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양호 교수의 '선과 현대미술'
禪을 線으로 표현하다
禪과 현대미술
- 아그네스 마틴(Agnes Martin)
▲ 아그네스 마틴의 작품
〈Night Sea(1963·사진 왼쪽)〉와
〈Untitled(1999·사진 오른쪽)〉의 모습.
후기로 갈수록
선이 비정형화되며 자유로워진다.
조용하고 고요한 상태에서
자신의 긴 호흡을 인지하며
스스로 깊은 내면에 침잠하며
정신의 가치를 찾아가는 모습에서
많은 사람들은 감동과 찬사를 보내며
그러한 정신성을 체험하기를 희망한다.
추상표현주의·禪에 깊은 감화
절제된 삶을 표현 방법 활용해
선 하나에 온 정신·마음을 투영
초기엔 정형·후기엔 비정형 특징
선은 수행이며 진리를 찾는 방법
아그네스 마틴
(Agnes Martin, 1912~2004, 미국)은
캐나다에서 태어나
20대에 미국으로 이주하며
미국에서 작가생활을 하였다.
미국 추상표현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은 그녀는
점차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해 나아간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마음을 가장 크게 움직이게 한 것은
선(禪)사상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동양사상,
특히 선사상에 깊은 감동을 받은 그녀는
마치 수행자처럼 삶을 영위하였다.
지극히 절제된 삶을 추구하는 그녀는
자신의 예술도
정신성의 표현을 위한 방법으로 활용하였다.
즉, 다시 말해
자신이 체험한 자연의 이치를 표현하기 위하여
예술적 행위를 하였으며
그녀에게 예술은 또 다른 방식의 수행이었다.
당시 추상표현주의 화가인
마크 로스코, 바네트 뉴먼 등과 교류하며
추상표현주의에 관심을 가졌으나
점차 스스로
자신만의 예술성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이
강렬한 단색을 통하여
정신성을 표현하던 것에서 벗어나서
가능한 단색과 미색을 사용하여
조용하고 고요한 정신의 경지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나의 작품에는
어떠한 대상, 나무 등 어떠한 것도
형상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빛, 광명이며
어떠한 고통도 소멸시키는 형상을 추구하는 것이다.
즉, 형상 없는 형상을 통하여
마음의 아픔을
치유하는 빛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마틴은 말하고 있다.
〈Night Sea, 1963,
Oel auf Leinwand mit Blattgold, 183x183cm>
‘밤 바다’로 제목을 붙인 이 작품은
그녀의 정신성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 중의 하나이다.
그녀가 선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지며
좌선을 행하여 느껴지는 마음의 고요한 상태를
막막한 대해에 작은 선을 그으며
내면의 모습을 관조하는 작품이다.
커다란 화면에 작은 선을 반복해서 그을 때
나타나는 작은 공간들이 반복되며
전체적으로
커다란 새로운 공간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는 자신이 좌선을 하며
자신의 호흡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조금씩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직시하며
마음을 새로운 관점에서
관조하는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밤바다는
무명을 가리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두운 밤에 바다를 보면
어떠한 모습이 보이는가.
아무런 형상도, 색채도, 방향도
구분하기 힘든 적막의 모습이다.
그녀는 이러한 자연의 현상을 보면서
인간의 삶이
이처럼 막막한 가운데 살아가고 있음을 관조하며
자신이 조그마한 빛이 되어
누군가에게 광명의 빛으로 비쳐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아가기를 바라는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삶의 방식도
절제와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여기었으며
그녀를 가까이에서 본 많은 사람들이
그녀는 마치
동양에서 온 수행자 같다는 말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그녀가 생각하는 예술가는
자유롭고, 창의적이지만
절제와 수행을 동반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마틴은
선을 하나 긋기 위하여 온 정신을 투영한다.
그 선은
그녀에게는 수행이며
진리를 찾아가는 방법인 것이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긋는 선들은
자세히 보면
선과 면 사이에 미묘한 긴장관계를 느낄 수 있다.
바이올린 줄을
적정한 긴장 상태로 만들어야
좋은 소리가 나듯이
그녀가 긋는 선은
면과 면 사이의 긴장을 유발시켜
그 속에서 최고의 극점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서
그녀는 무아의 경지인
삼매(三昧)의 상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그녀의 초기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특성들이다.
작은 선은
그녀가 생각하는 마음의 상징이었다.
마음을 집중하지 않으면
선은 금방 삐뚤어진다.
즉,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전혀 새로운 선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그 작은 선을 하나 긋기 위하여
많은 시간을 명상을 하며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다.
〈Untitled, 1999, Acrylic,
Grafit auf Leinen, 31x31cm〉
이 작품은
그녀의 정신성의 극점을 보여주는 후반기 작품이다.
80세가 넘은 나이에도
마틴은 자신의 정신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선을 긋고 있다.
선은 그녀에게 선(Line)이상의 의미가 있다.
