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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11권 / 경기(京畿) / 양주목(楊州牧)
【속현】 풍양현(豐壤縣) 주(州) 동쪽 50리 지점에 있다. 본래 고구려 골의노현(骨衣奴縣)이다. 신라에서 황양(荒壤)이라 고쳐서 한양군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에서 풍덕(豐德)이라 고쳤다. 현종 9년에 양주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포천에 예속시켰는데, 본조 세종 원년에 다시 본현에 내속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풍양(豐壤) 동남쪽으로 45리에 있는데 본래 백제 골의노(骨衣奴)이다. 노(奴)는 내(內)라고도 한다. 경덕왕(景德王) 16년에 황양(荒壤)으로 고쳐서 한양군(漢陽郡)으로 하여 현(縣)을 관할하였다. 고려 태조 23년에 풍양으로 고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해서 후에 포주(抱州)로 하였다가 본조 세종 원년에 다시 풍양에 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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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11권 / 경기(京畿) / 양주목(楊州牧)
《대동지지(大東地志)》
【궁실】 풍양행궁(豐壤行宮) 풍양의 옛현 동쪽에 있으며 우리 태조(太祖)ㆍ태종(太宗)이 이곳에서 주필(駐蹕)하셨다. 지금도 유지가 있다. 영종(英宗) 31년 2월에 풍양 구기(舊基)에 각(閣)을 건축하고 태조대왕이 친히 글을 써서 비(碑)를 세웠으니 상왕(上王) 때의 구궐(舊闕)에 유지가 12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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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종(英宗) 31년 2월에 풍양 구기(舊基)에 각(閣)을 건축하고 태조대왕이 친히 글을 써서 비(碑)를 세웠으니 상왕(上王) 때의 구궐(舊闕)에 유지가 12자 남아 있다. -> 문리불통
‘太祖大王在上王時舊闕遺址’
*영종 때 각을 세웠다. 태조대왕이 비를 세웠다, 시대가 안맞음
상왕 때의 구궐은 어느 상왕인가 태조의 상왕인가 영종의 상왕인가
구궐은 어느 상왕의 구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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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실】 풍양행궁(豐壤行宮) 풍양의 옛현 동쪽에 있으며 우리 태조(太祖)ㆍ태종(太宗)이 이곳에서 주필(駐蹕)하셨다. 지금도 유지가 있다. 영종(英宗) 31년 2월에 풍양 구기(舊基)에 각(閣)을 건축하고 태조대왕이 친히 글을 써서 비(碑)를 세웠으니 상왕(上王) 때의 구궐(舊闕)에 유지가 12자 남아 있다. ->영종(英宗) 31년 2월에 풍양 구기(舊基)에 각(閣)을 건축하고 영조대왕이 친히 글을 써서 비(碑)를 세웠으니 '태조대왕 상왕(上王) 때의 구궐(舊闕) 유지 太祖大王在上王時舊闕遺址'라는 12자를 새겼다.
*영조실록 83권, 영조 31년 1월 28일 임인 2번째기사 1755년 청 건륭(乾隆) 20년
양주 풍양의 태조 구궐 유지에 비를 세우다
임금이 양주(楊州) 풍양(豊壤)의 태조 대왕(太祖大王) 구궐 유지(舊闕遺址)에 비(碑)를 세우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지금 나이 늙어 선릉(先陵)을 알현(謁見)하고 또 풍양에서 주정(晝停)하려고 하니, 이 마음 갑절이나 설레인다. 성조(聖祖)의 구궐 유지(舊闕遺址)에 어찌 표지(表識)가 없어서 되겠는가? 경기 감영으로 하여금 예조와 오가면서 즉시 거행하도록 하되, 석재(石材)는 칠릉(七陵)의 것으로 하고 표석(表石)은 영건청(營建廳)의 남은 돌로 새겨서 세우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각릉(各陵)의 비석 세우는 역사가 한창 펼쳐지는 시기에 더욱 백성들을 가엾이 여겨야 마땅하니,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저치미(儲置米)를 나누어주도록 하고, 모든 일은 절대로 백성을 이용하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그리고 친히 비(碑)의 앞뒤면을 썼는데, 그 전면에 ‘태조 대왕 재상왕시 구궐 유지(太祖大王在上王時舊闕遺址)’라고 쓰고, 후면에는 ‘황명 숭정 기원후 삼을해 중춘에 이곳에 주정하면서 절하고 공경히 쓴다.[皇明崇禎紀元後三乙亥仲春晝停于此拜手敬書]’라고 서는, 경기 감영으로 하여금 비를 세우도록 하였으며, 또 두 줄로 ‘지명 풍양(地名豊壤)’ 네 글자를 썼다.
