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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에서 반구대암각화· 천전리 각석 실물모형 전시, 각종 문양에 대한 입체적 영상 해설 등의 관람을 헸다.
2층에는 올라 선사사시대 생활모습, 선사마을 생활, 선사미술실 등 체험공간, 선사시대 사냥체험, 포토존,
선사인과의 만남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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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각화(岩刻畵) 전시물(展示物)1
울산암각화전시관에서 활동하고 있는 직원들은 "이곳 전시관이 개관한지는 얼마되지 않았지만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며 "앞으로 명실상부한 울산의 대표 문화명소 뿐 아니라 세계적인 선사문화 관광지로
명성을 떨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한다.
↑ 암각화(岩刻畵) 전시관(展示館) 앞에서
암각화 전시관 관람을 마치고 나와 전시관 앞에서 단체로 기념촬영이 있었다.
이 사진은 정면에서 촬영하는 사이 옆쪽에서 그냥 카메라 셔터를 눌려 담은 사진으로 옆모습만 나왔다.
↑ 암각화(岩刻畵) 전시관(展示館)앞 풍경
반구대 암각화를 보기위해 전시관을 뒤로하고 전시관 입구 다리위에서 바라본 대곡천의 모습...
화사한 꽃과 가을옷을 갈이입은 단풍이 굽이도는 계곡과 어울린 한폭의 그림같은 풍경이다.
↑ 암각화(岩刻畵) 전시관(展示館)앞 다리 꽃길
전시관 앞 꽃길 다리를 거너고 있는 일행들이다.
↑ 대곡천과 기암 풍경1
전시관을 출발, 약 5분쯤 지났을까? 굽이도는 대곡천을 병풍처럼 드리워진 기압벽 위로 울긋불긋 단풍이 물들어가는
풍경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고 말았다.
↑ 대곡천과 기암 풍경2
병풍처럼 둘려쳐진 기암벽 사이로 단풍이 곱게 물들고 잔잔히 흐르는 호수와 어울려 한폭의 동양화를 그려내고 있었다.
자연이 아니고서는 감히 그 누구도 흉내낼수 없는 아름다운 신의 걸작품이였다.
↑ 기암풍경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는 일행들
이 아름다운 기암절벽을 바라보며 장황한 설명을 쏱아내는 원장님!!
이곳이 바로 고려말의 충신 정몽주가 귀향살이한 곳이라 한 대목에서 나는 다시한번 바라보며 답사여행의 보람을 느낀다.
↑ 집청정 앞 계곡풍경
기암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집청정을 지나 우측으로 호수를 끼고 있는 길을 따라 가면서
아름다운 풍경에 다시한번 감탄사를 던진다.
↑ 사연호의 풍경
대곡천을 따라 흘러가던 물은 사연호에 닿으면서 하천이란 이름은 지우고 잔잔한 호수로 변하면서
이곳에서 부터 사연호가 시작된다. 이 물은 결국 울산 태화강으로 흘려 동해로 빠져들어 갈 것이다.
↑ 사연호와 기암풍경
대곡천을 휘감고 있는 사연호가 시작되는 커브길에서 바라본 집청정 앞 계곡 풍경이다.
↑ 반고서원 유허비(盤皐書院 遺墟碑) /시도유형문화재 제13호 (울주군)
사진 앞쪽에 보이는 정자각이 바로 반고서원 유허비(盤皐書院 遺墟碑) 이다.
유허비란 한 인물의 옛 자취를 밝혀 후세에 알리고자 세우는 비석으로,
이 비는 고려 말 충신포은 정몽주(1337~1392)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있다.
포은 선생은 고려 우왕 2년(1376) 성균관 대사성의 벼슬에 있으면서 중국 명나라를 배척하고 원나라와 친하게
지내려는 친원배명 외교정책에 반대하다가 이곳에서 1년가까이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 동안 반구대에 올라 "중양절감회"라는 시를 짓는 등 많은 자취를 남겼다.
詩題 ; 重陽節 感懷[중양절 감회]
구월 구일의 감회
節序重陽亦暑消[절서중양역서소]
중양의 절서가되니 역시 더위는 사라지고
天高馬膩冷霜朝[천고마니냉상조]
하늘 높고 말 살쪄 서리내린 아침은 차네.
黍禾嚲嚲昇祥旭[서화타타승상욱]
곡식은 익어 늘어졌는데 좋은 아침해 뜨고
鴻雁嗈嗈聽遠霄[홍안옹옹청원소]
기러기 짝지어 우는 소리 멀리서 들리네.
