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가톨릭
몽골인들은 ‘뭉흐 텡그린’이란 말을 즐겨 쓴다. ‘영원하고 푸른 하늘’이란 뜻인데, 하늘 그 자체가 초월적인 힘, 곧 신성을 가지는 것으로 여긴다. 또한 나무, 바위, 산 등 모든 사물에 정령이 깃들어있다고 여겨, 그의 심기를 거스르면 해를 입는다고 생각한다.
몽골 초원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것은 ‘오보’ 곧 성황당이다. 성황당은 몽골인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왔으며 몽골인의 삶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는 신성한 곳이다. 성황당은 마을의 수호신이요, 초원의 이정표이자 재앙을 막아주는 역할도 한다.
몽골의 대표적인 종교는 라마불교이다. 몽골 국민 90% 이상이 라마불교 신도다. 사실 불교는 몽골인에게 종교라기보다 생활의 일부로, 이들은 집안에 불상을 모셔놓고 지낼 정도로 적극적이다. 몽골인은 모든 것을 부처를 통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로 모든 일은 부처의 대리인으로 여기는 승려가 관장했다.
1937년은 몽골 역사상 최악의 해로 일컬어진다. 사원 내부에서 정부에 대한 정치적 반란을 모의하고 있다는 소문을 빌미로 정부는 ‘사원 조직 정리’를 실시했다. 수백 개의 사원들이 파괴되고 수많은 불경이 불타 없어졌으며, 10만 명의 라마승들은 세속에 돌아가도록 강요받거나 살해당했다. 그 결과 당과 정부가 종교를 장악했지만 일반인의 신앙생활만은 허용하였다.
가톨릭교회 진출 21주년을 맞으며
몽골은 청나라 때 여진족에게 복속하여 외몽골과 내몽골로 나뉘어 중국의 통치를 받았다. 그러다 중국이 1911년 신해혁명으로 혼란에 빠지고 1917년에는 러시아에서 공산혁명이 일어난 뒤, 외몽골은 공산주의 소련의 지원 아래 독립을 선언한다.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개혁개방정책을 펴자 몽골도 1990년부터 개방정책을 선언했다. 그러나 소련이 무너지면서 소련의 지원에 의존하던 몽골 경제는 갑자기 무너졌다.
이에 몽골 정부는 서방세계와의 교류와 지원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로마 교황청에 “선교사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1992년 교황청이 몽골 정부와 수교를 시작하였다. 개방 이후 세계 각국에서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들어왔다. 지난 2012년은 가톨릭교회가 몽골에 진출한 지 20주년이 되는 해라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몽골에 처음으로 진출한 수도회는 원죄 없으신 성모 성심회이다. 현재 몽골교회의 큰어른이신 웬체슬라오 파딜라 주교는 이 회 소속으로 21년째 몽골에서 소명을 다하고 있다. 인도에 본부가 있는 사랑의 선교회도 고아들을 돌보며 빈민가에서 무료 급식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살레시오회는 돈보스코 기술학교를 운영하며 몽골 청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하고 있다.
한국의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는 학교를 세워 가난한 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있다. 대전교구 이준화 노르베르토 신부는 판자촌인 바양호쇼라는 동네에서 방과 후 학교를 운영하는 등 현지인들을 위해 17년째 사목하고 있다. 작년 10월 28일에는 성 소피아 성당 문을 열어 직접적인 선교에도 열정적으로 나서고 있다.
울란바토르 안에 있는 항올 지역에는 13년간 몽골을 위해 열성을 다바치고 안식년을 지내고 있는 대전교구 김성현 스테파노 신부가 땀 흘려 일구어낸 항올성당이 있다. 지금은 스테파노 신부와 함께 발을 맞춰 온 대전교구 허웅 프란치스코 신부가 본당신부로서 나와 함께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다.
한반도의 7.4배에 이를 만큼 넓은 국토를 지닌 몽골이지만, 인구는 280만 명뿐이다(2011년 8월 기준). 이 가운데 반 이상이 수도인 울란바토르에 살고 있다. 현재 6개 본당에서 891명이 세례를 받았다(2013년 5월 기준). 9개의 서로 다른 단체에서 온 73명의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활동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대전교구 소속 신부 4명과 평신도 선교사들도 있다.
몽골교회에서 중요한 사업은 버려진 아이들, 노숙자들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되었다. 정부는 선교사를 초청하였지만, 종교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오히려 외국 종교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따라서 종교활동을 교회건물 안으로 제한하였고, 아직도 허가받지 않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종교활동에는 추방이라는 강한 제재를 하고 있다.
몽골교회는 2000년부터 몽골어로 번역된 「미사경본」을 쓰고 있고 몽골어 성경이 있어, 몽골 현지인들에게 가톨릭을 쉽게 이해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지금은 어린이 성경, 성인전 등이 몽골어로 발간되면서 현지인들에게 쉽게 다가가고 있다.
몽골교회는 아직 어린 교회이기에 문제점도 있다. 세례를 받으면 교회로부터 현실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이들도 많다. 많은 선교사가 땀을 흘리고 있지만 현지인의 언어, 문화 전통에 대한 이해와 공산주의의 잔재에 대해 어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바라보며 몽골교회의 미래를 꿈꾸어본다.
몽골의 희망, 어린이와 청소년들
“수 아와래~.” 따듯한 봄이 오고 나면 내가 사는 바양호쇼에서 아침마다 쉽게 들을 수 있는 “우유 사세요~.”라는 소리다. 몽골은 물이 귀해 아이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물을 길으러 오가느라 바쁘다. 많은 분들이 우리 동네를 방문하고 가면서 하는 말이 한국의 1980년대를 연상케 한다고 한다.
몽골에서 지내면서 대자연 앞에 인간의 무기력함을 많이 느끼곤 한다. 영하 40도가 넘는 한겨울에 전기가 나가서 추위에 떨어보기도 하고, 물의 소중함에 대해서도 많이 묵상해 보곤 한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무엇보다 작은 것에 감사하는 것을 배운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초대교회의 모습을 그려보곤 한다. 한국에서 아이들과 함께했던 시간은 밖에 나가 캠프를 하거나,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곳 아이들과 함께하는 하루하루는 참으로 자연스럽다. 성가를 배우며 즐거워하고, 함께 공놀이를 하는 등, 무엇인가를 이벤트처럼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고 열린 마음 하나면 충분하다. 몽골에서 지내는 것이 쉽지만은 않지만 아이들과 함께하는 그 순간만큼은 그 어떤 어려운 환경에서도 웃음이 난다.
가끔씩 ‘몽골인 신부가 있으면 참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한다. 아무래도 현지인들을 이해하며 선교를 하는 데 가장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1992년 척박한 몽골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 현재 그 희망이 이루어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몽골 울란바토르 주교좌성당인 성 베드로바오로본당 출신 엥흐 바타르 요셉(26세)이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 연구과 1학년에 재학 중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를 외국인들의 종교로만 여기며 차별이 여전한 몽골에서 사제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어쩌면 하나의 도전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신학교에서 만나면 몽골을 위해 고생하신다며 감사하다고 말을 건네는 겸손한 엥흐 바타르. 가끔 엥흐 바타르 신학생을 생각하며, 몽골의 ‘김대건 신부님’을 그려본다.
* 원동성 바오로 - 대전교구 신부로 몽골에 파견되어 울란바토르 항올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3년 7월호, 원동성 바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