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개 주 코스를 탄다.
영식이 버스를 내린 곳은 원터골 청계산입구이다.
청계산은 서울 근교에 있는 산이라 서울 사람들에겐 잘 알려진 산이지만 전에 영식도 많이 오른 산이지만 오랜만에 하는 등산이라 확실히 하기 위해 오늘 아침 영식이 인터넷에서 다시 등산정보를 찾아 보았다.
영식은 주 코스 따라 오르는 등산 코스를 잡았다.
원터골 등산 입구에는 등산로를 따라 작은 냇물이 흐른다.
냇물 소리에 섞이어 숲 속의 산새들의 노랫소리가 맑은 공기 중에 공명하며 즐겁게 들리고 등산하는 사람들의 말소리에서 정겨움이 묻어나고 불어오는 바람은 이마에 시원하게 부딪친다.
사람들의 틈에 끼어 사람들의 발자국을 따라 사람들의 가쁜 숨소리를 들으며 산을 오른다.
처음 얼마간은 호기롭게 산을 오르던 영식은 차츰 숨이 가빠지고 다리에서도 힘이 빠져 나간다.
산을 안 오른 동안 근력이 많이 저하 된 모양이다.
하지만 USB로 노래를 들으며 아직은을 뇌이며 열심히 올라
드디어 옥녀봉! 옥녀봉은 해발 376m로 마을 뒷산 높이로 청계산에서 제일 낮은 봉우리이다. 옥녀봉 정상에 올라 조망을 한다. 과천 쪽의 전경이 잘 보인다. 특히 과천경마장이 한눈에 뜨인다. 하지만 오늘은 휴일이라서 인지 시간이 맞지 않아서 인지 경마장은 텅 비어 있어 하산한 느낌마저 든다.
옥녀봉에서 잠시 쉬고 능선을 타고 내려가니 매봉으로 오르는 나무계단이 시작된다. 옥녀봉에서 쉬었고 이곳까지는 완만한 내리막이라 길이 수월해서 별 힘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얼마간을 힘차게 오르고 있는데 세 명의 여자들이 영식을 추월하여 이야기를 나누며 별 힘들이지 않고 산을 오른다.
차림이나 산을 오르는 폼이 등산을 자주 하는 사람들인 모양이다.
여자들에게 추월을 당하자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나도 한때는 누구보다 열심히 산을 오르고 지금도 40대 초반의 장년의 남자인데 하는 오기가 생겨 추월을 해 보려고 부지런히 그녀들을 따라가 보았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진다.
계단으로 된 길이 올라갈수록 경사가 급해져 영식은 힘에 부침이 더하고 발걸음이 느려지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따라가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곤 이것 참 남자 체면이 말이 아니구나, 앞으로 운동을 좀 하고 등산도 자주 하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등산길 나무계단을 하나씩 오르며 계단을 오르는 이유를 묻는다.
즐기기 위해, 체력단련을 위해, 다른 사람들이 올라가니까, 누구 말마따나
여기에 산이 있고 그 산을 오르는 길에 나무계단이 있으니까,
계단을 오르며 하던 이런 잡스러운 생각도 땀 흐름이 심해지고 다리가 아프고 숨이 차지자 힘들다는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은 모두 새어나가 버린다.
그래서 잡스런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는 등산이 좋다고 하는가 보다.
이렇게 힘든 계단인데 올라가는 사람, 내려오는 사람들 모두가 여유롭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몸은 힘들어도 마음에 여유가 있어서 일까?
몇 번을 쉬고 땀을 뻘뻘 흘리고 숨을 헐떡이며 오르다 보니 드디어 매봉에 도착했다. 군사시설 때문에 제일 높은 만경대를 오를 수 없는 지금 청계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이다.
매봉에는 먼저 도착하여 사진을 찍는 사람, 얼음과자나 막걸리를 사 먹는 사람, 가지고 온 과일을 까는 사람, 그냥 의자에 앉아 숨을 헐떡이며 쉬는 사람들로 붐빈다.
매봉에서는 저 멀리 남쪽으로 뻗어있는 경부선이 그리고 서울 시내와 그 넘어 북한산, 도봉산과 수락산 그리고 과천 쪽의 관악산과 분당과 수지 그리고 용인시 등이 내려다보인다.
산 정상에 서면 늘 느끼는 것이지만 저렇게 빼곡하게 높은 빌딩이 개미집같이 보이고 그 거리에서 복닥거리며 산다는 것이 덧없는 것 같아 그 속에서의 삶을 의연하게 할 수가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상에서 주변을 관망하는 동안 어느 정도 땀방울이 식었고 시간을 보니 점심때가 되어 매봉 정상에서 조금 내려와 적당히 편편하고 햇볕도 들지 않는 점심 먹기에 적당한 장소를 잡고 배낭을 풀었다.
자리를 깔고 가져온 김밥을 꺼내고 물과 과일을 꺼내어 놓고 등산하느라 고파진 배를 채우기 위해 부지런히 식사를 했다.
후식으로 과일을 먹고 커피까지 마시니 기분이 좋다 등산은 이런 맛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점심을 먹느라고 늘어놓았던 물건들을 치우고 나머지 코스로 들어가기 전에 좀 누어 쉬고 가야겠다고 자리를 고르는데 여자등산객 두 명이 영식이 있는 쪽으로 다가온다.
