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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라
2022년 7월 24일 / 고후 1:3-9
고후 1:3-9 / [환난 후에 받는 위로] 우리의 하나님은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요! 그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며 모든 자비의 근원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고통과 환난을 당할 때 말로 다 할 수없는 위로와 격려를 주십니다. 왜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그것은 다른 사람이 어려운 처지에 놓여 동정과 격려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것처럼 우리도 도움과 위로를 그들에게 베풀 수 있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5) 여러분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면 당할 수록 그리스도께 받는 위로와 격려도 더 풍성하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6-7) 우리가 큰 환난을 당하는 것도 여러분이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며, 또 지금 환난을 당하고 있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시는 것도 역시 여러분을 돕기 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이 우리와 같은 환난을 당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위로가 얼마나 풍성한 것인가를 기억하게 하심으로써 여러분에게 환난을 견디어 나갈 힘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8)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우리가 아시아에서 겪은 환난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꼭 알아두기 바랍니다. 우리는 모진 박해와 고통을 견디어 내지 못하여 끝내 살아남을 희망조차도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9) 우리는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고 우리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라는 것을 절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잘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되자 우리를 구원하실 분도 죽은 사람을 살리실 분도 하나님임을 깨달아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환난이라는 단어와 고난이라는 단어가 여러번 나온다. 보통 <환란, 환난>을 예고되지 않은 어려움, <고난>은 예고된 어려움을 말한다. 8절에서 바울은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겪어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라고 하였다. 바울이 얼마나 큰 환난을 겪었는지 짐작이 가는 말이다.
하지만 본문에서 주목할 단어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위로’라는 말이다. ‘위로’라는 단어가 무려 9회(개정개역)나 등장한다. 그래서 바울은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했다(3절). ‘위로’라는 단어는 헬라어 ‘보혜사’로 ‘곁에서 힘을 준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하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위로는 단순히 동정심을 보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친히 고난의 현장에 다가오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위로는 우리가 어떤 고난도 극복할 수 있게 하신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환란, 환난)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다가 받는 고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위해서 받는 고난을 기뻐해야 한다.
벧전 4:13 / 오히려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하려는 것이니 진정으로 기뻐하십시오. 장차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는 날 여러분은 그 영광을 함께 받고 한없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환란, 환난) 속에서도 결코 낙삼하지 마라. 고난(환란, 환난) 중에 주님의 위로를 기대하시라. 마침내 모든 고난(환란, 환난) 가운데 우리를 승리케 하실 것이다. 위로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분이 되시기를 ….
1. 우리의 삶 중에서 무엇이 제일 두려운가? 묻는다면 무엇이겠는가?
예고 없이 닥치는 사고와 죽음일 것이다. 삶 속에는 행복한 순간들도 있지만, 예기치 않는 사고, 시련, 죽음 등의 환란, 환난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신실한 신앙인이라고 해서 <환란, 환난>과 <고통>으로 부터 면제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 더 많은 고통(苦痛)이 예고된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안과 밖에서 오는 고통을 인내해야 했었다. 안으로는 이단들의 활동으로 신앙을 와해시키려고 했고, 밖으로는 로마제국의 황제 숭배로 핍박을 감내해야 했다.
그 당시 제일 고통스러웠던 것은 안에서의 배반자들이었다. 대부분 순교의 자리로 끌려가게 되는 것을 보면, 안에서 밀고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일들이었다. 일제강점기에서 애국지사들이 잡혀 옥고를 치르게 된 대부분도 안으로부터의 밀정들이 있었기 때문인 것과 같은 의미이다.
사도 바울도 이런 측면에서 자신의 마음에 있는 고통을 아들과 같은 디모데에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
딤후 4:9-10 / 하루 빨리 이곳으로 와주시오. 10) 데마마저 내게서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는 이 세상 향락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데살로니가로 가버렸습니다. ….
