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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城縣白巖寺雙溪樓記
牧隱文藁卷之三 / 記 / 長城縣白巖寺雙溪樓記
三重大匡▣▣君雲菴澄公淸叟。因絶磵倫公名其樓。且以三峯鄭氏記相示。寺之故詳矣。而溪之爲溪。樓之爲樓。皆略之而不書。蓋難手命其名矣。於是。從絶磵訊之。寺在二水間。而水合于寺之源。東近而西遠。故其勢有大小焉。然合而爲淵。然後出山而去。寺四面山皆高峻。夏蒸溽。無所納涼。是以。據二水合流之處有樓焉。跨左水。俯右水。樓影水光。上下相涵。實爲勝覽矣。庚戌夏。水大至。石堤隳。樓因以壞。淸叟曰。樓吾師所起也。如此可乎。吾師師師相傳凡五代。所以留意山門者至矣。樓今亡。責將誰歸。乃剋日考工復其舊。腐者堅。漫漶者鮮明。於是。足以自慰矣。然吾之心。惟恐一毫或墜吾師之心者。吾之徒未必知也。吾之徒踵吾而住是寺者。或不知吾之心。則山門之事。不可保矣。獨樓乎哉。像設之塵埃。棟宇之風雨。爲人所笑也必矣。是以。一樓之興復。雖不足書。必求能言者筆之。所以圖不朽也。所以戒吾徒也。幸無讓。予嘗師事杏村侍中公。與子姪遊。師其季也。重違其請。用絶磵言名之曰雙溪樓。予老矣。明月滿樓。無由一宿其中矣。恨不少年爲客耳。其師弟子之相承。載在寺籍。故不書。
장성현(長城縣) 백암사(白巖寺) 쌍계루(雙溪樓) 기문
삼중대광(三重大匡) 복리군(福利君) 운암(雲菴) 징공 청수(徵公淸叟)가 절간(絶磵) 윤공(尹公)을 통하여 누대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이와 함께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 정씨(鄭氏)가 지은 사찰의 기문을 자료로 보여 주었는데, 사찰의 내력은 상세히 기술하고 있었으나 시내[溪]는 어떠하며 누각[樓]은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모두 생략하고 써넣지 않았으므로, 대개 누각의 이름을 짓기가 어려웠다.
이에 절간(絶磵)을 통해서 알아보았더니, ‘사찰이 두 개의 시냇물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물은 바로 사찰의 남쪽에서 합류하고 있다. 그 물의 근원을 살펴보건대, 하나는 동쪽으로 가까이 있고 하나는 서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형세상으로는 크고 작은 흐름의 차이를 보이고 있었으나, 각자 한군데로 합쳐져서 못을 이룬 다음에 똑같이 산을 나와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사찰의 사면을 에워싼 산들이 모두 높고 가파르기만 해서, 찌는 듯이 더운 여름철에도 더위를 피해 시원한 바람을 쐴 곳이 없었기 때문에, 두 물이 합류하는 곳에다 터를 정하고 누각을 세우게 되었는데, 왼쪽 시냇물 위에 걸터앉아서 오른쪽 시냇물을 아래로 굽어보고 있노라면, 누각의 그림자와 물빛이 위아래에서 서로 비춰 주는 등, 실로 보기 드문 승경(勝景)을 이루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경술년(1370, 공민왕19) 여름에 큰물이 져서 돌로 쌓은 제방이 허물어지는 바람에 누각도 함께 무너지게 되었는데, 이와 관련해서 청수(淸叟)가 말하기를, “누각은 우리 스님이 일으켜 세운 것인데, 이대로 놔두어서야 되겠는가. 우리 스님인 각엄 존자(覺儼尊者)로부터 스승과 제자 사이에 전해 온 것이 모두 5대(代)에 이르렀으니, 산문(山門)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인 것이 지극하다고 할 것인데, 지금 누각을 망치고 만다면 그 책임이 장차 누구에게 돌아오겠는가. 그래서 내가 기일을 약정하고 공사를 시작해서 옛날의 모습을 복구한 결과, 썩은 것은 다시 견고해지고 빛이 바랜 것은 다시 선명해지게 되었으니, 이쯤 되면 나 자신을 위로하기에는 충분하다 하겠다. 그러나 내가 마음속으로 털끝만큼이라도 우리 스님의 마음을 어기지나 않을까 하고 두려워했던 그 심정을 우리 문도들이 꼭 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요, 또 우리 문도로서 내 뒤를 이어 이 절에 머무르는 자가 혹시라도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산문의 일을 장차 보장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된다면 어찌 유독 누각뿐이겠는가. 불상(佛像)이 먼지로 뒤덮이고 불당(佛堂)이 비바람에 퇴락하여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도 뻔한 이치이다. 이렇게 본다면 누각 하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쯤이야 글로 남길 가치가 없다 하더라도, 이에 대해서 굳이 글 잘하는 이에게 부탁해서 기문을 지어 달라고 하는 것은, 바로 불후(不朽)하게 전해지도록 도모하는 한편 우리 문도를 경계시키려 함이라고 하겠다. 그러니 이 부탁을 거절하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하였다.
나는 일찍이 행촌(杏村 이암(李嵒)) 시중공(侍中公)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자질(子姪)들과 어울려 노닐었는데, 스님은 바로 그 계씨(季氏)이다. 그래서 내가 그 부탁을 거절하기가 어렵기에, 절간(絶磵)의 말에 따라서 쌍계루(雙溪樓)라고 명명하고 기문을 짓게 되었다. 나는 지금 늙어서 누각에 밝은 달빛이 가득할 때 그 속에서 한 번이라도 묵을 길이 없으니, 소년 시절에 그곳의 객이 되지 못한 것이 한스럽기만 하다. 사제간에 서로 계승한 기록은 사찰의 문서에 기재되어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쓰지 않는다.
