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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사람> 2023 가을호 - 서평 / 김광기
시적 구성의 미장센 효과
김광기(시인)
시를 읽다 보면 공감되는 시어에서 비쳐지는 상징적 의미들이 하나하나 부각되면서 감동을 주게 되지만 이와는 별개로 시인이 주도한 세밀하고도 특색있는 시적 구성이 시의 세계로 서서히 빠져들게 하는 효과를 주기도 한다. 이를테면 시적 구성상의 오브제 활용이라든가 시의 구성연출로 비쳐지는 미장센의 효과가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미장센(mise en scene)은 본래 연극무대에서 쓰이던 프랑스어로 ‘연출’을 의미한다. 연출자가 연극의 서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무대 위에 있는 모든 시각대상을 배열하고 조직하는 연출기법을 말한다. 한편 영화에서의 미장센은 화면 속에 담길 모든 조형적인 요소들을 고려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세트, 인물이나 사물, 조명, 의상, 배열, 구도, 동선, 카메라의 각도와 움직임 등이 포함된다. 제한된 장면 안에서 대사가 아닌, 화면 구도, 인물이나 사물 배치 등으로 표현하는 연출자의 메시지, 미학 등을 말하며 화면 속에 담기는 이미지의 모든 구성 요소들이 주제를 드러내도록 하는 작업을 가리킨다.
이와 같이 시적 구성에서도 미장센 구성을 적용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실제 조밀하게 구성된 감동이 있는 작품들을 보면 이를 참조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품에서 품어내는 기운이 오묘하고 감동이 있는 작품들을 이러한 측면을 염두에 두고 살펴볼 수 있다.
협소한 사무실 창턱에 올려놓은 소형화분에서
철 그른 채송화 몇 송이 피었다.
세상에나, 아침 해 들면 여전히
꽃은 송이마다 방석 내다 깔 듯
붉고 둥근 몇 닢 그늘 펴서 깔고 훔쳐낸다.
거기 바닥엔 자잘한 새끼 개미나
부스러기 옛 얘기 두어 토막 뒹굴기도 하는데
적막은 서로 무릎 베고 길게 눕기도 하는데
어느덧 마실길 떠돌던 미세먼지도 슬몃슬몃 끼어들어 오고
흙 속엔 누군가 듣다 내버린 언제적 귀 한 짝도 터져있어
끼리끼리 한 집안처럼 편히 둘러앉거나
마을 대동회(大同會)처럼 오순도순 모여 떠들곤 한다.
두 손 모은 채 저 따듯한 소국과민(小國寡民)의
압축된 동네 들여다보면서
나도 그만 저 그늘 동네에 주민등록 옮겨가 살까.
이내 그늘 걷고 바늘귀만한 씨앗 속 이사 갈
두어 송이 꽃 따라 먼 먼 미래 들어가 살까.
소형화분 늦여름 채송화들 치켜 올린 어깨 너머
유리창 밖 바라보니 그곳 원산(遠山) 역시
허리께 기웃기웃 대던 구름 행객들
엊그제에다 멀찍이 앉혔는지
새삼 볕살 더 느긋한 새참 때다
*오래된 미래 : H. 호지의 책 제목을 빌렸음. **소국과민 : 노자가 상상한 이상국가.
- 홍신선, 「오래된 미래」
요즘 지구 저쪽에서는 크고 강한 나라가 작고 약한 나라를 공격하며 혹독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 많은 것을 갖고 있지만 자신에게 없는 게 하나 있다면서 그것을 내놓으라고 으르다가 말을 듣지 않는다며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을 지켜보며 많은 나라들이 안타까워하고 있지만 어떤 나라도 그렇게 쉽게 적극적으로 동참해서 전쟁을 막아주지 못하고 있다. 작은 나라를 침범한 나라가 누구든 같이 덤비기만 하면 그 나라도 가만두지 않겠다고 공갈을 하며 마치 침범한 나라가 자신의 먹잇감인 양 으르렁대고 있기 때문이다. 남북이 긴장모드로 대립하고 있는 데다가 그 강대국이 바로 접경에 있는 우리나라 국민들은 이러한 상황을 뉴스를 통해 접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불안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다. 이러한 시국에 홍신선 시인의 시 「오래된 미래」를 읽게 된다.
