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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없는 밤 달 필 때
-『휘영청』을 중심으로 한 이정환 시 세계
박진임(문학평론가·평택대학교 교수)
Go, go, go, said the bird: human kind
Cannot bear very much reality.
Time past and time future
What might have been and what has been
Point to one end, which is always present.
-「Burnt Norton, Four Quartets」by T.S. Eliot
가라, 가라, 가라! 새는 노래한다. 인간은 현실을 견뎌내지 못하나니.
지나간 시간, 다가올 시간
있었을 법한 일도, 있었던 일도
모두 언제나 한 곳을 향하노니, 현재라는 시간을.
-T.S. 엘리엇의「불타버린 노튼, 4개의 4중주」에서 (필자번역)
1. 적멸을 향한 노정
이정환 시인의 시편들은 인간 삶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을 드러내고 있다.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무력한 미물로서의 인간, 그 본성에 대한 인식 또한 두드러지게 보여준다. 그의 시편들에서는 자연 속의 꽃, 새, 햇살, 산, 바람, 바위 등의 시어들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자연을 그리면서 서정을 묘사하는 것은 고시조와 현대시조의 작시의 전범에 해당한다. 2015년 간행된 휘영청 시집에 이르러 이정환 시인은 그러한 보편적인 작시법을 일정 부분 넘어서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전의 「애월바다」 나 「삼강나루」에서 보여주던 서정의 충일이 절제되면서 대상과의 거리가 확보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한 서정의 지양이 가능하게 된 것은 시인이 적멸의 시간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그러한 자각이 시편 전반의 밑그림이 되었기 때문이다. 연륜과 함께 지혜로워지는 시인이 바라보아야 할 바람직한 방향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영국 시인 T.S. 엘리엇의 후기 시편들이 교술적인(didactic) 양상으로 변모되면서 철학적 사유을 담백하게 그려내고 있듯이…….
“인간은 현실을 그다지 잘 견뎌내지 못한다”고 엘리엇은 노래한 바 있다. 우리 시대의 현실 또한 엘리엇이 그린 1930년대의 유럽의 현실만큼 견디기 어렵다. 이정환 시인의 「팽목항」과 「맹골 바다」시편이 보여주듯 ‘세월호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대량 살상의 재앙이 우리의 현실을 보여준다. 전쟁에 버금가는, ‘견뎌내지 못하’게 만드는, 고통스러운 현실이다. 두 번의 세계대전은 오래 전에 끝났지만 수백 명의 인명이 어느 날 수몰되는 현실에서 우리 또한 보이지 않는 전쟁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섬찟한 느낌을 갖곤 한다. 현재라는 시간대는 감당하기 어렵다. 현실을 견뎌내는 방식으로 때로는 과거의 기억을 간직하여 되살리기도 한다. 더러 초현실적인 유미주의의 세계로 도피하기도 한다. 적멸의 시간을 상상하며 그 날의 모습을 그리는 이정환 시인은 “다가올 시간”을 인지하고 순종의 자세로 “현재”를 받아들이라고 이른다.
아지랑이 감실대고
살구꽃 피는 날
메뚜기도 짐이 될
그날은 오리니
검정 옷
조문객들만
분주히 오갈 그날
은줄 연해 풀리고
금 그릇 깨어지고
샘 곁에서 항아리들
일시에 부서져서
흙바람 들이치리니
산으로 떠날 그날
-「그날」
아지랑이 피고 살구꽃 핀 날, “흙바람” 속에 “산으로 떠날” 모습으로 자화상을 미리 그려두고 있다. “검정 옷 조문객들”이라는 구절에 이르러 “검정”이라는 색채의 한정사 앞에 순간 멈칫한다. “조문객”이라면 필경 “검정 옷”을 입고 올 것이다. 그렇다면 “검정 옷 조문객들”은 오랜 시력의 시인이 골라낼 만한 적절한 시어가 아니라고 판단된다. 자명하여 상투어로 들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부러 “검정 옷”을 다른 말로 대체할 선택권 자체를 포기한 것으로 해석해본다. 곳곳에 부려둔 나긋나긋한 느낌의 말들과 색채의 시어들, 이를테면 “감실대고”“살구꽃”“은줄”“금 그릇”과 강한 색조의 대비를 이루며 적멸의 황폐한 시공간을 시각적으로 제시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삶의 시간들이 밝고 환하고 빛난 만큼, “분주”한 조문객들의 “검정 옷”으로 가득 찬 그 곳, 그 시간의 고적을 강조하는 장치로 받아들일 수 있다.
