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진리
-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이사 52,13-53,12)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요한 5,32).
오늘은 치성[1] 장날이다.
간밤에 오늘 문초는 장터에서 한다고 형리가 전했다.
오늘 장터에서 송사가 있다고 고을에 퍼트린 것 같다.
장도 보고 구경도 하니, ‘원님도 보고 송사도 본다’는 속담대로다.
장날마다 치성장터에서 독을 팔았으니 나를 아는 얼굴들이 많을 것이다.
현감은 고을 사람들 앞에서 천주교를 사교로 몰아 사람들로 하여금 천주교를 미신으로 만들려 할 것이다.
또한 내게 고문을 가해 현감의 권위를 높이고 천주교를 혐오하도록 만들 것이다.
나와 교우를 묶어 장바닥에 무릎 꿇기고는 현감이 의자에 앉았다.
좌우편에 유림들이 도열했다.
현감이 시문(始問)했다.
“불도와 공맹도가 정도(正道)이거늘 너희는 어찌 사도(邪道)를 얻어듣고 사람에게 요혹(妖惑) 했는가?”
나 이도기가 답했다.
“불도는 불가(佛家)가 하고, 공맹도는 유가(儒家)가 하듯이 천주교의 도리는 천주교인이 합니다.”
현감이 재문(再問)했다.
“무지한 천주교는 삼강과 오상을 모르니 임금과 부모를 잊고, 남녀 혼잡한지라. 또한 나라의 금령을 따르지 않으니 사교(邪敎)가 아니가?”
내가 답했다.
“임금은 한 나라의 부모요, 양친은 한 가족의 부모입니다. 저는 글을 익히지 못했지만 천주님이 천지만물의 주인임을 믿습니다. 이 나라에는 반상와 남녀와 적서가 유별하지만 하느님의 나라에는 상하 없이 평등하고 모두 존귀합니다.”
현감이 삼문(三問)했다.
“나라와 백성은 물론 풀 한 포기까지 임금의 것이다. 그리고 나라에서 옳고 그름을, 살리고 죽이는 것을 임금이 정한다. 임금은 강상을 근본으로 법을 정하여 경향 각지 관헌들이 임금을 대신하여 법에 따라 백성들을 다스린다. 그런데 너희는 군명과 관령을 거역하였으니 죽어 마땅하다”
내가 답했다.
“천주께서 계시니 만물이 있고, 만물이 있으니 부부가 있고, 부부가 있으니 군신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천주님은 천지의 임금이고 조선의 왕은 조선팔도의 임금입니다. 충신은 목숨 바쳐 임금을 모시고, 간신은 자리를 보고 임금을 모십니다. 충을 가르치는 조선에서 더 큰 충을 찾은 백성을 죽일 놈들로 여기는 것을 어찌 정도(正道)라 하겠습니까?”
현감은 “저 두 사람에게 형을 가해 요설로 장중 백성들을 현혹치 못하도록 하라”고 명을 내렸다.
형졸들이 우리를 죄어 묶고는 상투를 풀어 헤치더니 침 뱉고 뺨치고 칼에 올라 발 구르고, 욕하며 희롱하고, 발로 차며 “오늘 이 장터에서 치도곤[2]으로 쳐 죽일 것이다.”라며 위협했다.
이렇듯 무서운 말이 무수하고 얼굴에 회를 칠하며 “이 놈들 낯짝 하고는 꼭 승천할 것 같다.”며 희롱하였다.
죄명패를 머리 위에 달고 등에 북을 지우고는 앞으로 가라 발로 차며 북을 쳐 댔다.
뒤에서는 현감이 말을 타고 추격하듯 우리를 몰아댔다.
북적이던 장터에 길이 나고 여기저기서 욕설과 동정하는 눈빛이 흙먼지 속에 뒤섞여 피어올랐다.
조리돌림을 멈추더니 현감이 외쳤다.
“이놈들은 천주학을 하니 역적과 다름이 없는지라. 치도곤을 받고도 천주교를 하는지 눈으로 보아라!”
치도곤 열 대가 볼기와 허벅지에 떨어졌다.
아랫도리가 떨어져 나간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뜻을 밝혔다.
“원님이 묻는 대로 모두 답했고 그 말들을 거둘 뜻이 없나이다.”
현감은 대노하여 치도곤을 맞고 주저앉은 다리를 묶고는 주장[3]으로 주리를 틀며 배교를 하라고 다그쳤다.
나와 교우는 “차라리 만 번 죽어도 배교할 수 없습니다.”라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해가 칠갑산으로 기울자 현감은 우리를 다시 옥에 가두라고 명하였다.
나는 손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모로 누어 곁에 누운 교우를 바라보았다.
교우의 얼굴은 피와 땀과 먼지가 범벅이 되어 있었고 눈은 먹주머니가 되어 있었다.
안타깝고 가엾기 짝이 없었다.
교우는 신음과 코 고는 소리를 번갈라 내며 잠에 빠져 들고 있었다.
배가 볼록해진 달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낮 동안 죽기를 각오하고 말들을 해서인지 마음 한 구석에서 멋쩍고도 공허함이 일기 시작했다.
서늘한 바람이 불자 나도 비몽사몽 잠에 빠져 들기 시작했다.