○上命竪碑于楊州 豊壤 太祖大王舊闕遺址, 敎曰: "今於暮年, 將謁先陵, 而又將晝停於豊壤, 一倍此心。 聖祖舊闕遺址, 豈無表識。 其令畿營往復禮曹卽爲擧行, 石材以七陵, 表石營建廳餘石刻竪。" 又敎曰: "各陵碑役方張之時, 尤宜恤民, 令備局劃給儲置米, 凡事切勿用民。" 乃親書碑前後面, 前面曰, ‘太祖大王在上王時舊闕遺址’, 後面曰 ‘皇明崇禎紀元後三乙亥仲春晝停于此, 拜手敬書’, 令畿營竪石, 又以雙行書地名豊壤四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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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83권, 영조 31년 1월 28일 임인 2번째기사 1755년 청 건륭(乾隆) 20년
양주 풍양의 태조 구궐 유지에 비를 세우다
임금이 양주(楊州) 풍양(豊壤)의 태조 대왕(太祖大王) 구궐 유지(舊闕遺址)에 비(碑)를 세우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지금 나이 늙어 선릉(先陵)을 알현(謁見)하고 또 풍양에서 주정(晝停)하려고 하니, 이 마음 갑절이나 설레인다. 성조(聖祖)의 구궐 유지(舊闕遺址)에 어찌 표지(表識)가 없어서 되겠는가? 경기 감영으로 하여금 예조와 오가면서 즉시 거행하도록 하되, 석재(石材)는 칠릉(七陵)의 것으로 하고 표석(表石)은 영건청(營建廳)의 남은 돌로 새겨서 세우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각릉(各陵)의 비석 세우는 역사가 한창 펼쳐지는 시기에 더욱 백성들을 가엾이 여겨야 마땅하니,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저치미(儲置米)를 나누어주도록 하고, 모든 일은 절대로 백성을 이용하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그리고 친히 비(碑)의 앞뒤면을 썼는데, 그 전면에 ‘태조 대왕 재상왕시 구궐 유지(太祖大王在上王時舊闕遺址)’라고 쓰고, 후면에는 ‘황명 숭정 기원후 삼을해 중춘에 이곳에 주정하면서 절하고 공경히 쓴다.[皇明崇禎紀元後三乙亥仲春晝停于此拜手敬書]’라고 서는, 경기 감영으로 하여금 비를 세우도록 하였으며, 또 두 줄로 ‘지명 풍양(地名豊壤)’ 네 글자를 썼다.
○上命竪碑于楊州 豊壤 太祖大王舊闕遺址, 敎曰: "今於暮年, 將謁先陵, 而又將晝停於豊壤, 一倍此心。 聖祖舊闕遺址, 豈無表識。 其令畿營往復禮曹卽爲擧行, 石材以七陵, 表石營建廳餘石刻竪。" 又敎曰: "各陵碑役方張之時, 尤宜恤民, 令備局劃給儲置米, 凡事切勿用民。" 乃親書碑前後面, 前面曰, ‘太祖大王在上王時舊闕遺址’, 後面曰 ‘皇明崇禎紀元後三乙亥仲春晝停于此, 拜手敬書’, 令畿營竪石, 又以雙行書地名豊壤四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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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실】 풍양행궁(豐壤行宮) 풍양의 옛현 동쪽에 있으며 우리 태조(太祖)ㆍ태종(太宗)이 이곳에서 주필(駐蹕)하셨다. 지금도 유지가 있다. 영종(英宗) 31년 2월에 풍양 구기(舊基)에 각(閣)을 건축하고 태조대왕이 친히 글을 써서 비(碑)를 세웠으니 상왕(上王) 때의 구궐(舊闕)에 유지가 12자 남아 있다. ->영종(英宗) 31년 2월에 풍양 구기(舊基)에 각(閣)을 건축하고 영조대왕이 친히 글을 써서 비(碑)를 세웠으니 '태조대왕 상왕(上王) 때의 구궐(舊闕) 유지 太祖大王在上王時舊闕遺址'라는 12자를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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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필재집(佔畢齋集) 김종직(金宗直)생년1431년(세종 13)몰년1492년(성종 23)자계온(季昷), 효관(孝盥)호점필재(佔畢齋)본관선산(善山)시호문충(文忠)
佔畢齋集卷之十六 / 詩 / 閏八月二十五日。扈從大駕。謁光陵。過豊壤宮。夜猶末央。
中宵淸蹕動。三更三點。動駕。
霜露感將攄。
缺月明馳道。駕至先農壇。月始出。
奇香滿屬車。
風欹戎士弁。
泥濺侍臣裾。雨新霄。途有泥淖。一侍臣馬蹶霑汚。
已過離宮側。
天星尙未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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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여지지 제2권 / 경기(京畿) 우도(右道)○양주진(楊州鎭) / 양주목〔楊州牧〕
