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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오만석 평론집:몸-주체와 상처받음의 윤리
p12-20
1.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 은유에 대하여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새를 지으
시고 아담이 무엇이라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
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창세기 2:19)
Ⅰ.
신은 우주 만물을 창조한 후에 인간에게 모든 피조물의 이름을 붙이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이름을 얻음으로써 피조물들은 상징계 안에서 비非존재에서 존재로 전화된다. 이름을 얻음으로써 피조물들은 비로소 (기호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며) 사물의 층위에서 언어의 층위로 전이된다. 은유란 이렇게 최초의 인간이 사물에 붙인 이름 위에 다른 이름을 부여하는 작업이다. 그러므로 '은유를 한다'는 것은 한 존재를 다른 존재로 전화시키는 일이며, 하나의 기호를 다른 기호로 전이시키는 일이다. 이 전화와 전이는 은유 이전의 존재와 은유 이후의 존재를 분리시키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한 이름에 다른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존재를 확장시키는 행위이다. 그리하여 은유 이전과 이후의 존재 사이에는 항상 '유사성(similiarity)'이 존재한다. 이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Aristole)는 "은유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은 가장 훌륭한 일”이며 “훌륭한 은유를 만드는 것은 유사성을 볼 줄 아는 눈을 갖는 것"(시학 The Poetics)이라고 하였다.
작은
장미,
아주 작은,
때로,
발가벗은 꼬맹이 장미,
당신은
내 한 손에
딱 맞아
마치 내가 당신을 이렇게 움켜쥐고
입으로 가져갈 것 같아,
그러나
갑자기
내 발은 당신 발에 닿고 내 입은 당신 입술에 닿지,
당신은 이미 커버렸거든,
당신의 어깨는 마치 두 개의 언덕처럼 솟아오르고,
당신의 가슴은 내 가슴 위에서 떠도네,
내 팔은 이제 좀체 당신 허리의
초승달 같은 가는 선을 감싸지도 못하지...
왜냐하면 사랑할 때 당신은 당신을 바닷물처럼 풀어놓으니까.
그리하여 나는 하늘의 가장 넓은 눈을 거의 측정하지도 못해,
그리고 대지에 키스하기 위해 당신의 입에 몸을 숙이지
-파블로 네루다(P. Nerula), 당신이라는 대지 안에서 전문(오민석 역)
화자가 이름을 붙이기 전에 이 시 속의 "당신은 비존재 혹은 무존재에 가깝다. 그것은 텅 빈 껍데기 시니피앙이다. 화자는 그것에 작고 귀여운, "발가벗은 꼬맹이 장미"라는 이름을 붙여 준다. 화자에게 "당신"은 제어 가능한 작고 귀여운 존재이다. 그러나 움켜쥐는 순간, "당신의 어깨는 “두 개의 언덕처럼 솟아오르고" "당신의 가슴은 화자의 가슴 위에서 떠돈다. 날씬한 허리는 "초승달 같은" "가는 선"을 보여 주지만 화자의 팔이 껴안을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해 있다. 화자는 이 방대해진 존재를 감당하기 어렵다. 지속적인 '이름 붙이기'에 의하여 "당신은 마침내 어머니인 대지"로 커진다. 은유에 의해 "당신의 의미는 이렇게 ① 작고 귀여운 존재 ②관능적인 존재 → ③ 어머니인 대지로 점점 확장된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존재들은 "당신"이라는 동일한 존재의 서로 다른 세 층위이다. 이들은 서로 안에 내주한다. 은유는 이렇게 유사성의 축을 중심으로 의미의 동심원을 확장해 나가는 작업이다. 은유는 존재에 새로운 층위를 계속 부여함으로써 '단층적'인 존재를 '중층화'한다. 은유는 바다 거품에서 비너스를 생성하는 힘이다.은유의 파도 위에서 존재는 계속 새롭게 피어난다. 은유는 몸체만 있는 식물에 잎과 가지를 달고, 꽃받침 위에 겹겹의 꽃잎을 올린다.
Ⅱ.
