宋汝孝 金鎬 閔光鱗 善政 李亨慶 權審言 尙蓍孫 崔稀壽 朴顆 李希讓 全應昌 金瞻 善治 李寗
宣廟
高尙顔 金浩 朴仁立 呂大老 王辰假守善治 李大期 癸巳假守 宋承祚 鄭泓元 守身 禹興龍 權裕男 盧道亨
고상안(高尙顔, 1553~1623)
■가계
>3 고수연(高壽延)
>2 고극공(高克恭)
>1 고천우(高天佑) 配신천인 강희언(康希彦)의女
>0 ①고상증(高尙曾)
>0 ②고상안(高尙顔, 1553~1623) [진1573] [문1576] 字사물(思勿 號태촌(泰村). 본관 개성. 용궁거주.
<태촌선생문집>『태촌집(泰村集)』
>0 ③고상민(高尙閔)
>0 ④고상맹(高尙孟)
>0 ⑤고상정(高尙程)
■관력
찰방, 함창현감, 좌랑, 감찰, 정랑, 임란의병장, 삼가현령, 지례현감, 함양군수, 울산판관, 풍기군수
■기록
○선조실록 22권, 선조 21년 3월 11일 갑오 2번째기사 1588년
사헌부가 아뢰기를 형조 좌랑 고상안(高尙顔)은 용렬하니 체직하소서."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선조실록 107권, 선조 31년 12월 12일 계해 3번째기사 1598년
정언 권진(權縉)이 【좌목은 위와 같다. 】 와서 아뢰기를,... 단양 군수 고상안(高尙顔)은 체차시키소서."하니 나머지는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선조실록 183권, 선조 38년 1월 25일 경자 4번째기사 1605년
헌부가 아뢰었다.......함양 군수(咸陽郡守) 고상안(高尙顔)은 사람됨이 용렬하며 정사를 아랫 관리에게 맡겨 관아의 일이 나날이 폐추(廢墜)되고 백성의 삶이 침해됨이 많으며, 또한 무뢰한 족속을 놓아 마을의 부녀를 겁간(㤼奸)하려고 하는 등 위세와 폭력을 자행하여 본부에 원통함을 호소하게 하였으니, 이러한 사람은 하루도 관직에 있게 하여서는 안 됩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 한국문집총간 > 태촌집 > 泰村先生文集卷之五 > 效嚬雜記下 > 최종정보
[龜城] 지례현감시의 기록
명종 | 8 | 1553 | 계축 | 경북 龍宮의 旺泰洞에서 태어나다. |
명종 | 14 | 1559 | 기미 | 姜霽의 문하에 나아가 受學하다. |
명종 | 22 | 1567 | 정묘 | 本道 夏課에 장원하다. |
선조 | 1 | 1568 | 무진 | 高靈朴氏와 혼인하다. |
선조 | 4 | 1571 | 신미 | 향시에 합격하다. |
선조 | 6 | 1573 | 계유 | 司馬試에 합격하다. |
선조 | 9 | 1576 | 병자 | 會試에 나아가, 丙科第四人으로 합격하다. |
선조 | 10 | 1577 | 정축 | 부친 봉양을 위하여 一善 黌官에 제수되다. 金貴榮이 古詩 1篇으로 餞行하다. |
선조 | 11 | 1578 | 무인 | 成歡道 察訪이 되다. |
선조 | 13 | 1580 | 경진 | 6월, 부인 喪을 당하다. |
선조 | 14 | 1581 | 신사 | 임기를 마치고 부모를 위해 외직을 청하여 咸昌 縣監이 되다. 大江을 막아 둑을 쌓고 관개를 하여 尙州ㆍ咸昌 백성들을 유리하게 하다. 이곳 백성들이 永世不忘碑를 洑頭岩 石上에 새기다. |
선조 | 15 | 1582 | 임오 | 조정에 들어와 佐郞이 되다. |
선조 | 16 | 1583 | 계미 | 順天張氏와 혼인하다. |
선조 | 17 | 1584 | 갑신 | 監察이 되다. |
선조 | 18 | 1585 | 을유 | 부친상을 당하다. |
선조 | 20 | 1587 | 정해 | 복을 마치고, 다시 감찰이 되다. |
선조 | 21 | 1588 | 무자 | 정랑이 되다. |
선조 | 24 | 1591 | 신묘 | 귀향하여 先墓에 拜掃하다. |
선조 | 25 | 1592 | 임진 |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의병활동을 벌이다. ○ 郡事를 섭행하다. |
선조 | 26 | 1593 | 계사 | 다시 의병장에 부임하여 兵士를 소집하고 군량을 거두다. |
선조 | 27 | 1594 | 갑오 | 봄, 三嘉 縣監이 되다. ○ 4월, 權慄의 천거로 武科 別試 試官에 차출되어 統營에 가다. 三南統制使 李舜臣과 보름간 같은 진영에서 지내다. 이때 唱酬한 詩가 많다. |
선조 | 29 | 1596 | 병신 | 모친상을 당하여 귀향하다. |
선조 | 30 | 1597 | 정유 | 再亂이 발발함에 상중이라 참여하지 못하고 柳成龍에게 禦倭八策을 진달하다. |
선조 | 32 | 1599 | 기해 | 난후 해이해진 儒風의 진작을 위해 諸生을 모아 「小學」 등을 가르치다. |
선조 | 34 | 1601 | 신축 | 知禮 縣監이 되다. |
선조 | 35 | 1602 | 임인 | 咸陽 郡守가 되다. |
선조 | 39 | 1606 | 병오 | 蔚山 判官이 되다. 文敎가 행해지지 않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귀향하다. |
선조 | 40 | 1607 | 정미 | 豐基 郡守가 되다. ○ 黃暹ㆍ郭𡺽 등과 더불어 講學ㆍ論難하다. ○ 西厓 柳成龍을 哭하고 會葬에 참여하다. |
선조 | 41 | 1608 | 무신 | 尙州 遯達山에 南石亭을 짓고 南石老人이라 자호하고, 그 齋는 ‘頤齋’라고 편액하다. |
광해군 | 1 | 1609 | 기유 | 南石新庄에서 同志士友와 더불어 학문을 닦고 唱和하다. |
광해군 | 3 | 1611 | 신해 | 조정이 날로 혼란해지자 가족을 이끌고 草洞에 들어가 여생을 보내기로 하다. |
광해군 | 8 | 1616 | 병진 | 11월, 栢巖 金玏을 곡하고 祭文을 지어 장례에 참석하다. |
광해군 | 11 | 1619 | 기미 | 3월, 金烏書院 四先生奉安享禮에 참여하고, 장사ㆍ제례 절차 및 遺訓을 써서 훈계를 내리다. 또한 農家月令 1편을 지어 절기별 농사 절차를 설명하고 이를 한글로 번역하다. |
인조 | 1 | 1623 | 계해 | 10월 4일, 草洞寢第에서 졸하다. ○ 12월, 尙州 仙巖에 장사 지내다. |
고종 | 35 | 1898 | 무술 | 후손들이 문집을 간행하다.(鄭宗魯의 序)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