[주-D001] 장성현(長城縣) …… 기문 : 《목은문고》 원문에 누락된 글자가 많이 눈에 띄는데, 이 부분들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6 장성현(長城縣) 불우(佛宇) 정토사(淨土寺) 조에 나오는 이색의 기문을 참고하여 보완해서 국역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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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文選卷之七十四 / 記 / 長城縣白巖寺雙溪樓記
三重大匡▣▣君雲菴澄公淸叟。因絶磵倫公名其樓。且以三峯鄭氏記相示。寺之故詳矣。而溪之爲溪。樓之爲樓。皆略之而不書。盖難乎命其名矣。於是從絶磵訊之。寺在二水間。而水合于寺之源。東近而西遠。故其勢有大小焉。然合而爲淵。然後出山而去。寺四面山皆高峻。夏蒸溽。無所納涼。是以據二水合流之處。有樓焉。跨左水俯右水。樓影水光。上下相涵。實爲勝覽矣。庚戌夏。水大至。石堤隳。樓因以壞。淸叟曰。樓吾師所起也。如此可乎。吾師師師相傳凡五代。所以留意山門者至矣。樓今亡。責將誰歸。乃剋日考工。復其舊腐者堅。漫漶者鮮明。於是足以自慰矣。然吾之心。惟恐一毫或墜吾師之心者。吾之徒未必知也。吾之徒踵吾而住是寺者。或不知吾之心。則山門之事。不可保矣。獨樓乎哉。像設之塵埃。棟宇之雨風。爲人所咲也必矣。是以一樓之興復。雖不足書。必求能言者筆之。所以圖不朽也。所以戒吾徒也。幸無讓。予甞師事杏村侍中公。與子姪遊。師其季也。重違其請。用絶磵言。名之曰雙溪樓。予老矣。明月滿樓。無由一宿其中矣。恨不少年爲客耳。其師弟子之相承。載在寺籍。故不書。
동문선 제74권 / 기(記) / 장성현 백암사 쌍계루기(長城縣白巖寺雙溪樓記)
이색(李穡)
삼중대광(三重大匡) □군 운암(雲菴) 징공(澄公) 청수(淸叟) 절간(絶磵) 윤공(倫公)에 부탁하여 쌍계루(雙溪樓)의 이름을 짓고, 또 삼봉 정씨(三峯鄭氏)가 지은 누기(樓記)를 가지고 와 보여주었는데, 백암사의 내력은 자세하나 쌍계가 쌍계로 된 내력과 쌍계루가 쌍계루로 된 내력은 모두 생략되어 써 있지 아니하였다. 아마 그 이름을 명명(命名)하기가 어려워서 그런 듯 싶다.
이렇게 되어 한번 구경하기로 작정하여 절간공(絶磵公)을 따라 절을 찾았다. 절은 두 물 사이에 있었고, 물은 절을 일으킨 윗목에서 합쳤는데 동쪽은 근원이 가까웠고 서쪽은 근원이 멀기 때문에 수세가 크고 작고 하였다. 그러나 합하여 못을 이룬 뒤에 산을 빠져 흘러 내려갔다. 절 사면을 둘러 있는 산은 모두 높고 가팔라 한여름 6월 더위에도 바람을 쏘이고 땀을 들일 만한 곳이 없기 때문에 두 물이 합치는 곳에다 쌍계루를 세웠다. 왼쪽 물위에 걸터앉아 바른쪽 물을 굽어보면 다락의 그림자와 물빛이 아래위에 서로 비치어 참으로 볼만 하였다.
경술년 여름에 큰물이 나서 돌축대가 무너지는 바람에 누(樓)도 무너져버렸다. 청수옹(淸叟翁)은 이 누를 중수하고 쌍계루 기를 지어달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쌍계루는 우리 스승님이 세운 것인데 이처럼 무너져도 내버려 두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 스승님은 스승을 이어받기 오대(五代)나 되었으므로 절에 뜻을 둔 것이 지극하였습니다. 그런 누가 지금 없어졌으니 그 책임을 어디로 돌려야 할 일입니까. 그래서 부랴부랴 날을 다투어 공사를 끝내고 옛 모습대로 다시 세우자 썩었던 재목이 견고하여지고 알 수 없게 되었던 채색이 선명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고서야 족히 스스로 위안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조금이라도 우리 스승님의 마음을 타락시키는 점이 있지 아니한가 두려워함이 있음을 내 제자들이 반드시 알지는 못할 것입니다. 내 제자로서 나를 따라 이 절에 머물러 있는 자가 나의 이 마음을 못 알아본다면, 절 일은 지탱되지 못할 것이니 누(樓)쯤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불상에 먼지가 끼고 지붕에 비바람이 들이치게 되어 남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누 하나쯤 재건한 것으로써, 글로 쓸 만한 것이 못 된다 하더라도 꼭 글 잘하는 분을 구하여 써주기를 청하는 것은 오래도록 전하기를 꾀하기 때문이요, 나아가서는 나의 후배를 경계하기 위한 까닭이니, 사양하지 마시고 써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내 일찍이 행촌(杏村) 시중공(侍中公)을 스승으로 모셨고, 그 자질(子姪)과 같이 공부하였는데 선생은 그 계씨(季氏)다. 여러번 써드린다는 약속을 어겨 왔으므로 이제 절간공(絶磵公)의 말을 인용하여 이름을 ‘쌍계루’라 하고 기를 지어 보낸다. “아, 내가 늙었구나. 명월이 누에 가득 찼으련만 하룻밤 그곳에서 구경할 길 없으니, 젊어서 길손되지 못한 것을 한할 뿐이로다.” 하고는, 그 사제(師弟)의 이어받은 계통은 자세하게 절 문서에 기재되어 있기에 여기에는 쓰지 않았다.