고적(古蹟)
풍양 폐현(豐壤廢縣) 주 동쪽 50리에 있다. 본래 고구려 골의노현(骨衣奴縣)이었는데, 신라가 황양(荒壤)으로 고치고 한양군(漢陽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가 풍덕(豐德)으로 고쳤고 현종(顯宗) 때에 그대로 양주에 편입시켰다. 후에 포주(抱州)로 이속시켰다. 본조 세조(世祖) 초에 다시 양주로 편입시켰는데, 지금 현 뒷산 위에는 옛 성이 있다.
풍양궁(豐壤宮) 풍양현 동쪽에 있다. 우리 태종조(太宗朝)에 태조(太祖)를 위하여 이 궁을 창건하였다. 태조가 이 궁이 창건된 뒤로 이곳에 환어(還御)하였다. 지금은 무너져 유허(遺墟)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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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의궤 제2책 / 종묘 제도〔廟制〕
○ 세종대왕(世宗大王) 신축년(1421, 세종3) 7월 무인일(18일)
이에 조정에서 다시 조묘를 세울 땅을 논의하였다. 좌의정 박은(朴訔)이 아뢰기를,
“사조전(四祖殿)을 태실의 서쪽에 둘 경우, 종묘의 태조(太祖) 이하가 모두 사조의 자손인데, 세대(世代)가 낮은 왕이 바로 곁에 있는 상태에서 종묘에 올리는 사시(四時)의 대향(大享)에 세대가 높은 이가 참여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의 정리에 편치 않습니다. 장생전(長生殿)은 국도(國都)의 서쪽에 있어 종묘와 떨어져 있으니, 그곳을 사조전으로 삼으소서.”
하고, 참찬 변계량(卞季良)도 역시 종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조묘를 세울 것을 청하였다. 이때에 상왕(上王:태종)이 풍양궁(豐壤宮)에 있었는데, 예관(禮官)이 갖추어 아뢰자, 상왕이 말했다.
“하늘에 계신 조종(祖宗)의 영령이 어찌 장소의 멀고 가까운 데에 따라 흠향(歆饗)하고 말고가 있겠는가. 또한 조종을 위하면서 건물을 짓는 공사를 어렵게 여겨 오래된 전각을 사용한다는 것은 예가 아니다. 마땅히 옛 제도를 따라 태실의 서쪽에 조묘를 세우고, 칭호는 의당 ‘영녕전(永寧殿)’이라고 하라.”
영녕전은 대개 조종과 자손이 모두 편안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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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D022] 조묘를 세울 땅 : 대본은 ‘建宗廟之地’인데, 《세종실록》 3년 7월 18일 기사에 ‘建廟之地’로 되어 있는 것에 의거하여 대본의 ‘宗’ 자를 연문(衍文) 처리하였다.[주-D023] 상왕(上王) : 태종을 말한다.[주-D024] 풍양궁(豐壤宮) : 양주(楊州)에 있던 이궁(離宮)으로 동이궁(東離宮)이라고도 한다. 《세종실록》 〈지리지 경기 양주도호부〉에 “풍양이궁은 부의 동남쪽에 있으니, 곧 풍양현의 옛터이다. 또한 태종이 거둥하여 계시던 곳이다.” 하였다. 조선 후기에 불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었는데, 영조 때 궁궐의 옛터에 비를 세워 표시하라는 명에 따라 세운 비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英祖實錄 31年 1月 28日》[주-D025] 공정대왕(恭定大王) : 태종(太宗)이다. 공정은 명나라에서 받은 시호이다.[주-D026] 공정왕(恭靖王) : 정종(定宗)이다. 공정은 명나라에서 받은 시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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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언 별집 제9권 / 기(記) / 소요산기(逍遙山記)
소요산은 양주(楊州) 고을에서 북쪽으로 40리 되는 곳으로, 대탄진(大灘津)에 20리 못 미쳐서 있으며, 왕방산(王方山)의 서쪽 기슭 별산(別山)이다. 골짜기 입구 안팎의 산 아래 사는 사람들이 서로 전하기를,
“왕궁의 옛터 두 곳이 무성한 풀 속에 섬돌 두어 개만 남아 있는데, 이것은 영락(永樂) 연간에 태상왕(太上王)이 머물렀던 행궁(行宮)이다.”
