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동 차
정 동 식
옛날 선비들이 꼭 익혀야 할 덕목인 육예六藝(禮樂射御書數) 중에 말타기가 있었다. 육예는 선비가 되는 과정에서 꼭 배워야
할 기초소양인데 어御가 바로 마술馬術이다. 인간은 신석기시대 말기부터 말을 사육하게 되었고 북부 우크라이나 지방의
촌락에서 발견된 말뼈나 말의 이빨, 재갈의 흔적으로 미루어 보아 기원전 3000년 전후로 말을 타기 시작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말은 한때 수렵의 대상이었다가 사냥과 전쟁의 수단으로 변해 왔으며, 19C 철도와 자동차가 인류 앞에 등장하기 전까지는
인간에게 가장 유용한 운송수단이었다.
말은 인류에게 농경을 도와주기도 하지만 홀로 시속 65km를 달리며, 전차를 끌더라도 1시간에 33km 정도를 달릴 수 있다니, 강력한 힘과 엄청난 속도, 지구력은 다른 동물의 추종을 불허한다. 모토무라 료지라는 작가는 ‘말의 세계사’에서 언급하기를
‘말이 없었다면 21세기는 여전히 고대 사회에 머물렀을 것이다!’ 할 정도로 말은 인류의 역사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인간이 말을 이용하지 않았다면 동서양의 문화교류, 진시황제의 중국 통일, 칭기즈칸의 유럽 진출, 태양이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건설이 과연 가능했겠는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많은 명마가 있었다. 적토마는 동탁, 여포, 관우 등 여러 주인을 거쳤고, 나폴레옹의 애마인
마렝고는 142cm 밖에 안 되는 작은 말이지만 용맹하고 튼튼하여 단신인 나폴레옹에게 딱 맞는 말이었다고 한다.
나에게도 애마가 있었다. 나의 애마는 D자동차에서 생산한 누비라Ⅱ이다.
마이카 시대는 진작에 왔었지만 내 생애 최초의 차는 2003년에야 인연이 찾아왔다.
1999년식 배기량 1498cc인 비교적 상태가 괜찮은 준중형 중고차였다.
사업을 하는 K친구가 신차로 바꾸는 틈새를 공략해서 저렴한 비용만 주고 구매했다.
2003년부터 2017년까지 출퇴근할 때는 물론 휴가기간에도 청산도, 보길도, 완도, 진도, 욕지도, 거제도, 설악산, 등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그야말로 이름값을 정말 톡톡히 한 셈이다.
다만 오랫동안 탔으니 웃픈 에피소드가 없다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겠는가?
의성군으로 부임하고 서너 달 지났을 무렵, 나와 동갑인 참모 한 분이 “이제 목표를 이루었으니 새 차를 타시는 것이
어때요? 보는 눈도 있고 하니.... 저도 그랜즈 1000만 원 주고 사서 잘 타고 있어요” 했다. 지금은 외제차를 타도 말이 없지만
그때는 고급차를 타면 눈치를 보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지만 큰 고장이 없다면 좀 더 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마 사람의 입에 이러쿵 저러쿵 내 차에 대한 얘기들이 가십으로 오르내린 모양이었다.
과장님과 나는 이번이 두 번째 근무이며, 인품이 있는 분이라 서로 오해할 부분은 전혀 없었다. 나는 웃으며 과장님에게
말했다. 공적인 행사에는 관용차가 있고, 집에 갈 때는 개인차량을 이용하면 되니 괘념할 필요가 없어요. 했다.
이후에도 각각 다른 분위기에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차량을 바꾸라는 충고를 여러 차례 듣기는 했지만 “그럼 차 사는데 좀
보태 주실래요?”하며 농담으로 받아넘기곤 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2015년 5월 30일 토요일! 여름에 가까운 봄이었다.
내가 참석하는 모임 중, 유일하게 부부동반으로 만나는 고등학생 반창회가 있는 날이다.
매번 유사가 정해지고 모든 일정은 회장단과 상의하여 1박 2일을 함께 보낸다.
처음엔 만찬과 술, 가무 위주로 진행하다가 내가 유사를 맡은 의성 방문 때부터 문화탐방을
하는 방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모임의 분위기가 달라지니 아내들의 반응이 뜨거워지고 호응도가 상당히 높아졌다.