그러나 은유는 장식이 아니다. '이름 붙이기'는 무정형의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고, 은유는 기존의 의미에 다른 의미를 덧씌우는 작업이다. 은유는 선택과 배제를 통해서 사물에 의미의 예각을 세운다. 이런 점에서 은유는 일종의 '인식'이다. "은유는 장식이 아니라 문체를 통하여 본질의 비전을 회복하는 필수 불가결한 도구이며, "서로 다른 시간에 존재하는 감각들을 병치함으로써 유비(Wit, analogy)의 기적을 통해 공통의 본질을 해방시킨다"(제라르 주네트Gérard Genette, 「문학 담론의 형상들 Figures of Literary Discourse). 인용문에서 “본질의 비전" "공통의 본질”이란 은유의 작업을 통해 '드러나는' 인식의 결과물들을 말한다. 은유는 두 사물을 비교하는 일종의 "유비"이지만, 그것은 단지 하나의 이름에 다른 이름을 포개는 작업이 아니다. 두 개의 이름이 겹쳐지면서 그 사이에 '긴장'이 발생할 때에만 우리는 이 포개짐을 은유라 부른다. 은유는 일상 언어의 차원에서는 양립 불가능한 항목들을 연결시킴으로써 불안한 혹은 새로운 긴장'을 생성한다. 가령 꽃은 생물이다"라는 진술은 은유가 될 수 없다. 이 문장은 "꽃"에 아무런 의미를 추가하지 않는다. "꽃"과 "생물 사이에는 유사성만 있을뿐, 이 둘의 결합은 아무런 긴장도 생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은유에 있어서 혁신이란 대상에 부적절성(impertinence)을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론적 적절성(pertinence)을 생산하는 데에 있다" (폴 리쾨르 Paul Ricoeur, 시간과 서사 Time and Narrative).
아무도 섬이 아니다.
그 자체 저절로 온전하지 않다.
누구나 대륙의 한 조각이요,
본토의 한 부분이다.
만일 흙 한 덩이가 바다에 쓸려 내려가면,
바닷가의 절벽이 작아지고,
그대와 그대 친구들의 영토가 작아지고,
유럽이 작아진다.
모든 사람의 죽음이 나를 줄어들게 한다.
왜냐하면 내가 인류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람을 보내 알려 하지 마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냐고,
종은 그대를 위하여 울린다.
-존던(J. Donne),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전문(오민석 역)
이 시는 일상 언어의 문법에서 보았을 때) '부적절한 비유를 끌어들임으로써 긴장을 생산한다. 누가 고작 "흙 한 덩이"가 바다에 쏠려 간다고 해서 유럽이 작아진다고 생각하겠는가. 누가 한 사람의 죽음을 인류의 상실로 받아들이는가. 이 시는 "흙 한 덩이"를 "대륙" "본토"와, 즉 부분을 전체와 동일시함으로써 일상적 사유를 전복시킨다. 화자에게 있어서 모든 전체는 결국 부분들의 연결이며, 부분이 없이 전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어떤 개인도 고립된 "섬"이 아니다. 그리하여 개인을 "인류 전체와 등치시키는 것이 가능해진다.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울리는 종은 따라서 죽은 자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다.
죽은 자나 살아있는 자나 그 자체 모두 “인류"이고, 따라서 한 사람의 죽음은.곧 나의 ‘줄어듦'이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적 과정을 통해 애초에 ‘부적절’해 보이던 유비는 의미론적 '적절성'을 확보하게 된다.
헤밍웨이의 소설 제목으로 차용되어 유명해진 이 시는 (그러나 원래 시가 아니라) 시인이자 성직자였던 존 던의 종교적 묵상집의 일부이다. 말하자면 시처럼 쓴 산문이지만, 이 글은 은유가 단지 뻔한 비유 혹은 유비가 아니라 새로운 인식이며 새로운 논리의 생성임을 잘 보여 준다.
모든 시적 언어가 그렇지만 새로움을 잃을 때 은유는 죽는다. 죽은 은유(dead metaphor)는 시가 아니다. 은유는 새로운 긴장의 파도 위에서만 살아 있다. 은유는 경화된 공리에 구멍을 내는 언어이다. 그것은 화석화된 사유를 깨뜨려 새로운 인식(사유)의 길을 여는 언어이다. 그러므로 좋은 은유는 항상 '예상 불가능한 비유이며, 한 번도 사용되지 않은 비유이다. 반복은 관습을 낳고 관습은 은유를 죽인다. 죽은 은유가 가득한 상징계에서 의도적으로 '부적절한 은유를 생산함으로써 긴장을 조장하는 것이 시인의 의무이다. 모든 새로움은 규범으로부터의 일탈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이런 점에서 시인의 언어는 '꼬장'의 언어, '심술'의 언어이며, '난센스'의 언어이다.
"모든 형식은 고갈되었다"는 모더니스트들의 고백은 일탈의 끝에서 새로운 일탈을 만들어내야 하는 모든 예술가들의 비명맥이다. "더 이상의 새로운 형식은 없다"는 고백에서 역설적이게도 새로운 형식이 시작된다. 이런 고백은 오로지 "새로운 형식"을 찾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III.
