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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암집(大菴集) 박성(朴惺)생년1549년(명종 4)몰년1606년(선조 39)자덕응(德凝)호대암(大菴)본관밀양(密陽)특기사항곽간(郭趕), 배신(裵紳)의 문인. 곽준(郭䞭), 장현광(張顯光) 등과 교유
大菴先生集卷之三 / 墓誌銘 / 郭存齋墓誌銘
郭䞭 | 1551 | 1597 | 玄風 | 養靜 | 存齋 | 忠烈 |
公諱䞭字養靜。姓郭氏。玄風縣人。高祖諱安邦。通訓大夫益山郡守。以淸白著名。曾祖諱承華進士。遊佔畢門。祖諱𤧞。屢擧不中。考諱之完。娶進士鄭玉堅之女。有明嘉靖辛亥。生公于縣之率禮里。公溫良忠信。恬靜寬厚。和柔而堅。坦夷而直。於凡外物泊如也。少長有成人之度。宗黨器重之。年十八。從同縣裵洛川紳受大學。聞格致誠正之說而心慕之。踰冠聞寒岡講道。遂往來聞前所不聞。始知賓主內外辨。雖親老家貧。不免就試。其志不在外慕焉。丙子罹內艱。哀誠自致。泣涕白其大人曰喪禮不行久矣。非禀寒岡。無以復古。遂推本古經。以正流俗失謬。至如冠昏喪祭。咸遵用古禮。士人有取以爲式。孝友出性。又申以學問之力。愉色婉容。左右承籍無違。親或有過則必積誠感通。開義理曉喩。起孝敬以熟諫。惴惴焉恐或有失。事兄愛敬俱至。臨不義則雍容納䂓。亦不失驩。友弟赾最篤。勉進以志業。親心悅豫聽信。兄弟旣翕。和氣習習滿室。又推廣之。睦宗族婣外親而信於交友。一時聞人贒士樂與之遊。己丑丁外艱。廬墓三年。跡不出廬外。服闋不復應擧。立書室三間。扁曰存齋。蚤夜整巾衣。日覽觀遺篇。專精力學。識見漸進。喜與勝己者友。考疑就正。則窮晝夜亹亹不怠。世間聲利。自不入心計。妻子凍餒。猶曠然也。未甞對親舊言貧。中歲喪配。矜居八九年。恬然獨處。制行之嚴。絶過人矣。與余生同閈。昕夕游從餘三十年。切偲有麗澤益。聞人善若己有之。視惡辨而不間。遇童穉有一藝。欣喜奬勉。惟恐不成其美。見鄕人俗子。輒油油笑談。賢者慕其德。不肖者感其和。敎子弟必先小學。繼以四書。飭勉孝悌禮義。皆溫恭和順。知愛親敬長之道。且以內則女訓敎女。使知貞孝可法。蚤嬰濕痺。自以學不博爲慊恨。而其靜存動察之功。不以病作輟。雖未及究極精微。其所謂二之中者歟。甞與金公沔友善。逮起義旅。公佐其幕。多裨補軍政。時金公誠一廵察慶尙右道。素聞公賢。以軍勞上。除自如察訪。治屯田有績。未幾朝廷選擢才俊。公作宰安陰。政尙寬仁。民愛戴之。豪猾無不誠服。丙申冬體察使李公元翼知公有守。遂啓達。令公領三邑軍守黃石城。以金海府使白士霖將之。士霖守東北。公守西南。及賊門于南。公躬射賊。晝夜督戰不小懈。賊不敢近。士霖使報曰劇賊薄城。得無畏乎。公厲聲曰旣以死守。何畏之有。士霖遂與其兵遁。俄有大呼者曰白將旣走。太守何獨不出。公怒曰此人訛言動衆。可斬之。使人往視之。城東北已空矣。於是士卒守西南者。逃遁不可遏。子壻等號泣曰事急矣。何不早爲謀。公凝然不動曰吾已分死矣。又曰不焚軍械。卽爲賊有。遂焚之。及城陷。公據胡床爲大將容儀。顔色不少變。竟遇害。時年四十七。二子亦抱父同死。萬曆丁酉八月十八日也。長女與夫壻柳文乕走出城。柳爲賊所虜。則曰吾獨出者爲夫也。夫旣見虜。何忍生爲。遂縊死。公弟赾間關賊路。斂公尸于黃石。安陰士人莫不痛惜之。匍匐護喪。其遺愛可知。十一月載公若二子櫬。返葬于縣西花山先壠之側。公有其弟矣。其歿也。友朋長號。聞風者隕涕。君子於是乎知公之學有定力。能守死善道也。事聞自上贈通政大夫工曹參議。二子咸贈工曹佐郞。翊年春。遣官賜祭。其文曰從容就死。死亦有榮。二子殉焉。節孝雙成。噫聖上之褒忠孝亦至矣。公配全基遠之女。生二男。長履常。溫柔遜悌。娶愼希陽女無子。次履厚。淳質沈默。所謂二子死孝者也。女長適柳文乕。柔嘉有婦道。死於貞。
季適姜遵。嗚呼。以公之學之行。揚于王庭。則德業施設。必有人所不及者。而不幸無位年以終。可勝惜哉。雖然世敎不明。綱常幾乎墮地。食君食衣君衣者。知有其身。不知有君父。自公之死。凡爲臣子者。知所勸戒。若公者可謂昭天理於旣泯。回人心於旣死者也。甞觀古之人。死於死者或有之。其能樹三綱於一家。爲宇宙之棟樑者。有幾人哉。公歿之十年。赾以我雅知公。請識懿行。辭以不文而請愈勤。顧義不可終辭。敢揮涕屬筆而係以銘。銘曰。
名利滔天。士不知學。慢棄彜倫。懵不省覺。號稱道學。鮮克爲己。內無實得。外餙觀美。臨小利害。猶未堅執。况當死生。詎能卓立。公禀美質。長厚淳篤。力學明善。存省謹獨。務本着己。唯古寔師。不放尺寸。繩準矩規。孝親敬兄。引喩道義。懋遵禮經。行懿敦至。移孝于忠。獨守孤城。鄒訓生義。知所重輕。從容就死。怡然若歸。殺身成仁。烈烈巍巍。生平實見。則驗于終。惟子與女。禮義餙躬。顚沛不違。貞孝之風。惟彼髯婦。忘義畏縮。聞公伏節。寧不羞恧。猗歟一身。植立三綱。行通神明。名與天長。公歿其寧。我爲公悲。嗚呼若人。而至於斯。嗟尒來裔。思殫厥軄。欲考其德。視此銘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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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복집(愚伏集) 정경세(鄭經世)생년1563년(명종 18)몰년1633년(인조 11)자경임(景任)호하거(河渠), 승성자(乘成子), 석총도인(石潨道人), 송록(松麓), 우복(愚伏)본관진주(晉州)초시문숙(文肅)개시문장(文莊)특기사항유성룡(柳成龍)의 문인. 이전(李㙉), 이준(李埈)과 교유
愚伏先生文集卷之十七 / 碑銘 / 贈兵曹參判郭公神道碑銘 幷序
郭䞭 | 1551 | 1597 | 玄風 | 養靜 | 存齋 | 忠烈 |
國家昇平百年。城復于隍。中外恬憘。忘戰已久。猝遇壬辰之變。如河流橫潰。汎濫衝決。所過城邑。不能爲蕭葦之防。遂致三都失守。五廟成灰。自古兵戎之禍。未有慘於此者。獨賴先王禮義之化浹人心髓。凡列于士夫者。皆知賊之不可從。君父之不可背。雖堅脆不敵。恇怯駭散。而終無一人開門迎納。詣壘投降者。至於爲國捐軀。橫屍戰場者。往往而有焉。此又前史之所罕也。然其死也或激於倉卒意氣。或迫於事勢窮蹙。則可謂之殺身。而于成仁有歉焉。求其無歉於是者。則指不能以屢屈。而安陰縣監郭公卽其一也。公之守黃石山城也。爲縣僅二朞。而恩信惻怛。已孚於民。都體察使李公元翼以黃石爲湖嶺咽喉。賊所必爭。法當守。以公忠實而剛毅。且得吏民心。必能守。遂隷以三邑兵。使扼其吭。且以公書生不習兵。令金海府使白士霖助之戰。公乃修治哨堞。積儲糧械。爲死守計。且與士霖約。分城以守。公守西南。士霖守東北。明年賊大至。門于南。公躬督戰。晝夜不懈。士霖欲棄城走。陰使人餂之曰。賊盛而逼。豈不怖哉。公厲聲曰。吾已分死無怖矣。士霖知不可說。乘夜縋下其妻子。卽與手下兵遁。軍吏走報曰。白公已逃。請速出。公曰。此奴訛言熒惑。當斬。使人視之。城東北空矣。於是城中波析。不可禁遏。子壻及吏民等皆號泣以請曰。事已至此。願早爲計。公笑曰。此城乃吾死所。何計之更爲。指軍器曰。不可以籍寇命。悉焚之。明日賊登城。公毅然踞胡床。神色不變。竟遇害。嗚呼。不旣從容矣乎。謂之無歉於成仁者非耶。當是時。棄城而不死。亡陣而享爵祿者。前後相望。公所熟見。士霖之終不伏軍律。亦童子之所知也。惟其熊魚之辨。素定於平日。而心之所安。在於死職。故視士霖如盜賊犬彘。視雨砲電刃如飮食裘葛。不攝不亂。終不開後門以死。嗚呼壯哉。蓋公自寇深以後。以死難自許。一家女婦等亦皆佩以小刀曰。卽有不幸。以此自決足矣。前伏節數十日。與友人別有詩曰。廟堂平昔講經綸。此日男兒有幾人。滄海血流腥滿地。臨分相勖在成仁。至今讀之。凜然有生氣。其素定之堅確。於此亦可槩矣。是以。當時有識之知公者。聞黃石陷。莫不愕然失聲曰。嘻養靜其必死矣。養靜非苟活者。其志節之見必於人。有如此者。公諱䞭。養靜其字也。世爲玄風人。高祖諱安邦。益山郡守。以淸白稱。曾祖諱承華。進士。與寒暄同遊佔畢門。祖諱𤧞。嘗在都下應擧矣。己卯禍作。掃跡南歸。杜門不出。妻兄尹豐亨在銓地。擬一官貽書誚之。竟不爲所汚。幾及禍而免。考諱之完。妣草溪鄭氏。進士玉堅之女。公自少嶷然。有成人局量。及長。從遊師友間。知內外輕重之分。則雖爲親在。不免爲擧業。實無榮達念。親歿。遂不復詣場屋。築書室扁曰存齋。日處其中。專精硏究。有疑則資之勝已。亹亹不怠。一切外物。泊然不入心。雖妻子凍餒。夷如也。壬辰。金公沔糾合義兵。公素相善。佐軍幕。補益弘多。觀察使金公誠一聞其賢。以軍勞上。除自如道察訪。癸巳兵荒甚。餓殍滿野。公管諸邑屯田事。悉心經紀。得粟甚多。全活人不可紀。甲午秋。朝廷拔擢才俊。以不次待公。授安陰縣以去。
丁酉。死黃石。年四十七。公之死也。子履常,履厚抱持公罵賊。賊幷斫之。女隨其夫柳文虎走出城。夫爲賊所獲。哭曰。棄父出。爲夫也。夫被執。何用生爲。縊于樹以死。皆公之敎誨式穀。能有以似之也。事聞。先大王懿之。命幷旌其閭。贈公兵曹參議。遣官祭之。履常,履厚俱贈佐郞。廢主朝。加贈公參判。今上卽位。又遣官致祭。軫其無後。特賜守冢人。
