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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4장_보좌에 앉으신 분
베드로후서 1:19~21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올해 우리 교회 표어는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임에서는 올 한 해 동안 「복음 진리」, 「교회 진리」, 「재림 진리」 에 관하여 특별 말씀집회와 여름수양회를 통해 성도들을 견고한 기초 위에 세우고자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재림 진리를 위하여 요한계시록을 몇몇 형제님들이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선 요한계시록 1~3장과 20~22장은 주일 말씀으로 전하게 될 것이고, 나머지 4~19장까지는 수요모임에서 매월 2회 교제를 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언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사도 베드로가 권면하였듯이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직접 받아 말한 것이기에 사람의 생각이나 이성적 판단만으로 분별할 수 없는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사용하는 말로 요한계시록이 기록되었고, 그것이 성경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샛별이 우리 마음에 떠오르기를 기대하면서 주의를 기울여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에게 1년이라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을 저 혼자 연구하고 분별하여 성도님들께 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성도님들께 부탁을 드리는 것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뢰아 사람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여 우리 모임 전체가 주님의 재림 진리에 대하여 한 단계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러면 요한계시록 말씀 교제를 시작해보겠습니다.
우선 제가 나누어드린 유인물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장으로 읽는 요한계시록】이라고 제목을 붙여봤습니다. 정말 많은 성도님들이 요한계시록을 어려워합니다. 읽어도 읽어도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선 요한계시록 전체 내용을 한 장에 요약하여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할 수 있도록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1장에는 요한계시록이 어떤 책인지, 요한계시록이 쓰여지게 된 배경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1장에 대하여 주일말씀이 있을 예정이기 때문에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지만, 몇 가지만 언급하고 지나가겠습니다. 우선 계 1:3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이 본문을 보면, 복 있는 사람이 셋이 나옵니다. 말씀을 읽는 자, 말씀을 듣는 자, 말씀을 지키는 자, 이렇게 말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이 개인적으로 성경말씀을 읽는 자가 복이 있고, 주일예배나 수요모임 등에서 말씀을 듣는 자가 복이 있고, 또 일상 삶 속에서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일까요? 이런 말씀 이해가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 즉 AD 1세기 교회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당시에는 인쇄술이 발달되지 않은 상황이라 대부분의 성경기록은 파피루스라는 갈대에 기록되어 있거나 양피지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배당에 한 권의 성경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모임이 이루어질 경우, 한 사람이 성경본문을 읽고 다른 성도들은 듣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읽는 게 아니라 낭독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또 한 가지, 한글 성경에서는 듣는 자와 지키는 자가 별개인 것처럼 보여지지만 사실 원어나 영어번역본을 확인해보면 듣고 지키는 자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1:3이 의미하는 바는 요한계시록 말씀을 교회 앞에서 낭독하는 사람과 그 말씀을 듣고 삶 가운데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계 1:19을 보면, 요한계시록의 구성요소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여기서 ‘본 것’은 1장 예수님의 모습을 본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지금 있는 일’은 요한계시록 기록 당시, 소아시아 지역에 있는 일곱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장차 될 일’은 4장 이후 미래에 있게 될 말씀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2,3장에서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는 서신입니다. 각 교회의 현재 처해있는 상황과 주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시는지, 그리고 그들에게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4,5장에는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 분과 어린 양에 대한 기록이 있고, 어린 양께서 일곱 인으로 봉인된 책을 펼치시면서 장차 있게 될 사건들이 6장부터 이어집니다. 중간중간 삽입 장면들이 나오긴 하지만, 18장까지 인류 역사 마지막에 있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장면이 적나라하게 보여집니다. 큰 음녀와 바벨론 멸망이 이어지고, 어린 양의 혼인잔치, 천년왕국, 옛 뱀이요 사탄, 마귀라고도 하는 용이 유황 불못에 던져지고 나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면서 이 세상의 역사는 끝이 납니다. 이제부터 본문을 직접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요한계시록 4장입니다. 본문을 낭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최○○ 형제 낭독)
