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이런 일이
신 영 수
일상에서 상상하기도 힘든 일들을 찾아 방영하는 tv프로그램을 가끔 본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천태만상이다. 오늘 저녁 시청한 60세 된 한 여인의 삶이 참으로 해괴하다.
그녀가 살고 있는 집은 폐가였다. 집안은 쓰레기 집하장이나 진배없었다. 방문 앞에 이리저리 수없이 널브러져 있는 쓸모없는 물건들이 어지럽다. 전기나 수도가 공급될 리가 없다. 모두가 끊겨 있는 상태로 거미줄이 이리저리 걸쳐져 있는 낡은 건축물속의 한 공간에 사람이 끼여 사는 형국이다. 엉성하게 닫힌 방문 안을 자그마한 틈새로 취재진이 카메라를 갖다 대었다. 식사를 하는 모습이 정상적이지 않다. 부패한 음식을 마구 입에 넣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먹고 있다. 희끗 희끗하게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에 비치는 눈길이 섬뜩하다.
취재진이 문밖에서 말을 걸었다. 하나 일체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가까이 다가가자 갑자기 뛰쳐나와 마당에 있는 기다란 막대기를 주워들고 마구 흔들며 위협하는 모습이 처절하다. 난방도 되지 않는 방에 춥지 않으신지, 식사는 어떻게 하시는지 걱정이 되어 왔다고 친절히 설명해도 막무가내다. 나가라고 욕설을 하며 접근을 피한다. 오기가 있어서 일까 그래도 몸빼바지에 걷는 모습은 힘이 있어 보였다.
어려운 환경에 처한 유기견도 적극적으로 구출해 내는 요즘 사회다. 그녀를 건강한 삶으로 유인하기 위해 전문가들을 통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접근을 시도했다. 전문가들의 의견은 사람들로부터 경계심을 풀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했다. 먼저 이웃주민이 따뜻하게 차린 떡국을 가져갔다. 방안에 앉아 꿈쩍도 않고 필요 없다고 큰소리로 타박이다. 그러나 문 앞에 두고 간다고 이야기하며 떠났다. 한참 후 사람들이 떠난 것을 확인한 후에야 나와서 떡국을 맛있게 먹는 장면이 cctv에 잡혔다. 그 후에 다시 호의를 갖고 있음을 알리며 취재진들이 접근했지만 단지 “올 때 까지는 나갈 수 없어”라는 알 수 없는 말만 남기며 방문을 닫아버렸다. ‘올 때 까지 나갈 수 없다’는 그 말의 의미를 추적했다.
동네 사람들은 그녀를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이 집에 산지가 30년이 훨씬 넘었다고 한다. 어릴 적엔 유난히 예쁘고 귀여운 아이였단다. 이웃에 사는 옛날 친구였던 분이 사진을 보여주었다. 여고시절에 친구와 함께 교복을 입고 찍은 빛바랜 사진들이 그때를 말해주었다. 친구들 중에도 단연 돋보이는 외모. 잔뜩 멋을 부린 깜직한 모습들이 여기 주인공의 옛 모습이었다. 아무리 세월 따라 삶의 형태가 바뀔 수 있다고 해도 도저히 믿기지 않은 기막힌 한 사람의 운명을 보고 있는 것이다.
주위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저 사람은 옛날에는 날씬하고 출중한 미모로 남들의 눈을 끌기에 손색이 없었다. 학교를 졸업한 후 멋쟁이 총각을 만나 교제를 하다가 총각은 군대에 갔었고 그 후부터 소식이 끊겼는데 소문에 의하면 총각은 육군 헌병이었다”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집을 수없이 방문했으나 가족들로부터 수모만 당했고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백방으로 그 사람을 찾았지만 끝내 만나지 못했단다.
