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사: 조기 사회진출 동기생들의 스토리
이 회고는 대열임관50주년 기념책자 (가칭: 대열 반세기 여정)에 포함시킬 예정인 대열의 현역시절 활약 약사 중 특정분야근무 동기들의 부분을 작성하기 위해 편집진에서 해당 동기들의 대표집필을 통해 제공받은 내용으로서, 책자발간 이전에도 동기들이 함께 보면서 아! 그랬었구나! 하고 공감해 볼 필요도 있다고 보아, 회고담의 하나로 전재(轉載)합니다.
아래 내용은 편집진이 5월12일 졸업임관 이전 화랑대를 떠나 민간사회에 진출했던 동기들의 약사 집필을 요청한 데 대해, 유병태 동기가 대표해 5월29일 편집진에 응신해 준 내용으로서, 떠나던 때의 애환과 이후의 노력과 성공의 역사가 비교적 상세하게 담겨 가슴 뭉클하게 하며 대열을 자랑스럽게 하는 인생역정이란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밖에도 행정부처진출, 정보부파견 등 동기생들의 약사와, 각 동호회 및 지역포럼 등의 동기생들에게도 이미 요청한 각 분야의 활동 약사를 제공받으면, 대열 카페의 이 50주년 [특집]<대열반세기 우리들이야기>에 옮겨 동기생 전체가 일별하고 공감하도록 할 것입니다. 한편 여기에 전재하는 글은 집필동기생의 느낌을 그대로 전달해 읽는 동기생들이 최대한 실감하고 공감하게 하도록 거의 그대로 올릴 것이며, 기념책자에 수록될 때에는 지면사정과 타분야와의 조화 등을 고려해 가감될 것임을 밝혀 드립니다. -편집위원 김명수 (註)-
대열동기 임관 50주년에 즈음하여
1967년 1월 25일 청운의 꿈을 안고 육군사관학교에 가입교하여 그 동안의 생활과는 다른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였다. 가입교 신입생 264명이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한 이유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어도 우리는 가입교와 이후의 생도생활을 통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명예와 신의를 존중하고, 정의의 길을 택하는 삶을 사는 사람으로 태어났다.
그 생도 생활 4년동안 처음 생각했던 삶과 달라서 또는 체력, 학업성적이 기준에 미치지 못하였거나 또는 학교가 정한 규칙을 어기었거나 육사가 자랑하는 명예제도를 위반하여 중간에 다른 길을 택한 입학 동기들이 있었다.
가입교 기간중 4명 1학년 23명, 2학년 25명, 3학년 8명, 4학년 16명으로 가입교를 포함하여 76명의 동기생이 자의로 또는 타의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대부분은 1, 2 학년에서 미적분, 영어, 물리, 토목 등 학과 과목에서 학력미달로 그만 두었다.
동기생들의 끈끈한 우정은 학력 미달로 추가시험 재시험을 치르는 생도를 위하여 본인의 휴가를 반납하면서까지 동기들의 학업을 도와 동기간의 우의를 다지기도 하였으나 과목별로 난이도가 달라 중도 탈락자 발생은 어쩔 수 없었다. 또한 가끔은 명예제도나 군기를 위반하여 나가는 경우가 있었으며 이 경우 가끔은 화랑 연병장에서 나가는 생도들에게 체벌을 가하는 우를 범하기도 하였다.
특히 27기 대열동기회는 보병학교 OBC 교육을 생도기간 마지막에 넣어 받게 하였는데 이 기간 중 군기위반 사고가 발생하여 12명의 동기생이 졸업 2주전에 다른 길을 걸어야만 했다.