國泰民安時絶好[국태민안시절호]
국태 민안하니 때는 더할나위 없이 좋고
風調雨順歲豊饒[풍조우순세풍요]
풍조 우순하니 해는 풍년들어 넉넉하네.
重陽把酒無量感[중양파주무량감]
중양절에 술잔드니 더없이 좋은 감정이라
擊壤歌呼紫陌遙[격양가호자맥요]
도성의 길 멀리서 풍년가 노래 부르도다.
그 후 지역인들은 선생을 추모하여 반구대를 "포은대"라 명명하기로 하였다.
↑ 반고서원 유허비(盤皐書院 遺墟碑) 설명판
숙종 38년(1712) 언양지역 유생들이 포은 정몽주, 회재 이언적, 한강 정구 세 분을 추앙하여 반고서원을 세우고 제서하였다.
그러나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서원은 문을 닫게 되었다.
그 후 지역 유림들이 포은대영모비(1885), 포은실록대비(1890), 반고서원유허비실기(1901)
3기의 비석을 차례로 세웠으며, 1965년 현위치로 이전하였다.
↑ 호젖한 대나무길
우측으로 서연호를 끼고 나중에 되돌아와 뒤풀이 동동주 한잔할 가든을 지나 대나무 오솔길을 따라
반구대 암각화가 있는 곳을 향해 우리일행들의 발길은 계속된다.
↑ 곱게물든 단풍
반구대 암각화가 있는 곳으로 가는 길목엔 곱게물든 예쁜 단풍나무 하나가 온몸에 붉은옷을 걸치고 우리를 반긴다.
↑ 반구대 암각화(盤龜臺岩刻畵) / 국보 제285호
울산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산234-1
암각화 전시관을 출발한지 약 30여분이 소요되었을까?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에 도착했다.
↑ 반구대 암각화(盤龜臺岩刻畵) 설명문
위 사진 아레에 붙어있는 반구대 암각화에 대한 상세한 설명문이다.
↑ 반구대 암각화(盤龜臺岩刻畵) 현장
1965년 완공된 사연댐으로 인해 현재 물 속에 잠겨있는 상태로 바위에는 육지동물과 바다고기,
사냥하는 장면 등 총 75종 200여점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육지동물은 호랑이, 멧돼지, 사슴 45점 등이
묘사되어 있는데, 호랑이는 함정에 빠진 모습과 새끼를 밴 호랑이의 모습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멧돼지는
교미하는 모습을 묘사하였고,
사슴은 새끼를 거느리거나 밴 모습 등으로 표현하였다. 바다고기는 작살 맞은 고래, 새끼를 배거나 데리고
다니는 고래의 모습 등으로 표현하였다. 사냥하는 장면은 탈을 쓴 무당, 짐승을 사냥하는 사냥꾼,
배를 타고 고래를 잡는 어부 등의 모습을 묘사하였으며, 그물이나 배의 모습도 표현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선사인들의 사냥활동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길 기원하며, 사냥감이 풍성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바위에 새긴 것이다.
↑ 반구대 암각화(盤龜臺岩刻畵)에 대한 설명을 듣고있는 일행들
일행들에게 반구내 암각화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 창원문화원징님 이시다.
조각기로 쪼아 윤곽선을 만들거나 전체를 떼어낸 기법, 쪼아낸 윤곽선을 갈아내는 기법의 사용으로 보아
신석기말에서 청동기시대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과 점을 이용하여 동물과 사냥장면을 생명력있게
표현하고 사물의 특징을 실감나게 묘사한 미술작품으로 사냥미술인 동시에 종교미술로서
선사시대 사람의 생활과 풍습을 알 수 있는 최고 걸작품으로 평가된다.
전체 화면에는 고래, 물개, 거북 등 바다동물과 호랑이,사슴,염소 등 육지동물 그리고 탈을쓴 무당,사냥꾼,배를
타고있는 어부, 목책,그물 등 다양한 종류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달하는 다양한 종류의 물상들이 새겨져 있는 것은 세계적으로 매우 드문 예로서
고고학, 미술사 연구에도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소중한 문화재가 물에 잠겨 안타깝지만 오히려 헤손되지 않고 오래도록 보존하는 한 벙법일수도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고 말한다.
↑ 억새와 암각화(岩刻畵)
물에잠긴 반구대 암각화.. 바람결에 하늘거리는 은빛 억새와 어울려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 사연호와 기암층
반구대 암각화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좌측으로 내리서 잔잔한 사연호 따라 층층이 기암벽을 이루고 있는
풍경이 아름다워 카메라에 담았다.
↑ 사연호와 가든
사연호에서 바라본 우리가 머물 가든의 풍경이다...잔잔한 호수를 끼고 다소곳 앉아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다.