살아간다는 것은 눈부시게 황홀한 일이다. 삶이 주어지던 순간,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음에 대해서는 자각이 있을 수 없다. 기쁨도 감사도 없고 원망을 물론 없다. 무지와 순수로 시작한 인생길의 어느 노상에서 문득 그 길의 다른 끝을 보고 설 수 있다니... 그런 자각이 가능하다니! 그런 의미에서도 인간이라는 동물의 본성은 오묘하다. 처음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길이 인생길이다. 그런데 돌아간 그 곳이 처음 왔던 그 곳임을 인식하는 것은 되돌아가 그 곳에 다시 도착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그래서 엘리엇은 또한 노래했다.
We shall not cease from exploration
And the end of all our exploring
Will be to arrive where we started
And know the place for the first time.
-「Little Gidding, Section V」 by T.S. Eliot
우리는 탐색을 쉬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모든 탐색의 끝은 처음 시작했던 곳에 이르는 것,
그리고 그 곳을 처음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T. S. 엘리엇의 「리틀 기딩」 중 (필자 번역)
이정환 시인은 따뜻한 봄날, 꽃 피는 시간에 “처음 시작했던 곳에” 이르고자 하는 희구를 간직하고 있다. 미국 원주민의 노래에서 발견된 황홀한 적멸의 모티프를 다시 본다.
차디찬
바람 속에
다시
꽃 핀 것 보고
새가
내려 앉아
그 꽃
살피는 것 보고
기쁘게
받아들여지기
바라나니
이 봄날
-「열납」
달리 무엇이 더 필요할까? 계절이 순환하듯 생명은 조금씩 소멸점을 향해 이동하고 있는데 누군가 있어 고이 받아들여주기를 바랄 밖에는... 바람에 이어 꽃이 등장하고 꽃을 따라 새가 날아든다. 그 바람과 꽃과 새가 빚어내는 풍경의 아름다움은 시간상으로는 “이 봄날”을 거느리며 더욱 부각된다. 꽃은 그냥 핀 것이 아니라 “다시” 핀 꽃이다. 인고의 시간을 견디고 순환하는 자연의 이치를 현현하기 위해서인 듯 개화한다. 상징적으로 꽃피는 것이다. 새는 그저 무심히 내려 앉아 꽃의 아름다움을 탐하지 않는다. “그 꽃 살피는” 새로 그려지면서 꽃의 존재 양상에 적절히 호응한다. “꽃 살피는”새의 존재는 시인이 지향하는 기독교적 사랑을 현현하고 있다. 서로 용납하고 도우며 존재하는 상생과 공존의 미학을 그려내는 데에 있어 시인이 필요로 한 것은 단 둘이다. “다시” 핀 “꽃”과 “살피는” “새”인 것이다. 꽃과 새가 어울려 함께 봄날의 풍경을 완성하고 있으므로 이제 시인은 본향으로 돌아가도 좋으리라 안심하며 미소 짓는 듯하다. 시인은 받아들일 주체를 굳이 호명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 대상이 누구이든지간에 오로지 “받아들여지기”를 기원할 따름이다. 그것도 “기쁘게” 받아들여지기를 희망한다. “차디찬”으로 시작하여 “이 봄날”로 마무리되는 짧은 순환의 시간 속에 단촐한 화조의 이미지가 생성하는 온화한 조화의 공간을 함께 빚어 넣고 시인은 눈 감은 채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 “기쁘게 받아들여지기”를 꿈꾸고 있다. “바라나니/ 이 봄날”의 매듭이 단아하다.