그러나 중간에 다른 길을 걷게 된 대부분의 동기들은 사관학교에서의 기간의 길고 짧음을 넘어 화랑대에서 받은 육사 정신과 연마한 체력이 그 후 사회생활을 하고 삶을 영위하는데 중요한 기초가 되었음을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아무리 부정해도 사관학교에서 중도에 탈락하였다는 하나의 멍에를 짊어지고 생활해야했고 어디를 가든지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의심을 받아야 했다. 이들 가운데는 동기들과 접촉하지 않는 동기들이 있는 반면에 지나온 날들이 소중해서 또는 개별적으로 친분관계를 유지하기 때문에 동기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동기들이 있었으니 이들이 과반수가 되었음은 육사 교육의 산물이며 또한 동기들과의 일체감과 서로에게 보여준 우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중간에 길을 달리한 동기들의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 저학년에서 길을 달리한 동기들은 당시 일반대학에서는 학제가 3학년 편입위주로 되어있고 가끔있는 2학년 편입은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있어 일반대학에 입학시험을 치르고 1학년부터 다시 시작한 동기들이 많이 있었다. 일부는 가정형편으로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직장을 먼저 택하고 나중에 대학공부를 시작한 친구들도 있었다. 또한 일부는 선호하는 직업을 찾아 공무원시험을 치고 공무원으로 취직을 하거나 집에서 부모님이 하는 사업을 물려받아 바로 사업전선으로 나간 친구들도 있었다
3,4학년에서 길을 달리한 친구들은 편입생을 받아주는 많지 않은 대학( 한양대, 국민대, 동아대 등)을 찾아 편입하여 공부를 계속하였다. 일부는 육사에서 다닌 학력으로 직장에 들어가 열심히 생활하여 고위직에 올랐으며 후에는 개인적으로 사업을한 경우가 있다.
특히 졸업 바로 전에 길을 달리한 12명의 동기 중 많은 수는 바로 직장으로 들어가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에 기여한 바 있다.
우리가 다니던 당시의 학교 규정은 중간에 길을 달리한 퇴교생에 대한 배려가 거의 없고 퇴교생은 터부시하여 생도기간 중에는 생도가 접촉하여서는 안 되는 존재였으며 이들의 학교출입을 금하였다. 또한 학교에 제출할 목적으로 성적 증명서를 발부 받을 경우 퇴교를 당한 학년의 성적은 나와있더라도 해당학년 성적을 제외하고 직전학년 성적까지만 발부해주었다. 그러나 가끔은 학적에 있는 모든 성적을 발부해주는 경우도 있었으니 당시에는 행정이 체계화 되어있지 못하였다. 그후 육사에서도 행정이 체계화되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4년간의 전체 교육과정을 이수하였지만 졸업 직전에 길을 달리한 동기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며 이들에게는 50년이 지난 2020년 5월 4년 수료증(176학점)을 학교장으로부터 받은 바 있다.물론 이 사례는 27기 대열 동기회장을 비롯한 회장단과 육사 총동창회 회장단의 끊임 없는 육사사랑과 노력 덕분이었으며 당시 육사교장의 따뜻한 배려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중도에 다른 길을 걸은 동기들의 생활은 각자 다른 환경에서 다시 시작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생활하였다. 이들 중에는 우리나라 무역이 증가되는 시기에 맞추어서 무역업에 종사한 동기들 (고중운, 안치운, 이종정, 조양연, 홍석두, 정인재 등)이 있었으며 이들은 우리나라의 상품을 해외에 수출하는 데 일익을 담담하거나 해외에 있는 원자재를 수입하여 우리나라 회사에 공급하는 일을 하였다.
또한 대기업이나 공기업에 취직하여 멀리는 중동에서(정완균), 가까이는 국내에서 산업발전에 기여한 동기들(신철, 이병국, 이한재, 정동락, 정완균, 추정엽, 홍만형, 황재문 등)이 있었으며 일부는 공무원(김용상, 김형욱, 이성호, 윤태현 등)이 되었다.
또한 일부는 연구소를 운영(이원식)하거나 학교에서 교편을 잡아 후진양성에 온갖 정성을 쏟아 대학교에 남아 교수를 하며 교수(고용식), 대학원장(조한식), 대학 부총장(유병태)에 이른 동기도 있다. 또한 많은 동기들이 회사를 운영하며 (강주일, 고중운, 문순길, 신철, 황재문, 안치운, 이대동, 이병국, 이종정, 임의택, 임희목, 최상일, 홍석두 등) 불굴의 정신으로 살아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기여하였다.
이들이 살아온 면면을 보면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았든 지, 길든 짧든 육사에서 받은 교육이 몸과 마음에 배여 삶의 자양분이 되었음을 의심치 않는다. §
5월29일 유병태
첫댓글 읽어 보신 동기생들의 꾸준한 새로운 사실 제보로 게재 내용이 수시로 수정보강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