公天姿粹美。性質醇愨。忠厚樸實。坦易明白。謙若不足而操執固。與物無忤而取舍辨。見人有一善一藝。誠心喜好。必爲之奬成乃已。遇鄕人俗子。亦不爲畦畛。與之由由。而終亦無自失焉。家居。篤於行義。事親盡其誠。怡愉于兄弟。睦姻于族黨。敎子女必以孝悌貞信。冠昏喪祭。必遵用禮經。嗚呼。玆其爲守死善道之本歟。
初娶全基遠女。生男二。卽履常,履厚。女二。長卽柳文虎妻。皆無子。季適縣監姜遵。有三男五女。
後娶安守恭女。無子。
始公之喪。公之弟參奉赾伏匿行入城。收瘞于城外。後數月。葬之玄風縣西花山先兆傍。後十年。諗于公之友朴君惺誌其竁間。又以書及朴君誌來屬余曰。吾仲氏之行。其大者在人耳目。子無不知。其細者。朴君非華而不實者。觀於誌而可徵。願得子一言刻石墓道。使有以不朽。惟吾子幸惠圖之。余惟公之不朽者自足以霆轟宇宙。與天壤俱弊。奚待乎揄揚。而又豈余之所及耶。獨念公嘗以勸相沿牒。屢往來于尙。尙之大夫士無不悅公之德。至今吃吃不離口。余時糊口湖中。未及際晤。常茹恨在心。尙覬他日得一執贄定交。當歡如平生。旣而聞公之死。則宿昔之願。不可得以償矣。爲之潸焉以悲。而仰公所立。又不啻如中河之砥柱。則輒爲之收涕而擊節焉。士固有曠世而神交者。況同時耶。余於公。直面目不相接耳。參奉君之所以屬筆於余者。意必以是歟。則又何可以蕪拙辭耶。遂掇朴君之誌。附以所聞於士友者。敍之如右。系以銘曰。
有氣浩然。充塞穹壤。人孰不受。患不能養。士方平居。說義說仁。禍福所怵。或棄君親。不見義重。但見生大。見豈不及。咎在氣餒。惟公所存。剛大以直。旣見死所。如矢赴的。勇往不顧。賁育莫奪。形毀理全。奚怨奚怛。父子四人。樑棟三綱。歷觀載籍。孰此煒煌。何彼不仁。謂公傷勇。死於封彊。聖所折衷。黃石之山。屹爲南紀。使山若礪。公名不死。
우복집 제17권 / 비명(碑銘) / 증(贈) 병조 참판 곽공 준(郭公䞭)의 신도비명 병서
나라가 태평을 누린 지 100년이나 되어 성(城)이 모두 무너져 해자(垓子)가 되고 중외(中外)의 사람들이 편안하게 지내면서 전쟁을 잊은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임진년의 변란을 만나 왜적들이 마치 강물이 마구 범람하면서 강둑을 무너뜨리는 것과 같이 쳐들어오자, 그들이 지나치는 성읍(城邑)들이 모두 소위(蕭葦)의 제방(堤防)조차 될 수가 없었다. 이에 드디어 삼도(三都)가 함락되고 오묘(五廟)가 잿더미로 화하였다. 예로부터 있었던 전란의 참혹스러운 화 가운데 이보다 더 참혹한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도 유독 선왕(先王 선조)이 편 예의(禮義)의 교화가 사람들의 마음과 골수에 흡족히 스며드는 데 힘입어, 사대부의 반열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왜적을 따라서는 안 되고 군부(君父)를 등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비록 견고하고 나약함이 서로 상대가 되지 않는 탓에 겁을 집어먹고 놀라 흩어지기는 하였지만, 끝내는 한 사람도 문을 활짝 열고서 왜적들을 받아들이거나, 보루로 달려가서 투항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면서 심지어는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전쟁터에서 죽어 시신이 된 자도 왕왕 있기까지 하였다. 이것은 또 전 시대의 역사에서는 보기 드문 것이었다. 그러나 그 죽음이 혹 창졸간의 의기(意氣)에 격동되어서 죽었거나 혹은 사세가 궁박한 데 몰려서 죽었거나 하였을 경우, 살신(殺身)하였다고는 할 수가 있으나 성인(成仁)하였다고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 여기에 대해 부족한 점이 없는 사람을 구해 보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얼마 되지 않는데, 안음 현감(安陰縣監) 곽공(郭公)이 바로 그런 사람 가운데 한 분이다.
공이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지킬 때에는 현(縣)을 맡아 다스린 지 겨우 2년밖에 안 되었는데도 은혜롭고 측달스러운 마음이 이미 백성들에게 미더움을 받았다.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이 황석산성은 호령(湖嶺) 지방의 요충지여서 왜적들이 반드시 빼앗으려고 할 것이니, 법에 있어서 마땅히 지켜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공이 충실하고 강직하며 또한 아전과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으므로 반드시 능히 지켜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이에 드디어 세 고을의 군사들을 공에게 주어 그들을 데리고 왜적들의 목을 조르도록 하였다. 그러고는 또 공은 서생(書生)이라서 병법(兵法)에 익숙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 김해 부사(金海府使) 백사림(白士霖)으로 하여금 공을 도와서 싸우게 하였다. 공은 이에 성채와 성가퀴를 수리하고 군량과 병기를 쌓아 두고서 죽음으로써 지킬 계획을 하였다. 그러고는 백사림과 약속을 맺고서 성을 나누어 지켰는데, 공이 서쪽과 남쪽 방면을 지키고, 백사림이 동쪽과 북쪽 방면을 지켰다.
그다음 해에 왜적들이 대거 쳐들어오자, 공은 남쪽에 있는 성문에서 몸소 밤낮없이 싸움을 독려하여 해이하게 하지 않았다. 백사림이 성을 버리고 도주하고자 하여 몰래 사람을 시켜 공을 꾀기를, “왜적들이 잔뜩 몰려 쳐들어오고 있으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하자, 공이 화를 벌컥 내면서 소리치기를, “나는 이미 죽기로 작정한 몸이므로 조금도 두렵지가 않다.” 하였다. 백사림이 공을 꾈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밤을 틈타 그 처자들을 밧줄에 매달아 성 밖으로 내보내고는 곧바로 수하의 군사들과 더불어 도망쳤다. 군리(軍吏)가 달려와서 보고하기를, “백공이 이미 도망쳤으니 속히 나가십시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놈이 거짓말로 현혹시키니 목을 쳐라.” 하였다. 그러고는 사람들을 보내 살펴보게 하니, 성의 동쪽과 북쪽이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이에 성안 사람들의 사기가 모두 꺾이어 도망치지 못하도록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아들과 사위 및 아전과 백성들이 모두들 울면서 청하기를,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일찌감치 계책을 정하소서.” 하니,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 성이 바로 내가 죽을 곳이다. 그런데 다시 무슨 계책을 하겠는가.” 하였다. 그러고는 병기(兵器)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왜적들의 손에 넘겨줄 수가 없다.” 하면서 모두 불태우라고 명하였다. 그다음 날 왜적들이 성 위로 올라오자 공은 의연히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신색(神色)을 조금도 변치 않은 채 있다가 마침내 해를 당하였다. 아, 이것은 이미 차분한 마음으로 죽음에 임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을 일러 자신의 몸을 죽여 인을 이루었다고 해도 부족한 점이 없다고 한다면, 잘못된 것이겠는가?
