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니번고도(尼蕃古道)' 를 가다>
8-1) 히말라야 넘는, 네팔공주의 혼례길 70쪽
8-2) 《대당천축사출명(大唐天竺使出铭)》의 발견 13쪽
8-3) 천축으로의 직행로, <왕현책로(王玄策路)> 20쪽
8-4) 해동의 구법승들의 천축로(天竺路) 50쪽
* 티벳에서 히말라야를 넘는 직행로로 인도를 4차례나 왕복한 당 사신 왕현책의 초상
* 구하기 어려웠던 <네팔고대사>
* 티벳 송쩬감뽀 임금에게 시집간 네팔의 부리쿠티 공주의 소상 <파탄박물관> 소재
* 데비 부리쿠티 소상의 설명문
* 네팔의 라수와 가디와 티벳의 케룽를 잇는 <니번고도>의 개념도
* 네팔공주와 무역의 수호신인 빔센사원
* 빔센신
* 빔센사원의 수호신인 설사자상
《'尼蕃古道'를 가다:
1천4백 여년 전, 히말라야를 넘는 네팔공주의 신혼길 #1》
Following the road of An Epic marriage Journey :
How Nepal kingdom's princess #Brikhuti going to Tibet?
이제 다시 길 떠납니다. 특히 이번 티벳행은 그간 <中尼公路>라고 알려진 네팔과 티벳간의 통행로의 한 가닥 지류로써, 네팔령 라수와가디#Rasuwa Gadhi와 티벳령 케룽 #Kerung 국경을 통과하는 루트이기에, 실크로드학 및 불교사적으로도 묵직한 비중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인상적인 히말라야의 풍광도 간간히 소개될 것이오니 기대하셔도 될 것입니다.
이 길을 통해서 639년 네팔공주가 티벳으로 시집을 갔고 약 658년에는 당 사신 왕현책(王玄策) 수행단의 일원으로 신라승 혜륜(慧輪)일행이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를 넘나들었습니다. 혜초스님보다 무려 한 세기 전에 말입니다. 또한 7세기에는 연화생, 빠드마삼바바도 이길을 통해 설역고원에 딴뜨라불교를 전파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유서깊은 길을 1천4백년의 시간의 수레바퀴를 거슬러 올라가며 그길에 서려있는 한 여인의 한과 진리의 목마름으로 이국만리 타향까지 와서 대설산에서 숨을 거둔 해동의 구법승들의 못다 한 이야기들을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이제 나는 이 길위로 나서기 전에 향을 사루며 천지신명의 가피를 빌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에는 네팔공주의 수호신이었던 빔센(#Bimshen)신에게 제 운명을 맡겨보렵니다.
* 빔센사원은 1681년 파탄의 말라왕에 의해 만들어진 3층 지붕으로 된, 상업의 신을 모신 사원으로 일거리를 기다리며 쉬고 있는 포터 꾼들의 인기있는 쉼터이다. 화재와 지진 등으로 인해 여러 번 재건축됐다
1층은 금색으로 칠해져 있고 기둥에 신에게 바치는 공물인 컵과 숟가락이 매달려 있다고 한다. 화요일과 토요일에 참배객이 많이 몰린다.
빔센은 비마(Bhima)라고도 하며 고대 인도서사시인 마하라바타(Mahabarata)에 나오는 판다바형제(Pandava)중의 하나이다.얼굴은 붉은색이고 눈은 화난듯 크게 뜨고 검은 콧수염을 가지고 있다. 한손을 말을 들고 무릎에 코끼리를 깔고있고 코브라와 사자를 안고 있다. 여기서 사자는 비쉬뉴 신의 화신인 나르싱하를 말한다.
어느 누군가 말했던가? 길은 끝나는 법이 없다고 한 것처럼 여기 세상에서 가장 높고 험하고 그리고 오래 된 길이 있었다. 바로 대 설산 히말라야의 <공당라모(Gongtang Lamo:孔唐拉姆; 5,236m)>고개를 넘는 옛길이다. 이를 우선 <번니고도>라 부르기로 하자. 말하자면 가칭이다.
이 길은 네팔에서 설역고원을 가로 질러 중원대륙으로, 만주벌판으로, 해동으로, 일본으로 이어졌던 국제적인 소통로였다. 말하자면 실크로드의 갈레길 의 하나이다. 이를 중국 쪽에서는 현재 <중니공로(中尼公路)> 또는 <러쒀공루[熱索公路]>라고 부르지만 오늘 우리의 주제에 어울리는 이름으로는 <번니고도> 또는 <왕현책로)> 라는 부르는 것이 오히려 어울린다. 물론 이 명칭 또한 필자가 편의상 명명한 가칭이기 때문에 사계의 전문학자에게도 낮선 이름이다.