선은 수행이며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많은 시간 선을 긋는 행위를 통하여
자신의 마음을 관조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선은 점점 더 고요해졌으며
그 고요함 속에서 나오는 강렬한 빛은
점점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광명으로 다가가게 된다.
필자가
프랑스 파리에 있는 퐁피듀 센터에서
아그네스 마틴의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에는
너무나 단순하고
색도 미색이라 별다른 감동을 받지 못하였다.
당시에는
작가에 대하여 잘 모르는 상태여서
그저 유명한 작가의 작품인 줄로만 생각하고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감상하기 바쁘게 시간이 지나갔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고
커피를 한 잔 마시는데
스쳐지나가는 듯한 강한 느낌이 왔다.
그러면서 어제 본 마틴의 작품을
다시 한 번 꼭 보고 싶은 강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찾은 퐁피듀에 있는
그녀의 작품은
어제 내가 본 그 작품이 아닌 것처럼
너무나 강한 감동을 주었다.
작품은 위에서 보는 작품과 비슷하나
고요하면서도
정적인 작품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빛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었다.
한참 동안을
그 작품 앞에서 움직일 수 없는 감동이 이어졌다.
지금 생각해도 생생하게 느껴지며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다시 그 작품이 보고 싶어진다.
작품이 관객의 마음을 끄는 것은
크게 2가지로 분류하여
그 특성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자신의 내면에
그러한 성향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평상시에는
자신의 내면에 대한 자극을 주지 못하다가
자신이 인지하고 있는 작품을 보는 순간
줄탁동시처럼 큰 감동이 오는 경우이다.
예들 들면
동일한 작품을 보아도
어떤 사람은 전혀 감동을 받거나
심지어 이해하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내면에
그러한 인식의 범주가 없을 때에는
어떠한 자극을 주어도
전혀 반응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는
색채나 형상이다.
색채는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특히 작품 속에 나타나는 단색의 강렬한 색채는
자신의 성향과 체험이 결합되며
깊은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이 경험한 즐겁고 행복한
좋은 일과 연관되는 색채는
마치 자신을 지켜주는
수호신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또 하나는
자신이 좋아하는 형상을 보았을 때
깊은 감동을 받는다.
필자가 원형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을 때
눈앞에 나타나는 원형은
무의식적으로 인지하게 되며
그 중에 자신이 생각하는 원형의 이미지는
강한 울림을 느낄 수 있다.
즉, 형상이 주는
상징적, 경험적, 인지적 특성들이 결합되어
내면에 존재하는
깊은 무의식적 감성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퐁피듀에서
필자가 보았던 마틴의 작품은
첫 번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당시 필자가 독일에 유학하던 시절이라
필자는 정신성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러한 작품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깊은 감동을 받지 못하였으나
그녀의 작품이
마음속에서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다는 것을
시간이 흐른 뒤에 알게 되었다.
작품은 작가 마음의 표현이다.
작가가 선을 긋는다면
작가의 마음에 선은 전부인 것이다.
선을 통하여
세상과 교감하고 소통하며
자신의 정신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예술가들이
선택하는 표현의 방법이나 기법들은
평범해보여도
그 내면에 존재하는 깊은 정신성은
그 깊이를 아는 사람만이 인지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작품이 단순하고
색채가 무채색에 가까울수록
정신성이 더욱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작가의 생각에 따라서
강렬한 색채를 통하여
자신이 인지하는
깊은 정신성을 드러내기도 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인지하는 관객의 입장에서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평행이론처럼
작가의 개별적 특수성이 인정되지 못하고
동일한 색채나 기호들이
동일한 의미로 해석되는 것은
관객으로서 지양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같은 색채나 동일한 형상, 기호를
사용하였다 하여도
작가의 특성에 따라서
그 내면적, 정신적 관점은
전혀 다르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한 작가의 작품에서
제작 시기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아그네스 마틴의 경우
초기에는 정형화된 선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지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비정형적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색채는
거의 무채색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즉, 시간이 흘러도
색채가 가지는 정신적 특성은
크게 변화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녀에게 선은
자신의 내면에 일어나는 마음의 변화를
인지해 나아가는 것처럼
인식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 색채는
마음바탕처럼
본성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평생을 수행자적 자세에서 벗어나지 않고
예술가의 길을 새롭게 만들어간
아그네스 마틴은
시대를 초월하여
자신의 정신성을 인정받는 작가 중 한명이다.
너무나 원초적이고 미세한 감각들이
깊은 호흡하며, 발산되는 강한 정신성이
무채색의 면과
가느다란 선을 통하여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삶과 예술의 모습을
새롭게 형성해 나아가고자 한
그녀의 생각과 노력이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깊은 감동으로 느껴진다.
그녀가 수행을 하며
인지하고 느낀 정신성의 깊이를
모두 알 수는 없지만
한 예술가의 삶과 작품을 통하여
다시 한 번
우리 삶의 존재방식과
가치에 대하여 생각하게 한다.
현대불교신문
윤양호 원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