처음에는 좀 늦게 올라온 등산객들이 점심을 먹기 위해 자리를 찾아 근처까지 온 것으로 생각해서 별스럽지 않게 생각을 했는데 자리를 마련하고 막 누우려는 영식에게 그 중 한 사람이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한다.
영식은 자기에게 하는 인사라고 생각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곳에는 자기 외에는 다른 사람이 없다.
그래서 흔히 산에서 만나면 모르는 사람끼리도 서로 인사를 주고받는 예가 많으므로 그 친절에 고맙게 생각하며 아무 생각 없이
“네!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받았다.
“영식이 오빠 아니세요?”
다시 인사말이 건너온다.
그리고 이름까지 불려지고 오빠라는 소리까지 따라오자 당황하면서도 의아하게 생각한 영식이
“네! 그런데 누구신지?” 하자
“저 숙희예요, 심 숙희.”
그 이름을 듣자 영식의 가슴에 천둥이 쿵 하고 울린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이름인가. 대학을 졸업하고 15년만 이다.
아니 결혼 전까지는 종종 생각도 나던 이름이다. 결혼하고 나서 차차로 잃어버렸고 그렇게 세월이 가는 동안 기억에서 지워졌던 이름이다. 그 이름을 듣고 자세히 보니 얼마간 옛날의 모습이 숙희에게 남아 있다.
“아! 숙희씨!” 하고는 곧 말이 안 나와 잠시 끊었다가 “참! 오랜만이 군요.” 했다.
“그러게요, 그런데 그렇게 저를 못 알아보세요? 저는 대번에 알겠던데.”
“그러게요, 아마 뜻밖이라 그랬나 봅니다.”
“반갑지 않으셔요? 나는 무척 반가운데.”
숙희는 지금도 어려서와 같이 명랑하고 적극적인 성격이 여전한가 보다.
“나도 반갑습니다.”
“제가 숙희인 것을 아시고도 계속 존대말을 쓰시네. 그러지 마세요.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이 달아나 버려요.”
“그렇지만---”
“괜찮아요. 그리고 말 놓지 않으시면 그냥 가버릴네요.”
“아 알았으니 이리로 와 앉아요.”
“또.”
“그래 이리와 앉아.”
“아참! 여기는 우리 이웃에 사는 이웃사촌 친구예요.”
하고 둘이서 이야기하는 동안 조금 뒤에 떨어져 있던 친구를 소개한다.
그리고 친구에게도
“아까 내가 말한 우리 오빠 친구분이야, 인사해.”
하고 친구에게도 영식을 소개한다.
숙희는 어디선가 벌써 나를 알아보고 친구들에게 말을 했나보다.
어디서였을까 의아했지만 산을 오르다 보면 여러 사람을 만나니까 어디서건 나를 보고 알아본 모양이 군 하고 생각하며
“한영식입니다.”
“이경애 예요.”
이렇게 인사를 나누고 셋은 자리에 앉았다.
영식이 보온병에 남아 있던 커피를 종이컵에 따랐다.
“그런데 오빠 혼자 오셨어요?”
“보시다시피.”
“와이프는 어딜 가시고?”
“오늘 친구들 모임이 있데.”
이렇게 대답을 하며 숙희가 와이프를 먼저 언급하는 것에 영식은 묘한 기분이 든다. 옛날 15년 전 같으면 그렇게 쉽게 와이프를 먼저 거론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친구분들이라도 같이 오시지 않고.”
“갑자기 등산을 하게 돼서 친구들에게 연락 못 했어.”
“오빠는 지금도 혼자 등산을 잘 다니시는 모양이네.”
대학교 다닐 때 혼자 곧잘 등산을 다니던 영식을 숙희가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냥 그런 편이야!”
오랫 만에 만난 사람에게 그것도 옛날에 알던 여자에게 혼자 등산을 오게 된 내력을 길게 대답을 하는 것이 구차한 생각이 들어 영식은 그렇게 얼버무렸다.
“오빠는 지금 어디 사세요?”
“개포동에, 숙희는?”
숙희에게서 오빠라는 소리를 듣고 또 자기가 이렇게 이름을 부르고 나니 옛날 생각이나 영식은 다시 기분이 묘해진다.
숙희도 영식과 같은 기분인지 잠시 말을 하지 못하다가
“나는 잠실에 살아요.” 한다.
“거기 사는지 얼마나 됐는데?”
“5년 정도 됐어요. 전에는 구리에 살았어요. 오빠는요?”
“나는 분당에 살다가 개포동으로 온 지 칠팔 년 됐어. 애들은 몇이야?” 이번에는 영식이 먼저 물었다.
“초등학교 5학년과 3학년인 딸만 둘이예요. 오빠는요?”
“나는 초등학교 4학년 아들애와 2학년 딸애 둘이야. 남편은 무얼 하시나? 직장에 다니시나?”
“아니에요. 조그만 가게를 하고 있어요. 오빠는 회사에 다니시나 보죠?”
영식이 직장을 다니는 것에 중점을 두어 물어본 것이 숙희에게서 이런 질문을 받게 된 모양이다.
“그래, 나는 샐러리맨이야.”
