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덕왕릉(興德王陵)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에 있음.
『삼국유사』에 전하는 무덤의 위치가 이 무덤과 대체로 일치하고, 왕릉 주위에서 ‘흥덕’이라는 글자가 쓰여진 금석문이 발견되어 이 무덤이 흥덕왕의 무덤이라는 것을 뒷받침해 주고있다.
전체적인 배치와 장식물의 양식으로 볼 때 성덕왕릉과 원성왕릉의 형식을 많이 본따고 있다.
신라 제42대 흥덕왕(826~836)의 무덤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0호로 지정
<가계도 및 주요치세>
★ 흥덕왕릉비문에 의하면 원성왕은 성한의 22세손으로 기록되어 있어 이에 따라 세대 구분
>20세 김위문 또는 김훈입(訓入) =박창근 이간
>21세 김효양 : 명덕왕(明德王)으로 추존 =지오부인 혹은 계오부인(繼烏夫人) 박씨, 소문태후(昭文太后)로 추존
>22세 38대 원성왕(元聖王, 785~798) =숙정부인 김씨(淑貞夫人) - 각간 김신술(神述)의 딸
선덕왕이 병으로 죽자 왕위를 계승. 휘는 김경신(金敬信), 묘호는 열조(烈祖), 시호는 원성(元聖)
元聖王立. 諱敬信, 奈勿王十二世孫. 母朴氏継烏夫人, 妃金氏神述角干之女. 初恵恭王末年, 叛臣跋扈, 宣徳時為上大等, 首唱除君側之惡. 敬信預之, 平亂有功, 洎宣徳即位, 卽爲上大等. 及宣徳薨, 無子, 群臣議後, 欲立王之族子周元. 周元宅於京北二十里, 㑹大雨, 閼川水漲, 周元不得渡. 或曰, “即人君大位, 固非人謀. 今日暴雨, 天其或者不欲立周元乎. 今上大等敬信, 前王之弟, 徳望素髙, 有人君之體.” 於是, 衆議翕然, 立之継位. 旣而雨止, 國人皆呼萬嵗. [출처] 卷第十 新羅本紀 第十원성왕(元聖王)(785~798)|
원성왕(元聖王)이 즉위하였다.
왕의 이름은 경신(敬信)으로 나물왕(奈勿王)의 12세손이다. 어머니는 朴氏 계오부인(繼烏夫人)이고 왕비는 김씨로 신술(神述) 각간(角干)의 딸이다.
일찍이 혜공왕(惠恭王,765~780) 말년에 반신(叛臣, 金志貞의 난)이 발호(跋扈)하였는데, 선덕왕(宣德王,780~785)이 당시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앞장서서 임금의 곁에 있는 나쁜 무리를 제거할 것을 주장하였다. 경신(원성왕)이 그에 동조하여 난을 평정(平定)하는 일에 공(功)이 있었기에, 선덕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상대등이 되었다.
선덕왕이 죽었는데 아들이 없자, 많은 신하 등이 회의를 한 후에 왕의 집안 조카인 주원(周元)을 옹립하고자 하였다.
주원의 집은 서울에서 〔왕궁으로부터〕 북쪽으로 20리(里) 떨어진 곳에 위치였는데, 마침 큰비가 와서 알천(閼川)의 물이 넘쳐 주원이 알천을 건너 〔왕궁으로〕 오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왕[人君]은 큰 자리라 진실로 사람이 도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 갑자기 비가 쏟아진 것은 하늘이 혹시 주원을 왕으로 세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 상대등 경신은 전왕의 동생으로 평소 덕망이 높고 왕의 자질이 있다. “고 하였다.
이에 여러 사람의 뜻이 모여 경신이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그치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만세를 외쳤다.
<삼국유사>김지정의 난이 혜공왕이 아니라 당시 실권을 잡은 상대등 김양상, 이찬 김경신을 겨냥하여 일어났으며, 이 과정에서 혜공왕과 김지정이 모두 죽고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 했다는 학계의 해석도 있다.
二月, 追封髙祖大阿湌法宣爲玄聖大王, 曾祖伊湌義寬爲神英大王, 祖伊湌魏文爲興平大王, 考一吉湌孝讓為明徳大王. 母朴氏為昭文太后, 立子仁謙為王太子. 毀聖徳大王·開聖大王二廟, 以始祖大王·太宗大王·文武大王及祖興平大王·考明徳大王為五廟. 増文武百官爵一級. 拜伊湌兵部令忠廉為上大䓁, 伊湌悌恭為侍中, 悌恭免, 伊湌世強為侍中.
〔원년〕 2월에 고조부 대아찬(大阿湌) 법선(法宣)을 현성대왕(玄聖大王)으로, 증조부 이찬(伊湌) 의관(義寬)을 신영대왕(神英大王)으로, 조부 이찬 위문(魏文)을 흥평대왕(興平大王)으로, 죽은 아버지 일길찬(一吉湌) 효양(孝讓)을 명덕대왕(明德大王)으로, 어머니 박씨를 소문태후(昭文太后)로 추봉하고, 아들 인겸(仁謙)을 세워 왕태자로 삼았다.
성덕대왕(聖德大王)과 개성대왕(開聖大王)의 두 사당[廟]을 없애고, 시조대왕(始祖大王)·태종대왕(太宗大王)·문무대왕(文武大王)과 조부 흥평대왕(興平大王)·죽은 아버지 명덕대왕(明德大王)을 5묘(五廟: 천자 7묘, 제후 5묘, 대부 3묘)로 만들었다.
