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115 연중1주간 토 – 133위 030° 조 바르바라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133위 030° ‘하느님의 종’ 조 바르바라
이름 : 조 바르바라
출생 : 1783년
순교 : 1839년 9월(음)
조 바르바라는 양반 이(李)씨의 부인으로, 성품이 단정하고 총명하였다. 1839년의 순교 성녀 이영덕(李榮德) 막달레나[0.1]와 이인덕(李仁德) 마리아[0.2] 자매는 바로 그녀의 딸이다.
조 바르바라는 언제부터인가 의지할 데가 없어진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그때 이미 그녀의 친정어머니는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조 바르바라는 두 딸과 함께 친정어머니에게 자연스레 천주 교리를 배우게 되었고, 이내 천주 신앙을 받아들여 교리를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비신자였던 남편이 천주교를 반대했으므로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후 조 바르바라의 친정어머니는 선종하였으나, 조 바르바라 모녀는 계속해서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남편이 지방으로 여행 간 틈을 이용하여 조 바르바라는 두 딸과 함께 영세 입교하였다.
그러던 중 큰딸 이영덕 막달레나가 혼인할 나이가 되자, 남편은 막달레나를 한 비신자와 혼인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동정을 지키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던 이영덕 막달레나는 부친의 명에 따를 수 없었으므로 꾀병을 부리기도 하였고, 자신의 결심을 보여 주려고 손가락을 베어 혈서를 쓰기도 하였다. 하지만 부친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고, 이 떄문에 이영덕 막달레나는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남편의 강요를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한 조 바르바라는 어느 날 두 딸을 데리고 집을 나와 교우 집에 의탁하였다. 그때 앵베르(L. Imbert, 범세형[范世亨] 라우렌시오) 주교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 그들 모녀에게 집으로 돌아가도록 권유했으나, 그렇게 할 수 없는 사정임을 알고는 회장들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게 하였다. 이에 조 바르바라 모녀는 서강 독갑이골에 마련된 새 거처에서 생활하게 되었다.[1] 이곳에서 그들 모녀는 비록 추위와 굶주림으로 고통을 받았지만, 마음 놓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으므로 이러한 고통을 달게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 가타리나[1.1]와 조 막달레나[1.2] 모녀가 바르바라 모녀가 사는 집으로 와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그들은 함께 용기를 북돋워 주면서 신심을 함양하였고, 박해가 닥치면 함께 순교하자고 권면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한창이던 5월에는 마침내 독갑이골로 포교들이 들이닥쳐 그곳에 살고 있던 다섯 사람을 모두 체포하여 포도청으로 압송하였다. 포도대장 앞으로 끌려간 다섯 사람은 문초와 주뢰형을 받았지만, 모두가 용감하게 이를 참아 내면서 신앙을 증언하였고, 옥중에서도 서로를 격려하였다. 그러다가 조바르바라는 형벌 때문에 쇠약해진 몸에 장티푸스까지 걸려 이 가타리나, 조 막달레나 모녀와 함께 옥중에서 순교하였으니, 때는1839년 8월(음력)로, 당시 바르바라의 나이 56세였다.[2]
[註]__________
[0.1] 聖女 이영덕(李榮德) 막달레나(1812-1839) :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인 이영덕은 외교인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외할머니의 권면으로 어머니 ‘하느님의 종’ 조 바르바라, 동생 聖女 이인덕(李仁德) 마리아과 함께 천주교를 믿게 되었는데 아버지가 천주교를 몹시 싫어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지방으로 여행간 틈을 타서 나머지 식구들과 함께 성세(세례) 성사를 받았다. 혼기에 이르러 아버지가 외교인과의 결혼을 강요하자 수정을 결심한 후 꾀병을 앓기도 하고,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아버지에게 써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완고한 아버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범 라우렌시오 주교에게 가출할 수 있도록 청원했다. 그러나 주교가 허락하지 않으므로 어머니, 동생과 함께 집을 나와 교우들의 집에서 숨어살았다. 이 사실을 안 주교는 처음에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으나 조선 풍습에 가출했던 부녀자가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음을 알고는 세 모녀가 살 수 있도록 집 한 채를 마련해 주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이영덕은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함께 살던 조 막달레나와 이 카타리나 모녀 등과 서고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를 각오하고, 주교가 체포되면 자헌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미처 자헌할 겨를도 없이 6월 어느 날 이영덕은 습격한 포졸들에게 집에 있던 나머지 사람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마침내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28세에 나이로 참수하였다.
[0.2] 성녀 이인덕(李仁德) 마리아(1818-1840) : 언니 聖女 이영덕 막달레나와 함께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인 이인덕 마리아는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 해 6월 어머니 ‘하느님의 종’ 조 바르바라, 언니와 함께 체포되어 이듬해 1월 31일 '당고개'에서 5명의 교우와 함께 22세에 참수순교하였다.
[1] 절두산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소장, 「기해·병오 순교자 증언록」(필사본), 1883.5., 회차 20, 김 베네딕타의 증언.
[1.1] 聖女 이 가타리나(1783-1839) : 시골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와 함께 입교한 이 가타리나는 교리에 밝지 못한 부모 때문에 14세 때 조(趙)씨란 성을 가진 외교인과 결혼하여 3남매를 두었다. 가타리나의 권고로 남편은 대세를 받고 사망하였다. 1838년 말 고향에 사사로운 박해가 일어나자 가타리나는 가산을 버리고 자녀들과 함께 상경하여 조 바르바라의 집에서 같이 살았다. 1839년 6월 주인집 세 모녀, 큰딸 조 막달레나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딸과 함께 문초를 받고 한 차례의 주뢰질을 당한 후 옥에 갇혔으나 옥이 워낙 비좁고 불결하여 체포된 지 3개월 후인 9월 어느 날 57세에 염병으로 옥사순교했다.
[1.2] 聖女 조 막달레나(1807-1839) : 어려서 어머니 이 가타리나에게 천주교를 배워 입교한 조 막달레나는 외교인 친척들의 반대로 7, 8세경부터 교우 집안인 외가에 가서 살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18세 때 혼담이 오가자 수정(守貞)을 결심하고는 혼담을 피해 서울로 와 5, 6년을 지냈나. 그 후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외교인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죽어 가는 아이들에게 대세를 주는 등 열심히 교회일을 도왔다. 그러던 중 1838년 말 고향에서 사사로운 박해가 일어나자 어머니, 두 동생과 함께 가산을 버리고 서울의 조 바르바라(‘하느님의 종’)의 집으로 피신했다. 1839년 6월 주인집 세 모녀, 어머니 이 가타리나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한 차례의 신문과 주뢰질을 당한 후 옥으로 끌려간 조 막달레나는 3개월 동안 비좁고 불결한 옥살이 중에 염병으로 33세에 동정옥사순교하였다.
[2] 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ff. 434-437; A. Daveluy,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 ff. 29-30; 『기해일기』, 78-80면. 이후 바르바라의 딸 이 막달레나와 이 마리아는 참수로 순교하여 1925년에 시복되었고, 1984년에 이 가타리나, 조 막달레나 모녀와 함께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