ⓒ 한국고전번역원 | 양대연 (역)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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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卷三十六 / 全羅道 / 長城縣 / 佛宇
鷲棲寺。在鷲嶺山。有石塔、石鍾。宋時有僧雲默,遊于中國,以善書名世。其示寂也,弟子爲立塔鍾,以安遺骸。
淨土寺。在白巖山。寺有雙溪樓。○李穡記:“三重大匡、福利君、雲巖澄公淸叟,因絶磵倫公,請命其樓。且以三峯鄭氏記相示,寺之故詳矣,而溪之爲溪,樓之爲樓,皆略之而不書,蓋難乎命其名矣。於是從絶磵訊之,寺在二水間,而水合于寺之南,水之源東近而西遠,故其勢有大小焉。然合而爲淵,然後出山而去。寺四面山皆高峻,夏日蒸溽,無所納涼。是以據二水合流之處,有樓焉,跨左水,俯右水,樓影水光上下相涵,實爲勝覽矣。庚戌夏,大水至,石堤隳,樓因以壞。淸叟曰:‘樓,吾師所起也,如此可乎?吾師覺儼尊者,師師相傳凡五代,所以留意山門者至矣。樓今亡,責將誰歸?乃剋日雇工,復其舊,腐者堅,漫漶者鮮明,於是足以自慰矣。然吾之心惟恐一毫或墜吾師之心者,吾之徒未必知也,吾之徒踵吾而住是寺者,或不知吾之心,則山門之事不可保,奚獨樓乎?像設之塵埃,棟宇之風雨,爲人之所笑也必矣。是以一樓之興復,雖不足書,必求能者筆之,所以圖不朽也,所以戒吾徒也,幸無讓。’ 予嘗師事杏村侍中公,與子姪遊,師其季也。重違其請,用絶磵言,名之曰雙溪樓。吾老矣,明月滿樓,無由一宿其中矣,恨不少年爲客耳。其師弟子之相承在載籍,故不書。” ○鄭夢周詩:“求詩今見白巖僧,把筆沈吟愧不能。淸叟起樓名始重,牧翁作記價還增。煙光縹緲暮山紫,月影徘徊秋水澄。久向人間憂熱惱,拂衣何日共君登?”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6권 / 전라도(全羅道) / 장성현(長城縣) / 【불우】
정토사(淨土寺) 백암산에 있는데, 절에 쌍계루(雙溪樓)가 있다. ○ 이색(李穡)의 기문에, “삼중대광 복리군 운암 징공 청수(三重大匡福利君雲巖澄公淸叟)가 절간 윤공(絶磵倫公)으로 하여금 나에게 그 누각에 이름을 지어줄 것을 청하면서 삼봉 정씨(三峯鄭氏)의 기문도 함께 보여주었다. 절의 내력은 상세하나, 시내가 어떤지 누각이 어떤지는 모두 생략하고 쓰지 않았으므로 그 이름을 짓기가 어려웠다. 이에 절간에게 물으니, 절이 두 시냇물 사이에 있는데, 물이 절의 남쪽에서 합치며. 물의 근원은 동쪽이 가깝고 서쪽이 멀기 때문에 크고 작음이 있는데, 합쳐서 못이 된 뒤에 산을 나와서 흐른다고 한다. 절의 사면은 산이 모두 높고 험해서 무더운 여름날이면 시원한 바람을 맞을 곳이 없으므로, 이 두 시내가 합류하는 곳에 누각이 있어 왼쪽 물에 걸터앉아 오른쪽 물을 굽어보고 있으면 누각의 그림자와 물빛이 위 아래로 서로 비치어 참으로 볼만하다고 한다. 경술년 여름에 큰물이 나서 돌 제방이 무너지매 누각도 따라서 무너졌다. 청수(淸叟)가 이르기를, ‘누각은 우리 스승이 세운 것인데, 이래서야 되겠는가. 나의 스승 각엄존자(覺儼尊者)께서는 스승과 제자로 서로 전해 온 지가 모두 5대나 되었다. 그런 까닭에 산문(山門)에 유의하기를 지극히 하였다. 누각이 지금 없어지면 책임이 장차 누구에게 돌아가겠는가. 이에 날짜를 기약하고 목공을 고용하여 그 옛 모습을 회복하였는데, 썩은 것은 견고한 것으로 갈고 퇴색한 것은 선명하게 하니, 이에 위안이 될 만하였다. 그러나 내 마음에 조금이라도 혹시나 우리 스승의 마음을 져버릴까 두려워하는 것을 내 제자들이 꼭 알지 못할 것이요, 내 제자로서 나의 뒤를 이어 이 절에서 사는 자가 혹시 내 마음을 모른다면 산문의 일이 보존되지 못할 것이 어찌 누각뿐이겠는가. 불상에 먼지끼고 집에 비바람 치는 것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 틀림없다. 이러므로 한낱 누각의 다시 건축함을 비록 글로 쓸 만한 것은 못되나, 반드시 글 잘하는 이가 쓰기를 구하는 것은 후세에까지 전하기를 꾀하기 때문이며 내 제자들을 경계하려는 것이니, 부디 사양하지 마시오.’ 하였다. 내가 일찍이 행촌 시중공(杏村 侍中公)에게 사사하여 그 자질(子姪 이름은 암(岩))과 벗하고 놀았는데 그 스님은 그이의 계씨였다. 그 청을 어기기 어려워서 골짜기에서 들은 말을 따라 쌍계루라고 이름 지었다. 나는 이미 늙어서, 밝은 달이 누각에 가득 찼을 터인데, 그 안에서 한 번 자지 못하게 되었으니, 소년시절에 그 절의 객이 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그 스승과 제자의 서로 계승한 것은 책에 있으므로 쓰지 않는다.” 하였다.
○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지금 시를 써달라 청하는 백암승(白岩僧)을 만나니, 붓을 잡고 침음(沈吟)하면서 재주없음 부끄럽구나. 청수가 누각 세워 이름이 이제 무겁고, 목옹(牧翁 이색)이 기문을 지어 값 더욱 더하네. 노을빛 아득하니 저무는 산이 붉고, 달빛이 배회하니 가을 물이 맑구나. 오랫동안 인간에서 시달렸는데, 어느날 옷을 떨치고 자네와 함께 올라 볼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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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峯集卷之十三 奉化鄭道傅著 / 拾遺○記
白巖山淨土寺記 佚○按李穡淨土寺雙溪樓記曰。三重大匡福利君雲巖澄公淸叟。因絶磵倫公請命其樓。且以三峯鄭氏記相示。寺之故詳矣。而溪之爲溪。樓之爲樓。皆略之而不書。蓋難乎命其名矣。 [本文缺]
(국역) 쌍계루(詩ㆍ書) : 雙溪樓원서명白羊寺와 雙溪樓저/편자정몽주 (鄭夢周 , 1337 ~ 1392) 등 지음저작시기분류사항집부(集部) 별집류(別集類)번역대본변시연 선생이 영인하여 발간한 『白羊寺와 雙溪樓』(한국고문연구회, 1987)를 번역한 것임
쌍계루 서
백암산 정토사 사적 서문(白巖淨土寺事蹟序)-20
백암산 정토사 교루기(白巖山淨土寺橋樓記)-23
장성현 백암사 쌍계루 기문(長城縣白巖寺雙溪樓記)-29
쌍계루설(雙溪樓說)-33
중수 상량문(重修 上樑文)-36
백암사 쌍계루 중수기(白巖雙溪樓重修記)-42
중건기(重建記)-45
도서명 국역 쌍계루 시ㆍ서
저자 호남학연구원 편 박미향ㆍ이대연 역
분류 [교양]
발행일 2017-11-17 판형 4×6배판
ISBN 978-89-6849-443-7 (03810)
페이지 380 정가 비매품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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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목차
쌍계루(雙溪樓)는 백양사(白羊寺)에 소속된 누정으로 고려시대 국사였던 각엄부구(覺儼復丘)에 의해 창건되고 이후 청수(淸叟)에 의해 중창되었다. 이 누정에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기문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시가 현액 되면서 대대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포은이 조선 유학자들의 종장(宗匠)으로 추앙되면서 포은의 시를 좇아 많은 관료와 학자, 유자들이 이곳을 찾아 차운시(次韻詩)를 남겼다.