그렇게 대답하며 숙희에게 조금은 창피한 생각이 들며 괜히 남편에 대하여 물었구나 하는 후회가 일었다.
무슨 가게인지 모르나 아무래도 회사원인 자기보다는 형편이 나을 것이고 자기 가게이니 얼마쯤은 자유스러울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래서 잠시 이야기가 중단됐다.
그 사이에 숙희 친구가 숙희에게 귓속말을 하고 일어서며 영식에게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한다.
“왜요? 먼저 가시려고요.”
하는 영식의 물음에
“네! 바쁜 일이 좀 있어서---”한다.
바쁜 일이 있기 보다는 두 사람의 오랜만에 만나서 하는 대화에 끼어들기도 쑥스럽고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앉아있기도 민망해서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거 미안하게 됐습니다. 같이 대화라도 나누어야 되는데, 우리끼리 이야기 하느라고.”
“아니에요. 그럼 먼저---”
“네! 안녕히 가세요.” 하고 영식은 인사를 한다.
“그래! 그럼 이따 저녁에 연락할게” 하는 숙희의 인사에
“우리 걱정하지 말고 좋은 시간 가져.”
하고 멀어져 가는 친구를 보며 그녀가 자기들에 사이를 오랜만에 만난 연인 관계로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아니 숙희가 자기들에 관계를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모르지만, 그녀의 말에 그런 뉘앙스가 풍겼다.
둘만 남께 되자 분위기가 더 어색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숙희의 표정에도 그런 생각이 드는 것 같다.
그래서 둘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을 깬 사람은 숙희였다.
“오빠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올라오는 길에 우리 만났었어요.”
“그래? 어디서?”
영식이 의아해서 묻는다.
“올라오던 길에 오빠를 지나쳐온 여자 세 명이 우리예요.”
“내가 잠시 따라가던.”
“네! 맞아요. 우리가 오빠를 지나쳐오자 오빠가 우리를 따라왔었잖아요. 처음에는 나도 오빠를 못 알아보고 어떤 놈팡이가 여자만인 우리를 보고 희롱하려고 따라오는 줄 알았다가 자세히 보니 오빠잖아요. 그래서 오빠가 나를 알아보고 따라오는 줄고 오빠가 말을 붙이길 기다렸는데. 좀 있다 보니 오빠가 안 보이데요. 그래서 오빠가 나를 알아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죠. 그리곤 정상에서 오빠가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랬군, 나는 그냥 오기심이 발동해 잠시 따라갔었지. 여자들이 하도 산을 잘 오르기에.”
“우리는 거의 매주 한 번 정도 산을 다녀요.”
그 말에서 숙희의 생활에 여유로움이 보이고 다행이라는 생각과 조금은 질투 같은 불편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곤 또 잠시 침묵이 흘렸다.
영식으로서는 숙희에게 물어보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러나 헤어진 지 15년이 넘은 지금 빛바랜 색지 같은 옛날의 일을 새삼스럽게 다시 꺼내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 자제하고 있었다.
숙희도 말문이 막히는 모양이다.
“부모님은 아직도 고향에 계시나?”
무거운 침묵이 짐스러워 영식이 그렇게 물었다.
“아버님은 몇 해 전에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아직도 시골을 지키고 계세요.”
“그럼 어머니 혼자 농사를 지시나?”
예전 숙희네 사정을 잘아는 영식이 그렇게 물었다.
“아니에요. 농사는 모두 남을 주고 심심풀이라며 집 앞에 채소밭만 일구세요.”
“연세가 많으시지?”
“네! 올해 80이 넘으셨어요.”
“벌써 그렇게 되셨나! 그래 건강하신가?”
“아직도 정정하세요. 오빠 부모님들은 어떠세요?”
“고향에 계시지. 황토밭 곁에서 초록 이불 덮으시고.”
“두 분이 다?”
“두 분이 다.”
“그러면 고향엔 아무도 없어요?”
“부모님들이 사시던 집이랑은 다 처분하고 부모님 묘지가 있는 밭만 남아 있어.”
“그렇군요.”
둘 사이 대화에서 세월의 흐름과 변화가 뚝뚝 떨어지고 잠시 부모님을 생각게 한다.
그런 느낌이 그들을 다시 침묵하게 되고
“오빠 영숙이 소식 들으셨어요?”
이번엔 숙희 차례였나 보다.
“아니. 못 들었는데.”
영숙은 숙희와 제일 친했던 고등학교 동창이고 숙희를 만나고 나서는 영식이 가장 궁금해 하던 소식으로 진작 숙희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것 이다.
하지만 15년 만에 만난 숙희에게 그 소식을 물어보기가 쑥스러웠고 또 자기가 지금까지 영숙이를 못 잊고 있다는 인상을 줄 것 같아 참고 있었던 것인데 숙희가 그 말을 꺼낸 것이다.
“어떻게 지내고 있을 것 같아요?”
“입버릇처럼 수녀가 되겠다고 했으니 수녀가 되어 있겠지.”
이런 생각이 전에는 시내에서 가끔 수녀를 만나면 수녀가 되어있을 영숙을 생각하곤 한 적도 있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렇지를 못해요.”
“그럼?”
“어떻게 지내고 있을 것 같아요?”
