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마틴루터의 생애.'
저자 : 롤란드 베인톤
출판사: 생명의말씀사
소개책자: 그리스도인의 자유
생각해보기 :
루터가 개혁의 선봉자였으며 그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우리의 신학 역시 개혁주의 신학
이고, 신앙도 개혁주의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현재 개혁을 하고 있는 마당에 한번쯤 읽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도 완벽한 자가 아니다. 농민 반란에 너무 민감하게 대응하여 무력 진압을 허용한
것은 큰 오점으로 남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의 개혁을 위대하게 보는 것은 말씀 앞에 선 그의 양심 때문
이다. 루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름스 의회에서 그의 고백을 깊이 새겨볼 필요가 있다.
"내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양심을 거스리는 것은 옳지도 안전하지도 않다.
나는 여기 확고히 서 있다(Here I Sstand) . 이것 외에 내가 할 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저자는 서문에서 자신의 마음을 끈 대목 두 가지를 말하고 있다. 첫째. 루터가 이성과 양심의 이름으로
교회와 국가에 도전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가 자신의 입장을 밝힌 다음에도 그것을 얼마든지 다시 생
각해보려 했다는 것이다. 보름스 의회 사건 이후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어살면서도 그는 곧 잘 "너 혼자
만 옳은 것이냐?"는 말을 되뇌이곤 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결단을 요하는 순간에는 단호한 입장을 취
하면서도 다음에 그 문제를 통째로 검토해서 자신이 납득하도록 하였다. 그의 개혁은 밖으로 개혁과 더
불어 철저한 자기 개혁을 이루어간 균형있는 개혁이었다. 그는 양심의 사람이었다. 나중에 수도원을 개
혁하면서 시집 못가고 남은 카타리나 자매와의 결혼은 양심 있는 '인간 루터'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
인 예라고 할 수 있다.
* 용서 받아야 할 대상 '인간 본성 전부'
특히 개인적으로 책을 읽으면서 생각해 본 것은 '용서 받아야 죄와 인간 본성의 문제'에 대한 그의 깊
은 고찰이다. 그는 철저히 죄를 회개하는 생활을 하였다. 용서받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매일 매일 회개하
다보니 자질구레한 죄만 남게 되었다. '잠을 조금 많이 잤다' '밥을 조금 많이 먹었다' 등 고해를 들어주
던 사제도 지겨워서 이렇게 말한다 " 여보게 그리스도께 사죄를 받고싶거든 뭐 좀 용서할 근거를 가지고
오라고. 이따위 시시껄렁한 것 ,자질구레한 것을 가지고 오지 말고 어버이 살해니 신성모독 죄니 간음이
니 하는 걸로 말야". 이에 대해서 루터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죄의 문제는 크고 작음이 아니라 모
조리 토해졌는가 그렇지 않는가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여기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이 잡듯이 찾아서 죄를 고백해도 여전히 검열을 피해 빠져 가는 죄가 있었다는 것이다. 기억되지 않는
죄, 생각조차 나지 않는 죄,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하고 짓는 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는 스라치
게 놀란 다. 결국 아무리 죄를 회개해도 여전히 죄인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누가 말했는가? "빨아도 걸
래다." 그는 이점이 참회제도의 모순이라고 하였다. 인간 본성 자체가 타락해있는데 사람들은 특수한 잘
못만을 대상으로 회개를 하려한다는 것이다. 그가 볼 때 용서를 받아야 할 대상은 몇가지 '죄목'이 아니
라 전적으로 인간 자신으로 '죄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특수한 죄 문제에 집중한 것은 절망해버리라는
얘기나 다름없다고 한다. 파도를 본 베드로는 물에 빠지고 말았다. 변화 받아야 대상은 파도를 처다 본
그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 없어 두려워하는 그의 '인간 본성 전부'였던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가
자질 구레한 죄들인 아니라 죄인으로서 용서를 받는 것이다.
그러한 루터는 결국 성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며 참회하다가 심령으로 " 이게 아니다!" 외칠 수 밖에
없었고 걸어서 내려오고야 말았다. 로마서 말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는
말씀을 영접했던 것이다. 결국 종교 개혁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 바다해 해영

(로마 여행 중에 찍은 사진)
성계단 성당에서 ...
루터가 구원을 얻으려고 무릎으로 올라가다 내려올 때는 걸어내려 온 곳이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기억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의를 이루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러했던 것이다.
얼마나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일인가! "이것이 아니다!"
루터는 벌떡 일어나 걸어내려왔다. 그리고 종교개혁 의 깃발을 들었다.
구원의 문제뿐 아니라 삶도 마찬가지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내의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여한다 면 한 말씀 이루기도 힘들고 벅차다.
먼저 순종, 먼저 충성적 행위를 요구하며 하나님의 축복을 가르친다면 그 역시도 힘들고
벅찬 일일 것이다. 이루지도 못하면서 무거운 삶을 살게된다.
주님은 율법의 의를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 어가신다(겔 36:26,27).
주님과 멍에를 메고 주님으로 살면 되는 신앙을 사람들은 율법으로 풀어가려 한다.
우리는 구원의 계단뿐 아니라 삶의 계단도 걸어서 내려와야한다!
주님이 하신다고 믿은 신앙은 우리의 삶을 가볍게 한다. 이 시대에도 루터의 각성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