현재 쌍계루에는 200여 편의 시와 서문이 걸려있으며, 백양사와 쌍계루의 풍광을 노래하고 있다. 이번 쌍계루 시와 서문의 완역을 통해 쌍계루를 중심으로 하는 당대 지식인들의 사상에 대한 탐색, 백양사와 쌍계루 그리고 주변의 풍광에 대한 이야기를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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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집 제2권 / 시(詩) / 장성 백암사 쌍계에 시를 지어 부치다〔長城白嵒寺雙溪寄題〕
시 구하는 백암사 승려를 이제 만났지만 / 求詩今見白巖僧
붓 잡고 읊어 봐도 글 안 되어 부끄럽네 / 把筆沈吟愧未能
청수가 누각 일으켜 이름 처음 중해지고 / 淸叟起樓名始重
목옹이 기문을 지어 값이 더욱 더해졌네 / 牧翁作記價還增
붉은 저문 산에 노을빛이 아스라하고 / 煙光縹緲暮山紫
맑은 가을 물에 달그림자 배회하리라 / 月影徘徊秋水澄
오래도록 세간에서 번뇌로 괴로워하니 / 久向人間煩熱惱
어느 날 훌훌 떠나 그대와 함께 오를까 / 拂衣何日共君登
[주-D001] 백암사(白嵒寺) 쌍계(雙溪) : 전라남도 장성군에 있는 백양사(白羊寺) 쌍계루(雙溪樓)를 가리킨다. 백암사는 조선 선조 때 중건하면서 지금의 이름인 백양사로 바뀌었다.[주-D002] 청수(淸叟)가 …… 더해졌네 : 청수는 누각을 중건한 백암사 승려 징청수(澄淸叟)이고, 목옹(牧翁)은 누각의 이름과 기문을 지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이다. 관련된 내용은 이색의 〈장성현백암사쌍계루기(長城縣白巖寺雙溪樓記)〉에 자세히 실려 있다. 《牧隱文藁 卷3》
ⓒ 한국고전번역원 | 박대현 (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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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집 제18권 / 서(序) / 《백암정토사사적》 서〔白巖淨土寺事蹟序〕
상인(上人) 인정(印正)은 그 거처한 곳이 정토(淨土) 석굴이요, 그 참구(參究)한 바는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이다. 하루에 한번 밥을 먹는다 하는데, 사람들은 그가 산을 내려온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렇게 하기를 몇 년이 지나도록 노인은 처음에 그를 알지 못하였는데, 그를 아는 사람이 그렇다 말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정토사적(淨土寺蹟)》을 들고, 산 밖에 있는 늙은이를 뵙고 말하기를 “장차 판각하여 오랫동안 전하려고 합니다.”라고 하면서 늙은이로 하여금 한 팔의 힘을 빌려달라고 하였다. 그 전적을 보니 부촉(付囑)이 오밀조밀하였다. 각엄(覺儼)으로부터 이하는 장(藏)을 돌려가며 회(會)를 베풀었고, 지정(至正)으로부터 이하는 글을 요청한 것이 장엄했으며, 정삼봉(鄭三峯)으로부터 이하는 뚜렷이 손바닥을 가리키는 듯하였다.
늙은이가 인정에게 이르기를 “절이 있으면 전적이 없을 수 없고, 전적이 있으면 그대가 없을 수 없다. 그대가 떠난 이후 홀로 또 다른 그대가 없겠습니까? 그대는 또 무엇을 근심하는가? 만일 반드시 그 결국 허환(虛幻)을 말한다면, 늙은이도 스스로 보장할 수가 없으니, 그대에게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진퇴에 내가 무슨 소용이 되겠습니까?
다만 늙은이가 인정에게 물을 것이 있습니다. 그대가 바야흐로 그대의 태상(太上) 한 가지에 종사하여 비록 형체도 스스로 도외시하면서 오히려 형체의 붙인 바에 연연해하는 것은 추구(芻狗)의 묵은 자취와 같은데, 그것이 잠깐 사이에 전해지느냐 전해지지 않느냐를 비교하니 이는 이른바 ‘색(色)과 공(空)이 서로 떨어지지 않아 세(世)마다 떨어져 나오고 별도의 법도가 없다.’라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이 절은 일찍이 늙은이가 독서했던 곳이다. 스님이 글을 요청하는데 늙은이가 거절할 수 없었다. 또 그 교루(橋樓)의 포옹(圃翁) 시에 차운하여 전적의 말미에 기록하도록 하였다.
[주-D001] 백암정토사사적 서 : 이 서문은 현재 전남 장성군 약수리 백양사의 전신인 정토사의 사적에 대한 글이다.[주-D002] 상인(上人) 인정(印正) : 1805~1883. ‘인정(麟淨)’이라고도 한다. 전남 장성(長城)에서 연안 차씨(延安車氏) 집안에서 태어났다. 1817년(순조17) 13세의 나이로 정토사 심옥(心沃) 스님에게 출가하였고, 1827년(순조27) 인월(印月) 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평생 하루 한 끼만 먹으며 정진하였고, 경율론(經律論) 삼장(三藏)을 널리 배웠다. 1840년(헌종6)에 화월(華月) 스님의 법을 이어받았다. 이 시기에 호남의 많은 절들이 퇴락하였는데, 인정은 10여 년 동안 정진하여 정토사를 중흥하였다. 그 후 운문암과 천진암에서 몇 년 동안 수행하다가 법랍 67세로 입적하였다.[주-D003]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 달마(達磨)가 서쪽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불법(佛法)을 전한 진의(眞意)가 무엇인지를 묻는 선종(禪宗)의 화두(話頭)인데, 당(唐)나라의 조주 종심 선사(趙州從諗禪師)에게 어떤 승려가 “조사가 서쪽에 온 뜻이 무엇입니까?[如何祖師西來意]”라고 하니, 조주가 대답하기를 “뜰 앞의 잣나무니라.[庭前柏樹]” 했다 한다. 《聯燈會要 卷6 趙州從諗條》[주-D004] 노인 : 기정진 자신을 말한다.[주-D005] 부촉(付囑) : 불법(佛法)의 보호와 전파를 다른 이에게 맡겨 부탁하는 것을 말한다.[주-D006] 장(藏)을 돌려가며 : 장은 대장경을 말한다. 이는 전독(轉讀)한다는 뜻이다. 