숙희가 또 영식의 궁금증을 자극한다.
“글쎄, 영숙이의 소식을 전연 못 들었으니 자기 말처럼 수녀가 되겠지 생각했지. 그래, 어떻게 지내고 있어?”
“무척 궁금한가 보죠?”
숙희의 그 말속에 작은 질투가 느껴진다.
“궁금하기보다 숙희가 물으니까.”
영식은 계면적은 생각에 그렇게 대답한다.
“정신이상이 됐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처음 영식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었다.
“영숙이가 정신이상이 됐다고요.”
그 말에 전율이 영식의 몸을 타고 흐르고 믿어지지도 않아
“정신이상이라니? 글쎄 그게 무슨 말이야?”하고 되묻는다.
“말 그대로 정신이상이 예요.”
“정말이야? 아니 왜?”
영식으로서는 상상밖에 일이다. 항상 조신하고 청순한 처녀였던 영숙이 기억된다. 그런데 정신이상이 됐다니. 영식의 놀람을 예견했었다는 듯 잠시 망설이던 숙희가
“그 원인은 나도 잘 몰라요. 그때 그렇게 헤어져서 가끔 만나다 결혼 후에는 거의 만나지 못하고 결혼해서 잘 산다는 말을 들었었는데, 몇 년 전 그렇게 되어 집에 와 있다는 소식을 다른 친구에게서 듣고 그래도 한때는 가장 친한 친구였는데 그런 말을 듣고 그냥 있을 수가 없어 집으로 찾아갔었어요. 영숙이는 집에 없고 어머니가 영숙이를 요양원에 보냈다고 말씀하시면서 나를 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시는데 나도 슬프고 죄송해서 혼났어요.”
“어쩌다 그렇게 됐데?”
영식의 물음에 다소 떨림이 있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시집가서 군인인 남편이 결혼 초에는 영숙에게 잘 대해 주었는데 남편에게 의처증이 생기면서 영숙이 구타 등 심한 학대를 받아서 그렇게 됐다고 하시던데, 어떤 친구들은 밤에 친정에 다니려 왔다가 근처 부대에 있는 군인들한테 겁탈을 당하여 그렇게 되었다고도 하더라고요. 영숙이네 집이 외진 곳이고 근처에 군인부대가 많잖아요. 그래서 저로서는 어떤 것이 원인인지 확실히 알지 못해요.”
숙희의 말이니 거짓은 아니겠지만 믿어지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참 딱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밀려 든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나 혹시 옛날에 우리 인연이 진전되어 나와 한 이불을 덮고 사는 사이가 되었어도 그렇게 됐을까?’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처녀 때 말끝마다 수녀가 되겠다고 했으니 시집을 가지 않고 수녀가 됐더라면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까?
그때 영숙에게 정신이 바르지 못한 동생이 있어 혹시 가족 병력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수녀가 되겠다고 했는데 혹 그런 인자가 영숙에게도 있어 어떤 가벼운 충격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닐까?‘
아무 말도 없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는 영식에 답답했던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숙희가 묻는다.
“그냥 이런저런 생각이 나는군.”
“무슨 생각?”
“숙희도 알고 있잖아, 영숙에게 정신이 바르지 못한 동생이 있다는 것. 그래서 영숙이도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하고”
“나는 모르는데요.”
“그래! 나는 영숙이한테 그렇게 들은 것 같은데, 그래서 그렇게 수녀가 되겠다고 고집했던 것 아닌가?”
“영숙이가 오빠에게 그렇게 말했어요?”
“15년 전 일이라 확실한지는 모르지만 나는 영숙이가 그렇게 말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역시 오빠가 영숙이와 고등학교 동창인 나보다 영숙이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군요. 나는 영숙이가 수녀가 되겠다고 할 때 신앙심이 깊어서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렇게 말하는 숙희에게서 조금은 섭섭해 하는 표정이 보였다.
그만큼 자기보다 영숙이 영식이와 가까웠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것 같다.
“뭐 이젠 다 지나간 일인데. 그리고 내가 잘못 알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변명하지 않아도 돼요.”
숙희의 말에는 또 작은 응어리가 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하니 어쩜 오빠의 말이 사실인지도 모르겠네요. 고등학교 3년간 우리 동창들이 한 사람도 영숙이네 집에 놀러 간 적이 없어요. 제일 친했다는 나까지도 집에 놀러 간다면 무슨 핑계를 만들어 못 오게 했으니까.”
숙희의 말에 할 말을 잊은 영식은 다시 시선을 돌려 나뭇잎에 부는 바람을 보고 있다.
가만히 있고 싶어 하는 나뭇잎을 바람이 흔드는지. 흔들리고 싶어 하는 나뭇잎이 지나가는 바람에게 흔들어 달라고 하는 것인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 참 많이 변했죠?”
잠시 후 숙희가 그렇게 물었다.
“변하긴 했지, 이제 우리 모두 40대 이잖아. 아무러면 20대 같겠어. 그래도 숙희는 젊었을 때 모습이 많이 남아 있어.”
“그런데도 날 못 알아보았어요?”
“숙희가 여기 오리라고 생각도 못했으니까.”