물론 전자는 토번왕국과 네팔왕국사이의 옛 통로를 강조하는 용어이다. 처음이 길로 네팔공주가 토번으로 시집을 갔고 다음은 당 태종의 신임을 받던 특사 왕현책(王玄策, ?~?)이 당과 천축과의 유대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4번씩이나 들락거렸기에 이를 강조하여 부친 이름이다.
특히 우리에게는 이 대목이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당시 왕현책 사절단에는 현조법사(玄照法師)를 주축으로 하는 승려들도 한 무리를 이루었는데, 그들 중에는 혜륜(慧輪)를 비롯한 여러 명의 해동의 순례승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시기는 우리나라 최초의 천축 구법승으로 꼽히는 신라의 혜초(慧超)보다 한 세기나 앞선 셈이니 우리나라 역사를 새로 써야할 만큼 중요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불교의 전파로로써도 의미가 무시할 수 없는 대목이다. 이 길로 구루린뽀쩨 혹은 빠드마삼바바[蓮花生大師]가 인도의 후기불교인 딴트라밀교를 티베트에 전파하었기 때문이다.
관련된 어느 나라 역사 속에서도 존재감이 없었던 이곳이 요즘 갑자기 미디어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그 이유는 한 동안 네팔과 티베트 사이의 출입구로 유일하게 열려있던 ‘쟝무[章木]-우정의 다리-코다리(Kodari)’ 국경이, 작년 네팔과 티베트 접경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인하여 막혀 버리자, 대신 그간 무려 천 수백 년 동안 굳게 잠겨 있던 이곳을 양국이 개방하면서 부터였다. 그래서 필자는 처음 글을 시작할 때 ‘있었다’라는 과거형으로 적었던 것이다. 공간적으로 소통할 뿐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연결된 것이다.
‘그 길’은 바로 1,300여 년 전 네팔의 ‘브리쿠티(Bhrikuti Devi:赤尊公主)’공주가 토번임금에게 시집 온 길로 역사에 처음 등장한다. 이 대목에서 부연설명이 좀 필요하다.
이 히말라야를 넘는 고대 소통로에 대해 필자는 무려 30년 가까이 관심을 가지고 자료조사를 해왔다. 그리고 시절인연을 기다려 왔다. 물론 ‘그때’란 이 루트를 직접 답사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말한다. 그리고 나서 그 동안 축적된 자료들을 바탕으로 장대한 ‘로드다큐’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 이유는 위에서 대략 큰 주제만 이야기 한 것처럼, 이 길은 역사, 문화, 종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비중을 갖기 때문인데, 그런데 문제는 히말라야 산맥을 넘는 이 루트가 티베트를 점령하고 있는 중국과 네팔 사이의 문제로 인해 수백 년 동안 굳게 닫혀 있었기에 한 개인의 능력으로는 이곳을 통과하여 그간 멈춰 있던 시간의 수레바퀴를 다시 돌릴 수가 없었다. 그저 기약도 없이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다가 2015년 4월에 일어난 히말라야 대륙판에 일어난 지진으로 인하여 그 동안 두 나라의 유일한 창구역할을 해왔던, <장무-코다리> 국경이 통행이 금지되면서 대신 티베트의 첫 마을 시가체에서 540km 거리에 있는 국경마을 키롱(Kirong:吉隆)과 공당라모 고개를 잇는 옛길을 경유하여 카트만두에서 110km 거리의 라수와 가디(Rasuwa Ghadhi) 국경을 2014 12월 개통했으나 당시는 제3국인은 통행이 금지되었으나 2017년 8월 30일 중국과 네팔의 협정에 의해 외국인도 통행이 가능하게 되었다. 또 다른 새로운 <니번고도>의 또 다른 개막이였다.
이에 필자는, 너무 늦기는 했지만, 네팔공주가 정략결혼의 제물이 되어 고향을 떠나 멀고 춥고 험난한 히말라야 5천m급의 높은 고개를 넘어 가며 한 구비 넘을 때마다 고개 돌려 뒤돌아보고 한 숨 쉬고 또 눈물을 닦았던, 그 길을 더듬어가며 이제 그녀의 한 많은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헌사를 써 보고자 한다.