그 당시에 성을 버리고서도 죽지 않고 진(陣)에서 도망치고서도 작록(爵祿)을 누리는 자들이 전후로 잇달아 있어서 공이 충분히 본 바이다. 그리고 백사림이 군율(軍律)에 복죄(伏罪)되지 않을 것임은 어린아이들조차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생각건대 웅어(熊魚)의 분별은 본디 평소에 정해져 있는 바였으며, 마음에서 편안한 바가 직분을 수행하다가 죽는 데에 있었다. 그러므로 백사림을 보기를 도적이나 개돼지처럼 보았고, 쏟아지는 포탄과 번뜩이는 칼날을 보기를 음식이나 갖옷과 같이 보았다. 이에 두려워하지도 않고 어지러워지지도 않아 끝내는 뒷문을 열고 도망치지도 않고 있다가 의연히 죽었으니, 아, 장하기도 하다.
대개 공은 왜적들이 깊이 쳐들어온 이후로 국난(國難)에 죽기로써 스스로 허여하여, 온 집안의 딸과 며느리들에게 모두 작은 칼을 하나씩 차게 하고는 말하기를, “불행한 일을 당하게 되면 이것으로 자결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하였다. 절의(節義)에 죽기 수십 일 전에 벗에게 준 이별시(離別詩)에 이르기를,
묘당에서 평상시에 경륜 강구하였건만 / 廟堂平昔講經綸
오늘날에 남자답게 죽을 사람 몇몇이랴 / 此日男兒有幾人
창해에는 피 흐르고 땅엔 온통 비린내니 / 滄海血流腥滿地
헤어지며 서로 간에 인 이루자 권면하네 / 臨分相勖在成仁
하였는데, 지금도 그 시를 읽어 보노라면 늠연하여 기운이 생겨나는바, 공이 평소에 정한 바가 단단하고 확고하였다는 것을 여기에서도 잘 알 수가 있다. 이 때문에 당시에 공에 대해서 잘 아는 식견이 있는 자들이 황석산성이 함락되었다는 소리를 듣고는 모두들 깜짝 놀라 목놓아 울면서 이르기를, “아 양정(養靜)이 반드시 죽고 말았을 것이다. 양정은 구차스럽게 살아남지 않을 사람이다.”라고 하였는바, 그 지조와 절개를 다른 사람들이 기필하는 바가 이와 같은 점이 있었다.
공의 휘는 준(䞭)이고 양정(養靜)은 자(字)이다. 대대로 현풍(玄風)에서 살아 현풍인이 되었다. 고조는 휘가 안방(安邦)으로 익산 군수(益山郡守)를 지냈는데, 청백(淸白)으로 칭해졌다. 증조는 휘가 승화(承華)인데, 진사(進士)이며,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더불어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종유(從遊)하였다. 조고는 휘가 미(𤧞)인데, 일찍이 도하(都下)에 있으면서 과거 시험에 응시하였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자취를 거두어 남쪽으로 돌아가 두문불출하였다. 처형인 윤풍형(尹豐亨)이 전조(銓曹)에 있으면서 일관(一官)에 주의(注擬)하자, 편지를 보내어 꾸짖어서 마침내 더럽혀지지 않았으며, 화를 당할 뻔하다가 겨우 면하였다. 선고의 휘는 지완(之完)이고, 비(妣)는 초계 정씨(草溪鄭氏)로 진사 정옥견(鄭玉堅)의 따님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우뚝하여 성인과 같은 국량(局量)이 있었다. 장성함에 미쳐서는 사우(師友) 간에 종유하여 내외(內外)와 경중(輕重)의 분별을 알았다. 이에 비록 어버이가 살아 계시어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한 공부를 함을 면치 못하였으나, 실제로는 영달하고픈 생각은 없었다. 어버이가 돌아가시자 드디어 다시는 과장(科場)에 나아가지 않고 서실(書室)을 짓고는 존재(存齋)라고 편액(扁額)을 내걸고 날마다 그 속에서 지내면서 정신을 오로지하여 학문을 연구하였으며,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는데, 부지런히 힘쓰면서 게을리하지 않았다. 일체의 외물(外物)에 대해서는 담박하기만 해 마음에 두지 않았으니, 비록 처자식이 추위에 떨고 배고프게 지냈으나, 태연하기만 하였다.
임진년(1592, 선조25)에 김면(金沔)이 의병을 규합하였는데, 공이 평소에 그와 친하게 지냈으므로 군막(軍幕)에서 보좌하면서 도움을 준 바가 아주 많았다. 이에 관찰사로 있던 김성일(金誠一)이 공의 현명함을 듣고는 군공(軍功)이 있다고 아뢰어 자여도 찰방(自如道察訪)에 제수되었다. 계사년(1593)에 병란과 흉년이 심하여 굶어 죽은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였는데, 공은 여러 고을의 둔전(屯田)을 관할하는 일에 온 마음을 다해 경영하여 곡식을 얻은 것이 아주 많았다. 이에 목숨을 구해 살린 사람들이 이루 다 기록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았다.
갑오년(1594) 가을에 조정에서 재주 있는 사람을 발탁하면서 불차탁용(不次擢用)으로 공을 대우하여 안음 현감(安陰縣監)에 제수해 내려가게 하였다. 정유년(1597)에 황석산성에서 죽으니, 나이가 47세였다. 그때 아들인 이상(履常)과 이후(履厚)가 공을 끌어안고 왜적들에게 욕설을 퍼붓자, 왜적들이 그들까지 모두 죽였다. 딸은 남편인 유문호(柳文虎)를 따라 성을 나와 도망치다가 남편이 왜적들에게 사로잡히자, 통곡을 하면서 말하기를, “아버지를 버리고 성 밖으로 나온 것은 남편을 위해서였는데, 남편이 사로잡혔으니 살아서 무엇 하겠는가.” 하고는, 나무에 목을 매어 죽었다. 이는 모두가 공이 자식들로 하여금 선을 행하도록 잘 가르쳐서 능히 이와 같이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공에 대한 일을 아뢰자 선대왕이 아름답게 여기고는 모두에게 정문(旌門)을 내려 주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공에게는 병조 참의를 추증하고 관원을 보내어 제사 지내게 하였으며, 이상과 이후에게는 모두 좌랑을 추증하였다. 폐주(廢主) 때에 이르러서는 공에게 병조 참판을 더 추증해 주었다. 금상(今上 인조)이 즉위하고서는 또다시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으며, 후사가 없는 것을 불쌍히 여겨 특별히 묘를 지킬 사람을 하사해 주었다.
공은 천부적인 자질이 순수하고 아름다웠으며, 타고난 성품이 순후하고 정성스러웠다. 또한 충후(忠厚)하고 박실(朴實)하였고, 화평하고 명백하였다. 그리고 마치 모자란 사람처럼 겸손하였으나 지조를 잡음은 단단하였고, 상대방의 뜻을 거스르지는 않았으나 취하고 버림에 구별이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한 가지 착한 점이나 한 가지 재주가 있는 것을 보면 성심으로 기뻐하고 좋아하여 반드시 끝까지 다 이루도록 장려해 준 다음에야 그만두었다. 시골 사람이나 속인(俗人)을 만나더라도 역시 경계를 두지 않은 채 그와 더불어 즐겁게 지냈으나, 끝내는 역시 자신의 체신을 잃지는 않았다.
공은 집 안에 있으면서는 의(義)를 행하는 데 독실하여 어버이를 섬기는 데 정성을 다하였으며, 형제들과는 화락하게 지내고 종족들과는 화목하게 지냈다. 자녀들을 가르침에 있어서는 반드시 효제(孝悌)와 정신(貞信)으로 가르쳤으며,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예에 있어서는 반드시 예경(禮經)을 준용하였다. 아, 이것이 바로 죽음으로써 절의를 지켜 도(道)를 착하게 한 근본이 된 것이다.
공의 초취 부인은 전기원(全基遠)의 따님이다. 이분과의 사이에 아들 둘을 두었으니 바로 이상(履常)과 이후(履厚)이다. 또 딸 둘을 두었는데, 큰딸은 바로 유문호(柳文虎)의 아내이다. 이들은 모두 자식이 없다. 둘째 딸은 현감 강준(姜遵)에게 시집가서 아들 셋에 딸 다섯을 두었다. 후취 부인은 안수공(安守恭)의 따님인데, 자식이 없다.