2. 눈썹 같은 달이 피어날 때
자연의 물상들에 서정을 투사하고 은유로 묘사하고 또 추억으로의 여행을 위한 매개체로 이용하는 것은 오래된 시의 전통이다. 자연이 인간의 욕망과 기억을 추동하는 기제이거나 삶의 비의를 넌지시 제시하는 상징으로 작동하는 것 또한 관습적이다. ‘달’은 그 중 대표적인 것이었다. ‘달’을 떠올리면 시를 생각하게 된다. 2016년 개봉된, 엘레노어 코폴라(Eleanor Coppola) 감독의 영화 ‘파리로 가는 길, Paris Can Wait’은 인생의 사소한 아름다움들을 아낌없이 스크린에 담아내어 딜레탕트(dilettante)의 문화적 허영심을 충족시켜준다. 관객으로 하여금 여행길에 펼쳐지는 다양한 삶의 풍미를 공유하게 한다. 낮 시간에는 쇼비뇽 블랑 와인과 보랏빛의 라벤다 들판, 달팽이 요리와 옷감들이 간직한 전설이 펼쳐진다. 이어 날이 저물자 차 안에는 에릭 사티(Eric Satie)의 음악이 흐른다. 그 때 차창 밖에서 손짓하는 이른 저녁달을 보며 여주인공, 앤(Ann)의 역할을 맡은 배우 다이앤 레인(Diane Lane)은 하이쿠 한 구절을 낭송한다. 매우 단순하여 달리 의미를 찾기 어려운 두 줄짜리 시 한 편이 영화의 흐름 속에서 순간 신선하게 살아난다. 8세기의 일본 시인, 오또모 노 야까모치(Otomo No Yakamochi)의 시이다. “When I see the New/first moon, faint in the twilight/ I think of the moth eyebrows/ Of a girl I saw only once. 해질녘 희미한 초승달 보네, 딱 한 번 보았던 소녀의 아미(蛾眉)가 생각나네.“ 초저녁 희미한 새 달을 보고 기억 속의 예쁜 소녀를 떠올리는 것이 무어 색다를 것이 있으랴? 그러나 영화의 그 장면은 결단코 인생의 승화를 보여주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인생 항로를 상징하는 짧은 여행길에서 문득 다가온 자연의 한 대상을 두고 시귀 한 줄을 떠올린다는 것, 그것은 속(俗)으로부터 벗어나 성(聖)을 경험하는 체험, 예술적 혹은 심지어 종교적 초월의 순간에 해당하는 것이다. 라벤다의 향기를 느끼게 하는 후각의 작용처럼, 우리가 옷감의 결을 촉각으로 느끼듯, 감추어졌던 삶의 미학을 시 한 줄이 슬며시 드러낸다. 미당 서정주의 「동천」에서도 달을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이라고 했던가? 미당이 일본시의 모티프를 빌어 왔는지 혹은 아시아인의 정서에서는 달은 ‘님의 눈썹’으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지 알 길이 없다. 시의 승화작용이 참기 어려운 현실을 잠시 넘어서게 한다는 것을 그 장면에서 긍정하면 될 일이다. 아름다움을 음미하는 프랑스식 삶의 한 정점에 시가 놓여있음을 느낄 수 있으면 그만이리라.