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2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6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7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8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9 그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때에,
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요한계시록에는 반복되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일곱이라는 숫자’, ‘이기는 자’, ‘인(seal로 봉인)’, ‘나팔’, ‘대접’, ‘열두 지파’ ‘144,000’ 등등,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일 후에’라는 말도 여러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표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시간의 연속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사도 요한이 본 장면, 장면을 연결하는 연결 어구냐?’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요한계시록 각 장을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의 사건들로 봐야 할 것이냐, 아니면 단순히 사도 요한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소위 말하는 영화씬(scene) 같은 의미인지 판단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분명히 시간의 연속적 흐름으로 볼 수 있지만, 또 어떤 경우는 단순히 연속적인 사건이 아니라 전혀 다른 장면이거나 이미 나온 장면의 반복 같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최대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각 장의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볼 예정입니다. 전체적인 흐름보다는 본문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사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이래로 2천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고 수많은 성경학자들과 설교자들이 요한계시록을 강해하였지만 기록된 사건들의 때를 분별함에 있어 단 한 사람도 제대로 설명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 역시 그럴만한 역량이 없다고 스스로 고백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본문에 나오는 수많은 이미지들과 내용들이 무엇이고, 그 사건들이 언제 어떻게 성취될 것인지를 분별하는 부분에 대한 언급은 최대한 자제하려고 합니다. 저 역시 틀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게 그리 유익이 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권면에 따라 자의적인 해석을 최대한 줄여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라’고 하셨으니 굳이 때와 기한을 알아내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차라리 본문이 주고자 하는 메시지, 전달하려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더 집중하는 것이 지혜롭다는 판단을 하게 됩니다.
1절입니다. 사도 요한이 일곱 교회에 대한 말씀을 듣고 난 후에 하늘을 올려다 보았더니, 열린 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따라서 이제부터 살펴볼 대부분의 말씀들은 미래에 마땅히, 반드시 일어날 일들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예상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기준 시점은 사도 요한이 살아 있을 때, 이후입니다.
그 때 사도 요한이 성령에 감동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령에 감동되었다는 것은 성령 안에 있었다는 말인데, 이는 아마도 성령께서 사도 요한을 완전히 사로잡아 압도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단에게 시험받으실 때에도 성령에게 이끌림을 받았듯이, 지금 사도 요한 또한 성령에 감동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어떤 것이 보였습니까?
| 어떤 분들은 1절에서 ‘이리로 올라오라’는 말씀을 ‘그리스도인들의 휴거’로 해석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자체만을 볼 때, 그런 해석의 근거가 될만한 내용은 보이지 않습니다. |
2절을 보십시오. 하늘에 있는 한 보좌가 보였습니다. ‘보좌’라는 말은 ‘왕이 앉는 자리’를 의미합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보좌’란 ‘임금이 앉는 자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옥좌’라고도 부릅니다. ‘왕좌’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 보좌 위에 앉으신 분이 계셨습니다. 앉으신 분의 모양은 벽옥과 홍보석 같았고, 무지개가 보좌 주위를 둘렀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았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의 형상은 사도 요한이 보지 못한 듯 합니다. 아니면 보았어도 그 형상을 표현할 길이 없어 생략하였을 수도 있을 겁니다.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은 누구일까요? 분명 ‘하나님’이실 겁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어떤 형상으로도 표현되지 않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사도 요한이 기록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세를 통해 주어진 십계명 중 둘째 계명에 따르면, ‘하나님을 어떤 모습으로든지 형상화하지 말라’ 하셨기에 애초에 그 형상을 보여주시지 않았을 수도 있겠습니다. 인간들은 일단 보면 어떤 모양으로든지 형상화하려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4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앉아 계신 보좌 주위로 스물 네 개의 보좌가 있었는데,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흰 옷을 입고 있었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누구인지 그 어떤 힌트도 없습니다. 수많은 성경해석자들이 이십사 장로들이 누구인지 나름대로 제시를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구약의 장로들이다’, ‘구약 열두 지파 장로들과 신약 열두 사도들이다’ 다 추측이요, 상상일 뿐입니다.