“ 하긴 나도 처음에는 오빠를 못 알아보았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친구들이 웬 남자가 우리를 따라 온다고 해서 수상한 생각에 자꾸 뒤돌아보다가 오빠라는 걸 알았죠. 오빠도 모습이 많이 안 바꿨어요,”
“그랬군!”
대답하는 영식의 대답하는 말 속에 다시 세월이 지나가고 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이 언제였죠?”
“내가 대학교 3학년이었으니까 숙희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을 거야.”
“그랬죠. 그해 봄 어느 토요일 오후 우리 오빠를 따라 학교에 놀러 갔다가 교내 호수가 벤치에 앉아 있는 오빠를 만났죠.”
“아마 그랬을 거야.”
“오빠를 따라가다가 호수가 벤치에 혼자 앉아 사색에 잠겨있는 어떤 대학생이 눈에 보이는데 버들이 늘어지고 푸른 물이 잔물결 치는 호수가 벤치에 앉아 있는 오빠의 그 모습이 이상하게 멋있어 보이고 마음이 설렜는데 우리 오빠가 그쪽으로 가면서 ‘여기 오면 저 녀석을 만날 줄 알았는데 내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군.’ 하더군요, 그래서 ‘누군데요?’ 하고 물었더니 ‘우리 과에서 나하고 제일 친한 친구’ 하더군요. ‘그런데 오빠는 저 오빠가 여기 있을 걸 어떻게 예상했어요?’ 하는 나의 물음에 오빠의 대답이 ‘저 녀석은 개똥철학을 좋아해 책도 많이 읽고 사색하기를 좋아하는 정이 많은 놈이거든.’ 우리 오빠의 그 말을 듣고는 우리 오빠가 오빠를 믿고 자랑하는 것 같은 뉘앙스가 은은히 내 마음에는 잔물결이 일으켰어요.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그땐 그랬어요. 19살 소녀의 엷은 감성에 불이 닿은 것이겠지만, 두 분이 인사를 나누고 우리 오빠가 나를 오빠에게 소개할 때 나는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졌죠.”
“그랬나? 나는 잘 몰랐는데.”
“오빠는 그런 면에 좀 무디었지 않아요.”
“그런가?” 하고 영식은 계면쩍게 웃었다.
“그날 교정을 두루 돌아다니며 구경도 하고 이야기도 하면서 놀다가 저녁까지 같이 먹고 헤어졌죠. 그리곤 얼마 있다 오빠는 군에 입대하고 우리 오빠는 ROTC를 받았구요. 그래서 한동안 우리는 못 만났어요.
임관하여 전방에서 근무하던 우리 오빠가 공비를 토벌하다 전사했죠. 장례를 치를 때 문상 온 군복 입은 오빠를 두 번째로 만났죠.
오빠는 많이 늠름해 졌고 더 건강해 보이더군요. 그런 오빠를 보자 우리 오빠 생각이 더욱 간절해져 나는 오빠를 붙잡고 참 많이 울었어요. 너무나 슬피 우는 나 때문에 오빠도 눈물을 감추지 못했죠.
그 후로 나는 죽은 우리 오빠가 그리우면 오빠에게 편지도 하고 면회도 갔죠. 하지만 죽은 오빠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핑계고 한동안 오빠를 못 만났지만, 첫인상이 그때까지 그대로 각인 되어있었다는 것이 더 참말이겠죠. 그러면서 나는 차츰 아니 어쩜 오빠를 다시 만난 그 순간부터 오빠를 사랑하게 됐어요. 그런 나를 오빠는 늘 동생으로만 대해 주었지요.”
“정민이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였고 숙희는 정민이 동생이니까 나도 숙희를 동생 이상으로 생각이 되지 않았어. 아마 숙희가 정민이 동생이 아니면 내 생각도 변했을 거야. 아니 정민이가 살아 있었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르지.”
“그 말은 그 후로 오빠에게서 참 많이 들은 말이에요.”
“그랬나?”
“내가 오빠에게 나는 왜 오빠의 여자가 될 수 없느냐고 추궁할 때마다 오빠가 한 말이니까요.
오빠가 제대하여 복학하고 얼마 안 되어 오빠를 찾아갈 때 내가 영숙이를 데리고 간 것이 잘못이었죠. 그날 영숙이와 약속을 깜빡하고 오빠와 약속을 했어요. 영숙이와의 약속시간이 조금 빨랐지만 어쨌던 두 사람과의 약속시간이 비슷하게 정해졌었어요. 그래서 영숙과 만나자 그녀를 데리고 오빠를 만나러 갔어요. 약속이 겹쳤다는 것은 핑계고 어쩌면 속으로는 친한 친구인 영숙이에게도 오빠를 자랑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가 만나서 영숙을 오빠에게 소개할 때 나에게 감추려고 했지만, 처음부터 오빠의 행동은 이상했어요.
다만 내가 영숙을 오빠에게 데리고 가면서 여러 번 영숙에게 오빠 이야기를 하며 내가 얼마나 오빠를 좋아하는지 말을 해 친구인 영숙이가 딴 생각을 하지는 않으리라고만 생각했지요. 그땐 그렇게 순진했어요.”
그랬다. 처음 영숙을 대한 영식은 다른 여자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그런 감정을 느꼈다. 청순하면서도 우수에 잠긴 것 같은 외로운 분위기 그래서 감싸주고 보호해 주고 싶은 그런 감정이 들었다.
