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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승 선생의 「부산동(扶山洞)」과 유신(庾信)의 「애강남부(哀江南賦)」
2019년 7월 14일
* 이건승 선생이 1910년 9월 26일 개성에 도착하여 이건창 선생과 교유하였던 왕성순 선생 집에 묵었습니다. 왕성순 선생이 이건승 선생을 데리고 개성 북쪽에 있는 채하동과 부산동에 갔습니다. 이건승 선생은 부산동에서 나뭇잎 떨어진 가을 풍경을 보고 내려오면서, 특별히 유신(庾信, 513-581)이 지은 「고향 강남지역이 그리워서 아픈 마음을 노래한 글(哀江南賦)」를 떠올리며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강화도 고향을 그리워하였습니다.
이건승 선생이 개성에서 왕성순 선생을 만나, 고려의 망국과 조선의 망국을 이야기하며 더욱 슬퍼하였습니다. 여기에 유신이 지은 「애강남부」를 덧붙여 망국의 슬픔과 아픔을 노래하였습니다. 유신은 연나라 형가(荊軻, ?-기원전 227)의 「연가(燕歌)」(다른 이름 「역수가(易水歌)」) 노래를 들으며 돌아가지 못할 고향을 더욱 그리워하였다고 합니다. 모두 나라 잃은 슬픔을 노래한 유민(遺民)문학입니다.
유신(庾信, 513-581)의 「애강남부(哀江南賦)」 가운데 서문을 중국 인터넷의 번역문과 주석을 참고하여 번역하였습니다.
* 이건승 선생, 「扶山洞」:蘭成愁日莫(暮),詞賦動江關。
庾信(513-581, 字子山,小字蘭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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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庾信, 513-581),「고향 강남지역이 그리워서 아픈 마음을 노래한 글(哀江南賦)」:
서문:
아! 548년 10월 큰 도적 후경(侯景, 503-552)이 반란을 일으켜 양(梁)나라를 빼앗으려고 하여 금릉이 함락되었다. 나는 아무도 없는 산골짜기에 숨었는데, 왕실과 일반인 모두 죽거나 다쳐서 도탄에 빠진 것 같았다.
554년 4월 나는 국가의 명령을 받고 양나라 서울 강릉(江陵, 華陽)에서 서위(西魏)의 서울 장안으로 사신 갔을 때, 서위가 양나라를 멸망시키고 나를 잡아놓았다. 나는 고향을 떠난 뒤에는 돌아가지 못하였다. 552년 후경 반란을 진압한 뒤 양나라를 중흥시킬 방법도 554년에 끝이 났다. 나는 억울하고 슬퍼서 나헌(羅憲, 218-270)이 도성의 정자에서 3일 동안 울었듯이 울었고, 숙손야(叔孫婼, ?-기원전 517)이 3년 동안 별관에 갇혔듯이 나는 갇혀있었다.
하늘에서는 목성이 12년마다 1번 돌아 운세가 바뀐다는데(참고:명나라 초기 胡翰의 十二運), 양나라는 망한 뒤에 다시는 일으킬 수 없었다. 부섭(傅燮, ?-187)이 적군을 맞아 신세를 슬퍼하고 죽기로 작정하였고, 원안(袁安, ?-92)은 왕실을 생각하여 흉노를 공격하지 말자고 10번 넘게 상소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동한시기 환담(桓譚, 기원전 40-기원후 32)은 『신론(新論)』 29편을 짓고 두예(杜預, 225-285)는 『춘추좌씨전 집해(春秋左氏傳集解)』을 짓고 모두 서문도 쓸 수 있었다.
반악(潘岳, 247-300)은 시를 잘 지어 가풍(家風)을 노래한 「가풍시(家風詩)」를 남겼고, 육기(陸機, 261-303)는 사부(辭賦)를 잘 지어 조상의 은덕을 노래한 「조덕부(祖德赋)」와 「술선부(述先赋)」를 남겼다.