이 시는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저서 오래된 미래와 노자(老子)의 소국과민(小國寡民) 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다. 오래된 미래는 빈약한 자원과 혹독한 기후에도 불구하고 생태적 지혜를 통해 천년이 넘도록 평화롭고 건강한 공동체를 유지해온 라다크(인도 카슈미르 동부 지역)가 서구식 개발 속에서 환경이 파괴되고 사회적으로 분열되는 과정을 보여주며, 사회적, 생태적 재앙에 직면한 우리의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희망은 개발 이전의 라다크적인 삶의 방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노자(老子)는 소국과민(小國寡民)을 통해 부드럽고 약한 것을 소중히 여기고 무위(無爲)와 무욕(無慾)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强調)하였다. 홍신선 시인도 이 압축된 사상을 들여다보면서 채송화처럼 작고 여린 감성으로 ‘오래된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시인의 사유를 따라 명상에 잠겨 작품을 몇 번 곱씹다 보니 유구한 역사 속에서 미래를 바라보는 잔잔하고 소박한 서정이 위대한 역사를 다시 만드는 나비효과를 갖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인간은 본래가 작고 소박한 것이라는 생각을 이따금 하게 된다. 하지만 인간이 만든 오늘날의 이 위대한 역사적 문명의 결과물은 이것이 과연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인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할 정도이다. 그렇기에 우리 인간은 오만할 수도 있고 필요 이상의 욕심을 부릴 수도 있다. 하지만 과욕은 우리를 망치게 된다는 것을 우리 자신들은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미래」를 읽으며 지구 이쪽의 우리도 지구 저쪽의 우리도 유구한 역사 속에서 미래를 바라보아야 할 시기가 아닌가 한다.
당신을 병상에 버리고 당신은 유리창 너머로 저를 버리고
저는 밤마다 아무도 읽지 않을 이야기를 썼죠
마당 가에 연못을 들였고요
당신이 꽃의 모가지를 따서 한 홉쯤 말려서 소포로 보내주신다면 꽃잎을 물 위에 뿌려놓고 꽃잎이 물속으로 가라앉을 때까지 바라보려 했죠
당신은 오래 죽은 척 가만히 누워 있었죠
발톱을 깎아 달라는 청을 들어주지 못했어요
연못 가에 앉아 제 발등을 바라보는 동안
풀이 시들고 바람이 사나워지고 골짜기 안쪽에서 눈이 몰려왔어요
당신의 장롱과 당신의 옷을 분리하고 당신의 부엌에서 당신의 수저를 떼어내고 면사무소에 가서 이름을 지웠어요
저는 이제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되었어요
문법을 잊고 마음껏 미끄러질 수 있게 되었어요
쨍한 코끝으로 연못 위에 문장을 쓸 수 있게 되었어요
당신이 자신을 결박하고 돌아누워
얼음장을 깔아준 덕분이죠
그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아서 좋은 단어들
의미 없이 녹아버릴 돌멩이들
연못을 덮은 얼음장 위에 얼음장을 덮은 눈 위에
- 안도현, 「연못 위에 쓰다」
세월이 유수처럼 흐르고 있는 것이 실감 나는 날들이다. 빠르게 흘러가는 물처럼 미처 정리할 새도 없이 지나가는 세월 속에서 무엇이 떠나가고 또 무엇이 남았는지 가끔씩 주위를 둘러본다. 떠나간 것들이 미련으로 멍울져 있지만 아직 남아있는 것들은 그래도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이별을 준비하고 있는 시간 속에서 떠나보내야 하는 것들이 아롱아롱하면서도 여울지게 하는 계절이 겨울인 것만 같다.
겨울 이미지가 가득한 안도현 시인의 시 「연못 위에 쓰다」에서도 화자는 누군가와 이별을 하고 있다. 헤어졌다 다시 만나는 일상적인 이별이 아니라 누군가를 영영 떠나보내고 있다. 깊고 깊은 연못에 정한이 그득 고이는 것 같은 생의 이별을 하고 있다. 그리고 화자에게 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떠나는 그는 화자를 밤마다 잠들지 못하게 하고 둘만의 그 서사를 연못 위에 적게 한다. 꽃 편지를 쓰듯 많고 많은 이야기를 적어나가는 화자는 그를 떠나보내는 슬픔에 젖어 있기보다는 떠나가는 사람의 존재의미를 가슴 깊숙이 또는 살아있는 생의 마디마디에 묵묵히 새겨놓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더 먹먹하고 가슴 아프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 속에서 화자는 떠나보내는 사람과 함께 초월적 인간으로 정한이 그득 고여 있는 호수 위를 거닐 듯 재회하고 있다. “님은 떠나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다”는 어느 시구(詩句)의 의미처럼 화자는 그를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도 화자를 떠나지 아니한 듯하다. 그리고 그가 만들어놓은 깊고 깊은 배려의 은덕인 듯한 정한의 연못을 단단하게 덮은 얼음장 위에 새로운 터전이 만들어져 있다. 그곳은 모든 것을 다 녹이고 삭힐 수 있는 “연못”이 있고 그 연못을 보호하는 것처럼 단단하게 덮은 “얼음장”이 있고, 그리고 차갑고 단단할 것 같은 것을 포근하게 덮은 “눈”이 있는 곳이다. 그 위에서 화자는 그와 만남의 의미가 있었던 시간의 서사를 적고 있다.