“그렇게 내가 오빠를 영숙에게 소개해 준 후 몇 번 오빠가 영숙이를 나 모르게 따로 만났다는 것을 알게 됐죠. 나는 자존심도 상하고 화도 났어요. 그리고 오빠와 영숙에게 배신감도 들고, 어떤 날인가 영숙과 셋이 만났을 때 영숙에 대한 오빠의 행동이 무척 내 마음에 거슬려 오빠와 헤어지고 나서 나는 자존심을 상해가면서 영숙에게 오빠에 대한 감정을 물었어요, 영숙은 자기가 고등학교 때부터 말한 것처럼 수녀가 될 결심이니 그런 걱정을 말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영숙에게 오빠를 만나면 수녀가 되겠다는 너의 의도를 분명히 밝히라고 했어요. 수녀가 되겠다는 영숙이의 생각을 알게 되면 오빠가 영숙이에게 다가가지 못하리라는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고도 나는 영숙이가 오빠가 가까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영숙이에게 혹시라도 오빠를 만날 일이 있으면 나와 같이 만나 달라고 말했어요. 될 수 있는 대로 영숙이 혼자는 따로 오빠를 만나지 말아달라고, 내가 없는 곳에서 오빠와 영숙이가 만난다는 것은 나를 참지 못하게 한다고 하면서. 그 말을 듣고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그러겠다고 약속하는 영숙을 외면하며 나는 영숙에게 다짐에 다짐을 시켰어요.
나는 이 약속을 영숙이 꽤 잘 지켜진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오빠가 나 몰래 영숙을 찾아가 만났다는 것을 알았죠. 그리고 질투가 나고 많이 슬펐죠. 영숙이에겐 나 몰래 오빠와 둘이 만난 것은 나와 약속한 것을 위반한 것이 아니냐고 추궁도 했죠.
그런 추궁을 받을 때마다 영숙의 얼굴은 당혹감과 쓸쓸함으로 물들었고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수녀가 되겠다는 네 생각에 변함이 없다면 오빠에게 분명히 하라고 욱박질렸어요.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우리의 관계는 유지 됐어요.
오빠가 중간에서 처신을 잘해선지 모르지만, 그때까지는 막연하지만 그래도 영숙에 대한 나의 믿음이 유지되었던 것 같아요.
이런 관계가 유지되면서 우리는 자주 만났어요.
우리가 만남이 끝나고 헤어질 대면 영숙은 ‘오빠가 너를 많이 사랑하는 것 같아.’하는 말을 꼭 했어요. 그것이 그녀의 의식적인 말이었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 말을 듣고 나면 나는 더욱 애를 태웠어요.
내가 보기에는 오빠가 나보다는 영숙이를 더 좋아하는 것 같은데 영숙이 그런 말을 하니 오빠의 본마음이 무엇인지 구분이 서지 않았으니까요. 나중에야 그 말은 영숙이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한 거짓말이란 것을 알았지만.”
그랬다. 영식은 숙희와 영숙이을 만나면 영숙에게는 연인 같은 감정을 가졌고 숙희는 동생으로서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영숙은 영식을 좋아하는 것 같으면서도 영식이 감정을 표현하는 것 같으면 자기는 수녀가 될 것이라며 영식의 접근을 피했다.
그때는 수녀가 되겠다는 결심으로 영숙이 자기의 감정을 거절하는 줄 았아는데 지금 들으니 숙희가 영숙이가 자기와 가까워지는 것을 막은 것에 일조를 한 것 같다.
“그렇게 둘이 오빠를 만나면서 나는 영숙에게 흐르는 오빠의 감정이 때때로 절제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어요.”
그랬다. 다가가려는 영식에게 보이는 영숙의 태도가 어떤 때는 영식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가 어떤 때는 아주 냉담해져서 영숙의 마음을 알 수가 없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영식의 마음도 오락가락했는데 지금 말을 들으니 대강 짐작이 가는 것 같다.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짐작을 하는 나로서는 결국 오빠가 영숙을 떠나 나에게로 올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더욱 오빠에게 집착하게 되었어요. 그랬는데 결국 오빠 졸업식 날 모든 것이 판명 났죠.
그날 졸업식이 끝나고 기념사진을 찍을 때 오빠 어머니의 무심히 하시는 말씀에서 나는 친구의 동생으로 영숙은 오빠의 여자로 소개가 된 것을 알게 됐으니까요.
우리를 보신 어머니는 나를 보고는 ‘이 아가씨가 정민이 동생이냐?’ 하시고 영숙에게는 ‘이 아가씨가 네가 말한 그 아가씨냐?’하고 오빠에게 물으시더군요.
그 사실을 알고 질투와 슬픔으로 감정이 상한 나는 그 자리에 더 있을 수가 없어서 오빠가 아시는 것처럼 집에 급한 볼일이 있는 것을 잊었었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자리를 떠났어요. 입장이 곤란해진 영숙도 같이 가자며 따라왔지요. 나는 혼자 있고 싶다며 영숙이를 피했지만 영숙이는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에서 인지 막무가내로 나를 따라왔어요. 나는 정말 혼자이고 싶었어요. 나오는 울음을 영숙이 앞에서는 울 수가 없어 붉어지는 눈을 영숙이 모르게 하느라 몇 번을 하늘을 오려다 보았는지 모르니까요. 영숙이도 내 마음을 알고 내게 미안하다고 몇 번 인가 말했지만 별 위로가 되지 않고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영숙이 오히려 미웠어요.