이 때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났습니다. 보좌 앞에는 켠 등불 일곱이 있었습니다. ‘등불 일곱’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사도 요한은 코멘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일곱 영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의미한다고 보여집니다. 그렇지만 왜 성령님을 일곱 영이라고 표현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다만 2,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와 무관하지 않을 듯합니다. 또한 일곱이라는 숫자가 요한계시록에서 특히 많이 나오는데, 일곱을 완전수로 보았을 때 하나님의 성령의 완전하심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6절입니다. 보좌 앞에는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좌 주위에는 네 생물이 있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였고, 각각 여섯 날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네 생물은 이미지가 첫째는 사자 같았고, 둘째는 송아지 같았으며, 셋째는 사람 같았고, 넷째는 날아가는 독수리 같았습니다.
그들이 보좌 주위에서 하는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8절을 보면,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말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이 말씀을 읽다보니 떠오르는 구약 말씀이 있습니다. 이사야 6장입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가 성전에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분을 보았었는데, 스랍들이 그분을 모시고 서 있었습니다. 스랍들은 여섯 날개를 가지고 있었는데 두 날개로는 자기 얼굴을 가리었고, 두 날개는 자기 발을 가리었고, 두 날개로 날면서 서로 불렀다고 했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사도 요한이 보았던 장면과 선지자 이사야가 보았던 장면이 같은 것이었는지 다른 것이었는지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분명 비슷한 면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에스겔 1장과 10장도 떠오릅니다. 겔 1:10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왼쪽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그런데 에스겔이 보았던 그룹들은 날개가 넷이었습니다. 요한이 보았던 네 생물은 날개가 여섯이므로 서로 같은 존재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누구인가가 아니라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일 것입니다.
9절입니다. 네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신 ‘세세토록 살아계신’ 분께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렸습니다. 그러자 이십사 장로들도 그분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자기들의 관을 보좌 앞에 드렸습니다. 그리고 말하였습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우리는 요한계시록 4장을 통해 보좌에 앉으신 분, 곧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습니다.
첫째, 하늘에 계신 분이십니다.(2절)
둘째, 보좌에 앉아 계신 왕이십니다.(2절)
셋째, 거룩하신 분이십니다.(8절)
넷째, 전능하신 분이십니다.(8절)
다섯째,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분이십니다. 즉,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8절) 또한 우리가 기다리고 고대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하나님께서도 오신다는 사실을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섯째, 모든 피조물로부터 경배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9,10절)
일곱째,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십니다.(11절)
그분은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아버지이십니다. 이 시간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경배드립니다. 영광과 존귀와 권능과 감사를 돌려드립니다.
마지막으로 11절 끝부분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하여 몇 가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첫째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은 주님의 뜻대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6일간 만물을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만물이 주님의 뜻대로 존재하고 있다고 이십사 장로들이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자연만물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있지 않나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사람들이 다스려야 할 자연만물이 첫 사람의 범죄 이후 신음하고 있고, 자연의 순리는 파괴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중에 사람이 가장 많이 창조질서에 어그러진 모습을 하고 있다고들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십사 장로들은 현재 자연만물이 하나님의 뜻대로 존재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다’라는 말씀은 다른 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기쁨을 위하여 그것들이 존재하며 창조되었습니다.” 즉 창조 목적이 하나님의 기쁨을 위함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1장을 봐도 6일 동안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좋았더라’라는 표현을 무려 여섯 번이나 반복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심히 좋았더라’고 마지막 총평을 하시면서 흐뭇해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물들은 하나님께 기쁨이요, 즐거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첫 범죄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죠. 이는 창조 당시 뿐만 아니라 피조물이 존재하는 한 변치 않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삶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지 못한다면, 그리고 하나님을 즐겁게 해드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존재 목적을 상실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유일한 방법은 바로 믿음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믿어드리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신실하신 분이시니, 우리 또한 신실한 존재들이 되어야 합니다. 신실하다는 것은 믿을 만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참 믿을 만한 사람이야!’라는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믿을 놈 하나 없는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마저 믿을만 하지 못하다면 정말 이 세상은 희망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