전독은 1부(部)의 경(經)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 진독(眞讀)과 상대되는 말로, 불경이 너무 방대한 점을 감안해서 법회(法會) 때에 불경의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 몇 줄 정도를 읽고서 끝내는 것을 말한다.[주-D007] 추구(芻狗) : 풀을 묶어서 개 모양으로 만든 것을 말한다. 옛날에 제사를 지낼 때 쓰던 것인데, 제사가 끝나고 나면 바로 내버리기 때문에, 소용이 있을 때만 이용하고 소용이 없을 때는 버리는 천한 물건의 비유로 쓰인다.[주-D008] 교루(橋樓)의 포옹(圃翁) 시 : 교루는 백양사 입구에 있는 쌍계루를 말한다. 포옹은 고려 정몽주(鄭夢周)의 호이다. 그는 일찍이 〈기제쌍계루(奇題雙溪摟)〉시를 남겼다.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ㆍ조선대학교 고전연구원 | 박명희 김석태 안동교 (공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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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시집 제45권 / 시류(詩類) / 백암사(白庵寺)로 돌아가는 도암 상인(道庵上人)을 보내다 5수. 병서(幷序)
백암사는 고려(高麗) 시중(侍中) 행촌(杏村) 이 문정공(李文貞公)의 원찰(願刹)인데, 그의 아들 평재(平齋) 문경공(文敬公)과 손자 용헌(容軒) 국로(國老)가 각기 선인(先人)의 뜻을 이어서, 출가한 자손 중에 조행(操行)이 있는 자를 가리거나 혹은 승려 중에 명망이 있는 자를 간택하여 이 절을 주관하게 함으로써 서로 전하여 수호해 온 지가 이미 100여 년이 되었다. 지난번에는 행촌의 외증손(外曾孫)인 판선종사(判禪宗事) 송은(松隱) 몽대사(蒙大師)가 이 절을 주관하였고, 그의 고제(高弟)가 바로 도암(道庵) 성 상인(成上人)인데 송은이 도암에게 이 절을 전하였으니, 도암 또한 산문(山門)에서 숙망(宿望)이 있는 사람이다. 그가 이 절에 머무른 지 지금 거의 30여 년에 이르는 동안, 도풍(道風)을 크게 선양함으로써 명성 높은 고승(高僧)들이 마치 비린내를 좋아하여 달려드는 개미들처럼 도암을 흠앙(歆仰)하여 서로 다투어 달려왔다. 인하여 생각하건대 거정(居正)이 예전에 흥천사(興天寺)로 송은을 찾아 뵈었더니, 송은이 거정을 족질(族姪)이라 하여 정성껏 대우해 주고 이어 송은에 대한 설(說)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는데, 송은은 다시 백암사로 가게 되었다. 그 후 거정이 설을 지어서 도암을 통하여 부쳐 드렸더니, 뒤에 송은이 거정에게 이르기를 “그대의 설이 노승(老僧)의 기본 취지에 잘 부합한다.” 하고는 도암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반드시 기록해 놓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송은이 시적(示寂)하였으므로 지금은 송은을 생각만 할 뿐 만날 수가 없으나, 도암을 만나니 애오라지 스스로 위로가 된다.
도암은 본디 양주(楊州) 불암리(佛巖里) 사람인데, 거정의 별업(別業) 또한 그 이웃에 있었다. 도암의 나이는 나보다 다섯 살이 아래인데, 왕래하며 서로 종유한 지가 거의 50년이 되었다. 상인은 항상 백암사에 머무르다가 혹 경사(京師)에 오거든 반드시 먼저 나를 방문하곤 했는데, 금년 봄에는 흥천사에 와서 결하(結夏)를 하고 가을 기후가 점차 서늘해지자 또다시 산으로 돌아가려 하면서 재차 찾아와서 나에게 이별을 고하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백암사는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의 자손들이 대대로 수호하는 원찰인데 공(公) 또한 행촌의 외현손(外玄孫)이니, 공의 한마디 말씀을 얻어서 길이 산문의 광영으로 삼고 싶습니다.” 하므로 거정이 말하기를 “행촌의 내외 자손으로 지금 조정에서 벼슬한 이는 몇 천백 인이요, 심지어는 왕실의 외척이 된 이도 있으니, 비록 거정 같은 하찮은 외손(外孫)이 아니라도 또한 반드시 그 일을 크게 빛내 줄 이가 있을 터인데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우선 절구(絶句) 5수를 써서 보내 드리고 겸하여 지주(地主) 조 사문(曺斯文)에게 부치는 바이다.
남국에 가장 이름난 절이 바로 백암사라 / 南國名藍是白庵
수많은 누대 사이엔 남기가 어우러졌는데 / 樓臺多少間晴嵐
언제나 짚신 버선 차림으로 스님을 찾아 / 何時鞋襪尋師去
밝은 달밤 쌍계에서 종용히 담론해볼꼬 - 이 절에 쌍계루(雙溪樓)가 있는데, 이목은(李牧隱) 선생이 그 기문(記文)을 썼다. - / 明月雙溪共軟談
가을바람은 점점 일고 호수는 하 맑은데 / 秋風欲落湖水澄
나그네 행장은 등나무 지팡이 하나로다 / 去去行藏一瘦藤
온 산에 원숭이 학은 서글피 기다릴 테고 / 猿鶴滿山應悵望
청산은 예전대로 흰 구름이 겹겹일 걸세 / 靑山依舊白雲層
천하에 명성 하 높았던 이행촌이거니 / 天下聲名李杏村
그 원찰을 의당 길이 보존시켜야 하는데 / 宜敎願刹鎭長存
나라 가득 자손들은 수도 없이 많지만 / 子孫滿國多於織
묻노라 그 어떤 이가 부지런히 수호할꼬 / 且問何人衛守勤
송풍나월이 산문을 보호하거니와 / 松風蘿月護山門
더구나 지주의 깊은 은택까지 입음에랴 / 何況深蒙地主恩
위하여 사문 조 태수에게 알려드리노니 / 爲報斯文曹太守
나도 행촌의 외현손이 되는 사람이라오 / 杏村吾亦外玄孫
목은의 큰 문장으로 사루를 잘 꾸몄는데 / 牧老雄文賁寺樓
삼봉의 뛰어난 필치 또한 풍류가 있거니 / 三峯妙筆亦風流
내 졸렬한 시구를 큰 소리로 읽지 말게나 / 莫將拙句高聲讀
아마도 산신령이 허여해 주지 않을 걸세 / 知有山靈不點頭