그렇다면 난센스의 언어인 은유는 어떻게 소통이 가능할까. 로만 야콥슨(R. Jakobson)에 의하면 은유는 수사법의 일종이면서 동시에 문장 생성의 보편적 원리 중의 하나이다. 말하자면 은유는 모든 일상 언어의 생성 원리 중 의 하나이기도 한 것이다. 야콥슨에 의하면 문장은 은유와 환유(metonymy)의 두 축의 교차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은유의 축은 같은 계열에 속하는 단어들 사이에 '선택(selection)'이 이루어지는 축이다. 가령 주어(혹은 타동사,목적어)라는 같은 계열체(paradigm)에 속하는 수많은 단어들을 다른 단어로 바꿀 때 다른 문장이 만들어진다. 이런 점에서 문장의 생성이란, 같은 계열에 속하는 단어들을 다른 단어들로 교체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 교체는 같은 계열이라는 '유사성'의 범주 안에서 일어난다. 야콥슨이 롤랑 바르트(R. Barthes)에 의해 "계열체"라고 명명된 축을 은유'의 축이라고 설명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그러나 문장의 생성은 계열체의 축에서 단어들을 선택하거나 교체함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계열체에서 선택한 단어들은 이제 엄격한 순서에 의해 '연속체 (syntagm)'의 축에서 수평으로 '배열(combination)'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 배열은 제멋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 다음에는 반드시 무엇이 와야만 한다는 (가령 영어의 경우 목적어는 반드시 타동사 뒤에 와야 한다), 즉 인접성(contiguity)'의 원리에 의해서 가동된다. 야콥슨은 롤랑바르트가 배열의 축이라고 명명한 이 축의 이름을 '환유의 축으로 바꾼다. 왜냐하면 은유가 유사성의 원리에 의해 가동된다면 환유야말로 인접성의 원리에 의해 가동되는 것이기 때
문이다. 환유는 어떤 사물을 그것에 인접해 있는 다른 사물로 부르는 것이다. 가령 왕(king)을 왕관(crown)으로, 미국 정부를 백악관이라 명명하는 것
은 인접성의 원리에 토대한 환유의 적절한 예이다.
롤랑바르트가 선택과 배열 혹은 계열체와 연속체의 교차로 설명한 문장생성의 원리는 로만 야콥슨에 의해 이렇게 은유와 환유의 축으로 교체된다.
이렇게 되면 은유와 환유는 수사법을 넘어 문장 생성의 보편적 원리로 격상된다. 야콥슨에 의하면 문장은 은유와 환유의 교차에 의해 만들어지며, 모든 언어는 은유의 축을 지향하거나 환유의 축을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 가령 시의 언어는 은유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음에 반해, 산문 언어는 유지향한다. 시의 언어는 한 기호를 다른 기호로 대체하는 언어이며 이를 통해 두 기호 사이의 유사성을 찾아내는 언어이다. 그러나 산문 언어는 대상밖으로 나가기를 거부하며 사물을 그것에 인접해 있는 것들을 통해 설명한다. 가령 소설 언어가 한 인물을 묘사할 때 그것의 외모, 복장, 어투, 그것이 위치해 있는 공간에 대한 묘사를 사용하는 것이 바로 이런 예이다. 그러나 시적 언어는 맥락을 파괴하며 맥락 밖으로 뛰쳐나가는 언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런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한편으로는 특수한 언어이면서 동시에 모든 문장 생성의 보편적 원리이기 때문이다.
언어를 습득하고 상징계에 진입한 모든 독자들은 은유를 이해할 수 있는 '언어 능력 (linguistic competence)'을 자신도 모르게 내면화하고 있다. 은유는 독자들이 이미 내면화하고 있는 은유에 대한 이해의 능력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소통의 불가능성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다. 은유는 소통의 궁극적인 가능성을 신뢰하면서 소통의 채널을 교란시키는 모순의 언어이다. 은유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히려 '손쉬운' 소통이다. 은유가 지향하는 것은 '불통지이 아니라 '새로운 소통이다. 독자들은 은유의 원리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은유의 형식 자체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지 않다. 독자들이 당황하는 것은 은유의 보편적 원리 안에서 벌어지는 언어의 이상한 게임이다. 이
미 알고 있는 길로 독자들을 끌어들이되 독자들로 하여금 마치 처음 온 길처럼 느끼게 만드는 언어 게임이야말로 은유가 지향하는 것이다. 새로운 게임이란 늘 같은 규칙 안에서 일어나지만, 마치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처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런 경기도 있네, 세상에 어떻게 저렇게 골을 넣을 수가 있지'라고 말할 때, 그 경기는 이미 경기의 모든 규칙을 준수하되, 그 안에서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은유는 따라서 자신에게 주어진 벗어날 수 없는 규칙을 준수하되 그것의 경계 너머를 꿈꾸는 위험한 언어, 기적의 언어이다.