처음에 공의 상(喪)을 치를 적에 공의 동생인 참봉 근(赾)이 몰래 성안으로 숨어 들어가 시신을 거두어 성 밖에다가 임시로 장사 지냈으며, 몇 달이 지난 뒤에 현풍현(玄風縣) 서화산(西花山)에 있는 선영 곁에 장사 지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뒤에 공의 벗인 박성(朴惺)에게 고하여 공의 묘에 묘지(墓誌)를 지어 묻었다. 그러고는 또 편지와 박군(朴君)이 지은 묘지를 나에게 가지고 와 부탁하기를, “우리 중씨(仲氏)의 행실에 대해서는 큰 것은 사람들의 눈과 귀에 남아 있으니 그대가 알지 못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세세한 것에 대해서는 박군이 화려하게 꾸미기만을 힘쓰고 사실대로 기록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니, 그가 지은 묘지를 보면 징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가 해 주는 한마디 말을 얻어 묘도(墓道)의 비석에 새겨 영원토록 전해지게 하고자 한다. 그대는 부디 이 일을 해 주기 바란다.”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공이 영원토록 전해지는 것은 우주 간에 우레 소리를 내기에 충분하여 천지와 더불어 영원토록 전해질 것인바, 어찌 치켜세워 천양(闡揚)하기를 기다릴 필요가 있겠으며, 또 어찌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다만 내가 홀로 생각하기에, 공이 일찍이 연첩(沿牒)을 하면서 백성들을 권면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상주(尙州)를 왕래하였으므로, 상주의 사대부들이 공의 덕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지금까지도 칭송하는 말이 잠시도 입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당시에 내가 호중(湖中)에서 입에 풀칠하면서 지내고 있었던 탓에 미처 가까이에서 모시지 못하였기에, 그것이 항상 마음속의 통한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뒷날에 한번 예를 올리고서 교분을 맺어 평생 즐겁게 지내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공이 죽었다고 들었는바, 지난날에 품었던 소원을 이룰 길이 없게 되었다. 이에 공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하였다. 그러고는 공이 수립한 바를 우러러 생각해 보매 또 황하(黃河) 가운데의 지주(砥柱)와 같을 뿐만이 아니었다. 이에 문득 눈물을 거두고서 무릎을 치면서 감탄하였다.
선비에게는 참으로 시대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정신적인 교제를 하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그런데 하물며 같은 시대 사람이겠는가. 나는 공에 대해서 단지 면목을 직접 뵙지 못하였을 뿐이다. 참봉공이 나에게 글을 지어 달라고 부탁한 것은, 그 뜻이 반드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런즉 내가 또 어찌 글솜씨가 거칠고 졸렬하다는 핑계를 대고 사양할 수가 있겠는가. 이에 드디어 박성(朴惺)이 지은 묘지(墓誌)를 참고하고 사우(師友)들을 통해서 들은 것을 덧붙여 이상과 같이 서술하였다. 그런 다음 명(銘)을 지었는데, 명은 다음과 같다.
호연하기 그지없는 기운이 있어 / 有氣浩然
천지간에 어디에고 꽉 들어찼네 / 充塞穹壤
사람치고 누가 이를 안 받았겠나 / 人孰不受
제대로 못 기르는 게 걱정이라네 / 患不能養
이 세상의 선비들 다 평상시에는 / 士方平居
인과 의에 대하여서 떠들어 대네 / 說義說仁
그러다가 화와 복에 겁을 먹고선 / 禍福所怵
어버이와 임금 모두 내팽개치네 / 或棄君親
의가 정말 중하단 건 보지 못하고 / 不見義重
단지 목숨 중하다는 것만을 보네 / 但見生大
보았다면 어찌 미치지 못하겠나 / 見豈不及
잘못은 기 쪼그라든 데 있는 거네 / 咎在氣餒
생각건대 우리 공이 보존한 바는 / 惟公所存
강건하고 큰 것으로 올곧게 했네 / 剛大以直
이미 자신 목숨 바칠 곳을 알고서 / 旣見死所
표적 향해 날아가는 살같이 갔네 / 如矢赴的
뒤 안 보고 용감하게 나아갔나니 / 勇往不顧
분육조차 뜻 빼앗을 수가 없었네 / 賁育莫奪
몸은 비록 죽었지만 도 지켰나니 / 形毁理全
그 무엇을 원망하고 슬퍼했으랴 / 奚怨奚怛
공의 부자 네 사람이 함께 죽어서 / 父子四人
삼강 오륜 지탱하는 기둥 되었네 / 樑棟三綱
서책 속에 실려 있는 사적을 보니 / 歷觀載籍
어느 누가 이와 같이 환히 빛나랴 / 孰此煒煌
어찌하여 저 어질지 못한 자들은 / 何彼不仁
공이 용맹 때문에 몸 해쳤다 하나 / 謂公傷勇
나라 강토 지키다가 목숨 바침은 / 死於封疆
성인께서 괜찮다고 말한 바이네 / 聖所折衷
황석이라 아득 높은 저기 저 산은 / 黃石之山
우뚝 솟아 영남 지방 진산 되었네 / 屹爲南紀
세월 흘러 저 산 숫돌 같이 되어도 / 使山若礪
공의 이름 영원토록 안 없어지리 / 公名不死
[주-D001] 소위(蕭葦)의 제방(堤防) : 쑥대와 갈대로 만든 제방으로, 아주 엉성하여 쉽사리 무너지는 제방을 말한다.[주-D002] 삼도(三都) : 한성(漢城), 개성(開城), 평양(平壤)을 가리킨다.[주-D003] 오묘(五廟) : 제후(諸侯)의 영묘(靈廟)로, 시조(始祖)와 이소(二昭)와 이목(二穆)의 신주를 모신 사당을 말한다. 천자(天子)는 칠묘이다.[주-D004] 황석산성(黃石山城) : 경상남도 안음현(安陰縣)의 황석산에 있는 산성으로, 육십령(六十嶺)으로 통하는 길목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안음 현감으로 있던 곽준은 함양 군수(咸陽郡守) 조종도(趙宗道)와 함께 이곳에서 가등청정(加藤淸正) 휘하의 왜군과 격전을 벌이다가 전사하였다.[주-D005] 웅어(熊魚)의 분별 : 생선을 버리고 곰의 발바닥을 취하겠다는 뜻으로, 목숨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는 분별을 말한다. 웅(熊)은 곰의 발바닥이고, 어(魚)는 생선이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곰의 발바닥과 생선을 다 좋아하지만 두 가지를 함께 얻지 못할 바에는 생선을 버리고 곰의 발바닥을 취하겠고, 생(生)과 의(義) 두 가지를 다 하고 싶지마는 두 가지를 함께 얻지 못할 바에는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 하였다.[주-D006] 일관(一官) : 일명(一命)과 같은 말로, 처음으로 관등(官等)을 받고서 되는 관원을 말하는데, 보통 9품관을 가리킨다. 《주례(周禮)》 〈대종백(大宗伯)〉에는 일명에서 구명(九命)까지의 관직이 있다.[주-D007] 연첩(沿牒) : 관원들이 관직에 임명하는 임명장을 따라서 여기저기 외직으로 돌아다닌다는 뜻이다.[주-D008] 지주(砥柱) : 삼문협(三門峽)을 통해 흐르는 황하의 한복판에 있는 산 이름으로, 황하의 거센 물결에도 굳건하게 서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난세(亂世)에 절조를 지킨다는 뜻으로 쓴다.[주-D009] 분육(賁育) : 옛날에 힘이 장사라고 소문난 용사인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으로, 《한서(漢書)》에 이르기를, “힘에는 오확(烏獲), 날래기는 경기(慶忌), 용맹에는 분육이다.”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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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집(寒岡集) 정구(鄭逑)생년1543년(중종 38)몰년1620년(광해군 12)자도가(道可)호한강(寒岡), 사양병수(泗陽病叟)본관청주(淸州)시호문목(文穆)특기사항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의 문인