↑ 가든에서
가든에는 먼저온 일행들이 벌써 자리를 하고 도토리묵과 붙임개등 놓여있고 동동주 사발이 배달되고 있었다.
↑ 회장님 인사말
회장님의 인사말이 끝나고 동동주 한잔씩 주고 받으며 정을 나누면서...
서먹서먹한 감정도 사라지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정겨움이 야기저기서 묻어난다.
↑ 경청하는 일행들
동동주 한잔에 서로 정담을 나누며 있는 37기 동기생들이다.
↑ 동별 장기자랑
분위기가 무르익어가자 동별로 장기자랑이 시작된다. 처음에는 움추리고 있던 분위기가 시간이 지나다
노래한곡에 두둥실 춤을 추며 흥겨운 시간이 이어진다.
누가 잘하고 못하고도 없이 모두가 우승자 다운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한다.
↑ 박동백 원장님 한곡조
나도 한곡조..우리 원장님 노래실력 쥑인다. 못한다고 하더니 "허공"이란 곡을 뽑기시작한다. 넘어가는 폼이 쥑이다.
흥겨움에 젖어 시간 가는줄도 몰랐는데...이제 떠나야 시간이다. 모두들 아쉬움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오늘 이자리는 회장님이 마련한 자리다. 100명이 넘는 인원인데...경비도 만만찮을 것이다.
이런 자리를 마련해 주신 회장님께 감사를 드린다.
↑ 그림같은 풍경의 반구대
포은 정몽주이 한이서린 이곳 ...돌아오는 길에 다시한번 바라본 풍경이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더욱 깨끗해진 모습이다.
↑ 반구대 앞에서
돌아오면서 서쪽으로 기운 햇볕을 받은 반구대의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 폼함 잡아보았다.
↑ 집청정(集淸亭)
집청정(集淸亭)은 경주최씨 가암파의 파조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의 증손 운암(雲岩)
최신기(崔信基)가 1600년대에 반구대 앞에 세운 정자를 말한다.
최신기는 최원석씨의 14대조. 1932년에 중건됐다. 현재 울산에 남아 있는 15개의 정자 가운데 원형이
가장 잘 유지되고 있고, 보존상태도 좋은 편이다. 최신기가 집청정을 지은 뒤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 됐다. 사철 맑은 대곡천 계곡물과 반구산(265m),
일명 비래봉에서 뻗어내린 상대와 중대, 하대 3층 석대와 석대에 이어진 거북 머리 형상을 한 반구대가
만들어내는 경관에 푹 빠진 것. 선경이 따로 없었다. 머물 곳으로는 집청정이 있어서 모자람이 없었던 것.
반구대는 풍광 뿐이 아니었다. 선비들의 표상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한강(寒岡) 정구(鄭逑) 세 선현이 흔적을 남긴 곳. 선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집청정에는 1600년대 중반부터 1800년대 말까지 300년간 이곳을 다녀간 283명이 읊은 394수의 작품이 남이있다.
지금은 어린이 예절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잇는 곳이다.
↑ 집청정(集淸亭) 안내문
집청정 옆에 세워진 이 안내문은 포은 정몽주 선생의 얼이 숨어있는 곳으로 요즘은 잊혀져 가는 전통예절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한다.
↑ 그림같은 풍경 반구대
돌아오는 길에 집청정 앞의 반구대의 그림같은 아름다운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역광이 되지않아 더욱 운치가 있었다.
↑ 전시관앞 계곡풍경
버스가 있는 전시관으로 다시 돌아왔다. 다리를 건너면서 전시관앞 대곡천의
아름다운 풍경도 다시한번 카메라레 담았다.
↑ 전시관 앞 계곡풍경2
태양이 서쪽으로 기운 탓인가? 선명해진 산하...반구대의 상단부가 고개를 내밀며 우리들에게
아쉬움의 작별을 고하는듯 하다.
↑ 전시관을 뒤로하고
버스가 있는 전시관 앞에 도착하면서 천전리각석과 반구대암각화 답사를 모두 마치고 다시찾아올 기약도 없이
전시관을 뒤로하고 버스에 버스에 올랐다.
암각화에 대한 궁금증으로 시작한 금번 답사여행은 선사시대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과 그들의 희망을
그림으로 돌에새긴 귀중한 문화재를 접할수 있었던게 무엇보다 큰 보람이며,
그림같은 아름다운 풍경의 반구대가 포은 정몽주 선생의 유배지라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된것
또한 값진 답사 여행으로 가슴속깊이 남을 것이다.
좋은 여행지를 선정해 주신
박동백 창원문화원장님을 비롯한 관계직원 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싶다.
글/사진 : 산과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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