문무백관의 관작(官爵)을 한 등급씩 올려 주었다.
이찬 병부령(兵部令) 충렴(忠廉)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고 이찬 제공(悌恭)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는데, 제공이 사양하므로 이찬 세강(世强)을 시중으로 삼았다.
780년(선덕왕 1년) 이찬(伊飡)으로 상대등(上大等) 김양상과 함께 김지정이난을 평정하고 상대등에 올랐다.
785년(원성왕 1년) 선덕왕이 죽고 대신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라 당과 통교하였다.
786년(원성왕 2년) 金城과 주변 지역에 흉년이 발생하자, 명을 내려 2회에 걸쳐 6만여 석의 곡식을 백성에게 나눠줌.
788년(원성왕 4년) 독서삼품과를 설치하여 인재등용
시험 기준으로는 《논어 (論語)》, 《문선(文選)》, 《예기(禮記)》,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효경(孝經)》, 《곡례(曲禮)》등 유교 경서의 독해 수준에 따라 상, 중, 하등급으로 나누어 관리로 채용하였다.
★ 성덕왕(선덕왕의 증조부), 개성왕(선덕왕의 아버지)의 묘제가 대부의 묘제인 3묘인 것에 유의.
→이후 원성왕은 제후의 묘제인 5묘를 세움.
★ 형제 상속 원칙을 고수하는 집단
★김효양에게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물려받았는데, 이 때문에 일본의 왕 문경(文慶)이 신라를 침략하지 못했다는 전설을 수록하였다.
>23세 ①인겸 :태자책봉 후 791년 사망 ▶혜충태자에 추증
>24세 ①준응(俊邕) -798년 39대 소성왕(798.12.~800.6.) 797년부터 대리청정
>25세 ①청명(淸明) ▶40대 애장왕(800~809) =아찬 김주벽의 딸 박씨
805년부터 친정 시작 공식20조 발표. 12도에 사신파견
>25세 ②체명
>25세 장화부인
>24세 ②언승(彦昇) : 809년 41대 헌덕왕(809~822)으로 즉위 =귀승부인 김씨
809년 애장왕과 체명을 죽이고 왕이 됨
812년 발해에 사신 파견. 826년 대동강가에 300리 장성을 쌓아 발해의 남하를 대비
819년 당에서 이사도(李師道)가 반란을 일으키자 헌종 조칙에 응해 金雄元 등 3만의 군사를 파견
822년 김헌창이 웅진을 수도로 한 장안국을 세우고 반란
>25세 ①김장렴(金張廉)
>25세 ②김헌장(金憲章)
>24세 ③수종(秀宗), 수승(秀升) ▶42대 흥덕왕(826~836)= 소성왕의 딸 장화부인(章和夫人)
827년 봄 정월, 왕이 몸소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828년 4월 장보고(張保皐)를 청해진 대사(淸海鎭大使)로 삼았다.
828년 12월,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돌아온 사신 대렴(大廉)이 차나무 종자를 가지고 왔기에 왕이 지리산(地理山)에 심게 하였다.
832년 여름에 가물어 땅이 붉게 탔다. 왕은 정전에 나가지 않고 음식을 줄였으며, 중앙과 지방의 죄수들을 사면하였다.
7월에야 비가 내렸다. 8월, 흉년이 들어 도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10월, 임금이 사람을 파견하여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833년 봄, 나라 안에 큰 기근이 들었다. 4월,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이 해에 전염병으로 죽은 백성이 많았다.
834년 9월, 왕이 서형산(西兄山) 아래에 행차하여 크게 군대를 사열하고, 무평문(武平門)에서 활쏘기를 관람하였다.
10월, 남쪽 지방의 주와 군을 두루 돌아보았다. 노인과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들을 찾아 위문하고, 곡식과 베를 형편에 따라 차등을 두어 내려주었다.
835년 2월, 아찬 金均貞)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시중 우징이, 그의 아버지 균정이 재상으로 조정에 들어갔기 때문에 사직할 것을 요청하였으므로, 대아찬 김명(金明)을 시중으로 삼았다. 김유신(金庾信)을 추봉(追封)하여 흥무왕(興武王)이라 하였다.
836년 12월, 왕이 붕어(崩御)하자 시호를 흥덕(興德)이라 하였다. 조정에서는 왕의 유언에 따라 장화왕비(章和王妃)의 능에 합장하였다.
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사촌동생인 균정(均貞)과 균정의 조카 제륭(悌隆)이 왕위를 두고 다투었다.[
>24세 ④충공(忠恭) - 선강왕(宣康王)으로 추봉.
>25세 ▶44대 민애왕
>23세 ②의영(義英) - 792년 태자로 책봉되었으나 794년 사망 사망 ▶헌평태지에 추증
>24세 숭빈(崇斌)
>23세 ③예영(禮英) ▶혜강왕(惠康王)에 추봉
>24세 ①헌정(憲貞) ▶익성왕(翌成王)으로 추봉
>25세 제륭(悌隆) ▶43대 희강왕(僖康王, 836~838)
>24세 ②균정(均貞) ▶성덕왕에 추봉
>24세 귀승부인(貴勝夫人) 헌덕왕의 부인
>23세 대룡부인
>23세 소룡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