寒岡先生文集卷之十二 / 祭文 / 祭郭存齋 䞭 墓文
嗚呼。人固有一死。死非人之所免。而幸不幸存乎其間。死於可死而無媿乎本心者。是得死之正理而爲幸焉。死於不必死。或可死而不死。反之心而不能無媿者。是不得死之正理而爲不幸焉。然則養靜之死。其惟可死而死。得死之正理。無媿於本心而爲幸者乎。其惟爲吾道之光。而爲在世朋友所共增氣於悲傷痛哭之中者乎。養靜之爲人。淳厖而閎厚。溫恕而寬平。朋友之所共稱服。以爲不可及者。而養靜則常欿然自以爲不足。益求所以進進不已。蓋養靜之學所造。實有朋友之所不能盡知者。當壬辰之變。與平日相許士友。共倡義兵。辛勤顚沛。以抗一方。屹然爲南中有人。已足以聳四方之聽。而爲後世之所追想矣。及丁酉醜寇之再突。則獨守孤城於窮山。主將潛遁於半夜。萬兵盡潰而無存。安坐待賊。凝然不動。左右親屬。力勸姑避。而竟無回撓之意。從容不屈。以成其仁。至兩子同死。而女子子又復死於其夫。忠孝節義。凜然俱著。一代綱常之義。遂盡出於養靜之一家。不惟養靜之死處得其正理。而無媿乎本心。抑兩子一女之死。俱無媿乎其心。而皆得死之正理。朋友之傷慘罔極者如何。歎息增氣者如何也。僕之追隨相愛三四十年矣。切磋磨礲之益。豈尋常交好之比哉。遊宦千里。雖臨風長痛者。不勝五內之如割。而尙未秉一炷之香。以寓平生之懷。宿草今日。滿目悽涼。追思疇昔。笑談之樂。琅然精靈。如在左右。嗚呼養靜。奈何奈何。嗚呼養靜。其實有不死者存焉。顧豈不爲幸甚而增吾道之光哉。其與悠悠䰟飛於劍鋩者。不足相較。况可死而不死者類。其又奚說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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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집(梧里集) 이원익(李元翼)생년1547년(명종 2)몰년1634년(인조 12)자공려(公勵)호오리(梧里)본관전주(全州)봉호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시호문충(文忠)
梧里先生文集卷之一 / 祭文 / 祭郭安陰 䞭 文 庚子○安陰縣監郭䞭。丁酉年守黃石城。倭兵逼䧟。郭與二子死節。是年以都體察使在星州。遣從事官金光燁祭之。
昔几席之從容。休休一介士。當兵刃之蒼黃。烈烈奇男子。誓心嬰城。成仁取義。貫日之精。凌霜之氣。維公敎誨。二子式似。父死於國。子爲父死。忠孝一家。綱常千䙫。人誰無死。死而全美。人爲公悲。我爲公喜。擧酒賀公。高山仰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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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석집(蒼石集) 이준(李埈)생년1560년(명종 15)몰년1635년(인조 13)자숙평(叔平)호창석(蒼石), 유계(酉溪)본관흥양(興陽)시호문간(文簡)특기사항유성룡(柳成龍)의 문인. 정경세(鄭經世) 등과 교유
蒼石先生文集卷之十三 / 雜著 / 郭安陰傳
丁酉八月。倭陷黃石山城。安陰縣監郭䞭前咸陽郡守趙宗道死之。䞭素善宗道。宗道替官咸陽。寓居安陰。與䞭約同守城。有詩曰。巡遠城中死亦榮。體察使李元翼。命金海府使白士霖協守。䞭守南門。士霖守北門至是倭賊來犯。士霖率所部先遁。子城空虛。倭賊登城。安陰官屬告䞭曰。別將遁去。軍卒盡散。縣監當出。䞭訶之曰。事無可爲。燒軍器後當自盡。宗道尋士霖不得。仍到䞭所。遂同死。初。䞭二子履常,履厚。勸䞭出城。䞭曰。義不可出。汝等可將母以避。履常等執手語曰。父已必死。我等何忍偸生乎。俱死之。䞭女。士人柳文虎妻也。隨夫出城文虎被擄。女曰。父死不殉。爲夫在也。今已矣。亦自剄。䞭死於忠。履常,履厚死於孝。郭氏死於烈。聞者莫不嘆息。事聞。贈䞭兵曹參議。宗道司㒒正。士霖令白衣從軍。立功自效。尋命拿鞫。旣而釋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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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집(訒齋集) 최현(崔晛)생년1563년(명종 18)몰년1640년(인조 18)자계승(季昇)호인재(訒齋)본관전주(全州)시호정간(定簡)특기사항김성일(金誠一), 정구(鄭逑)의 문인. 이윤우(李潤雨), 노경임(盧景任)과 교유
訒齋先生文集卷之九 / 雜著 / 郭義士錄
郭䞭 | 1551 | 1597 | 玄風 | 養靜 | 存齋 | 忠烈 |
余於十年前。聞南鄕有一佳士。曰郭䞭。養靜其字也。願與之交而不可得。壬辰亂初。列邑波坼。龍御西巡。監司守令曁鎭將武人。皆從風遠遁。莫敢交鋒。未聞有一人操弓矢冒白刃而前者。忽聞有郭再祐,郭䞭,趙宗道諸人。首先唱義。募得死士若干。與義兵將金沔,鄭仁弘。協心討賊。屢摧其鋒。賊之不敢專力西向。分屯自守而江右十數邑之保存。湖南一道之完全者。以此也。余於是時。尤偉其人。非白面一書生。歲甲午春。巡察使韓公。啓請屯田于蕩敗諸邑。以爲補軍興活遺民。所係極重。非存心濟物者。不可任以事。迺博採士論。公以自如道察訪。兼屯田差使員。余以有司。受其約束。最以同事得接爲幸。其人也。貌恭而志剛。言訥而行方。謙若不足而處事誠。與物無忤而取舍明。蓋仁厚而篤實者也。九月。朝廷選公爲安陰縣監。以公之才且賢能。蘇殘救廢也。其行也。余往商山。作序以贐之。自此闊別三四年。雖未見其治官事狀。以此人推此心。其爲政可知矣。及丁酉。倭賊再蹂湖南。行長一運。自順天已犯南原。淸正一運。自蔚山拳甲南歸。鼓其怒氣。直犯黃石山城。城縣地也。乃湖嶺之交。體察使李公。奉朝命築此城。遏截兩南之咽喉。以公素得民心。爲守城將。以金海府使白士霖有武才。爲出戰大將。趙宗道亦以咸陽郡守。新遞寓居縣地。以國家號令不可規避。率家屬入城。數人約誓爲死守計。余其時。適在眞寶縣廨。聞黃石城陷。語邑宰李公軫曰。噫郭養靜必死矣。李曰何哉。曰余知郭之爲人。必不偸生。俄而李見馳報曰。君言驗矣。郭䞭,趙宗道一家。俱極其慘禍。獨大將不死耳。余竦然髮豎。不覺長慟一聲。悲其死壯其節曰。白士霖以大將獨免。必嫁禍於二人。而先自遁去耳。或曰。強弱不敵勢也。豈可以守死善道。責之武人乎。士霖之不死。安知其將欲有爲也。余曰。人心若此。國之崩陷無怪也。旣以大將爲名。死於其城分也。又與二人。約與同事生死共之義也。渠若預料必敗。將避其鋒。則與二人議以同去宜也。今乃陽爲固守之形而陰謀自脫之計。遺慘禍於二人。必斬士霖以徇。然後可以快一時公論。噫刑賞不擧久矣。吾知士霖必不受誅。猶有不泯者公論也。從當得其實。其冬。余到南鄕。南鄕諸士子。語其詳。城陷之前日。士霖潛放軍糧。散給降倭及手下交通軍三百餘名。以結其心。乘夜縋下其一家于北門。北門軍。因北踰城逃潰。士霖於亂軍中遁去。有士卒奔告郭公。公手拔白刃。擬空大呼曰。白士霖逃耶。又曰。大將雖去。我當以死守之。敢動者有此劍。趙公病臥幕中。聞大將已去。初以爲未信。使人尋之不得。城已一空。賊從東門入。唯南門軍民。以主將尙在。不敢去。趙謂郭曰。將走軍散。城且陷矣。矢死不去者。惟我二人。男兒惟有一死耳。不可爲不義而生。當與君北向再拜而決。但妻子死之無益。可令出去。郭曰。此我之素志也。其子履常,履厚。其壻姜遵曁安陰下吏等。交進泣勸曰。事已無可奈何。宜速出城。郭叱曰。有死而已。誰敢勸我出城者。爾等死非職分。去矣去矣。郭之二子。執手訣曰。父已必死。吾等誰爲生耶。遂不去。二公恬然不變。腰揷弓箭。爲射賊計。俄而白刃如電。郭公與趙。俱死於兇刃。
履常履厚。抱其父罵賊。幷被害。
姜遵已率夫人及妻。出城得免。
郭之長女。柳文虎妻也。與履常之妻愼氏。俱出城伏草莽間。文虎被虜。
郭氏哭曰。父死而生者。爲夫在也。夫已俱亡。復何所待。遂自縊林中。
愼氏聞履常死。亦自縊死。