사실 그녀의 행적은 조국 네팔에서도, 시댁 티베트에서도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그저 당나라 공주보다 먼저 시집와서 사원 하나 지었다는 정도가 고작이다. 더구나 기존에 사용되던 ‘브리쿠티 데비’란 명칭도 그녀 자신의 본명인 고유명사가 아니고 그냥 공주와 여신이라는 보통명사라는 것도 필자가 밝혀낸 사실이니, 그녀의 일생이 애처롭기 느껴진다.
반면 문성공주는 친정이었던 당나라가 처남매부의 맹세를 저버리고 매부의 땅이었던 티베트를 통째로 삼켜버린 위대한 조국덕분에 그녀가 비록 한 맺힌 생을 살았더라도 그래도 현재 티베트와 중국이 한나라라는 정책으로 인해 그녀의 삶은 그나마 다방면으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한 예를 들자면 라싸의 심장으로 널리 알려진, 지금의 조캉(Jokhang:大昭寺)사원은 실은 네팔공주가 원찰로 지은 절이다. 그래서 이름도 트루낭(Trunang)이라 하고 정문도 네팔 쪽을 향해 서쪽으로 내었다. 반면 문성공주는 뒤늦게 현재의 라모체(Lamoche:小昭寺)사원을 짓고 당나라 쪽인 동쪽으로 정문을 내었는데, 어느 사이엔가 슬그머니 주인이 바뀌어 현재 상대적으로 중요하고 큰 대소사의 주인이 문성공주가 되어버렸고 그녀가 가지고 온 ‘조오’ 라는 12세 석가불상이 법당에 안치되어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혹 이런 역사적 현실을 추궁하는 눈 밝은 이들에게 현재 중국당국이 내세우는 이유가 정말 옹색하기 그지없다. “변란시에 불상을 보호하기 위해서~” 란다.
그러나 문제는 네팔공주의 친정 네팔이, 그때나 지금이나 주위 강국들 틈새에서 명맥만 지탱하고 있는 탓인지는 몰라도, 조캉사원의 창건주가 네팔공주라고 주장하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네팔공주의 신행길을 더듬어 보자면 우선 7세기 당시의 설역고원을 중심으로 한 국제정세를 먼저 배경으로 살펴보아야만 한다. 당시 고원에는 송쩬감뽀라는 불세출의 영웅이 출현하여 중원과 중앙아시아에 막강한 기마병의 위력을 과시하던 때였기에 당나라가 토번의 위협에 굴복하여 정략결혼의 제물로 문성공주를 토번으로 보냈다고 앞에서 이미 이야기 한 바 있다. 그러나 실은 2년 전. 639년에 네팔공주가 먼저 시집을 왔다. 토번의 위협적인 청혼에 두려움을 느낀 주위 군소국들이 모두 5명의 공주들을 바치는 정략결혼의 첫 단추가 끼워진 것이었다. 당시 네팔의 리챠하비(Lichhavi)왕국의 암슈바르마왕(Amshuvarma, 605-621)이었다고 전하고 있는데, 역시 히말라야 너머로 세력을 뻗어오는 토번의 세력에 공주를 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사실 이 네팔공주의 인적사항은 그리 뚜렷하지 않다. 네팔역사에서는 단지 리챠하비 왕국의 공주라는 정도만 알려져 있고 토번의 기록으로는 5명의 왕비중의 한 명이고 그녀가 세운 사원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 사원에는 그녀가 네팔에서 가져온 악쇼바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는 정도 뿐 그녀의 생몰년대의 대한 족적은 매우 희미하다.
이상하게 둘릴지 모르겠지만, 네팔 역사책에는 고대사가 전혀 없다. 세계 여러 나라 중에는 자국의 고대사를 뻥튀기하여 유구한 민족임을 자랑하는 중국같은 나라와 스스로 알아서 축소하는 나라가 있는데, 네팔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후자에 속하는 나라인지, 필자가 여러 권의 네팔 역사책을 섭렵해본 결과는 네팔의 역사는 879시작한다고 되어있다.
그리고 13세기 초에 말라(Malla)왕조가 처음 카투만두에 도읍을 정하고 1743년 고르카(Gorkha)족의 프리티비(Prithivi Narayan Shah)왕이 전국을 통일하여 지금의 네팔영토와 같은 통일왕조를 이루면서 그 뒤로는 편년체적인 역사기술이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9세기 이전은 선사시대 또는 신화시대라는 말이다. 그렇기에 필자가 찾아 헤매는 부리쿠티 공주에 대해서도 역사책에는 한 줄의 기술도 찾아 볼 수 없기에 기타 2차적인 자료들을 종합하여 역사를 만들어 내는 방법 밖에 없다.