겨울이 가면 다시 봄이 오듯이 떠나간 것들도 다시 돌아온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겠지만 이승을 떠나간 것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형태든, 어떤 의미로든지 모든 것이 떠나간 자리는 공허하게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호수”처럼 그 존재가 남겼던 의미로 그득 채워져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공간 속에서 지금 이 세계에서 떠나간 것들과 남겨졌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시간이 다시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화자는 얼음장 위에 이승에서의 미련을 적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있을 그때의 시간들을 먹먹한 가슴을 진정시키며 적어나가고 있는 듯하다.
파장 무렵 오일장 같은
고향에 와 투표했네
수백 년 팽나무 곁에 함께 늙은 마을회관
더러는 이승을 뜨듯 주섬주섬 돌아서네.
돌아서네 주섬주섬
저 처연한 숨비소리
살짝 번진 치매기인가 어느 해녀 숨비소리
방에서 자맥질하는 그 이마를 짚어보네.
작살로 쏜 붉바리 푸들락 도망친다고
팔순 어머닌 자꾸
허공을 겨냥하지만
결국엔 민망해져서 피식 웃을 뿐이지만
어디로 떠났을까
몽고반점 그 고기는
마지막 제의(祭儀)이듯 물질을 끝냈을 때
한 생애 땟국 같은 일 초경처럼 치른 노을
- 오승철, 「그리운 붉바리」
찌는 듯한 폭염(暴炎) 속에서도 서서히 가을의 문은 열리고 있을 것이다. 아침부터 울어대는 매미 소리가 가을을 부르고 있는 소리처럼 들린다. 이 시간에 오승철 시인의 「그리운 붉바리」를 읽는다. 평시조 4수가 2연으로 펼쳐져 있으면서 기승전결(起承轉結)의 형식으로 진술이 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부분 부분적으로 이미지가 생성되어 파노라마처럼 전개되고 있다. 진술과 이미지가 행간 행간마다 매끄럽게 덧씌워져 있어서 마치 입체적으로 시를 구성한 것처럼 여겨진다.
붉바리는 농어목 바리과의 바닷물고기로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제주도 일대에서 잡히고 있다. 살이 담백하고 씹는 맛이 좋아 바리과 어류 중에서도 최고급 종으로 취급되고 그 수가 매우 적어 아주 비싼 가격에 팔리고 있다는 생선이다. 어선에서 던진 그물에 가끔 걸리거나 낚시로 드물게 잡히는 정도라 한 마리에 보통 몇백만 원 한다는 말을 언제가 TV에서 본 적이 있다. 한 마디로 해산물로 생계를 꾸리는 어부나 해녀한테는 금 물고기나 다름없는 물고기이다.
이러한 물고기가 평생 가족의 생계를 꾸려온 듯한 화자의 어머니에게도 꿈의 물고기로 상징화되고 있다. 말년까지도 “작살로 쏜 붉바리 푸들락 도망친다고/ 팔순 어머닌 자꾸/ 허공을 겨냥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하며 “마지막 제의(祭儀)이듯 물질을 끝냈을 때/ 한 생애 땟국 같은 일 초경처럼 치른 노을”이라 하며 화자는 슬픔에 젖어 있는 듯하다. 평생 삶을 바다에서 건져 올리던 어머니의 그 순수하고 단조로운 열정적 일생을 “붉바리”라는 생선에 비유하면서 화자는 눈시울을 붉히고 있는 듯하다. 그래도 “한 생애 땟국 같은 일”이었지만 “초경처럼 치른 노을” 같은 삶이 화자 자신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까지 붉고 찬란하게 비치고 있는 것만 같다.