聞者莫不嗚咽流涕曰。慘矣。禍之至於此極也。韙哉。忠孝貞烈之萃于一門也。卞門忠孝節義成雙。郭氏兼有焉。此其古今之所罕聞。亂後死義之卓然尤著者。而人或以士霖之生爲智免。郭趙之死爲傷勇。嗚呼。彼獨何心哉。賀蘭未斬。雷南之目。不瞑於地下。士霖猶在。將何以慰二公之忠魂耶。君子之死也。亦自盡其道而已。不以人之死不死爲加損。而當二公之約與死守也。渠獨棄城而遁。二公之憤。應不減於南八之抽矢射浮屠也。趙公。余於少時見之。卓犖不羈。勇於爲義。不苟同於俗者也。亂初。與招諭使金公。竭誠奮義。在晉城有詩云。崆峒山外生雖樂。巡遠城中死亦榮。已見其素定矣。臨亂倡義。以節自終。可謂無愧矣。巡察使陳其梗槪以聞。命追贈郭䞭兵曹參議。宗道司僕正。白士霖白衣從軍。赴蔚山戰有罪。拿鞫于京。尋得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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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집(桐溪集) 정온(鄭蘊)생년1569년(선조 2)몰년1641년(인조 19)자휘원(輝遠)호동계(桐溪), 고고자(鼓鼓子)본관초계(草溪)특기사항조목(趙穆), 정구(鄭逑)의 문인. 남인(南人)의 중진(重鎭)
桐溪先生文集卷之二 / 傳 / 書郭義士傳後 庚子
朴從事汝昇。傳郭䞭事蹟。甚詳且的。殆無餘憾。獨恨夫白士霖罪狀。略焉不詳。斯豈勸懲之道乎。時士霖以金海府使。爲黃石城出戰將。郭以守城將。董治城役。役未畢。賊鋒已動。三邑軍民。皆至城下。居昌縣監韓詗。自縣馳來曰。壁堅已破。無復可爲。軍民聞之。皆散去。入城者十未一二。士霖最晩自兵營來。見城機未完。軍卒已散。明知其不可守。而深信降倭之言。以爲賊急於犯京。必不以此城爲意。乃言曰。賊若不來完城之功。吾所當得。雖無三邑人。吾軍足以守之。意氣甚自得。所謂吾軍者。乃金海人新自賊中來者。人持倭衣履。潛藏袋中。脫有緩急。着此衣履。投降賊中。乃其計也。士霖豈不知其輩之不足恃以爲用。而僥倖賊之不來。欲以完城爲己功耳。於是䞭守南門。士霖守東北子城。子城天險。士霖所自占也。及賊衆來薄。城中洶洶。人見金海人。日未暮。皆已理裝。爲出城之狀。初昏斬北門而出。士霖家屬隨之。軍民瓦解。勢不可遏。士霖托言巡城。持鎗潛逃。䞭方戰酣。南門未之知也。本縣官奴宋仁連者。爲士霖使令。見其逃去。急來告曰。金海令公已出。進賜何爲在此。䞭怒曰。此人訛言惑衆。罪當斬。略不之信。夜半。賊由士霖所守處。蹂躪而入。䞭始知事急。欲往焚軍器。未及而遇害。嗚呼。偸生苟活。士霖之常態。不足深責。而當其逃出之時。賊未入城矣。勢不甚急矣。何不與䞭相議。喩之以知難而退之之義乎。䞭之聽也。則與之同生可也。䞭之不從也。然後自爲之所。猶未晩也。顧乃以䞭爲虎口之肉。而自爲鼠竄之計。君子曰。殺䞭者。非倭也。乃士霖也。人言䞭之守南門。樓上有小窓。開而射賊。閉而避丸。方䞭之控絃而射也。賊丸掠額而過。略不變色。左右欲閉之。䞭止之。挺身當窓云。䞭之一死。自分久矣。雖有士霖之言。豈肯與之偸生也。雖然。䞭仁者也。殺無辜士民。而成己死義之名。豈其本心乎。其意以爲。城之險阻如此。士霖又以善戰名。此可恃以無虞矣。豈料士霖之陰懷二心。終以己賣賊也。甚矣。奸人之情狀也。始幸於成功。則與之同事。終臨於危難。則脫身先逃。此果與措刃殺人者。有間乎。嗚呼。殺人者死。士霖所殺。非徒䞭而已。孤三邑之子。寡三邑之妻者。不知其幾何。則士霖之罪。固不容誅。或者以爲。士霖及其家屬。與衆偕出。非先逃也。此兒童之所不信。其時入城者。俘戮殆盡。雖以匹夫匹婦之單身健步者。鮮得免焉。士霖家屬無慮三十餘人。有七八十老焉。有四五歲幼焉。而無一人相先後者。無一人顚頓傷墜者。果非先逃之驗歟。抑不知天之眷愛不忠之賊。使鬼護神扶而然耶。嗚呼。公論不白。邪議橫生。使士霖久保首領。可痛也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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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명집(東溟集) 세렴(金世濂)생년1593년(선조 26)몰년1646년(인조 24)자도렴(道濂), 도원(道源)호동명(東溟)본관선산(善山)시호문강(文康)
東溟先生集卷之八 一善金世濂道源著 / 碑誌碣銘 / 存齋郭先生墓碣銘 幷序
郭先生神道碑旣成。將以五月辛卯。立于馬山之陽。卿大夫士會者七十二人。咸慨然曰。先生墓木且拱矣。不意今日始得豎麗牲之石。幸則大矣。墓表尙闕。於我心猶有歉然。敢籍子之一言以文之。余謂先生大節。古固無有。然若先生者盡性立命。日星吾道。使文敬公而在者。先生且入室。非直以一朝伏節死爲重也。先生少學於裵洛川。及長與朴大菴爲道義交。折衷於鄭寒岡。刻厲奮發。講明正學。居敬以立其本。窮理以致其知。識見日進。踐行益篤。一變至道。一時行輩。皆以爲不可及。親沒不復應擧。築書室扁曰存齋。日處其中。孜孜不怠。平居退讓。言若不出口。至於臨大節定大事。則壁立千仞。凜然有不可奪者。蓋其平日所素養如此。故能樹立於急難之際者若彼其烈烈。豈所云殺身成仁不負所學者非耶。余故曰若先生者。使文敬公而在者。先生且入室。非直以一朝伏節死爲重也。昔者朴大菴之稱先生也。曰生而學聖賢道。死而樹萬世綱常者。惟吾友一人。君子謂之知言。請以是題其石可乎。咸曰唯唯。先生諱䞭。字養靜。存齋其號也。考諱之完。祖諱𤧞。曾祖諱承華。望於玄。世居馬山之率禮村。始城陷。先生之弟參奉赾。伏匿行入城收瘞。後數月葬于縣西花山先兆傍。墓右曰配全氏葬也。墓前曰子履常,履厚葬也。兄弟同塚。當先生伏節死也。抱持爭死賊。事聞。幷旌閭。忠孝大節。萃先生父子三人。亦豈不赫赫矣乎。其詳載神道碑。銘曰。
父死忠子死孝。各得其死。一何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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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암집(葛庵集) 이현일(李玄逸)생년1627년(인조 5)몰년1704년(숙종 30)자익승(翼昇)호갈암(葛庵)본관재령(載寧)시호문경(文敬)특기사항홍여하(洪汝河), 정시한(丁時翰), 이유장(李惟樟) 등과 교유
葛庵先生文集卷之二十九 / 諡狀 / 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存齋郭公諡狀
公諱䞭。字養靜。玄風人。高祖諱安邦。益山郡守。以淸白著名。曾祖諱承華。成均進士。有淸介拔俗之標。爲士友所推。祖諱𤧞。有氣節操行。考諱之完。娶鄭氏女。以嘉靖辛亥某月某日生公。自兒幼時。恬靜和厚。便有成人儀度。宗黨皆器重之。年十八。從同縣洛川先生裴公紳遊。得聞大學格致誠正之說而心忻慕之。踰冠。聞寒岡鄭文穆公講道新安泗水上。遂往從之。益知有內外輕重之分。雖以家貧親老。不免從事擧業。其素志不在是也。萬曆丁丑。丁內艱。喪致哀祭致誠。凡喪祭儀節。與寒岡先生反復詳訂。一正流俗之謬。至他冠昏之儀。亦皆遵用古禮。一方人士多取以爲法。公孝友出天。又繼之以學力。事親之際。愉色惋容。承藉無違志。親或有過。則至誠規誨。以期開悟。處兄弟骨肉之間。和敬以睦。姻于外親。信於朋友。各盡其道。一家之內。旣翕且湛。常有鳧藻之樂。己丑。丁外艱。廬墓終三年。服闋。不復應擧。築數椽屋。扁曰存齋。日整衣冠危坐。專精讀書。本之以六經語孟洛建之書。潛心硏究。以極其趣。至於天文地誌卜筮等書。亦皆涉其流而識其槩。樂與勝己者遊。講析疑義。窮日夜不知倦。若寒岡鄭文穆公,大庵朴公惺,松庵金公沔。皆其道義交也。其於世俗聲利紛華。一味澹泊。不入乎心。家貧妻子告飢寒。曠然若不聞也。對親舊。未嘗言貧。坦蕩以自遣。少無尤怨切蹙之態。人有寸善片長。歆歎奬勉。惟恐不成其美。與鄕人俗子處。油油然色笑可親。以故賢者慕其義。不肖者感其德。敎子弟。必先之以小學。繼之以四書。勉以孝仁禮義之敎。申以溫恭和順之行。且譯內則,女戒等書。以敎女子子。使知貞淑孝謹之道。常以早患風痺。學問不博爲恨。其靜存動察之工。不以疾病呻吟少懈。壬辰之變。金公沔倡起義兵。起公佐其幕。多所裨益。時金文忠公誠一巡察嶺南。上其功狀。除自如道察訪。未幾。朝廷擢用才俊。特拜公安陰縣監。政尙寬仁。百姓愛戴。豪猾亦服。丙申冬。體察使李公元翼知公忠義。可任以事。檄公領三邑兵。守黃石山城。與金海府使白士霖分城而守。士霖守東北。公守西南。及賊薄城。自公所分始。公率將士。手弓臨賊。督戰不少懈。賊不敢逼。士霖使謂曰。劇寇薄城。得無畏心乎。公厲聲曰。旣以死誓。何畏之有。士霖率其屬潛遁。軍中一人大呼曰。白帥已去。太守何獨不去。公怒曰。此人訛言動衆。可斬也。使人偵之。士霖所守果空。於是士卒潰亂。勢不可遏。公之子若壻皆號泣曰。事無可爲者。何不早爲之所。公笑曰。此吾死所。何所之更圖。指軍器曰。不可以藉寇。遂焚之。明日賊登城。公據胡床不動。竟爲賊所害。