나는 머리가 쇠기 시작하는 30대에 후경의 반란을 겪으면서 고향을 떠나 줄곧 타지를 떠돌다가 몰골이 늙어버렸다. 형가(荊軻, ?-기원전 227)가 진왕을 암살하려고 떠나면서 불렀던 「연가(燕歌)」를 듣고는 슬픔을 가눌 수 없었고, 고국 출신의 늙은이들을 만나면 울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는 처음부터 검정 표범이 남산에 살면서 비 맞는 것을 싫어하여 밖에 나가지 않았듯이 위험한 것을 싫어하였는데, 신포서(申包胥)가 군사력 지원을 받기 위하여 진(秦)나라에 갔듯이 갑자기 명령을 받고 서위(西魏) 조정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또한 백이와 숙제가 관직을 맡지 않으려고 동해 바닷가로 도망갔듯이 나도 서위에서 관직을 피하려고 하였는데 서위의 관원이 되어 녹을 받아먹고 살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공숭도(孔嵩道)가 말(馬)을 잃고 정자 아래에서 노숙하였듯이, 양홍(梁鴻)이 다리 밑에서 외롭게 노숙하였듯이 나그네가 되어 떠돌았다. 고향의 노래 초가(楚歌)를 들어도 마음이 기쁘지 않고, 맑고 담백한 노나라 지방의 술(魯酒)을 마셔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잊을 수 없다.
지난 일들을 떠올리며 이 노래를 지어 역사를 기록하는데, 내가 위험하였거나 고통스러웠던 말도 들어있지만 오직 나라를 잃은 슬픔과 애달픔이 가장 많다.
나이가 늙어갈수록 고향 길은 멀어만 간다. 지금 세상은 왜 이렇단 말인가!
풍이(馮異, ?-34) 장군이 세상을 떠나자, 장군이 앉아있던 커다란 나무도 의지할 사람 없이 외롭고 쓸쓸하구나. 형가(荊軻, ?-기원전 227) 장사가 진왕(秦王)을 죽여 연(燕)나라 침략을 막으려고 떠났는데 돌아오지 않자, 차가운 북풍이 더욱 쓸쓸하다.
난상여(藺相如)가 화씨벽(和氏璧)을 가지고 진(秦)나라에 가서 15개 성(城)과 바꾸려고 하였지만 끝내 속았던 것처럼, 나도 서위에 사신 왔다가 속았다. 모수(毛遂, 기원전 285-기원전 228)가 초(楚)나라에 가서 맹서의 피를 받았던 그릇을 들고 조(趙)나라와의 맹약을 지키라고 나섰으나 맹약을 이루지 못하였던 것처럼, 나도 서위에 사신 와서 맹약을 지키라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춘추시기 초나라 군자 종의(鍾儀)가 포로가 되어 진(晉)나라 감옥에서 초나라 음악을 연주하며 고향을 그리워하였듯이, 나도 남쪽지역 관원으로서 북쪽 서위와 주(周)나라에 붙잡혀 있다. 노나라 행인 계손(季孫)이 진(晉)나라 서하에 갇혀서 고향에 돌아갈 수 없었듯이, 나도 고향에 돌아갈 수 없다.
오(吳)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할 때 신포서(申包胥)가 진(秦)나라를 찾아가 지원군을 요청할 때 땅바닥에 머리를 찧다가 머리가 부서졌듯이, 채위공(蔡威公)이 “우리나라가 망할 텐데.”라고 말하며 사흘 밤낮을 울었고 눈물이 마르자 피를 흘렸듯이, 나도 양나라를 구하려고 온힘을 다하였다.
남쪽 진(晉)나라 도간(陶侃)은 무창(武昌, 釣台)에 남쪽지역 버드나무를 옮겨 심어 향수를 달랬지만, 내가 있는 옥문관 북쪽지역에서는 남쪽 버드나무조차 옮겨 심을 수 없다. 진(晉)나라 육기(陸機, 261-303) 형제가 패전하여 하교(河橋, 현재 河南省 孟縣)에서 죽을 때 옛날 화정(華亭, 현재 상해시)에서 노닐며 들었던 학 울음소리를 다시 들을 수 없다고 말하였듯이, 나도 죽을 때까지 고향의 새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손책(孫策, 175-200)이 처음 원술(袁術)에게 의지하였다가 천하를 삼분할 때 군대는 겨우 500명이었고, 항우(項羽, 이름 籍, 기원전 232- 기원전 202)가 강동지역 자제들을 데리고 일어날 때 겨우 8천명이었다. 그렇지만 나라를 분할하고 천하를 호령하였다.