문학 텍스트는 시공간을 넘어 세계 곳곳을 여행한다. 가는 곳마다 조금씩 달리 받아들여져도 무방하다. 오히려 그 수용의 차이가 텍스트를 더 풍요롭게 만든다. 8세기 일본 시인의 정서가 여행을 통해 21세기 영화에 등장한다. ‘여행하는 텍스트’로 세계 문학을 이해하게 만드는 무수한 예들 중의 하나이다. ‘달’과 ‘사랑하는 이의 눈썹’이라는, 이제는 진부한 시적 장치조차 영화 속 어느 장면에서는 아름답게, 새로이 작동함을 볼 수 있을진대, 이정환 시인의 「달 필 때」는 달을 향한 매우 참신한 시적 상상의 세계를 열어젖힌다. 이제 달은 더 이상 ‘뜨지“ 않을 것이다. 시인의 상상력의 세계에서 다시 빚어진 이미지로 인하여 달은 꽃 피듯 ”피“어날 것이다.
붉은
바위 틈서리
한 마리
두꺼비 등에
달빛
내려앉고
달맞이꽃
내려앉아
두꺼비
바위가 되고
바위는
두꺼비 되고
-「달 필 때」
피어나는 것은 달맞이꽃이련만 달맞이꽃은 달 맞으려 피어나는 것이다. 그 달맞이꽃 더불어 함께 달이 피어난다. 달이 꽃처럼 피고, 달맞이꽃이 달 뜨 듯 둥실한 시간, 시인의 아내가 무심결에 발화한 “달 필 때”는 참신하고 강렬한 메타포가 되어 새로운 상상력의 시공간을 열어젖힌다. 하늘과 땅이 조화를 이루며 한 편의 음악을 빚어낼 때 시인과 시인의 아내를 포함한 천지만물도 그 웅장한 교향곡의 일원으로 스며든다. 모두가 “피는” 시간이다. 그래서 “두꺼비”는 “바위”가 되고 바위는 두꺼비가 된다. 달과 달맞이꽃의 경계가 흐려지고 각 주어를 서술하는 술어가 교차할 때 그렇듯 바위와 두꺼비도 하나로 섞여드는 것이다.
3. 떨칠 일과 버티는 일
「달 필 때」가 자연에 조화롭게 호응하는 시적 자아를 노래한 시편이라면, 『휘영청』에 수록된 이정환 시인의 다른 시편들은 대체로 대상과의 거리감과 시적 자아의 고적함을 그리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궁극적인 적멸의 순간에 대한 강한 자의식을 지니고 있는 시인이므로 과도한 감상성이나 낭만성으로 그 고적을 그리지 않는다. 살아간다는 일의 아득하고 막막함을 담백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정환 시세계의 스펙트럼은 극단의 두 영토를 아우르는 것이었다. 그의 대표작 중에 「애월바다」와 「전보」가 포함될 것이다. 그 두 편의 텍스트가 두 극단을 보여준다. 「애월바다」가 넘치는 서정성으로 출렁이는 바다에 닿아있다면 「전보」는 서정적 자아가 완전히 꼬리를 감추고 동면에 든, 결빙의 영토를 보여주었다. 「애월바다」는 바다의 풍광을 배경으로 목메는 그리움을 절절히 그려낸 작품으로 꼽힌다. 영어 단어 중 visceral이라는 단어를 연상시키는 시편이 그것이다. visceral, ‘본능적이고 감각적인, 내장의’라는 뜻을 가진 그 단어가 지시하는, 애 끊는 그리움이 그 시편에 담겨있다.
사랑을 아는 바다에 노을이 지고 있다
애월, 하고 부르면 명치끝이 저린 저녁
노을은 하고 싶은 말들 다 풀어놓고 있다
누군가에게 문득 긴 편지를 쓰고 싶다
벼랑과 먼 파도와 수평선이 이끌고 온
그 말을 다 받아 담은 편지를 전하고 싶다
애월은 달빛 가장자리, 사랑을 하는 바다
무장 서럽도록 뼈저린 이가 찾아와서
물결을 매만지는 일만 거듭하게 하고 있다
-「애월바다」
「애월바다」에서 보여준 절절한 정념, 대상을 향한 충일한 감정의 세레나데는 「삼강나루」에서 더욱 고조된다.