致命前數十日。與友人詩曰。廟堂平昔講經綸。此日男兒有幾人。滄海血流腥滿地。臨分相勖在成仁。其捐軀殉國之本意。素定於胸中如此。公之死也。二子履常,履厚抱持公大罵賊。並斫之。女爲柳文虎妻。時文虎亦在圍城中。幸脫走出城。妻隨夫出。文虎爲賊所獲。妻哭曰。所以不從父死。爲夫在也。今夫又不幸。何用生爲。遂自縊以死。家庭式穀之化。有以致之也。事聞。命旌其閭。贈兵曹參議。遣官致祭。履常,履厚俱贈正郞。至光海朝。加贈公參判。命置守塚人。至仁祖朝。特遣官致祭。顯宗大王十五年秋。士林爲之立祠。今上丁巳。宣額以褒之。公初娶全州全氏。有二男二女。男卽履常,履厚。女長卽柳文虎妻。季適縣監姜遵。後娶廣州安氏。無子女。始公之死事。公弟赾經營賊藪。出生入死。收瘞公屍于黃石城外。後數月。以其喪歸葬于玄風縣西花山先壟之側。公之二子。皆死無後。公幾絶不祀。今上壬申秋。大臣諸宰白上以爲故安陰縣監贈兵曹參判郭䞭。以先朝著節之臣。至今不得立後。其在褒崇激勸之道。實爲欠典。請以䞭之弟參奉赾之孫生員昌一爲履常後。以奉䞭祀。從之。旣又特贈吏曹判書。玄逸之生也後。居且僻遠。常恨未能得公之遺文家傳而讀之。以償其平生景仰忻慕之意。歲癸酉。忝天官之長。供職在京師。公之所後孫昌一持家牒詣玄逸言曰。此先祖家傳也。夫以先祖之所樹立。章章如此。而家世零替。迄未有顯揚褒贈之典。迺者幸因廷臣建白。得有進秩之榮。今又以士林疏陳。將有易名之典。願吾子之爲之狀也。玄逸以寡陋不文辭。其請愈勤。不得終辭。遂据其家牒。狀次之如右。嗚呼。公一个書生也。受一縣之寄於危亂之際。擁羸卒守孤城。以抗暴起方張之寇。力竭援絶。遂以身殉。今讀聖上褒贈之敎。諸公贊揚之語。爲之掩卷流涕也。夫忠義之性。出於人心之所固有。君臣之義。無所逃於天地之間。而當國事搶攘之日。士大夫出身殉國。死其官守。如公之爲者。有幾人耶。若非熊魚取舍之極素定。守死善道之義素明。安能一朝倉卒。從容自靖如此哉。若公者可謂不失其本心之正而無愧於臣人之義矣。聖朝之所以褒贈奬寵。以爲人臣忠義之勸者。固其宜也。自公盡節之後。名公鉅人敍述稱美之文。固多有之。如大庵朴公之誌。愚伏鄭公之銘。蒼石李公之傳。桐溪鄭公之傳後敍。皆可謂愨辭確論。而其於鋪張揚闡之道。無復遺恨矣。玄逸之愚。何敢贊一辭。更加評騭哉。遂就其中僭那删節。彙爲一編。牒太常以請節惠之典。謹狀。
갈암집 제29권 / 시장(諡狀)
증(贈)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 존재(存齋) 곽공(郭公) 시장
공의 휘는 준(䞭)이고 자는 양정(養靜)이며,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고조의 휘는 안방(安邦)으로, 익산 군수(益山郡守)를 지냈으며, 청백리(淸白吏)로 저명(著名)하였다. 증조의 휘는 승화(承華)로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였다. 세속을 벗어난 듯한 맑고 깨끗한 기상이 있어 사우(師友)들에게 추중(推重)을 받았다. 조의 휘는 박(璞)으로 기절(氣節)과 조행(操行)이 있었다. 고의 휘는 지완(之完)으로 정씨(鄭氏)의 따님에게 장가를 들어 가정(嘉靖) 신해년(1551, 명종6) 모월 모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린아이 때부터 차분하고 후덕(厚德)하여 성인(成人)의 의표가 있었으므로, 일가(一家)들이 모두 중하게 여겼다. 나이 18세에 같은 현(縣)의 낙천(洛川) 선생 배공 신(裵公紳)의 문하(門下)에 종유(從遊)하여 《대학(大學)》의 격치성정(格致誠正)의 설(說)에 대해 배운 뒤, 마음속으로 매우 기뻐하여 흠모하였다. 약관(弱冠)이 지나자 한강(寒岡 정구(鄭逑)) 정 문목공(鄭文穆公)이 신안(新安)의 사수(泗水) 가에서 강도(講道)한다는 것을 듣고 마침내 가서 종유하였는데, 내외(內外), 경중(輕重)의 구분이 있음을 더욱 알게 되었다. 비록 집안이 어렵고 어버이가 연로하시어 과거 공부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지만 평소의 뜻은 거기에 있지 않았다.
만력(萬曆) 정축년(1577, 선조10)에 내간상(內艱喪)을 당하였는데, 거상에 슬픔을 다하고 제사에 정성을 다하였다. 모든 상례와 제례의 의절(儀節)에 관한 것은 한강 선생과 함께 반복해서 상정(詳訂)하여 세속의 잘못된 점을 일체 바로잡았으며, 여타 관혼(冠婚)의 의절 같은 경우에도 또한 모두 고례(古禮)를 준용하니, 일방(一方)의 인사(人士)들이 취하여 법으로 삼는 이가 많았다.
공의 효성과 우애는 천부적인 것인데, 거기에 학문의 힘까지 더해졌다. 어버이를 섬길 적에는 기쁜 안색과 부드러운 용모로 뜻을 받들어 어기지 않았으며, 어버이에게 어쩌다 과실(過失)이 있더라도 지성(至誠)으로 간(諫)하여 깨닫기를 바랐다. 형제간에는 온화하고 공경함으로써 친목을 돈독히 하였으며, 외친(外親)에게 친하게 하고 벗에게 믿음을 주는 등, 각각의 경우에 그 도리를 다하니, 온 집안이 화목하고 쾌락하여 항상 커다란 즐거움이 있었다.
기축년(1589, 선조22)에 외간상(外艱喪)을 당하여 여묘하면서 삼년상을 마쳤으며, 복(服)을 벗고 난 뒤에는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몇 칸짜리 작은 집을 짓고 존재(存齋)라고 편액(扁額)을 한 뒤, 날마다 의관을 정제하고 꼿꼿이 앉아 정신을 집중하여 글을 읽었다. 육경(六經)과 《논어(論語)》, 《맹자(孟子)》, 정주(程朱)의 글들을 근본으로 하면서 마음을 쏟아 연구하여 그 귀추(歸趨)를 깊이 깨달았다. 천문(天文)과 지지(地誌), 복서(卜筮) 등에 관한 글에 있어서도 또한 모두 나름대로 섭렵하여 그 대체(大體)를 알고 있었다. 자신보다 나은 이들과 즐겨 어울리면서 의심나는 부분들을 강론하였는데, 밤늦게까지도 지칠 줄을 몰랐다. 한강 정 문목공, 대암(大庵) 박공 성(朴公惺), 송암(松庵) 김공 면(金公沔) 같은 이들이 모두 도의(道義)로써 사귄 사람들이다.
세속적인 명예나 영리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담담하여 마음에 두지 않았으며, 집안이 가난하여 처자가 추위와 배고픔을 호소하더라도 마음에 두지 않고 못 들은 듯이 하였다. 친구를 대할 적에도 한번도 가난에 대해 이야기해 본 적이 없었으니, 느긋하게 자적(自適)하면서 조금도 원망하거나 위축되는 모습이 없었다. 남에게 조그마한 선행이나 장점이라도 있으면 경탄을 하면서 격려하여 그 훌륭함을 이루지 못할까 염려하였다. 고을의 속인(俗人)들과 자리를 함께할 경우에는 부드러운 안색과 미소로써 친하게 다가올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어진 자는 그 의리(義理)를 사모하고 어리석은 자는 그 덕에 감동하였다. 자제(子弟)를 가르칠 때에는 반드시 《소학(小學)》을 우선하고 이어서 사서(四書)를 가르침으로써, 효인(孝仁)과 예의(禮義)의 교화를 권면하고 온화하고 공순한 행동을 당부하였다. 또 《내칙(內則)》과 《여계(女戒)》 등의 책들을 번역하여 딸들을 가르침으로써 정숙하고 효성스러운 도리를 알게 하였다. 늘 일찍 중풍에 걸려 학문을 넓게 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으나, 정(靜)할 때에 보존하고 동(動)할 때에 살피는 공부는 질병으로 신음하는 중이라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임진년의 변란(變亂)에 김공 면이 의병(義兵)을 일으키면서 공을 막료(幕僚)로 임명하였는데, 도움이 되는 바가 많았다. 당시에 김 문충공 성일(金文忠公誠一)이 영남을 순찰할 적에 그 공(功)을 상주(上奏)하여 자여도 찰방(自如道察訪)에 제수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 조정에서 준재(俊才)로 발탁하여 특별히 안음 현감(安陰縣監)에 임명하였다. 현감으로 있으면서 정사를 너그럽고 어질게 하니, 백성들이 사모하였으며 호활(豪猾)한 무리들도 복종하였다.