이번 통영 모임의 유사는 김해에 사는 S 친구가 맡았다. 나도 기분 좋게 대구를 출발했는데
통영 시내 산복도로를 지날 때부터 차의 계기판(엔진체크) 부분이 깜박거리면서, 차량 이상의 낌새가 왔다. 우리가 묵을
숙소 E리조트는 바다를 굽어볼 수 있는 전망 좋은 언덕에 있었다. 그런데 가속 페달을 아무리 힘껏 밟아도 차는 30Km
속도밖에 나지 않았다.
타는 듯한 이상한 냄새도 나서 리조트 입구 아래쪽 도로 한쪽에 황급히 주차하고, 숙소까지는 걸어서 올라갔다.
반가운 친구들과 만나 담소를 나누는 중에도 온통 머릿속은 차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내일 장사도長蛇島 관광까지 마쳐야
하는데 통영 유람선 터미널까지 갈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아왔다. 사진에 조예가 깊은 황 작가가 구도를
잡아주는 데로 숙소 옆 연못에 앉아 수평선을 배경으로 멋있게 단체 사진을 찍고 연안부두로 향했다.
출발 전에 L 회장이 말했다. 동식이 차가 정상이 아니니 맨 앞에 서서 일렬종대로 가자는 것이었다. 다행히 시동은 걸렸다.
목적지까지 12Km를 차량 10여 대가 줄지어 서행하는 것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아침을 간단히 먹고 바로 나서서 그런지, 민폐는 크게 끼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장사도 관광을 마치고 친구들은 모두 서울로, 경기도로 각자 집을 향해 먼저 떠났지만 우리 부부는 가까운 카센터로 향해야
했다. 꿀빵과 빼떼기 죽으로 이른 저녁을 때우는 중, 차 수리를 완료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혹시 모르니 속도는 많이 안 내는
것이 좋다고 하여 국도를 이용해 살금살금 대구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날 이후 누비라는 에어컨 작동이 되지 않아 에어컴프레서를 별도로 구입해서 고쳐 쓴 적은 있지만 통영사건만큼이나
당황할 정도로 말썽을 부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2017년 11월에 드디어 운명의 날이 오고야 말았다.
자동차 정기검사에서 일산화탄소 기준치 초과로 배기가스 부적합 판정이 내려진 것이다.
자동차검사소 인근에서 지인이 운영하는 정비공장의 견적을 받아보니 달갑지 않은 소리를 했다. 차값보다 수리비가 더 많이
드니 새 차를 사는 것이 좋지 않겠나 한다.
자동차 보험수가는 70만 원인데 수리비는 100만 원 이상 들어간다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별의 순간이 현실로 다가왔다. 사실 나는 정년을 앞둔 시점에 고급 승용차를 탈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퇴직해보니 두 아들의 학자금 상환 등 경제사정이 녹녹지 않아 퇴임 후에도 1년 가까이 누비라와 함께 할 수
밖에 없었다.
질주본능 DNA는 남자의 상징이다. 사냥을 위해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피가 나에겐들 왜 없겠는가.
승, 하차감을 오롯이 느낄 정도의 고급 차종은 아니었지만 누비라도 절제된 질주본능은 가지고 있었다.
내가 끔찍이 사랑한 애마였고 내 마음속의 페라리(Ferrari), 포르셰(Forsche)였다.
어느 날 중고자동차 매매센터에서 폐차절차를 진행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이른 아침 아들과 함께 애마가 쉬고 있는 곳으로 갔다. 우선 애마를 좁은 공간에서 넓은 쪽으로 옮겨놓고 귀와 목덜미를
쓰다듬어 주었다.
문득 15년간 우리 가족을 위해 전국을 누빈 노고에 대해 감사와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아들에게 스마트폰을 주며 애마와 나의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나는 애마를 향해 거수경례를 했다.
잠시 후 견인차가 와서 나의 애마를 싣고 홀연히 사라졌다.
애마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누비라Ⅱ 34조 9318!
지금도 그 사진을 보면 떠난 님 생각나듯 가슴이 아려온다.
(22.10.19)
첫댓글 Seven 서장님, 15년간 삶을 함께 해온 누비라Ⅱ에 대한 사연들을 잘 읽었습니다. 님은 가고 사진만 남았음에도 볼때마다 아려오는 가슴이라는 내용에 크게 공감을 했습니다..
자동차에 얽힌 사연 잘 풀었습니다. 여러 번 읽어보면서 퇴고를 하시면 좋은 글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