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바위 성지
주소 전북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 1158 교구 전주교구
나바위성지는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1845년 10월 12일 밤 조선교구 3대 교구장이신 고주교님과 다블뤼(Daveluy)안신부님 그리고 11명의 조선교우들과 첫발을 내디디신곳이다. 김대건신부는 1821년 8월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당시로는 면천고을 솔뫼에서 부친 김제준이냐시오와 모친 고우르술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미 증조부 김진후비오와 조부 김택현 안드레아 등이 순교한 순교자가문이다.
솔뫼에서 태어나 박해를 피해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 골배마실로 이주하게 된다. 이때가 7살이었다. 김대건의 부친은 1839년 기해박해때 서소문 밖에서 참수 치명하신 순교성인이시다. 김대건이 첫영성체를 한 것은 1836년 1월에 입국한 파리외방전교회 모방(Maubant) 나신부님에 의해서였다. 조선인 성직자를 양성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적당한 소년을 찾고 있던중 골배마실 은이공소에서 김대건소년이 신학생으로 선발하게 된다.
어린 몸에 어려운 길을 서슴지 않고 따르겠다고 나선 소년 김대건의 소망은 겨레의 영혼을 구하겠다는 너무나도 거룩하고 원대한 것이었다. 신학생으로 선발된 김대건은 7월에 서울로 올라와 최양업토마스, 최방제프란치스코와 함께 그해 12월 중국인 유방제 신부가 귀국하는 길에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된다.
장차 한국교회의 순교성인으로 빛날 교우들인 정하상바오로 현석문가롤로 조신철가롤로의 호송을 받으며 일행은 고국산천을 작별하고 부모를 떠나 만주땅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세 소년은 조선의 교우들과 작별하고 중국인 안내자를 따라 봉천, 산해관, 북경, 천진, 광동을 거쳐 목적지인 마카오를 향해 떠나게 되었다.
세소년은 1837년 6월6일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에 도착한다. 그러나 함께 갔던 최방제가 1년만에 병사하는 불행을 맞는다. 이역만리 타향에서 김대건, 최양업 신학생이 학업에 열중하고 있을 때 조국에서는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김대건의 부친과 최양업의 부모님이 순교하게 된다. 모방(Maubant) 나신부님과 2대 교구장이신 앵베르 주교님 그리고 정하상 , 유진길, 조신철 한국교회의 지도급 교우들이 순교하는 대박해였다.
조선은 또다시 목자없는 교회가 되어 교우들은 뿔뿔히 흩어지게 되었다. 김대건은 1844년 조선교구 3대 교구장으로 선임된 고주교님에게 12월15일에 부제품을 받게 된다. 그리고 선교사의 조선영입을 위해 1845년 1월 김대건은 의주쪽으로 어렵게 혼자 입국하는데 성공한다. 그에게는 교회의 실정을 자세히 살펴보고 주교님을 맞아 들여야 하는 중대한 의무가 주어져 있었다. 외국인 성직자들이 육로로 조선에 들어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는 작은배 한 척을 사서 현석문 가롤로등 11명의 교우들과 상해로 돌아갔다.
1845년 8월 17일 상해에서 20리쯤 떨어진 김가항이라는 교우촌의 성당에서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님의 집전으로 한국인 첫 사제로 서품되었다. 한국교회창립 61년만의 일이었다. 8월31일에 김대건신부는 다블뤼신부와 11명의 교우들과 페레올주교님이 라파엘호라고 이름을 붙인 작은 어선을 타고 조선을 향해 출발한다.
라파엘호가 처음에는 요동방면으로 가는 중국 배에 끌리어 산동성까지 무사히 이르렀으나 갑자기 거센풍파를 만나 키는 부러지고 돛은 찢어져 물결이 치는대로 배를 맡기게 되었다. 9월 28일 라파엘호는 제주도의 해안에 닿게 된다.
이로부터 전라도와 충청도 사이에 있는 금강으로 접어들어 60리쯤 올라가서 은진군 강경에서 조금 떨어진 나바위에 상륙하게 된다. 9년만에 사제가 되어 돌아온 김대건과 꿈에도 그리워하며 6년을 포교지를 향해 준비한 페레올 주교님은 감사의 기도로 나바위에 첫발을 내디디었다.
1845년 10월12일 밤 방갓과 상제옷으로 몸을 가린후 어두운밤 나바위에 첫발을 디딘 것은 상해를 떠난 지 바닷길 42일만의 일이었다. 세분 성직자들의 거룩한 첫마음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나바위성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