달빛과 바람을 타고 한 말씀이 들렸다.
“나의 종은 바오로야, 너는 오늘 네 믿음을 지키는데 성공하였다.
네 믿음은 높이 올라 숭고해지고 더없이 존귀해지리라.
네 모습이 사람 같지 않게 망가져 많은 이들이 너를 보고 놀랐다.
네 모습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아녔지만 죽음보다 더 강한 것이 내게 있다는 것을 그들은 깨달았단다.
그들은 이제 네 말을 들은 귀를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단다.
그들 중에는 태어나 처음 듣는 네 말에 끄덕이는 이들이 생겨났단다.
하늘의 은하수가 하나가 아니라 더 큰 은하수가 무수히 있다는 것도 알았단다.
장차 네 믿음을 따르고 싶어 하는 이들이 생겨 날 것이다.
메마른 땅에서 자란 뿌리가 새순을 돋듯이 앙상해진 네 모습에서 사람들은 무성해지는 진리를 볼 것이다.
사람들 중에는 너를 멸시하고 배척하고 매질에 가세한 이들도 있지만 너의 믿음을 두려워 할 것이다.
옥에 누어 네 몸을 편히 돌보기보다 곁에 누운 교우의 상함을 걱정하는 그 마음이 내게 찬미가 되는구나.
나의 아들 성자도 사람들의 병고를 메고 갔고 사람들의 고통을 짊어졌단다.
사람들은 성자를 벌 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성자가 찔린 것도 으스러진 것은 사람들의 죄악 때문이다.
사람들을 대신하여 성자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사람들은 나았다.
사람들은 고집스런 양들처럼 길을 잃고 제 멋대로 죄악의 길로 걸어간다.
나는 그들이 떨어지는 죄악의 감옥에 성자의 오상으로 벌어진 틈을 끼워 구원의 창으로 삼았다.
네가 오늘 학대와 천대를 받았지만 너는 나에 대해 입을 다물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이는 어미 양처럼 참아내어 너는 배교를 말을 하지 않았다.
너는 판결을 받고 죽겠지만 그것은 성자의 길을 너도 가는 것이다.
박해자들이 안달할수록 복음의 씨앗은 더 멀리 퍼질 것이다.
나를 믿는 이들은 결코 창이나 칼을 들고 맞서지 않고 박해자들을 벌해 달라 내게 빌지도 않는다.
박해자들은 나의 사람을 죽이고는 악인들과 함께 묻었다고 안도하겠지만 성자와 함께 일어날 것이다.
앞으로 너는 살이 찢기고 뼈가 으스러져 죽겠지만 많은 열매를 맺는 밀알이 되는 것이다.
나는 네가 몸이 상해 괴로운 것이 아니라 내 영광을 더 잘, 더 많이 드러내지 못해 괴로워한다는 것을 잘 안다.
사람들은 조상들의 무덤을 꾸미고 제사를 지내지만 실은 세속을 사는 복을 빌고 있구나.
내게 오지 않은 조상들에게 제물을 바치며 복을 빈들 그들이 지옥에 갇혀 있다면 쓸모가 없을 것이다.
너는 조상을 숭배하고 후손의 효도를 받으며 오래 살기를 바라지 않고 내 뜻을 이루길 원하니 그 바람을 들어주겠다.
너는 고난의 끝에 빛에 싸여 천국을 미리 보며 흡족해하리라.
너처럼 의로운 나의 종들이 사방에서 다른 이들의 죄악을 짊어지고 피를 흘리니 내 아들을 닮아가는구나.
나는 너와 그들이 받을 하늘나라의 몫을 반드시 챙겨두리라.
네게는 아직도 남은 고통이 많지만,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와 함께 있겠다.”
[1] 치성 : 청양군 정산면 송학리 솔티에서 발원하여 역촌리를 북에서 남쪽 금강을 향해 가로지는 ‘치성천’이 있다. 칠갑산에서 흘러 정산 서정리를 지나는 ‘읍내천’이 있다. 정산 광생리 앞에서 ‘치성천’과 ‘읍내천’이 합류한다. 합류 과정에서 만들어진 삼각주 모양의 땅이 형성되었는데, 그 모양이 곡식을 까부는 ‘키’(사투리로 ‘치’라 한다)를 닮았다하여 ‘키섬’ 또는 ‘치섬’, ‘키성’ 또는 ‘치성’이라 부른다. 한자로는 ‘기도(箕島)’라 적는다. 이 치성에서 매월 10일에 장이 섰다. 현재는 ‘서정리구층석탑’(고려시대, 보물 제18호)이 있는 청양군 정산면 서정리 16-2번지 인근지역이다. 정산관아에서 치성장터까지 거리는 약 1km이다.
[2] 치도곤(治盜棍) : 조선시대에 사용되었던 곤(棍)과 장(杖) 가운데 가장 크고 무거운 몽둥이로 ‘도적을 다스리는 몽둥이’라는 뜻이다. 길이는 약 173cm, 두께는 약 3cm이다. 다른 곤처럼 넓지 않고 둥글어 타격이 크다.
[3] 주장(朱杖) : 주리를 틀 때 사용하는 붉은 칠을 한 작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