양나라 군대가 먼저 도망갔기 때문이지, 어찌 백만 의병(지원군)이 하루아침에 무기를 들고 도망간 뒤에야 반란군(侯景의 반란)들이 풀과 나무를 베듯이 양나라 백성들을 도륙하였더냐!
양자강과 회하(淮河)에는 강가에 적을 막아주는 절벽도 없고, 군대가 주둔하는 초소에는 튼튼한 울타리도 없었기 때문에, 반란군들은 강제로 집집마다 군량미를 걷어 사람들이 뭉쳐 늘어났고, 간단한 농기구와 간단한 무기를 든 반란군들이 이런 틈새를 타고 일어났다.
강남지역 제왕의 기운은 이렇게 300년(孫權이 강남지역에서 吳나라를 일으킨 뒤부터 東晉、宋、齊、梁까지)만에 끝났단 말인가?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였으나 그의 아들이 지도(軹道, 현재 陝西省 咸陽市 西北)에서 한고조에게 항복하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 천하의 수레바퀴와 글자가 통일되었지만, 평양(平陽)에서 두 황제가 잡혀가서 죽는 것을 막지는 못하였다.(311년 유총(劉聰)이 낙양을 함락시키고 진(晉)나라 회제(懷帝)를 평양(平陽)으로 잡아가서 죽였고 316년 유요(劉曜)가 장안을 함락시키고 혼제(湣帝)를 평양으로 잡아가서 죽였다.)
아! 산이 무너지고 개천물이 말라, 나라가 위망(危亡)할 조짐이 일찍이 나타났고, 양(梁)나라와 진(陳)나라가 바뀌는 전쟁이 일어나면서 반드시 고향을 떠나야할 슬픔이 있었다.
하늘의 뜻과 사람들의 행동은 마음을 이토록 처참하게 아프게 하는구나!
그렇다고 배를 타고 갈 길도 끊어졌는데, 배를 타고 은하수로 올라갈 수도 없고,
폭풍이 세게 불어 갈 길이 막혔는데, 배를 타고 바다 가운데 봉래산에 갈 희망도 없다.
앞길이 막힌 사람은 말하고 싶고, 지친 사람들은 겪은 일들을 노래하려고 합니다.
내가 지은 노래를 육기(陸機)가 듣고 박수를 친다면 고맙고, 장형(張衡)이 보고 수준 낮다고 평가한다면 당연한 비평입니다.
庾信(513-581),「哀江南賦」:
서문:
粵以戊辰之年,建亥之月,大盜移國,金陵瓦解。
余乃竄身荒谷,公私塗炭。華陽奔命,有去無歸。
中興道銷,窮於甲戌。三日哭於都亭,三年囚於別館。
天道周星,物極不反。傅燮之但悲身世,無處求生;袁安之每念王室,自然流涕。
昔桓君山之志事,杜元凱之平生,並有著書,咸能自序。
潘嶽之文采,始述家風;陸機之辭賦,先陳世德。
信年始二毛,即逢喪亂,藐是流離,至於暮齒。
「燕歌」遠別,悲不自勝;楚老相逢,泣將何及?
畏南山之雨,忽踐秦庭;讓東海之濱,遂餐周粟。
下亭漂泊,高橋羈旅。楚歌非取樂之方,魯酒無忘憂之用。
追爲此賦,聊以記言,不無危苦之辭,唯以悲哀爲主。
日暮途遠,人間何世!
將軍一去,大樹飄零;壯士不還,寒風蕭瑟。
荊璧睨柱,受連城而見欺;載書橫階,捧珠盤而不定。
鍾儀君子,入就南冠之囚;季孫行人,留守西河之館。
申包胥之頓地,碎之以首;蔡威公之淚盡,加之以血。
釣台移柳,非玉關之可望;華亭鶴唳,非河橋之可聞!
孫策以天下爲三分,眾才一旅;項籍用江東之子弟,人唯八千。
遂乃分裂山河,宰割天下。
豈有百萬義師,一朝卷甲,芟夷斬伐,如草木焉!
江淮無涯岸之阻,亭壁無藩籬之固。
頭會箕斂者,合縱締交;鋤耨棘矜者,因利乘便。
將非江表王氣,終於三百年乎?