반면 오늘날 지금 우리에게는 그러한 박해와 핍박의 고통은 없어도 타락한 물질문명의 문화 속에서 믿음대로 살려고 할 때 당하는 어려움과 고통은 전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 물리적 박해와 핍박에서는 견디어 낼 힘이 더욱 생겼지만, 이렇게 화려한 물질문명의 풍요로운 세상에서 오는 세상의 달콤한 유혹과 성적인 유혹은 젊고 늙고를 떠나 모두가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무서운 시험이기도 하다. 다윗과 삼손이 넘어진 것이 육신적으로 편안할 때였다. 디모데후서 3:12에서도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라고 하였다.
‘경건하게 살고자 한다’라는 의미가 무엇일까? 말씀대로, 믿음대로, 하나님 중심으로 자기를 죽이면서 살고자 하는 삶을 의미하는 말이다. 요즘도 이렇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 스스로에게 많은 절제를 요구하지만 세상적으로 오는 고난도 적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고난이 싫어서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면서 사는 것이 현대판 신자의 모습이 아닐까? 쉬운 예를 든다면 오락, 술좌석에도 앉고, 노름판에도 앉거나 옳은 길이 아닌 줄 알면서도 그 길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작은 개미구멍으로부터 재난은 시작된다는 사실을 잊지말아야 하겠다.
2.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그 고난에는 위로가 있다.
요 15:18-19 /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데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면 세상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했다는 것을 기억하라. 19) 만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다면 세상이 너희를 사랑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해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현대판 교인들이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고 고통받는 것이 싫어서 세상과 비슷한 색깔을 택한다.
좀 지난 통계이지만 지금도 다를 바 없어 참고로 한다. 우리나라 중요직책 100명의 종교 현황을 조사한 것을 보면, ① 기독교 42명, ② 천주교 20명, ③ 불교 9명, ④ 무종교 26명, ⑤ 기타 3명이라고 한다. 기독교 42명과 천주교 20명을 합치면 62명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신앙인들이다. 즉, 우리나라의 중요한 직책 중 62%가 기독교인들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아닌지? 왜 중요직책의 자리에 기독교인들이 들어가 있는데도 우리가 사는 사회는 변화되지 않을까? 이 문제를 한국 교회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바닷물은 염분이 4~5%만 들어있어도 썩지 않는다고 한다. 예수님 말씀이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라’라고 하였다. 소금이 소금의 맛을 잃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리면, 소금은 쓸모가 없다고 하셨다.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이 사회에서 필요한가?’ 하는 의문을 일으킨다. 때로는 사회 법정에서 도리어 교회 문제를 다루게 되어 있다. 교인들 가운데서도 쩍하면,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성경에 보면, 세상 법정보다 교회의 신앙적 행위가 위에 있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교회가 세상 법정에서 시비를 판가름 받게 되었으니, 이것이 본 말이 전도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만일 이런 삶을 살게 되면 이중의 고통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그런 삶에서는 하나님의 위로를 전혀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고난은 위로함이 따르는 것은 공식과 같은 진리이다. 우리 자신도 예수님이 고난 중에 함께 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으므로 담대히 세상과 타협이 없이 믿음을 지킬 뿐 아니라 욥과 같이 세상을 극복할 수가 있다. 예수님의 함께 하심과 위로가 초대교인들이 세상을 이길 수 있었던 유일한 힘이었다. 지금도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는 성령님의 위로 약속은 함께 하신다.
▮ 하나님께서는 외형적으로 믿었을지라도 고난을 통해 기회를 주신다.