1
이 다락방에서 나가선 안 돼
창밖을 내다봐도 안 돼
넌 오직 거울을 통해서만 세상을 볼 수 있어
거울이 보여주는 세계,
그 매끄러운 표면 위에서만 아름다워질 수 있지
침묵할 것, 그리고
네게 주어진 실로 태피스트리를 짜라
이 신성한 동굴 속에서 완벽한 여자가 될 때까지
2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창밖에서인지 내 속에서인지 실처럼 풀려나오는 노랫소리,
나는 창가로 다가가 바깥을 바라보았다
순간 두 눈에서 오래된 비늘이 떨어져내렸다
파열음과 함께
유리창이 깨지고 거울이 깨지고
깨진 거울 조각들은
수백 개의 눈동자가 되어 빛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회오리바람에
씨실과 날실이 뒤엉켜 온몸을 휘감았다
3
이젠 아무것도 짜지 않아요
베틀 같은 것, 어두운 다락방에 두고 왔어요
4
물가로 내려갔다
죽음의 잔을 벌컥벌컥 들이켜며
기억의 깊은 웅덩이를 향해 나아가는 동안
입술 사이로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 나희덕, 「다락방으로부터」
나희덕 시인의 시 「다락방으로부터」에서는 슬프고 비극적인 신화와 같은 여인의 서사가 비친다. 장편소설 같은 4부 구성의 플롯에서 단계적인 스토리로 독립적인 이미지가 그려지는 강하고 진한 감동의 서사가 펼쳐지고 있다.
1부에서는 고대 여인의 숙명과도 같은 여성의 세계가 그려지고 있다. 삶의 본질이 아닌 피상적 “거울이 보여주는 세계”에서 “오직 거울을 통해서만 세상을 볼 수 있”는 여인의 정체성이 “아름다워”지기 위하여 “침묵할 것, 그리고/ 네게 주어진 실로 태피스트리를 짜라”는 엄명을 받는 상황이다. 누에의 실처럼 여인의 삶에서 비롯되는 형형색색의 실로 짜내는 “태피스트리”는 누구에게 보여지는 것인가. 그렇게 누구에게인가 보여져야 하는 실물을 완성하는 것만이 “완벽한 여자” 되는 것이라 한다. 그 “동굴 속” 같은 곳에서 여자는 “창밖에서인지 내 속에서인지 실처럼 풀려나오는 노랫소리” 같은 노래를 부른다. 눈에서는 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굳은 “비늘이 떨어져내”리고 급기야는 “유리창이 깨지고 거울이 깨지고/ 깨진 거울 조각들은/ 수백 개의 눈동자가 되어 빛나기 시작”하는 것처럼 여인은 분노 속에서 자각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갑자기 들이닥친 회오리바람에/ 씨실과 날실이 뒤엉켜 온몸을 휘감”는 것과 같은 혼란 속에 휩싸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이젠 아무것도 짜지 않”는다. 운명의 “베틀” 같은 여성성을 용도 폐기하듯 “어두운 다락방에 두고” 정체성을 스스로 전환시키기에 이른다. “죽음의 잔을 벌컥벌컥 들이켜며/ 기억의 깊은 웅덩이를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여인의 행보는 그동안의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입술 사이로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새롭게 태어난 자신의 “노랫소리”였다.
관습의 틀에 갇힌 운명을 깨는 긴박하고 긴장되는 여인의 의지적 서사가 장편소설처럼 구성되어 펼쳐져 있다. 짧은 구성의 플롯이지만 요소요소에 적재된 상징적인 시어와 각부의 행간에 숨은 의미적 구성이 감동스럽기만 하다.