是知並吞六合,不免軹道之災;混一車書,無救平陽之禍。
嗚呼!山嶽崩頹,既履危亡之運;春秋迭代,必有去故之悲。
天意人事,可以淒愴傷心者矣!
況復舟楫路窮,星漢非乘槎可上;風飆道阻,蓬萊無可到之期。
窮者欲達其言,勞者須歌其事。
陸士衡聞而撫掌,是所甘心;張平子見而陋之,固其宜矣!
본문:
我之掌庾承周,以世功而爲族;經邦佐漢,用論道而當官。稟嵩華之玉石,潤河洛之波瀾。居負洛而重世,邑臨河而宴安。逮永嘉之艱虞,始中原之乏主。民枕倚於牆壁,路交橫於豺虎。值五馬之南奔,逢三星之東聚。彼淩江而建國,始播遷於吾祖。分南陽而賜田,裂東嶽而胙土。誅茅宋玉之宅,穿徑臨江之府。水木交運,山川崩竭。家有直道,人多全節。訓子見於純深,事君彰於義烈。新野有生祠之廟,河南有胡書之碣。況乃少微真人,天山逸民,階庭空穀,門巷蒲輪。移談講樹,就簡書筠。降生世德,載誕貞臣。文詞高於甲觀,楷模盛於漳濱。嗟有道而無鳳,歎非時而有麟。既奸回之奰逆,終不悅於仁人。
王子濱洛之歲,蘭成射策之年。始含香於建禮,仍矯翼於崇賢;遊洊雷之講肆,齒明離之胄筵。既傾蠡而酌海,遂測管而窺天。方塘水白,釣渚池圓。侍戎韜於武帳,聽雅曲於文弦。乃解懸而通籍,遂崇文而會武。居笠轂而掌兵,出蘭池而典午。論兵於江漢之君,拭玉於西河之主。
於時朝野歡娛,池台鍾鼓。裏爲冠蓋,門成鄒魯。連茂苑於海陵,跨橫塘於江浦。東門則鞭石成橋,南極則鑄銅爲柱。橘則園植萬株,竹則家封千戶。西贐浮玉,南琛沒羽。吳歈越吟,荊豔楚舞。草木之遇陽春,魚龍之逢風雨。五十年中,江表無事。王歙爲和親之侯,班超爲定遠之使。馬武無預於甲兵,馮唐不論於將帥。豈知山嶽闇然,江湖潛沸,漁陽有閭左戍卒,離石有將兵都尉。
天子方刪詩書,定禮樂;設重雲之講,開士林之學;談劫燼之灰飛,辨常星之夜落。地平魚齒,城危獸角;臥刁鬥於滎陽,絆龍媒於平樂。宰衡以幹戈爲兒戲,縉紳以清談爲廟略。乘漬水以膠船,馭奔駒以朽索。小人則將及水火,君子則方成猿鶴。敝箄不能救鹽池之咸,阿膠不能止黃河之濁。既而魴魚赬尾,四郊多壘。殿狎江鷗,宮鳴野雉。湛廬去國,艅艎失水。見被發於伊川,知百年而爲戎矣。
彼奸逆之熾盛,久遊魂而放命。大則有鯨有鯢,小則爲梟爲獍。負其牛羊之力,肆其水草之性;非玉燭之能調,豈璿璣之可正。值天下之無爲,尚有欲於羈縻。飲其琉璃之酒,賞其虎豹之皮;見胡柯於大夏,識鳥卵於條枝。豺牙密厲,虺毒潛吹。輕九鼎而欲問,聞三川而遂窺。
始則王子召戎,奸臣介胄。既官政而離逷,遂師言而泄漏。望廷尉之逋囚,反淮南之窮寇。出狄泉之蒼鳥,起橫江之困獸。地則石鼓鳴山,天則金精動宿。北闕龍吟,東陵麟鬥。
爾乃桀黠構扇,馮陵畿甸。擁狼望於黃圖,填盧山於赤縣。青袍如草,白馬如練。天子履端廢朝,單於長圍高宴。兩觀當戟,千門受箭;白虹貫日,蒼鷹擊殿;竟遭夏台之禍,終視堯城之變。官守無奔問之人,幹戚非平戎之戰。陶侃空爭米船,顧榮虛搖羽扇。
將軍死綏,路絕重圍。烽隨星落,書逐鳶飛。乃韓分趙裂,鼓臥旗折。失群班馬,迷輪亂轍。猛士嬰城,謀臣卷舌。昆陽之戰象走林,常山之陣蛇奔穴。五郡則兄弟相悲,三州則父子離別。
護軍慷慨,忠能死節,三世爲將,終於此滅。濟陽忠壯,身參末將,兄弟三人,義聲俱唱。主辱臣死,名存身喪。敵人歸元,三軍淒愴。尚書多算,守備是長。雲梯可拒,地道能防。有齊將之閉壁,無燕師之臥牆。大事去矣,人之雲亡!