■ 조니 에릭슨이라는 미국 여성이 있다. 그녀는 미국 메릴랜드의 체스픽 베이라는 강에서 다이빙하다가 잘못되어 목에 중상을 입고 전신 마비로 누워서 일생을 지내게 되었다. 그녀는 그리스도인이기는 했지만 이러한 시련을 감당할만한 믿음이 아직 부족했다. 그녀는 침상에 누워 늘 자신을 이렇게 만든 하나님을 원망하였고, 깊은 절망에 빠져서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마음에 이런 생각이 났다. ‘내가 이런 몸이라도 쓰임 받을 수만 있다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 수 있을 테네.’ 이런 생각이 들자 그녀는 하나님께 자신을 사용해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한가지 자신의 몸은 움직이지 않지만, 자신의 입술은 아직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입술에 연필을 물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그림이 세상에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하자 유명한 볼펜회사에서 광고 모델로 그녀를 출연시키겠다는 제안이 들어 왔다. 그녀는 그 광고를 받아들였고, 자신이 나오는 모든 광고 아래는 반드시 영어로 P.T.L(Praise The Lord)이라는 글자를 삽입하기로 합의하였다. 그 광고를 통해 널리 알려진 그녀는 복음 전도자로, 장애인을 위한 인권운동가로 미국 사회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지도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녀는 오직 자신의 입술 하나를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며, 높이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면서 수많은 영혼을 위로하고 힘을 주고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신체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나님의 손길이 닿지 않은 부분은 한 곳도 없다.
■ ‘낮은 데로 임하소서’의 주인공인 안요한 목사님이 있다.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이었다. 아버지가 목사님이었지만 믿음과는 아주 거리가 먼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자기 뜻대로 살고 자기중심적으로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병이 들어 시력을 잃게 되었다. 시력을 잃어 가는 과정에서 안요한 목사님은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시각장애인 된 이후에 새롭게 하나님을 위한 삶을 시작한다. 찬양이 없던 입술에서 찬양이 나오기 시작했고,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고 하나님을 높이기 시작했다. 그는 앞이 보지는 않았지만 보이는 인생보다 더 기쁘고 보람 있는 인생을 살아가므로 많은 사람이 그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분명히 4절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하나님은 성도를 환난 중에서 위로하신다. 우리를 환난 중에서 위로하시는 그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축원한다.
3.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당한 고난의 일을 잘 알고 있다. 성령에 이끌리어 빌립보로 왔고 그것도 복음을 전하다가 붙들려 40대에서 하나 감한 서른아홉 대의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다. 온몸은 멍이 들었고, 이곳저곳에 상처가 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까진 부분은 움직일 때마다 아픔을 전달했다. 손과 다리는 착고로 채워져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들의 입에서는 원망이나 불평을 찾아볼 수 없었다.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기도는 찬양이 되었다. 기도와 찬양이 계속되자 그토록 열릴 것 같지 않았던 지하 감옥의 문이 갑자기 흔들리며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은 비록 바울과 실라는 매는 맞았지면 그로 인하여 빌립보에서 많은 신자들이 생겼다. 성도들이 의롭게 살려고 하다가 고난을 받으면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하신다. 성도들이 말씀대로 살려다 받는 고난에는 성령님의 위로하심이 함께 하신다. 성도들이 고난 중에 있을 때 세상적인 위로를 구한다면, 거기에서는 위로를 받을 수 없다. 성도들을 위로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고난을 몸소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계신다.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그런 고난을 겪어 본 사람이라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갖은 멸시와 천대를 다 받으시고, 죄 없는 몸이 죄인의 형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이 이상 더 큰 고난을 받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예수님은 어떤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도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복음성가 중에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는 노래가 있다.
그 노래 중에서도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라고 하고 있다. 사실 고난 중에서라야 하나님의 위로를 가깝게 느낄 수 있다.
■ 어떤 목사님이 심방 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참고로 할 필요가 있다.