한다. 서울까지의 거리가 100리이고, 풍양궁(豐壤宮)까지의 거리 또한 100리이다.
골짜기 입구에는 버려진 우물의 돌난간이 있다. 산속으로 들어서면 산이 온통 돌이어서 봉우리며 골짜기, 장명등, 다리가 모두 돌이고, 산의 나무는 소나무, 단풍나무, 철쭉나무가 많다.
궁궐 터의 남쪽은 산의 돌이 아주 높고 가파르게 솟았는데, 가장 높은 곳에 백운대(白雲臺)가 있고, 조금 아래에 중백운대(中白雲臺)가 있고, 또 조금 아래 동북쪽으로 하백운대(下白雲臺)가 있는데, 실제로는 하백운대가 중백운대 위에 있다. 궁궐 터 위에는 높이가 8, 9인(仞) 되는 폭포가 있고, 그 밑으로 그늘진 벼랑을 따라 중백운대로 올라가면 굉장히 큰 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빈 터만 남았다. 폭포 옆에는 10여 인 되는 절벽에 나무를 비스듬히 걸쳐서 사다리를 만들어 놓았는데, 여기로 올라가면 원효대(元曉臺)가 나오고 원효대를 지나면 소요사(逍遙寺)가 있다.
소요사의 벽기(壁記)에,
“신라의 중 원효가 이 산에 머물렀고, 그로부터 300년 뒤인 갑술년에 고려의 중 각규(覺圭)가 태상왕의 명을 받들어 정사(精舍)를 지었다. 200년 뒤인 계유년에 이 정사가 불에 탔고, 그 이듬해 갑술년에 관동(關東)의 중 각령(覺玲)이 불전(佛殿)과 법당을 중건하였다.”
하였는데, 목암(牧庵)의 기문에는,
“원효는 신라 태종(太宗)과 문무왕(文武王) 때의 중이니, 그 연대를 따져 보면 신라 태종 때부터 우리 강헌대왕(康獻大王) 갑술년까지는 767년이 되고, 또 만력(萬曆) 갑술년까지는 180년이 된다. 그런데 벽기에 300년이라고 한 것은 무슨 이유란 말인가.”
하였다.
동쪽 모퉁이에서 폭포를 구경하였는데, 폭포 위에 5, 6장(丈)이나 되는 큰 바위가 절벽을 내려다보고 있다. 암벽 사이의 구멍에서 졸졸 흘러나오는 샘물은 원효정(元曉井)이다.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산 따라 위태로운 다리를 건너 / 循山渡危橋
실 같은 길 조심조심 걸어가누나 / 疊足行線路
그 위의 백 길 높이 산꼭대기에 / 上有百仞巓
원효대사 일찍이 절을 지었지 / 曉聖曾結宇
신령한 그 자취는 어디로 갔나 / 靈蹤渺何處
초상은 흰 비단에 남아 있는데 / 遺影留鵝素
찻물 긷던 샘에 고인 수정 같은 물 / 茶泉貯寒玉
마셔 보니 그 맛이 젖과 같구나 / 酌飮味如乳
이곳에 그전에는 물이 없어서 / 此地舊無水
중들이 살아가기 어려웠는데 / 釋子難棲住
원효공이 한번 와서 머물게 되자 / 曉公一來寄
바위구멍 속에서 단물 솟았네 / 甘液湧碞竇
하였다.