복숭아꽃 피던 시절
도시락을 싸서 너와 소풍 가던 기억 단단하다
너와 먹던 복숭아 조각이 어떻게 발목까지 내려가
복숭아뼈 화석이 되었을까
나는 너의 발뒤꿈치를 가만히 물었다
노리기 좋은 희디흰 발목이었으니까
달콤한 독 잔뜩 오른 독사가 되어
우리가 나뭇가지에 물컹물컹한 몸을
사이좋게 쪼개어 거꾸로 익어갈 때
너무 오래 걸어와 목이 마른 한 사람은
기꺼이 그 과실을 따먹었으니
너의 발목에 족쇄처럼 사랑은 자취를 남겼으니
복숭아뼈엔 복숭아 먹던 흔적이 있어서
네 희고 향긋한 발목을 보면
죄는 익어가고
아름다운 기억은 모든 여정을 마치고 발목에 고였으니
굳어버린 호수의 뼈여, 둥근 바닥이여
복숭아꽃 피는 시절에 우리는 한 나무에 달려
유방과 엉덩이와 발그레한 얼굴을 나누어 가졌으니
그 무게의 하중으로 미끄러져
가장 낮은 곳에 쌓인 채 굳어갈 것을 알면서도
꿀벌처럼 달콤한 것을 탐했으니
내 이빨엔 독이 깊어가고
네 눈알엔 벌겋게 슬픔이 여물어
툭, 가장 낮은 아래로 떨어져 오래 굳어갔으니
- 최금진, 「복숭아뼈」
이 시를 읽다 보면 다른 버전으로 된 아담과 이브의 신화를 읽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선악과를 따먹는 아담과 이브를 떠올리게 되고 아담이 먹다가 목에 걸린 사과로 인해 남성에게 생긴 ‘아담스 애플’이 떠올려지지만 위의 시 「복숭아뼈」에서는 그것이 ‘복숭아’로 대체되며 과육의 ‘복숭아’는 소화가 되고 씨앗의 본분을 다하려 복숭아 씨앗은 아래로 내려가다가 발목에 걸린 것으로 비쳐진다.
그것을 화자는 “복숭아꽃 피던 시절/ 도시락을 싸서 너와 소풍 가던 기억 단단”함으로 회상한다. “복숭아뼈 화석”이 된 “발뒤꿈치”를 가만히 물어보며 뱀의 유혹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스스로 “달콤한 독 잔뜩 오른 독사가 되어” 복숭아를 먹었던 기억을 떠올리고 “우리가 나뭇가지에 물컹물컹한 몸을/ 사이좋게 쪼개어 거꾸로 익어갈 때/ 너무 오래 걸어와 목이 마른 한 사람은/ 기꺼이 그 과실을 따먹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너의 발목에 족쇄처럼 사랑은 자취를 남겼으니/ 복숭아뼈엔 복숭아 먹던 흔적이 있”다 한다. 그렇지만 아무리 아름답던 기억도 죄는 죄인 것처럼 “희고 향긋한 발목을 보면/ 죄는 익어가고/ 아름다운 기억은 모든 여정을 마치고 발목에 고”인 것을 보고 있다 한다. 일심동체처럼 “복숭아꽃 피는 시절에 우리는 한 나무에 달려” 있다가 “유방과 엉덩이와 발그레한 얼굴을 나누어 가”지며 살고 있지만 “그 무게의 하중으로 미끄러져/ 가장 낮은 곳에 쌓인 채 굳어갈 것을 알면서도/ 꿀벌처럼 달콤한 것을 탐했으니/ 내 이빨엔 독이 깊어가고/ 네 눈알엔 벌겋게 슬픔이 여물어/ 툭, 가장 낮은 아래로 떨어져 오래 굳어”가고 있다고 한다.
선악과를 먹자고 하던 이브와는 반대로 화자는 아담의 형태로 스스로 독사가 되기도 하여 이브에게 선악과를 먹인 듯하다. 아담과 이브가 뱀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의 계율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원죄를 범하였다면 「복숭아뼈」 속에서는 아담으로 비치는 화자에 의해 선악과를 먹게 하고 그 죄의 무게로 “슬픔이 여물어” 갔다고 한다. 아담이기도 하고 선악과이기도 하고 뱀이기도 한 화자의 분신이 어려운 현실을 함께 감당하고 있는 상대에 대한 속죄와 자성의 아련하고 애틋한 사랑의 결실이 복숭아씨처럼 단단하게 맺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깊은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지만 자연스럽게 풀어지는 풀롯의 이곳저곳에 배치된 시어들의 치밀한 구성이 돋보이는 시들을 읽으며 무한한 감동과 놀라움에 휩싸이게 된다. 하나하나 주제를 강화시키면서도 자연스럽게 시적 서사를 이루는 시어들이 오브제로 쓰이는 미장센 효과가 아닌가 한다.
*내용 중의 일부분은 기발표했던 것으로 구성하였습니다.
김광기
1959년 충남 부여 출생. 아주대 대학원 국문학과 박사 수료.
1995년 시집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를 내고 작품활동 시작.
시집 호두껍질, 데칼코마니, 시계 이빨 등과
시론집 존재와 시간의 메타포 등의 저서가 있음.
1998년 수원예술대상, 2011년 한국시학상 등 수상. <문학과 사람>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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