[주-D001] 백암사(白庵寺) : 본디 전라도 장성(長城)의 백암산(白巖山)에 있는 정토사(淨土寺)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암(巖)이 암(庵)으로 바뀌었으나 우선 그대로 두었다.[주-D002] 결하(結夏) : 승려가 음력 4월 16일부터 7월 15일까지 90일 동안 출입을 금하고 한곳에 모여 수행에 전념하는 것으로, 하안거(夏安居)라고도 한다. 또 10월 16일부터 정월 15일까지 90일 동안을 위와 같이 하는 것을 동안거(冬安居)라 한다.[주-D003] 온 …… 테고 : 남제(南齊) 때 공치규(孔稚圭)가 북산이문(北山移文)을 지어 일찍이 북산에 은거하다가 변절하여 벼슬길에 나간 주옹(周顒)을 몹시 책망하는 뜻을 서술하면서 “혜초 장막은 텅 비어 밤 학이 원망하고, 산중 사람이 떠나가니 새벽 원숭이가 놀란다.〔蕙帳空兮夜鶴怨 山人去兮曉猿驚〕”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원숭이와 학은 곧 깊은 산중의 은자(隱者)의 처소를 의미한다.[주-D004] 송풍나월(松風蘿月) : 소나무에 부는 바람과 여라(女蘿) 덩굴에 걸린 달빛을 말한 것으로, 전하여 은자의 처소를 의미한다.[주-D005] 삼봉(三峯)의 …… 있거니 : 삼봉은 정도전(鄭道傳)의 호로, 그가 일찍이 쌍계루(雙溪樓)의 현액(懸額)을 썼던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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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시집 제45권 / 시류(詩類) / 백암사(白庵寺)로 돌아가는 도암 상인(道庵上人)을 보내다 5수. 병서(幷序)
백암사는 고려(高麗) 시중(侍中) 행촌(杏村) 이 문정공(李文貞公)의 원찰(願刹)인데, 그의 아들 평재(平齋) 문경공(文敬公)과 손자 용헌(容軒) 국로(國老)가 각기 선인(先人)의 뜻을 이어서, 출가한 자손 중에 조행(操行)이 있는 자를 가리거나 혹은 승려 중에 명망이 있는 자를 간택하여 이 절을 주관하게 함으로써 서로 전하여 수호해 온 지가 이미 100여 년이 되었다. 지난번에는 행촌의 외증손(外曾孫)인 판선종사(判禪宗事) 송은(松隱) 몽대사(蒙大師)가 이 절을 주관하였고, 그의 고제(高弟)가 바로 도암(道庵) 성 상인(成上人)인데 송은이 도암에게 이 절을 전하였으니, 도암 또한 산문(山門)에서 숙망(宿望)이 있는 사람이다. 그가 이 절에 머무른 지 지금 거의 30여 년에 이르는 동안, 도풍(道風)을 크게 선양함으로써 명성 높은 고승(高僧)들이 마치 비린내를 좋아하여 달려드는 개미들처럼 도암을 흠앙(歆仰)하여 서로 다투어 달려왔다. 인하여 생각하건대 거정(居正)이 예전에 흥천사(興天寺)로 송은을 찾아 뵈었더니, 송은이 거정을 족질(族姪)이라 하여 정성껏 대우해 주고 이어 송은에 대한 설(說)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는데, 송은은 다시 백암사로 가게 되었다. 그 후 거정이 설을 지어서 도암을 통하여 부쳐 드렸더니, 뒤에 송은이 거정에게 이르기를 “그대의 설이 노승(老僧)의 기본 취지에 잘 부합한다.” 하고는 도암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반드시 기록해 놓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송은이 시적(示寂)하였으므로 지금은 송은을 생각만 할 뿐 만날 수가 없으나, 도암을 만나니 애오라지 스스로 위로가 된다.
도암은 본디 양주(楊州) 불암리(佛巖里) 사람인데, 거정의 별업(別業) 또한 그 이웃에 있었다. 도암의 나이는 나보다 다섯 살이 아래인데, 왕래하며 서로 종유한 지가 거의 50년이 되었다. 상인은 항상 백암사에 머무르다가 혹 경사(京師)에 오거든 반드시 먼저 나를 방문하곤 했는데, 금년 봄에는 흥천사에 와서 결하(結夏)를 하고 가을 기후가 점차 서늘해지자 또다시 산으로 돌아가려 하면서 재차 찾아와서 나에게 이별을 고하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백암사는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의 자손들이 대대로 수호하는 원찰인데 공(公) 또한 행촌의 외현손(外玄孫)이니, 공의 한마디 말씀을 얻어서 길이 산문의 광영으로 삼고 싶습니다.” 하므로 거정이 말하기를 “행촌의 내외 자손으로 지금 조정에서 벼슬한 이는 몇 천백 인이요, 심지어는 왕실의 외척이 된 이도 있으니, 비록 거정 같은 하찮은 외손(外孫)이 아니라도 또한 반드시 그 일을 크게 빛내 줄 이가 있을 터인데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우선 절구(絶句) 5수를 써서 보내 드리고 겸하여 지주(地主) 조 사문(曺斯文)에게 부치는 바이다.
남국에 가장 이름난 절이 바로 백암사라 / 南國名藍是白庵
수많은 누대 사이엔 남기가 어우러졌는데 / 樓臺多少間晴嵐
언제나 짚신 버선 차림으로 스님을 찾아 / 何時鞋襪尋師去
밝은 달밤 쌍계에서 종용히 담론해볼꼬 - 이 절에 쌍계루(雙溪樓)가 있는데, 이목은(李牧隱) 선생이 그 기문(記文)을 썼다. - / 明月雙溪共軟談
가을바람은 점점 일고 호수는 하 맑은데 / 秋風欲落湖水澄
나그네 행장은 등나무 지팡이 하나로다 / 去去行藏一瘦藤
온 산에 원숭이 학은 서글피 기다릴 테고 / 猿鶴滿山應悵望
청산은 예전대로 흰 구름이 겹겹일 걸세 / 靑山依舊白雲層
천하에 명성 하 높았던 이행촌이거니 / 天下聲名李杏村
그 원찰을 의당 길이 보존시켜야 하는데 / 宜敎願刹鎭長存
나라 가득 자손들은 수도 없이 많지만 / 子孫滿國多於織
묻노라 그 어떤 이가 부지런히 수호할꼬 / 且問何人衛守勤
송풍나월이 산문을 보호하거니와 / 松風蘿月護山門
더구나 지주의 깊은 은택까지 입음에랴 / 何況深蒙地主恩
위하여 사문 조 태수에게 알려드리노니 / 爲報斯文曹太守
나도 행촌의 외현손이 되는 사람이라오 / 杏村吾亦外玄孫
목은의 큰 문장으로 사루를 잘 꾸몄는데 / 牧老雄文賁寺樓
삼봉의 뛰어난 필치 또한 풍류가 있거니 / 三峯妙筆亦風流
내 졸렬한 시구를 큰 소리로 읽지 말게나 / 莫將拙句高聲讀
아마도 산신령이 허여해 주지 않을 걸세 / 知有山靈不點頭