암벽을 오르고 끊어진 골짜기를 따라 바위에 올라 구봉(九峯)을 바라보니, 산의 돌이 모두 기이하게 생겼다. 중봉(中峯)의 바위구멍을 지나 현암(懸庵)의 동남쪽으로 나와서 의상대(義相臺)에 오르니, 여기가 최정상이고 그 북쪽은 사자암(獅子庵)이다. 골짜기 입구에서 폭포를 지나 벼랑을 따라 의상대에 오르기까지의 높이가 9000장(丈)이다. 10월의 산은 깊고 골짜기는 음산한데, 아침에 비가 온 뒤라서 시냇가 돌에 낀 푸른 이끼는 봄과 같고, 단풍잎은 마르지 않았다.
금상 4년 계묘년(1663, 현종4) 10월 기해일에 공암 미수는 기록한다.
금상 4년 계묘년 10월 무술일에 내가 완산(完山) 이진무(李晉茂), 상당(上黨) 한균(韓均), 사위 이구(李絿), 이무경(李茂卿)의 세 아들 원기(遠紀)ㆍ정기(鼎紀)ㆍ현기(玄紀)와 함께 소요사에서 잤다. 그 이튿날 같이 의상대 아래에서 놀고, 인하여 제명(題名)하였다.
공암 허목은 쓴다.
원효대 아래 폭포 옆 바위구멍에 또 제명하고, 저녁에 무경(茂卿)의 청초 별업(靑草別業)에서 잤다. 이튿날 대탄진(大灘津)을 건너 10리를 가서 구절탄(九折灘)에 있는 이생(李甥)의 계장(溪莊)에 당도하니, 옛날 화암(花巖)의 별업(別業)으로서 산수가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미수는 기록한다.
[주-D001] 영락(永樂) …… 행궁(行宮)이다 : 영락은 명나라 성조(成祖, 재위 1403~1424)의 연호인데, 여기에는 조선 태종 초기인 1403년 무렵을 가리킨다. 태상왕은 태조 이성계이다. 태종이 왕자의 난을 통해 보위에 오르자,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 태조가 궁궐을 떠나 소요산 행궁에 머물렀다.[주-D002] 풍양궁(豐壤宮) : 지금의 남양주군 별내면에 있었던 이궁(離宮)으로,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 머물렀던 곳이다.[주-D003] 화암(花巖) : 최유원(崔有源, 1561~1614)의 호가 화암이기는 하지만 이곳과 연관이 있는지는 밝히지 못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조순희 (역) |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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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전당집 제2권 / 시(詩)○오언율(五言律) / 풍양 지나는 도중에〔豐壤途中〕
하루 종일 모래바람에 고생하니 / 盡日風沙苦
비로소 한식날의 슬픔을 알겠네 / 方知冷節悲
황량한 촌이라 사람 말소리 적고 / 村荒人語少
짙은 구름 속에 말발굽이 더디네 / 雲暗馬蹄遲
옛 궁궐엔 부서진 주춧돌 남아 있고 / 故闕餘殘礎
새로운 무덤엔 작은 비석이 서 있네 / 新阡有短碑
인빈(仁嬪)의 무덤이 이곳에 새로 조성되었다.
상심하여 흥망성쇠를 읊어보지만 / 傷心賦興廢
너무도 슬퍼 문장 이루지 못하네 / 悽斷不成詞
두 번째〔其二〕
우리 태조대왕이 영북(嶺北)에서 와서 이 궁에 몇 년 머무셨다.
옛 궁전의 터가 남아 있어 / 故殿遺墟在
올라보니 마음 서글퍼지네 / 登臨一悵然
한양에 처음 도읍을 세우고 / 漢都初定鼎
풍양에 머문 해 언제였던가 / 豐邑更何年
황폐한 동산은 촌길과 이어지고 / 廢苑連村陌
무너진 담장은 전야와 이어졌네 / 頹垣接野田
늘 당시의 일이 의심스러우나 / 每疑當日事
나는 묵묵히 말하지 않으려오 / 默默欲無言
[주-D001] 풍양(豐壤) :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군이다.[주-D002] 인빈(仁嬪) : 선조(宣祖)의 후궁인 인빈 김씨(仁嬪金氏, 1555~1613)로, 추존왕 원종(元宗)의 생모이자 인조(仁祖)의 할머니이다.[주-D003] 우리 …… 머무셨다 : 태종(太宗)이 왕자의 난을 통해 보위에 오르자, 태조(太祖)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함흥(咸興)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풍양궁(豐壤宮)에 머물렀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이승용 (공역) |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