申子奮發,勇氣咆勃。實總元戎,身先士卒。胄落魚門,兵填馬窟。屢犯通中,頻遭刮骨。功業夭枉,身名埋沒。或以隼翼鷃披,虎威狐假。沾漬鋒鏑,脂膏原野。兵弱虜強,城孤氣寡。聞鶴唳而心驚,聽胡笳而淚下。拒神亭而亡戟,臨橫江而棄馬。崩於钜鹿之沙,碎於長平之瓦。
於是桂林顛覆,長洲麋鹿。潰潰沸騰,茫茫墋黷。天地離阻,神人慘酷。晉鄭靡依,魯衛不睦。競動天關,爭回地軸。探雀鷇而未飽,待熊蹯而詎熟?乃有車側郭門,筋懸廟屋。鬼同曹社之謀,人有秦庭之哭。
爾乃假刻璽於關塞,稱使者之酬對。逢鄂阪之譏嫌,值耏門之征稅。乘白馬而不前,策青騾而轉礙。吹落葉之扁舟,飄長風於上遊。彼鋸牙而鉤爪,又循江而習流。排青龍之戰艦,鬥飛燕之船樓。張遼臨於赤壁,王濬下於巴丘。乍風驚而射火,或箭重而沉舟。未辨聲於黃蓋,已先沉於杜侯。落帆黃鶴之浦,藏船鸚鵡之洲。路已分於湘漢,星猶看於鬥牛。
若乃陰陵失路,釣台斜趣。望赤壁而沾衣,艤烏江而不渡。雷池柵浦,鵲陵焚戍。旅舍無煙,巢禽無樹。謂荊衡之杞梓,庶江漢之可恃。淮海維揚,三千餘裏。過漂渚而寄食,托蘆中而渡水。屆於七澤,濱於十死。嗟天保之未定,見殷憂之方始。本不達於危行,又無情於祿仕。謬掌衛於中軍,濫屍丞於禦史。
信生世等於龍門,辭親同於河洛。奉立身之遺訓,受成書之顧托。昔三世而無慚,今七葉而始落。泣風雨於梁山,惟枯魚之銜索。入欹斜之小徑,掩蓬藋之荒扉。就汀洲之杜若,待蘆葦之單衣。
於是西楚霸王,劍及繁陽。鏖兵金匱,校戰玉堂。蒼鷹赤雀,鐵舳牙檣。沉白馬而誓眾,負黃龍而渡江,海潮迎艦,江萍送王。戎軍屯於石城,戈船掩於淮泗。諸侯則鄭伯前驅,盟主則荀罃暮至。剖巢熏穴,奔魑走魅。埋長狄於駒門,斬蚩尤於中冀。燃腹爲燈,飲頭爲器。直虹貫壘,長星屬地。昔之虎踞龍盤,加以黃旗紫氣,莫不隨狐兔而窟穴,與風塵而殄瘁。
西瞻博望,北臨玄圃,月榭風台,池平樹古。倚弓於玉女窗扉,系馬於鳳皇樓柱。仁壽之鏡徒懸,茂陵之書空聚。若夫立德立言,謨明寅亮;聲超於系表,道高於河上。更不遇於浮丘,遂無言於師曠。以愛子而托人,知西陵而誰望?非無北闕之兵,猶有雲台之仗。
司徒之表裏經綸,狐偃之惟王實勤。橫琱戈而對霸主,執金鼓而問賊臣。平吳之功,壯於杜元凱;王室是賴,深於溫太真。始則地名全節,終則山稱枉人。南陽校書,去之已遠;上蔡逐獵,知之何晚?鎮北之負譽矜前,風飆凜然。水神遭箭,山靈見鞭。是以蟄熊傷馬,浮蛟沒船。才子並命,俱非百年。