졸업식이 지나고 며칠 만에 나는 오빠를 찾아갔어요.
그렇게 도망치듯 오빠의 졸업식장을 떠난 내 감정을 아는 오빠니까 무척 당황해 할 줄 알았는데 오빠는 태연했고 나는 왜 오빠의 여자가 될 수 없느냐고 항변하는 나에게 ‘정민이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였고 숙희는 정민이 동생이니까 나도 숙희가 동생 이상으로 생각이 되지 않아’ 라고 대답했죠.
이 대답은 그 후로도 여러 번 들었죠. 오빠의 생각을 확실히 알고 난 후에 나도 마음을 바꾸려고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오빠에게 기울어지는 내 마음은 더욱 무거워져 주체할 수 없이 되고 그럴 때마다 나는 오빠를 찾아가서 오빠의 여자이고 싶다고 졸랐으니까요.”
지금 생각을 해도 이상하다. 그렇게 자기가 좋다고 죽자고 따라다니는 여자에게서 동생 이상의 감정이 생기지 않았으니.
어쩌면 정민과의 깊은 우정이, 숙희를 볼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정민에 대한 생각이, 숙희를 여동생 이상으로 생각 키우지 않게 한 것 같다.
“오빠의 졸업식 후로 영숙과 나의 거리는 멀어졌어요. 영숙이 몇 번 나를 찾아왔지만 내가 영숙을 피했어요. 오빠에게 빠진 나에게 영숙이는 암초 같았어요. 오빠와 나의 사이가 멀어진 것이 영숙이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했으니까요. 그런 내 생각이 영숙을 피하고 멀리하게 했어요.
아수라에게 붙잡힌 것 같은 그런 날들이 계속되고 있었죠.
나의 지나친 행동으로 오빠도 편안치 못한 날들을 보냈지요.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직장에 다니시던 오빠는 우연인지 아니면 졸라대는 나에게서 피하기 위해서인지 지방으로 전근을 가시더군요.”
영식이 그때 지방으로 내려가게 된 것은 숙희에게서 피하고 싶어서가 아니고 영식이 다니던 회사에서 새로 시작하는 사업 때문에 회사의 부서 중 일부가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었는데 그중에 영식이 다니던 부서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거의 일 년 동안 나는 몇 번 오빠를 찾아 지방에도 갔고 오빠에게 절절한 내 마음이 들어있는 편지를 썼죠. 그런 나에게 오빠는 늘 같은 태도로 대했고 편지도 늘 간단히 일상적인 답장을 했어요. 오빠의 그런 변하지 않는 태도 때문 그렇게 불게 타오르던 내 마음은 차츰 멍이 들며 상처는 점점 깊어갔어요. 그때 숯 검둥이처럼 까맣게 타고 피 흘리는 상처로 괴로워하던 나를 감싸주는 손길이 있었죠.
실은 나에게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쫓아다니던 선배가 있었어요.
오빠에 대한 나의 감정을 알면서도 나를 좋아해 준 남자죠.”
“나는 전연 몰랐었는데.”
숙희의 의외의 말에 영식이 다소 놀라는 표정이다.
“내가 철저히 숨겼으니까요. 아니 내가 거의 무시했던 것이죠. 그동안은 오빠에게 빠져 멀리했던 사람인데 어느 날 오랫동안 그때까지 변치 않고 내 곁은 지켜주고 오빠에게 받은 상처를 감싸주는 그가 이상하게 커 보이고 믿음이 가더군요.
그 남자가 지금에 남편이에요.”
숙희의 긴 이야기가 끝났다.
영식은 긴 꿈에서 깨어난 것 같은 기분이다.
그리나 이상하게 숙희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지금 좋은 사람을 만나 안정된 삶을 살고 있는 숙희에게 고마운 마음과 이런 사건들이 모이고 모여 내 인생이란 것이 이루어지는 것인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영숙이 정신 이상이 되었다는 말이 영식의 감정에 작은 선을 긋는다.
안타깝다고 하는. 그러나 이제 어쩌랴 그것이 그녀의 인생인 것을.
사람은 모두가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자기 몫에 인생을 지고 삶이란 낮지 않은 고개를 넘어야 하는 것을
이야기를 끝낸 숙희의 얼굴에는 그동안 앙금처럼 쌓여있던 해묵은 애증이 사라진 것 같은 평온한 표정이 어린다.
“결혼 초에는 가끔 오빠 생각이 났지만 세월이 지나며 차츰 잊혀지고 사는 것에 쫓기다 보니 모두 잊고 있었는데 오늘 이렇게 오빠를 만나 지난날의 추억을 다시 되새기 되니 무슨 큰 횡재를 한 것 같군요. 기분이 평온해지는 것이 무엇인가 풀리지 않던 매듭이 풀린 기분이에요.