"목사님! 내가 시집살이하는 동안 우리 영감 때문에 그나마 살았답니다. 시어머니가 어찌나 못살게 하던지 도저히 살 수가 없었어요. 치마 뒤집어쓰고 연못에 빠져 죽으려고도 했고, 양잿물 마시고 죽으려고도 했고, 몇 번이나 죽으려 했지만, 그때마다 남편이 밤에 잠들기 전에 말없이 제 손을 꼬옥 붙잡아 주었답니다. 거칠거칠한 손, 고되게 일한 그 큰 손으로 꼬옥 잡아주면…. 눈물이 흘러넘쳤어요. 저는 남편 때문에 그 고된 시집살이를 살았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말씀대로 살려다 보면, 갖은 비난과 조롱, 멸시와 천대를 받는 경우가 있다. 더더욱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면 할수록 방해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그럴 때일수록 성령님의 손길은 우리를 붙잡아 주신다. 고난이 크고 많을수록 ‘마련된 위로’도 더욱 풍성하다. 마지막 날에는 반드시 기억해 주실 것이다.
계 21:3-4 / 그때 나는 보좌에서 들려 오는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보라, 이제 하나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계셔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며 4)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이제 다시는 죽음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은 영원히 다 사라져 버렸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신랑 되시는 예수님이 오실지 몰라도 늘 등과 기름을 준비하여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하는 지혜로운 청지기가 되자.
성경에 보면, 고난과 위로는 항상 붙어 다니는 이웃사촌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들이 험하고 악한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할 때, 방관하고 계시는 분이 아니시다.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위로함으로 채워 주신다.
사 46:3-4 / 그러나 주께서는 그와 정반대로 말씀하셨다. `야곱의 자손들아, 내 말을 들어라! 남아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내 말을 들어라. `너희가 나를 업고 다닌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태어날 때부터 업고 다녔으며, 너희가 모태에서 떨어질 때부터 내가 너희를 안고 다녔다. 4) 너희가 늙더라도 나는 여전히 너희를 업고 다니겠다. 너희가 백발이 되어도 나는 너희를 품고 다니겠다. 나는 항상 똑같이 너희를 돌보아주겠다. 내가 이제까지 한 것과 같이, 앞으로도 나는 계속 너희를 업고 다니겠다. 내가 너희를 품고 다니며 건져 주겠다.
오늘도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주님은 위로의 손길로 안아주신다. 눈물로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에게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하신다.
▶ 그런데, 고난과 위로에는 목적이 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고난을 허용하고, 또한 위로를 베푸는 데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➊ 가장 큰 목적은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9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고후 1:9 / 우리는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고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라는 것을 절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잘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되자 우리를 구원하실 분도 죽은 사람을 살리실 분도 하나님임을 깨달아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고난 중에 있을 때 하나님만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의 손길을 바라게 하신다. 사실 보면, 사람이 부족함이 없으면 하나님을 찾게 되지 않는다. 찾더라도 형식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인생이 힘들고 괴로움이 있을 때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된다.
➋ 고난 중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신다.
고후 1:4 / 그것은 다른 사람이 어려운 처지에 놓여 동정과 격려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것처럼 우리도 도움과 위로를 그들에게 베풀 수 있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 어느 성도가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그만 마주 오는 차와 충돌을 하여 그 자리에서 죽었다. 이쯤 되면 누가 무슨 말로 위로를 할 수 있겠는가? 목사님의 위로, 심방 오는 것도 모두 거절했다. 그러다 몇 달이 지났다. 두문불출하던 그에게 같은 아파트에 사는 가난한 가정의 노(老)부부의 위로를 듣고 일어났다. 이 노(老)부부의 아들 둘은 모두 특이한 병으로 둘씩이나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는 아픔을 겪은 분들이었다. '저 늙은 부부는 아들 둘을 잃고도 사는데…….' 세상에는 나보다 더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다는 그런 것 때문에 위로를 받고 일어났다는 말이다.
이런 것을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고 한다. 슬픔은 슬픔을 겪어본 사람만이 서로 아는 법이란 말이다.
그런 면에서 세상에서 제일 천대, 멸시, 조롱, 매 맞음, 침 뱉음, 십자가까지 진 분은 주님밖에 없다. 하나님은 죄 없는 외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위하여 참았다. 그러므로 지금 죄 없이 억울하게 당하고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신다.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신다. 우리 모두 이 위로로 세상을 이길 수 있게 되기를 소원한다. 그리고 또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서로 위로하면서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다.