이제, 필자는 그런 방법으로 1천 4백여년 전 그녀가 조국 네팔을 출발하여 토번왕국의 도읍지 라싸에 도착할 때까지의 괘적을 추적해 들어가 보기로 한다. 우선 힌두교의 ‘교역과 사업의 신’인 빔센(Bhimsen 또는 비마(Bima)신에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한다. 왜 하고많은 네팔의 신전 중에서 하필이면 빔센사원인가? 그 이유는 차차 풀어 나갈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한 전설이 민간에 전해오고 있는데, 당시 공주가 신행길을 떠날 때 수행원 중에 하나가 ‘빔센 마하라지’의 화신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후 빔센사원에 모셔진 신상(神像)을 12년마다 티베트 라싸까지 모셔 갔다가 되돌아오는 일을 반복했는데, 중국이 티베트를 점령한 후 이런 전통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12년 마다 부리쿠티공주의 신행길을 재현했다는 것이다.
의사선생이면서 네팔통의 전문작가인 임현담선생이 슬며시 전해준 귀뜸에 솔깃해진 필자는 더 이상 자료를 찾지 못해 진도가 안 나가서 답답했던 차에 우선 그곳에서 무엇인가 실마리를 찾아보기로 했는데, 그런데 네팔에는 곳곳에 빔센사원이 많아 어디를 가야할까 궁리하다가 우선 카투만두의 빔센사원을, 다음으로 좀 더 고풍스런 고도인 파탄(Patan)과 박타푸르(Bhaktapur)을 모두 뒤져 보기로 했다.
우선 파탄으로 향했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빔센사원을 찾아냈다.
빔센사원은 인도의 대 서사시 <마하바라타>에 나오는 비마신를 모신 사원이지만 언제부터인가 빔센 사원으로 불리고 있다. 네팔인들은 이 비마신을 상인들과 대상들의 후원자이며 수호신이라고 믿고 있어서 상인들에게는 빔센이 코끼리 코를 가진 시바신의 아들이며 재물의 신인 가네쉬보다 더 상위의 신으로 여긴다. 특히 히말라야를 넘나드는 대상들은 빔센의 신봉자들인데, 그 이유는 히말라야를 넘어 라싸까지의 교역로를 개척한 사람이 바로 빔센의 화신이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공주가 티베트 라싸로 시집을 빔센신이 수행원으로 모습을 나투어 안내했기에 히말라야를 무사히 넘었다는 이야기가 생겨난 것이리라.
이렇게 네팔에서 미쿄 도르제 불상을 가지고 티베트로 시집간 브리쿠티 공주는 티베트에서는 티쮠[赤尊]이라고 부르며 그녀로 인해 네팔의 고승 실라만주가 티베트로 들어갔고 역시 인도불교가 광범위하게 소개되며 티송데쩬 시대에 티베트에서 불교가 제자리를 잡는다. 이 일을 빔센이 도왔다는 이야기니 불교전파에 힌두교의 에너지가 개입했다는 구조로, 빔센이란 힘든 산길과 설산을 넘어가는 거침없는 에너지이며, 그 결과 대상들에게는 부귀영화를 안겨주는 에너지 형태이기도 하다.
파탄의 빔센 사원은 규모가 매우 커 당시 파탄의 무역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사원을 마주 보고 잇는 곳에는 크지 않는 돌기둥 형태의 빔센상이 있는데, 2층에 있는 소상이 적을 앞에 둔 분노상이라면 반면 사원의 바깥 광장에 자리한 맞은 편 기둥에는 단정한 대상의 모습을 갖춘 빔센 석상이 서 있다. 대상을 이끌고 먼 길을 출발하는 순간, 사모관대까지 갖춰 쓰고 그답지 않게 차분한 자세를 갖추고 있다.
빔센 사원의 좁고 어두운 나무계단을 타고 매캐한 향냄새와 그을림 냄새가 가득 밴 2층으로 오르면, 중앙에 모신 빔센 상을 만난다. 금강역사와 야차를 뒤섞어놓은 듯한 모습에 바라보는 사람, 도리어 온몸의 근육이 부푼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 금방이라도 튀어 나올 주먹만 한 부리부리 눈망울, 손에는 말 한 마리를 공깃돌처럼 가볍게 들어올리고, 무릎 아래에는 코끼리를 숨도 못 쉬게 깔아 짓뭉긴 가운데, 바로 앞에서 커다란 코브라가 존경하는 눈빛을 던지며 얼어붙은 채로 빔센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는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듯 5곳의 빔샌 사원에서 관계된 사람들을 붙들고 물어보았으니, 역시 역사책에서도 실종된 자기나라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단지 부리쿠티도 그 수많은 데비(Devi), 즉 여신중의 한 명으로 경배한다는 사람은 한 두명 만났을 뿐이고 대부분은 우리의 위대한 빔센 마하라지에게 우선 보시를 많이 해야 돈을 그 만큼 많이 벌 수 있다는 상투적인 낚시질만 할 뿐이었다.