[주-D001] 백암사(白庵寺) : 본디 전라도 장성(長城)의 백암산(白巖山)에 있는 정토사(淨土寺)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암(巖)이 암(庵)으로 바뀌었으나 우선 그대로 두었다.[주-D002] 결하(結夏) : 승려가 음력 4월 16일부터 7월 15일까지 90일 동안 출입을 금하고 한곳에 모여 수행에 전념하는 것으로, 하안거(夏安居)라고도 한다. 또 10월 16일부터 정월 15일까지 90일 동안을 위와 같이 하는 것을 동안거(冬安居)라 한다.[주-D003] 온 …… 테고 : 남제(南齊) 때 공치규(孔稚圭)가 북산이문(北山移文)을 지어 일찍이 북산에 은거하다가 변절하여 벼슬길에 나간 주옹(周顒)을 몹시 책망하는 뜻을 서술하면서 “혜초 장막은 텅 비어 밤 학이 원망하고, 산중 사람이 떠나가니 새벽 원숭이가 놀란다.〔蕙帳空兮夜鶴怨 山人去兮曉猿驚〕”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원숭이와 학은 곧 깊은 산중의 은자(隱者)의 처소를 의미한다.[주-D004] 송풍나월(松風蘿月) : 소나무에 부는 바람과 여라(女蘿) 덩굴에 걸린 달빛을 말한 것으로, 전하여 은자의 처소를 의미한다.[주-D005] 삼봉(三峯)의 …… 있거니 : 삼봉은 정도전(鄭道傳)의 호로, 그가 일찍이 쌍계루(雙溪樓)의 현액(懸額)을 썼던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2006
送道庵上人還白奄寺 五首○幷序
白奄寺。高麗侍中杏村李文貞公願刹也。子平齋文敬公。孫容軒國老。承先志。擇子孫之出家有操行者。或選緇徒之有聲望者。主寺。相傳護守。百有餘年。頃者。杏村外曾孫判禪宗事松隱蒙大師。住是寺。其高弟曰道庵成上人。松隱傳之道庵。道庵亦山門之有宿望者。駐是寺。今幾三十餘年。宣揚道風。高禪韻釋。歆仰爭趍。如蟻慕羶。仍念居正昔謁松隱興天寺。松隱以居正爲族姪。待遇欵至。仍索松隱說。松隱還向白庵。居正作說。因道庵奉寄。後松隱語居正曰。子之說。深得老僧本趣。顧語道庵曰。當誌之。未幾。松隱示寂。今思松隱。不得見。見道庵。聊復自慰。道庵本楊州佛巖里人。居正別業。亦在其鄰。道庵。弟於我五歲。往復相從。幾五十年。上人常駐錫白庵。或來京師。必先訪我。今春。來興天寺結夏。秋序漸凉。亦復還山。再來留別。且曰。白庵。鐵城子孫世守之願刹。公亦杏村之外玄孫。願得一語。永爲山門之榮。居正曰。杏村內外子孫。今簪紱立朝者幾千百人。至有貴接椒房戚里者。雖非眇末外孫如居正者。亦必有張皇者。復何言哉。姑書絶句五首奉送。兼寄地主曹斯文云。
南國名藍是白庵。樓㙜多少間晴嵐。何時鞋襪尋師去。明月雙溪共軟談。寺有雙溪樓。牧隱李先生記之。
秋風欲落湖水澄。去去行藏一瘦藤。猿鶴滿山應悵望。靑山依舊白雲層。
天下聲名李杏村。宜敎願刹鎭長存。子孫滿國多於織。且問何人衛守勤。
松風蘿月護山門。何况深蒙地主恩。爲報斯文曹太守。杏村吾亦外玄孫。
牧老雄文賁寺樓。三峯妙筆亦風流。莫將拙句高聲讀。知有山靈不點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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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집 제4권 / 시(詩)
차운하여 쌍계루에 부쳐 제하다 임술년 2월이다.〔次韻寄題雙溪樓 壬戌二月〕
승려 성진(性眞)이 백암산(白巖山) 쌍계루의 사적(事蹟)을 가지고 와서 알현하였는데, 여기에서 포은(圃隱)과 하서(河西)의 시를 보았다.
회겁을 호승에게 번거로이 물을 것도 없이 / 不煩灰劫問胡僧
누각 중신한 사적 기록을 상고할 만하구려 / 記蹟重新攷可能
동방의 으뜸 유자의 시는 첫머리에 수록되고 / 海左宗儒餘事首
후학인 하서의 차운한 시가 더해졌네 / 河西後學嗣音增
일생을 외론 섬에서 말라빠진 쇠한 몰골이 / 百年孤嶼衰容槁
쌍계루 한바탕 꿈에 상쾌한 기분 맑기도 해라 / 一夢雙溪爽氣澄
우리의 도가 오랜 세월의 감응을 얻게 되었네 / 吾道應爲曠世感
이 누각에 일찍이 그 몇 사람이나 올랐던고 / 此樓曾有幾人登
[주-D001] 쌍계루(雙溪樓) : 전라남도 장성군(長城郡) 백암산(白巖山)의 정토사(淨土寺)에 위치한 누각이다.[주-D002] 임술년 : 1562년(명종17)으로, 이때 저자는 48세였다.[주-D003] 백암산(白巖山) 쌍계루의 사적(事蹟) : 쌍계루를 중신(重新)한 불자(佛者) 징공 청수(澄公淸叟)와 절간 윤공(絶磵倫公)의 부탁을 받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이 누각의 이름을 ‘쌍계’라고 지어 주었다는 사실이 이색의 기문(記文)에 있다.[주-D004] 포은(圃隱)과 하서(河西)의 시 : 쌍계루의 사적에 대하여 정몽주(鄭夢周)가 지은 〈장성백암사쌍계기제(長城白巖寺雙溪寄題)〉라는 제목의 시이다. “求詩今見白巖僧, 把筆沈吟愧未能. 淸叟起樓名始重, 牧翁作記價還增. 煙光縹緲暮山紫, 月影徘徊秋水澄. 久向人間煩熱惱, 拂衣何日共君登.” 하서 김인후(金麟厚)가 지은 〈쌍계루경차포은운(雙溪樓敬次圃隱韻)〉이라는 제목의 시이다. “樓頭識面兩三僧, 持守前規喜爾能. 絶澗言因淸叟懇, 烏川句爲牧翁增. 曾聞寫記庵爲幻, 今見隨行號偶澄. 扶病懶經頑石路, 春風不負少年登.” 저자 또한 이 운에 차하여 시를 지은 것이다.[주-D005] 회겁(灰劫)을 …… 없이 : 회겁은 겁화(劫火)의 남은 재이고, 호승(胡僧)은 서역(西域)의 승려이다. 《고승전(高僧傳)》 축법란(竺法蘭) 조에 “옛날에 한 무제가 곤명지를 파다가 검은 재를 얻어 그것을 동방삭에게 물으니 ‘모르겠습니다. 서역의 호승에게 물어봐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뒤에 호승 법란이 오자 뭇사람이 가서 물으니, 법란이 ‘세계가 끝날 때 겁화가 모조리 불태우는 것이니, 이 재가 바로 그것이다.’ 하였다.[昔漢武穿昆明池底, 得黑灰, 問東方朔. 朔云: 不知. 可問西域胡人. 後法蘭旣至, 衆人追而問之. 蘭云: 世界終盡, 劫火洞燒, 此灰是也.]”라고 하였다.[주-D006] 동방(東方)의 으뜸 유자(儒者) : 포은 정몽주이다.[주-D007] 우리의 …… 되었네 : 우리의 도란 유도(儒道)를 가리킨다. 고려 말기의 대유(大儒)인 정몽주의 시와 조선 중기의 대유인 김인후의 시가 모두 이 쌍계루에 걸리게 된 것을 감탄하여 이른 말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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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시고 제11권 / 시(詩)
가을날에 나잔자(懶殘子)를 삼가 생각하면서 인하여 시 5수를 읊어서 주실(籌室)에 받들어 올리다.