나는 나를 거두어 네게로 가겠다
삼강이 별빛처럼
입맞춤하는 그 곳
강 저편
갈대 사이의
네게로 가겠다
이젠 삼단머리 풀어 내리지 않아도
옥색 앞섶자락 풀어 헤치지 않아도
마침내
네게로 가겠다
강물소리 차디찬 밤
-「삼강나루」
다시 엘리엇의 시를 새겨보자. 엘리엇은 시간에 대한 그의 사유를 건조하게 시로 읊었다. 인간은 현실을 그다지 잘 견뎌내지 못한다고 노래한 다음, 기억의 발자국을 따라 내려가 이전에 열어보지 않았던 문을 열고 장미 정원으로 가보라고 권유했다.
Footfalls echo in the memory
Down the passage which we did not take
Towards the door we never opened
Into the rose garden. My words echo
Thus, in your mind.
-「Burnt Norton, Four Quartets」by T.S. Eliot
발자국 소리, 기억 속에 울려나온다.
전에 가 본적 없는 길을 따라 내려가
한 번도 연 적 없는 문을 열고
장미 정원으로 가거라.
그리하여 내 소리가 너의 가슴 속에 울릴 것이니.
-T.S. 엘리엇의 「불타버린 노튼, 4개의 4중주」에서 (필자번역)
이정환 시인은 「어떤 저녁」에서 기억을 찾아가는 대신 견디며 살라고 노래한다. 견디는 것으로 삶의 찬가를 부르라고 이른다. 시인은 견디는 일을 ‘견디다’는 어휘로 표현하지 않는다. 더 강한 은유를 내포한 “버티는” 일로 이를 치환하고 있다.
뒤란 우물 곁
감나무 가지 끝
남은 감 한 알이
버티고 있는 저녁
버티고 버티는 일의
그 끝을 보는 저녁
-「어떤 저녁」
「어떤 저녁」은 미국 소설가 이어네스트 헤밍웨이(Earnest Hemingway)의『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의 주제를 생각나게 한다. 상어에게 잡은 고기를 다 뜯기고 뼈다귀만 남긴 채 돌아왔지만 그래도 다시 삶을 계속하는 노인의 이미지를 환기시킨다. 그래서 「어떤 저녁」은 생존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하는, 우리 시대 삶의 가장 큰 교훈 중 한 가지를 노래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노인과 바다』에서 헤밍웨이는 말했다. “노인은 더 이상 꿈을 꾸지 않는다.” 꿈은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더 많을 때에 그 삶을 견인하는 것이라는 말일까? 꿈꾸지 않고도 살아가는 날들은 어떤 것일까? 무수한 예술가들이 찬란한 꿈을 그려내 왔다. 그렇다면 이제 꿈꾸지 않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예술가의 역할은 꿈 없는 삶을 그려내는 것이 아닐까? 시인이여, 소설가여, 부디 그려내어 주시길……. 꿈 없는 밤을 새며 지내는 법과 꿈 없는 세상을 꿈꾸듯 살아가는 일을!
꿈 꿀 나이가 지난 중견의 시인이 “버티는 일”, “그 끝”을 노래하고 있다. 시간은 저녁이다. 인간은 견디기를 잘하지도 못하는 존재이다. 언젠가부터 꿈 꿀 일도 없어질 것이다. 꿈을 꾸려고 해도 꾸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고기를 잡아도 갖고 돌아올 것은 없는 『노인과 바다』의 노인들이다. 엘리엇이 노래했듯 “있었을 법한 일”도 “있었던 일”도 모두 현재로 수렴될진대, 시대의 아픔을 넘어 삶의 질곡을 넘어 살아가는 일의 당위와 살아갈 힘을 찬양해야 할 때이다. 우물가 감나무의 마지막 감 한 알, 그 “버티는 일”의 거룩함을 노래하는 저녁이다. “그 끝을 보”게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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