오빠를 잃었다고 생각했던 그때는 세상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는데 지나고 나면 추억은 아름다운 것이에요. 그 아름다운 추억을 다시 되새겨보니 빛바랜 사진첩처럼 희미하지만 소중한 것 같아요. 오빠를 만나 못처럼 즐거운 시간을 가졌어요.”
“나도 그런 생각이 드는군.”
그런 말을 하며 눈길이 마주친 두 사람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어린다.
“다만 영숙이가 그렇게 된 것이 안 됐군. 그 후에도 소식은 들었나?”
“실은 영숙이 이야기가 나오면 내가 죄를 지은 것 같은 부담감 때문에 피했어요. 내 애증이 그녀를 멀리하게 하고 그리고 내가 영숙이가 그렇게 되는데 일조를 한 것 같은 생각 때문에. 그래서 직접 찾아보지를 못하고 친구들을 통해 아직 요양원에 있지만 많이 좋아졌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럴 필요는 없다고 보아. 마음으로는 안됐지만, 영숙이 그렇게 된 것은 나나 숙희의 잘못은 아니야. 우리가 영숙이 그렇게 되기를 바란 것도 아니고 그렇게 될 무슨 계기를 만든 것도 아니니까?”
“오빠와 영숙의 사이를 내가 방해 하지 않았으면.”
“그렇지는 않아 숙희가 방해 하지 않았어도 우리는 못 맺어졌어.”
“어째서요?”
“숙희는 모르지만 실은 내가 몇 번 영숙이에게 푸로포즈를 했어.
그때마다 자기는 수녀가 될 것이라고 거절했어. 화가 난 내가 왜 그렇게 수녀가 되기를 고집하느냐는 물음에 자기 동생 중에 정신이상자가 있다며 그 병력이 자기한테도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자기는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오빠에 대한 나의 감정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나중에 다른 사람과 결혼한 것을 보면.”
“물론 그런 면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선택은 영숙이가 한 것이고 어쩌면 그것이 영숙이의 운명인지 모르지. 영숙이 나와 결혼했다고 정신이상이 안 됐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고.”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오빠와 영숙이가 맺어졌다면 오빠가 영숙이에게 잘해 주었을 테니까요.”
“글쎄 그건 모르는 일이지. 남녀 관계란 모르는 일이고, 영숙이 말처럼 정신이상 인자가 영숙에게 있었다면 나와 맺어졌어도 막지는 못했을 거야.”
“그럴까요?”
“그래. 그러니까 그런 생각은 버려. 그리고 그녀가 다시 건강을 회복하기를 바라자고.”
“물론 그래야죠 그리고 오빠의 그 말을 들으니 이제 묵은 체증이 다소 내려가는 것 같군요. 가까운 시일 내에 영숙이를 한번 찾아가 보아야겠어요. 감사해요.”
이야기하는 동안 시간이 많이 지나 산을 내려갈 시간이 되었다.
“시간이 많이 됐군요. 이제 내려가야 하겠네요.”
“그러지 같이 내려가서 저녁이나 같이 하지.”
“아니에요, 친구들과 저녁 약속이 있어요. 아까 같이 등산했던 친구들과 저녁에 다시 만나기로 했어요. 남편들과 같이. 그리고 내가 먼저 내려갈 테니까 오빠는 조금 후에 오세요.”
“왜 같이 내려가면 안 되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냥 혼자 내려가고 싶어요. 오빠를 만나서인지 전사한 우리 오빠가 보고 싶군요. 그래서 내려가면서 죽은 오빠를 생각하고 싶어요. 우리 오빠는 언제나 내 마음에 26살 청년으로 살아있어요.”
“그래? 그러면 그렇게 해. 나도 종민이 생각이 나는군. 좋은 친구였는데. 우린 다음에 만나기로 하자고.”
“그래요. 다음에 만나요. 다음에도 오늘같이 우연히 만났으면 좋겠어요.”
“우리의 인연을 시험해 보자는 말 같군.”
“시험까지는 아니더라도 지나간 추억을 아름답게 간직하고 싶어요.
오빠를 자주 만나면 그 추억이 손상될 것 같아요.
또 이렇게 우연히 만나는 것이 더 반갑고 기쁘지 않아요.”
숙희는 어쩌면 영식과의 만남으로 죽어있던 불씨가 다시 살아나려는 것을 경계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의 가정생활에 조금이라도 때가 끼는 것을 거부하는지도 모르고, 그 만큼 남편을 사랑하고 지금의 가정생활이 만족하다는 뜻은 아닐지
“그래? 좋아 숙희 좋은 대로 해.”
“그럼 오빠 안녕히.”
그렇게 인사를 하고 등을 돌려 가는 숙희를 바라보며 영식은 자기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곤 들추어졌던 지난 추억이 다시 묵은 기억이란 책갈피에 끼어지며 지나가는 시간과 함께 다시 사위어 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잠시 자리에 앉아 있던 영식은 자리를 걷으며 내려갈 준비를 하다 문득 숙희와 이야기 하느라 잊고 있던 와이프 생각이 난다.
아침에 토라졌던 와이프가 별일 없이 문병은 잘 다녀왔는지 기분이 좀 풀렸는지.
집에 들어가는 길에 와이프가 좋아하는 장미와 딸기를 듬뿍 사가지고 들어가야겠다고 생각을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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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토요일의 삽화 한 폭 즐겁게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