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이 스리랑카에서 팔리로 기록되기까지는 열여덟 또는 열아홉 부파가 각각 자체 전승을 가지고 있었다. 이 부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각기 따로 나누어 가진 것이 아니다. 부파들은 한 벌의 옷을 이루고 있는 여러 가지 실 중의 하나였던 셈이다.
그중에서 오늘날 두 가지 것이 남아 있는데, 하나는 탐라사티야 판본이고 다른 하나는 설일체유부 판본이다. 비슷한 시기에 문자로 기록된 이 두 판본 중에서 전자는 팔리로 씌어졌고, 후자는 산스크리트와 프라크리트로 씌어졌다. 스리랑카에서 팔리로 기록된 경전을 남전 또는 ‘원로들의 가르침’이라 한다.
북전의 설일체유부 판본은 단편적인 모습으로만 남아있다. 다행스럽게도 북전은 한문과 티베트어로 번역이 이루어진 결과 오늘날에도 그 상당수가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부처님은 팔리, 산스크리트 혹은 프라그리트로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분은 마가디 또는 아르다마가디라고 하는 방언을 사용하셨는데, 그 말로 기록된 부처님 말씀은 하나도 없다. 현존하고 있는 두 가지 판본을 비교해보면 어떤 가르침이 부파분열 이전의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두 가지 판본의 내용이 똑같다면, 그것은 분열 이전에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내용이 다르다면 둘 중 하나 또는 둘 다 틀린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북전과 남전은 각기 좀 더 잘 보존하고 있는 경전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비교해볼 수 있는 두 가지 전승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여러모로 쓸모가 있다고 하겠다.
부처님 가르침의 세 번째 흐름이라고 할 수 있는 대승불교는 기원전 1~2세기에 일어났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계셨던 때로부터 몇백 년 동안 불법의 수행은 비구와 비구니들의 전유물이었다. 재가 신자들은 출가 승가에 의식주와 약을 보시하는데 그쳤다.
기원전 1세기 무렵이 되자 비구와 비구니들 중 상당수가 일신의 해탈만을 위해서 수행하는 것으로 비쳤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작용을 피할 수 없었다. 대승불자들이 제시한 이상 인격은 만중생을 위하여 수행하고 가르치는 보살이었다. 지금까지 말한 세 가지 흐름은 서로를 보완해주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근본불교가 부처님이 가르치셨던 것을 모두 간직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부파불교와 대승불교는 잊혀지거나 간과된 가르침을 되살릴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다른 모든 종교 전통과 마찬가지로 불교는 계속해서 명맥을 유지하고 성장해나가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스스로를 쇄신해야 한다. 부처님은 늘 당신의 깨달음을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하시곤 했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계셨던 이래 불자들은 사르나드의 녹야원에서 시작된 가르침을 표현하고 나누고자 끊임없이 새로운 법문을 열어왔던 것이다. 경전이나 설법은 그 자체가 바로 지혜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것은 말과 개념을 통해 지혜를 소개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지도를 이용해서 파리로 가는 사람은 일단 그곳에 도착하면 지도를 던져버리고 파리를 맘껏 구경한다. 만일 지도에만 매달려 있다면, 그러니까 부처님이 전해주신 말씀이나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면, 실재를 놓쳐버리고 말 것이다. 부처님은 여러 차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가르침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도 같은 것이다. 손가락을 달로 착각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대승불교의 전승을 보면 이런 말이 있다.
“경전에 나오는 모든 문구의 뜻을 설명한다면, 삼세, 즉 과거ㆍ현재 그리고 미래의 부처님들을 비방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경전에 나오는 단 한마디 말이라도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마라의 말을 내뱉는 것이다.”
경전은 수행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지침이지만, 그 속에 담긴 참된 의미를 깨닫고 실천에 옮기자면 주의 깊게 읽고 스스로 생각해 보고 스승이나 승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경전이나 논서를 읽고 나면 심신이 무거워지기는커녕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불교는 그저 지식의 창고에 뭔가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진아(眞我)를 일깨워주려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이따금 대답을 거절하신 적이 있다. 바치고트라라는 철학자가 물었다.
“자아는 존재합니까?” 부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자 그가 계속 물었다.
“자아는 없다는 뜻입니까?” 그래도 부처님은 대답하지 않으셨다.
결국 바치고트라는 물러갔다. 이에 부처님의 시자였던 아난다가 당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여쭈었다.
“세존께서는 늘 자아라는 것은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왜 바치고트라에게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이에 부처님은 바치고트라가 바란 것은 깨달음을 얻는데 방해가 되는 장애를 없애는 방법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이론이었기 때문에 대답하지 않은 것이라고 아난다에게 말씀하셨다. 또 한번은 일단의 제자들이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놓고 이러쿵저리쿵 떠드는 소리를 듣게 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45년 동안 나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제자들이 말이나 관념에 사로잡히는 일이 없기를 바라셨다. 설령 그것이 당신의 말씀이라 해도 말이다. 부서진 조각상을 발견한 어느 고고학자는 조각상을 고쳐서 그 시대의 예술을 연구하고자 복원을 전문으로 하는 조각가들을 불러 모았다고 한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있다면, 일부분이 망실되거나 부가되어 있을 경우 그것을 알아차리고 손실된 부분을 복원해야 한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