천태를 회상하니 애가 끊어지려 하여라 / 回首天台欲斷腸
석교의 사람 그림자는 석양에 걸렸으리 / 石橋人影掛夕陽
지금 나는 도리어 한산사처럼 느껴져서 / 如今却似寒山寺
한밤중에 종소리가 병상에 이르는구려 / 半夜鐘聲到病牀
하도 빠른 세월에 절로 애가 끊어져라 / 流光飄忽自摧腸
창으로 해 붙잡던 노양공이 생각나네 / 駐日戈頭憶魯陽
수미산의 대천세계를 훌훌 떨쳐 버리고 / 手擲須彌大千界
두 다리 가부좌하여 선상에 앉았네그려 / 却盤雙脚坐禪牀
젊은 날엔 뛰어난 문장 다투어 펼치면서 / 少日爭披錦繡腸
이따금 고양의 주도를 사모했으니 / 酒徒往往慕高陽
미친 늙은이인 나를 응당 미워하련만 / 老狂有客應嗔我
나는 아직도 와상에 누워 시만 읊노라 / 口尙吟詩偃在牀
옛 친구 적적하여 시름겹기 그지없어라 / 舊游寂寂九回腸
제비는 오의항 떠나고 석양만 비꼈는데 / 燕去烏衣但夕陽
귀뚜라미는 쓸쓸한 시인을 불쌍히 여겨 / 蟋蟀却憐騷客冷
깊은 밤 풍로 속에 내 침상으로 들어오네 / 夜深風露入空牀
고금의 일에 상심되어 속에 번열이 나서 / 感古傷今熱肺腸
처마 밑에 홀로 앉아 아침 해를 쪼이네 / 茅簷獨坐負朝陽
원룡에겐 백 척의 높은 누각이 있거니 / 元龍百尺高樓在
잗달게 어찌 위아래의 와상을 논할쏜가 / 瑣瑣何論上下牀
[주-D001] 나잔자(懶殘子) : 고려 말기의 선승(禪僧)인데, 천태 판사(天台判事)가 되었고, 복리군(福利君)에 봉해졌다. 저자와는 젊어서부터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주-D002] 주실(籌室) : 인도(印度)의 우바국다 존자(憂波鞠多尊者)가 많은 사람들을 교화 제도하였는데, 그가 한 사람을 제도할 적마다 산가지[籌] 하나씩을 둔 것이 높이와 넓이가 모두 육장(六丈) 되는 방에 가득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수행인(修行人)을 교화 지도하는 방장 화상(方丈和尙)을 가리킨다.[주-D003] 천태(天台)를 …… 걸렸으리 : 천태는 곧 지자대사(智者大師) 지의(智顗)가 처음 천태산(天台山)에 들어가 교화를 크게 행하여 마침내 천태종(天台宗)의 개조(開祖)가 됨으로 인해서 범칭 불교(佛敎)의 뜻으로 쓰이는 것이요, 석교(石橋)는 천태산에 있는 돌다리인데, 이것이 두 산을 연결하여 그 모양이 마치 교량(橋梁)처럼 생겼으므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주-D004] 지금 …… 이르는구려 : 한산사(寒山寺)의 일명은 풍교사(楓橋寺)인데, 당(唐)나라 장계(張繼)의 〈풍교야박(楓橋夜泊)〉 시에, “고소성 밖의 한산사에서, 한밤중 종소리가 나그네 배에 이르누나.[姑蘇城外寒山寺 夜半鐘聲到客船]”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05] 창으로 …… 노양공(魯陽公) : 전국 시대 초(楚)나라 노양공이 한(韓)나라와 한창 싸우던 중에 마침 해가 곧 넘어가려 하자, 노양공이 창을 잡고 해를 향하여 휘두르니, 해가 마침내 삼사(三舍)의 거리를 되돌아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주-D006] 고양(高陽)의 주도(酒徒) : 초한(楚漢) 시대 역생(酈生)이 패공(沛公)을 알현하려고 할 때 패공의 사자(使者)가 역생을 거절하며 말하기를, “패공께서 삼가 선생(先生)을 거절합니다. 한창 천하(天下)를 일삼는 터라, 유자(儒者)를 만나 볼 겨를이 없습니다.”고 하자, 역생이 눈을 부릅뜨고 사자를 질책하여 말하기를, “나는 고양의 주도일 뿐, 유자가 아니다.”고 한 데서 온 말로, 술이나 즐겨 마시고 방탕하여 법도가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주-D007] 제비는 …… 비꼈는데 : 오의항(烏衣巷)은 지명으로, 동진(東晉) 때에 특히 왕씨(王氏)ㆍ사씨(謝氏) 등 망족(望族)이 이곳에 살면서 명성을 크게 드날렸다. 당(唐)나라 유우석(劉禹錫)의 〈오의항〉 시에, “주작교 가에는 들풀이 꽃을 피우고, 오의항 어귀에는 석양이 비꼈는데, 그 옛날 왕씨 사씨 집의 제비들이, 보통 백성들 집으로 날아드누나.[朱雀橋邊野草花 烏衣巷口夕陽斜 舊時王謝堂前燕 飛入尋常百姓家]” 한 데서 온 말로, 세월의 변천 속에 인생의 무상함을 의미한 말이다.[주-D008] 원룡(元龍)에겐 …… 논할쏜가 : 원룡은 삼국 시대 위(魏)나라 진등(陳登)의 자이다. 허사(許汜)가 일찍이 진등을 찾아갔을 때 진등이 허사를 손님으로 정중히 대접하지 않아서 자기는 높은 와상으로 올라가 눕고, 손님인 허사는 아래 와상에 눕게 했는데, 허사가 이 사실을 유비(劉備)에게 말하자, 유비가 말하기를, “그대는 국사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일신만 생각하는 사람이라 채택할 말이 없었으니, 이것이 바로 원룡이 꺼리는 바인데, 어찌 그대와 얘기를 나눌 까닭이 있겠는가. 소인(小人) 같았으면 자신은 백척루(百尺樓) 위에 올라가 눕고, 그대는 맨땅에 눕게 했을 터이니, 어찌 위아래의 와상 차이만 두었겠는가.”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