병신년(1596, 선조29) 겨울에 체찰사(體察使) 이공 원익(李公元翼)이 공의 충의(忠義)로움이 일을 맡길 만하다는 것을 알고는, 공에게 격문을 보내 세 읍의 군대를 거느리고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지키게 하였다. 김해 부사(金海府使) 백사림(白士霖)과 성을 나누어 지켰는데, 사림은 동북쪽을 지키고 공은 서남쪽을 지켰다. 적들이 성에 접근하여 공이 지키는 곳에서부터 공격을 시작하였는데, 공은 장사들을 거느리고 몸소 활을 잡고 대적하면서 싸움을 독려하기를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으니, 적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사림이 사람을 시켜 묻기를, “극악한 왜구가 성에 접근하는데, 마음에 두렵지 아니한가?” 하니, 공이 성난 소리로 말하기를, “이미 죽기를 맹세하였는데,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였다. 사림이 그 수하들을 데리고 몰래 도망하니, 군중에 있던 한 사람이 크게 소리치기를, “백수(白帥)가 이미 도망갔는데, 태수는 어째서 홀로 가지 않으십니까?” 하였다. 공이 노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이 와언(訛言)으로 군중(軍衆)을 동요시키니, 참수해야 할 것이다.” 하고는 사람을 시켜 정탐하게 하였는데, 과연 사림이 지키던 곳이 비어 있었다. 이에 사졸(士卒)들이 궤란(潰亂)하여 막을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공의 아들과 사위가 울부짖으면서 말하기를, “사세(事勢)가 어찌해 볼 수 없게 되었는데, 어째서 서둘러 피할 것을 도모하지 않으십니까?” 하니,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곳이 내가 죽을 곳인데, 어디로 가서 다시 도모한단 말이냐.” 하였다. 그리고 군기(軍器)를 가리키면서 이르기를, “왜구가 차지하도록 해서는 안 되겠다.” 하고는 마침내 불살라 버렸다. 다음 날 적들이 성을 점령하여 올라오자 공은 호상(胡床)을 지키고 앉은 채로 동요하지 않았는데, 마침내 적들에게 해를 당하였다. 명(命)을 다하기 수십 일 전에 벗에게 준 시에 이르기를,
“그 옛날 묘당에서 경륜을 논하였더니, 이날에 대장부 몇이나 남았는고.
창해에 핏물이 흐르고 비린내 진동하니, 헤어지며 서로 살신성인(殺身成仁)을 맹세하네.〔廟堂平昔講經綸 此日男兒有幾人 滄海血流腥滿地 臨分相勖在成仁〕”
하였으니, 몸을 바쳐 순국(殉國)한 본의(本意)가 평소에 이처럼 흉중(胸中)에 정립(定立)되어 있었던 것이다.
공이 죽을 적에 두 아들 이상(履常)과 이후(履厚)가 공을 껴안고서 적을 크게 꾸짖으니, 적들이 같이 죽였다. 딸은 유문호(柳文虎)의 처로, 당시에 문호가 또한 포위된 성안에 있다가 다행히 탈주하여 성을 빠져나가게 되자 지아비를 따라 나갔다. 그런데 문호가 적들에게 붙들리자 처가 울면서 이르기를, “아비를 따라 죽지 못한 것은 지아비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지아비가 또 불행하게 되었으니, 살아서 무엇 하겠는가.” 하면서 마침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으니, 가정에서 선도(善道)로써 교화한 까닭에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정려(旌閭)를 하도록 명을 내리고 병조 참의를 추증하였으며, 관원을 파견하여 치제(致祭)하였다. 이상, 이후에게는 모두 정랑(正郞)을 추증하였다. 광해조(光海朝)에 이르러 공에게 참판(參判)을 추가로 추증하고 무덤을 지키는 사람을 두도록 명하였고, 인조조(仁祖朝)에 이르러 특별히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현종대왕(顯宗大王) 15년 가을에 사림(士林)에서 공을 위해 사당을 세웠는데, 금상(今上) 정사년(1677, 숙종3)에 사액(賜額)하여 포상(褒賞)하였다.
공은 처음에 전주 전씨(全州全氏)에게 장가를 들어 2남 2녀를 두었는데, 그 아들이 곧 이상, 이후이다. 첫째 딸은 유문호의 처이고, 막내는 현감(縣監) 강준(姜遵)에게 시집갔다.
후처(後妻)인 광주 안씨(廣州安氏)는 자녀가 없다.
앞서 공이 죽음을 당했을 때, 공의 아우 기(赾근)가 적의 소굴에서 주선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공의 시신을 거두어 황석산성 밖에 묻어 두었다. 몇 개월 뒤에 운구(運柩)하여 돌아와 현풍현(玄風縣)의 서쪽 화산(花山)의 선영 곁에 장사 지냈다. 공의 두 아들은 모두 죽어서 후사가 없었으므로, 공의 제사가 거의 끊어질 형편이었다.
금상 임신년(1692, 숙종18) 가을에 대신(大臣)과 재신(宰臣)들이 상에게 아뢰기를, “고(故) 안음 현감(安陰縣監) 증 병조 참판 곽준(郭䞭)은 선조(先朝)에 절개를 드러낸 신하인데, 지금까지 후사를 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충의(忠義)를 포장(褒獎)하고 권면(勸勉)하는 도(道)에 있어서 실로 흠전(欠典)이 되니, 청컨대 곽준의 아우 참봉 기(赾)의 손자인 생원(生員) 창일(昌一)을 이상의 후사로 삼아 곽준의 제사를 받들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고, 또 특별히 이조 판서를 추증하였다.
현일(玄逸)은 후대에 태어난 데다 사는 곳도 궁벽한 원방(遠方)인지라, 늘 공의 유문(遺文)과 가전(家傳)을 얻어 보아 평소에 우러르고 사모하던 뜻을 풀지 못하는 것이 한이었다. 그런데 계유년(1693, 숙종19)에 이조 판서에 임명되어 직무를 수행하느라 경사(京師)에 있을 때, 공의 양손자 창일이 가첩(家牒)을 가지고 현일에게 와서 이르기를, “이것은 선조(先祖)의 가전(家傳)입니다. 선조께서 수립하신 것이 이토록 혁혁하거니와, 집안이 영락(零落)하다 보니 여태까지 현양(顯揚)하여 포증(褒贈)하는 은전(恩典)이 없다가, 이번에 다행히 조정 신하들의 건백(建白)으로 인하여 품계가 오르는 영광이 있었습니다. 지금 또 사림에서 상소한 것으로 인하여 장차 시호를 받는 은전이 있을 듯하니, 부디 그대가 시장을 지어 주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현일은 과루(寡陋)하여 글을 잘 짓지 못한다고 사양하였으나 그 청이 갈수록 간절해졌으므로 끝내 사양할 수 없었다. 마침내 그 가첩에 의거해 위와 같이 엮어 본다.
아아, 공은 일개 서생(書生)으로서 위란(危亂)에 즈음하여 한 고을을 위임받아 쇠잔한 군졸들을 데리고 고립된 성을 지키면서 한창 기세등등하던 왜구에 대적하였으나, 힘이 다하고 원병(援兵)이 끊겨 마침내 순국하였다. 이제 추증하라는 성상의 하교와 제공(諸公)들이 찬양한 말을 읽고는 책을 덮고 눈물을 흘렸다. 대개 충의(忠義)의 성품은 인심(人心)의 고유한 데서 나오는 것이니, 군신(君臣)의 의리는 천지 사이에 피할 곳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국사(國事)가 거덜나는 때를 당하여 사대부 중에 공처럼 몸을 내던져 순국하여 그 직분을 다한 자가 몇 사람이나 있었던가. 만약 의리에 대한 생각이 평소에 정립되고 죽음으로써 도를 지키려는 뜻이 평소에 분명한 자가 아니라면 어찌 창졸간에 일을 당하면서도 이처럼 조용히 자진(自盡)할 수 있겠는가. 공과 같은 이는 그 본심의 바름을 잃지 않아 신민(臣民)의 의리에 부끄러움이 없다고 할 만하니, 성조(聖朝)에서 포장하고 추증하여 신하들의 충의를 권면한 것은 진실로 마땅한 것이었다. 공이 절의를 지켜 죽은 뒤로 명공(名公), 거인(鉅人)들의 칭송하는 글이 참으로 많다. 이를테면
대암 박공의 지(誌)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정공(鄭公)의 명(銘),
창석(蒼石 이준(李埈)) 이공(李公)의 전(傳),
동계(桐溪 정온(鄭蘊)) 정공(鄭公)의 전후서(傳後敍)
같은 것이 모두 진실되고 정확한 의론이라고 이를 만하니, 포장하고 천양(闡揚)하는 도(道)에 있어 더 이상 유한이 없다. 그러니 어리석은 현일이 어찌 감히 한마디 말을 보태어 다시 평정(評定)을 가할 수 있겠는가. 이에 그중에서 참람되이 산절(刪節)해 낸 것을 모아 한 편을 만들어, 봉상시에 이첩(移牒)하여 시호의 은전을 청하고자 한다. 삼가 시장을 쓴다.
ⓒ 한국고전번역원 | 권경열 (역) |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