결 론
■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많은 유대인이 고문과 학살을 당했던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 참혹한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은 눈물을 뿌리면서 하나님께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하나님,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왜 이런 일을 허용하고 계십니까?" 그들의 피맺힌 절규는 연합군이 독일을 물리치고 수용소에서 그들을 자유롭게 할 때까지 매일 계속되었다. 전쟁이 마치고 연합군이 마침내 수용소를 점령하고 수용소의 막사를 점검하게 되었다. 막사를 점검하던 연합군 병사 중 한 명이 동료들을 급히 불렀다. 막사의 한 곳 후미진 벽에 쓰인 글 때문이었다. 그 벽에는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연합군의 병사들은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고난 중에도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더욱 놀라게 한 글은 그 찬양이 마친 다음에 쓰인 글귀였다. 그 글귀는 ‘God is now here 하나님은 지금 여기에 계시다.’라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찬양은 내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겠다는 믿음이 고백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환난을 주시는 이유에 대해 바울은 9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환난을 주신 이유는 바로 자신 중심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이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찬양은 오직 ‘내가 하나님만을 의지한다’라는 뜻이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 23절 이하에 보면 감옥에 자주 갇히기도 했다고 고백하였다. 그는 매도 수없이 맞고, 돌로도 맞아 죽을 뻔도 했고, 타고 가던 배가 세 번씩이나 파선 당하였으며, 강을 건너다가 위험한 고비도 있었고,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는 위험도 있었다. 본문에 있는 것처럼 그는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난을 받아 살아야겠다는 소망까지 끊어졌던 경험도 있다. 그런데 본문 9절에서 그는 분명하게 말한다.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바울은 세상적으로 손꼽을 정도로 잘 났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이 자신을 붙들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나약하고 힘들고 어려운 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자기가 자신의 인생을 붙들고 산다는 것이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기에게는 무익 또는 티끌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고백하기를 ‘이제부터는 오직 나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살겠다’라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 올해가 종교개혁 505주년이 되는 해이다. 마르틴 루터가 카톨릭의 잘못된 구원관을 지적하며 교황청에 정면 도전했다. 구원은 면죄부를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얻는다는 진리를 주장했다. 이때 독일의 찰스 황제가 그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사형에 처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는 너무나 두려워서, 살 소망이 끊어지고, 사형 선고를 받은 것처럼 낙심이 되었다. 그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고, 생명의 위협 때문에 수염과 머리를 길러서 변장하고 다녀야 했다. 그때 루터에게 큰 힘이 되었던 말씀이 시편 46:1-3절이었다.
시 46:1-3 /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 우리의 힘. 어려움 당할 때마다 항상 우리를 도와주시니 2) 땅이 마구 뒤흔들린다 해도 하나도 무섭지 않아. 이 산 저 산이 바다 한가운데로 빠져 들어간다 해도 하나도 무섭지 않아. 3) 바다에 마구 폭풍이 몰아치고 미친 듯이 날뛴다 해도 그 물이 넘쳐 언덕들이 마구 요동한다 해도 우리는 하나도 무섭지 않아. (셀라)
이 말씀에 영감을 받아서 지은 찬송이 바로 찬송가 585장이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당하랴.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 밖에 없도다 힘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루터는 위로의 하나님을 통해서 큰 힘을 덧입고 끝까지 영적 싸움을 싸울 수 있었다. 거대한 교황청의 위협도 이겨내고 당당히 승리할 수 있었다. 우리도 고난을 만날 때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를 건지시고 승리케 하실 하나님을 굳게 믿어야 하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큰 사망에서 건져내사 구원하신 것처럼, 앞으로도 우리를 영적 전투에서 승리케 하실 것이다. 우리 모두 바울나 루터처럼 전적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승리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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