中宗之夷凶靖亂,大雪冤恥,去代邸而承基,遷唐郊而纂祀。反舊章於司隸,歸餘風於正始。沈猜則方逞其欲,藏疾則自矜於己。天下之事沒焉,諸侯之心搖矣。既而齊交北絕,秦患西起。況背關而懷楚,異端委而開吳。驅綠林之散卒,拒驪山之叛徒。營軍梁溠,蒐乘巴渝。問諸淫昏之鬼,求諸厭劾之符。荊門遭廩延之戮,夏口濫逵泉之誅。蔑因親以致愛,忍和樂於彎弧。既無謀於肉食,非所望於論都。未深思於五難,先自擅於三端。登陽城而避險,臥砥柱而求安。既言多於忌刻,實志勇而形殘。但坐觀於時變,本無情於急難。地惟黑子,城猶彈丸。其怨則黷,其盟則寒。豈冤禽之能塞海?非愚叟之可移山。況以沴氣朝浮,妖精夜隕。赤鳥則三朝夾日,蒼雲則七重圍軫。亡吳之歲既窮,入郢之年斯盡。
周含鄭怒,楚結秦冤。有南風之不競,值西鄰之責言。俄而梯沖亂舞,冀馬雲屯。俴秦車於暢轂,遝漢鼓於雷門。下陳倉而連弩,渡臨晉而橫船。雖復楚有七澤,人稱三戶;箭不麗於六麋,雷無驚於九虎。辭洞庭兮落木,去涔陽兮極浦。熾火兮焚旗,貞風兮害蠱。乃使玉軸揚灰,龍文折柱。下江餘城,長林故營。徒思拑馬之秣,未見燒牛之兵。章曼支以轂走,宮之奇以族行。河無冰而馬渡,關未曉而雞鳴。忠臣解骨,君子吞聲。章華望祭之所,雲夢偽遊之地。荒穀縊於莫敖,冶父囚於群帥。硎穽折拉,鷹鸇批㩌。冤霜夏零,憤泉秋沸。城崩杞婦之哭,竹染湘妃之淚。
水毒秦涇,山高趙陘。十裏五裏,長亭短亭。饑隨蟄燕,暗逐流螢。秦中水黑,關上泥青。於時瓦解冰泮,風飛雹散,渾然千裏,淄澠一亂。雪暗如沙,冰橫似岸。逢赴洛之陸機,見離家之王粲,莫不聞隴水而掩泣,向關山而長歎。況復君在交河,妾在青波。石望夫而逾遠,山望子而逾多。才人之憶代郡,公主之去清河。栩陽亭有離別之賦,臨江王有愁思之歌。別有飄颻武威,羈旅金微。班超生而望返,溫序死而思歸。李陵之雙鳧永去,蘇武之一雁空飛。
若江陵之中否,乃金陵之禍始。雖借人之外力,實蕭牆之內起。撥亂之主忽焉,中興之宗不祀。伯兮叔兮,同見戮於猶子。荊山鵲飛而玉碎,隋岸蛇生而珠死。鬼火亂於平林,殤魂遊於新市。梁故豐徙,楚實秦亡。不有所廢,其何以昌?有媯之後,將育於薑。輸我神器,居爲讓王。天地之大德曰生,聖人之大寶曰位。用無賴之子弟,舉江東而全棄。惜天下之一家,遭東南之反氣。以鶉首而賜秦,天何爲而此醉?
且夫天道回旋,生民預焉。餘烈祖於西晉,始流播於東川。洎餘身而七葉,又遭時而北遷。提挈老幼,關河累年。死生契闊,不可問天。況復零落將盡,靈光巋然!日窮於紀,歲將復始。逼切危慮,端憂暮齒。踐長樂之神皋,望宣平之貴裏。渭水貫於天門,驪山回於地市。幕府大將軍之愛客,丞相平津侯之待士。見鍾鼎於金張,聞弦歌於許史。豈知灞陵夜獵,猶是故時將軍;咸陽布衣,非獨思歸王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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