여인은 그때의 충격으로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할머니가 된 지금도 그가 오기를 기다리며 아무도 접근을 하지 못하게 온 몸으로 저항하며 그 옛날의 세계에 갇혀서 버티고 있는 모양이었다. 동물적 감각도 잊은듯하다. 추위나 더위도 모른 채 그냥 그렇게 절절한 기다림만으로 저러한 행태로 생을 유지하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한 마디로 상사병으로 저 모양이 되었다며 혀를 끌끌 차며 안타까워했다.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기다림, 아니 외면당한 한이 저토록 한 인격을 황폐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인지, 지금도 상사병이란 이름으로 병든 사람이 있단 말인가.
오늘은 별난 날인 듯하다.
아침의 일이 오버랩된다. 엄광산 산행을 위해 부산역 건너편 버스 정류장에서 167번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가 빨리 오지 않아 서성거리던 중 뒤를 돌아보았다. 넓지 않은 인도의 한쪽 지하철 환기통 위에 한 여인이 걸터앉아서 먹다 남은 소주병을 옆에 두고 구시렁거리고 있었다. 그 옆에는 손잡이가 깨어진 빨간색 양산이 있었다.
영상 29도의 화끈한 날씨인데도 낡은 밤색 두터운 방한복에 청바지를 걷어 올린 채 앉아 있다. 새까만 발바닥, 한쪽다리는 퉁퉁 부어있고 상처투성이다. 체구가 자그마한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이 여인은 메모용 수첩에 펜을 들고 한 번씩 무언가 긁적거린다. 그리고는 길바닥에 내려가 흔들거리며 춤을 춘다. 그리고 또 한 모금 술로 입을 추긴다.
춤이라야 흔들거리며 다리를 올렸다가 휙 한 바퀴 돌고 휘청 또 한 번 흔들거리며 휘청. 그러다가 조용히 한쪽 이가 빠져나간 입으로 미소를 지으며 초점 잃은 눈을 껌벅거리며 옆걸음으로 조용조용 걸어서 제자리에 오곤 하는 것이다. 춤을 추러 잠시 내려간 사이에 남겨둔 수첩의 펼쳐진 부분을 조금 가까이 가서 얼핏 보았더니 수첩의 반 정도는 사용했는데 대부분이 알아볼 수 없는 낙서와 영어가 기록 되어있었다. 그중에 분명한 글씨는 pol. love이었다. 무슨 의미인지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지만 나름대로 숨겨진 사연이 있을 것 같다.
어떤 충격이 있었을까. 저 여인도 어린 시절 한때는 참 아름다웠을 텐데. 세월은 지나갔지만 가슴속에 남아있는 옛날 자신에 메여 저렇게 되고 있는 건 아닐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이곳은 속칭 택사스로 불려온 외국인들의 전용 접객업소가 있던 거리가 아닌가, 이 여인이 써내려간 알 수 없는 영어, 빨간 양산, 청바지, 그리고 그의 춤, 생각을 하게 되니 더욱 여기 이 여인의 모습이 짐작으로 다가온다. 지난날의 이 곳 삶속에서의 상처와 상관관계가 있을법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가오는 버스를 타고 산행 길을 향했다.
그리움, 한, 등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삶속에 늘 존재하는 것이어서 예사로 여길 때가 많다. 하나 오늘 나타난 사람들의 모습들을 개인의 삶이라고 치부해버리면 그만일까. 삶의 과정은 개인의 몫이라 하더라도 저렇게 마음의 병으로 참담한 모습으로 변해 버린 사람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회의 모퉁이에 얼마나 많을까. 궤도를 이탈한 인간군상에 대한 고민은 우리 모두의 몫인가 싶다. 그런 면에서 오늘 방영된 ‘세상에 이런 일이’란 프로그램이 어느 한 개인의 기괴한 삶을 보여주는 흥밋거리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관여해서 정상적인 삶으로 인도하려는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한편 겉은 세련되고 멋있게 보일지라도 마음속은 노숙자들이나 삶의 방향타를 잃고 헤매는 사람들의 모습보다 더 이지러진 모습의 환자들은 얼마나 많을까, 이들은 또 어떻게 식별해 낼 수 있을까. 이런저런 부질없는 생각 속에 하루가 지나갔다.
초대수필신영수.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