모두 하나같이 이구동성으로 “달라~ 루피~ 달러! 루피!”
천 수백 년 전에도 그랬을까?
그러나 빔센 마하라지가 돈 버는 방법을 가리켜주는 신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당시 <번니고도>가 단순히 그녀의 눈물자국만이 남아 있는 곳이 아님은 눈치첼 수는 있었다. 그건 네팔 쪽에서도, 정책적으로 이 루트를 중요한 교역로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시사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것만이라도 건졌으니 다행.
다시 무거운 발길을 돌려 근처에 있는 히말라야 전망대 나가르코트(Nagar Kot)로 향했다. 역광에 부신 눈을 들어 북쪽을 바라보니 아스라이 흰 능선만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고! 애닮 퍼라. 저 까마득한 하늘 고개길을 넘어 가며, 방년 16세 꽃다운 어린 공주는 고비마다 고개 돌려 돌아보고 돌아보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그 다음으로 필자가 공주의 궤적을 추적해 들어간 대목은 공주의 신행길이었다. 그 길은 곧장 북쪽으로 올라가다가 대설산에서 공당라모 패스를 넘는 난코스였다. 더구나 그곳에는 거대한 중국측 세관과 국경초소와 위압적인 경비병이 앞을 가로 막고 있었다. 바로 키룽국경선 이민국이다.
공당라모 고개 너머의 티베트의 첫 마을 키롱에서도 그녀의 체취는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 현재도 이 마을에는 여인들은 손으로 북을 치며 춤을 추는데 바로 이 춤이 그 옛날 네팔공주가 이곳을 지나면서 백성들과 3일 밤낮 동안 춤을 추었다는데 그 유래가 있다고 한다. 또한 현재 키롱의 여인들이 오른 손으로는 네팔산 작은 북을 잡고 왼손으로는 상아로 만든 손요령을 두드리면서 연주하는 ‘통쟈[同甲]’라고 부르고, 그 곡에 맞추어 추는 춤을 ‘통쟈춤’이라고 한다. 이런 문화적 풍속은 당시 공주는 고향의 음악소리에, 또 한편으로는 부락민들의 열정적인 환대에 이끌려 그들과 함께 모닥불 주위에서 춤추고 노래하면서 향수를 달랬다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당시 공주 일행이 몇 명이나 되는지 기록상으로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빔센으로 상징되는 대상들까지 끼어 있었다면 상당한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튼 공주는 큰 코끼리 등 위 꽃가마에 앉아서 앞으로 나아갔다고 하는데, 그 코끼리 위에는 당시 그녀의 부왕이 혼수품으로 하사한 석가상, 부동금강불상, 미륵법륜상, 불경, 염주 등의 진귀한 불교용품 이외에도 네팔의 정교한 예술품을 대량 얹어서 가져갔다고 한다. 특히 부동금강불상(不動金剛佛像:Akshobhya:Tib.Mikyöpal)은 현재도 라싸 뽀딸라 궁전 인근의 라모체 사원에 안치되어 있어서 위의 기록의 근거로 삼을 수 있다.
** 네팔의 라수와 가디(Rasuwa Ghadhi)와 티벳의 키롱(Kirong:吉隆) 사이에 국경선에 걸처 있는 다리 넘어로 거창한 중국 검문소가 버티고 서 있다.
** 20여 년의 기나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대망의 다리를 건너는 필자
** 국경선 가까이에서부터 멀리 히말라야의 하얀 능선이 바라다보인다.
첫댓글 Reise nach Tibet
Wow~~
역쉬~ 내공이 다릅니다. 기다린 보람 있습니다
역시 시간이 해결해 주는군요.
카투만두에서 티벳으로 넘어 오려고 알아보니 검열이 심하고 외국인은 안된다기에 아쉬움을 남겼던 기억이납니다.
중국이 다리도 놓아주면서 원조하고 있고 네팔 경제가 중국에 점차 장악 당하고 있다는 현지인 이야기에 네팔 앞날이 걱정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