자크 라캉(J. Lacan)에 의해서도 은유는 보편적 언어 규칙임이 증명된다.라캉은 프로이트가 꿈의 두 가지 조직 원리로 설명한 '응축(condensation)과 전치(置, displacement)'를 '은유'와 '환유'로 바꾸어놓는다. 이렇게 되면 은유는 수사법을 넘어 무의식을 조직하는 두 가지 원리 중의 하나로 격상된다. 간단히 말해 일상 언어뿐만 아니라 욕망조차도 은유(와 환유)의 원리에
의해 조직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은유는 무의식의 문법이고, 일상 언어의 문법이며, 동시에 시적 언어의 문법이다. 그러나 각 단위에서 은유가 가동되는 방식은 다르다. 시적 은유는 일상 언어의 은유와 다르다. 일상 언어의 은유가 순전히 소통의 편리를 위해 가동된다면, 시적 은유는 소통을 방해함으로써 질료로서의 언어 자체를 의식하게 만드는 언어이다. 시적 은유는 이런 점에서 무의식의 언어, 꿈의 언어, 욕망의 언어에 가깝다. 그것은 윤리와 율법을 깨뜨리는 언어이며, 경계를 넘나드는 횡단의 언어이다.
그것은 바닥에 숨어 보이지 않는 욕동을 의식의 너머로 끌어올리는 언어이며, 이성의 규칙을 조롱하는 언어이다. 그것은 자아와 초자아의 검열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위반'을 전경화하는 언어이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우고, 추억과
욕망을 섞으며, 봄비로
생기 없는 뿌리를 자극한다.
겨울은 우리를 따뜻하게 지켜주지, 망각의
눈(雪)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들에게
약간의 생명만 먹여 주었지.
-엘리어트(T. S. Eliot), 황무지」 부분(오민석 역)
은유는 서로 다른 시간대의 경험(추억과/ 욕망)을 소환해 뒤섞는다. 은유는 시간과 공간, 의미의 모든 경계를 허물고 간극을 메움으로써 죽어가는 대상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그것은 "망각"의 겨울을 거부하는 봄의 목소리이다. 은유는 죽은 클리셰("죽은 땅")에서 꽃을 피우고, '연명'을 생명으로 아는 "겨울"의 언어를 거부하는 언어이다. 은유는 죽은 일상에 가해지는 폭력의 언어이다. 그것은 이런 의미에서 "가장 잔인한" 언어이다. 은유는 이미 잘린 머리에서 새로운 머리를 뿜어내는 히드라Hydra의 언어이다. 그것은 하나의 머리를 고수하는 통념을 조롱하며 사물의 몸에 여러 개의 머리를 심는다. 은유에 의해 사물은 비로소 입체가 되며 무수한 각도를 갖는다. 일상의 헤라클레스 Heracles가 히드라의 머리를 칠 때 헤라클레스가 저주하는 것은 단일성과 평면성에 대한 도전이다. 헤라클레스가 히드라의 머리를 자르자 그 자리에서 두 개의 머리가 자라나듯, 은유는 그 모든 단성성(軍聲性,monophony)을 거부하며 사물에 '다성성(多聲性, polyphony)'의 뿔을 단다. 새로움을 죽이는 것은 시간이며, 시간을 통해 실현되는 반복이다. 모든 '새로운' 은유는 '낡음'의 운명에서 자유롭지 않다. 은유는 자기 몸의 낡은 기관(organ)들을 혐오한다. 은유는 자신의 신체가 낡고 진부했다고 느끼는 순간
그것을 절단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기관들을 심는다. 그것은 단일성과 습관화의 폭력에 굴하지 않는 영원한 히드라의 언어이다.
은유는 본질적으로 둘 간의 유사성에 의해 성립된다. 즉, 예술 원리인 모방(미메시스) 개념과 유관하다는 말이다.
은유는 또한 한 사물을 다른 사물의 거울을 통하여 바라보는 것과 같다. 즉, 잘 알려진 것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을 드러내는 용어이자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살펴 본 대로 은유는 우리가 아는 것을 ‘저 너머(Meta)’의 모르는 것으로 ‘가져가는 것(Pherein)’을 의미한다. 이 은유가 성립되는 것은 두 사물 간의 아는 것과 모르는 것 간의 유사성이 있기 때문이다. ‘다름’에서 ‘닮음’을 찾아내는 능력이 바로 은유이다.
이 은유의 유사성을 잘 찾는 사람이 바로 예술가이자 시인이라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이 지점에서 훌륭한 시인의 덕목을 은유의 발견 능력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은유는 근본적으로 예술가의 개인적 시각에 의한 허구적인 것으로부터 나온다. 왜냐하면 예술가는 하나의 사물을 정답이 아닌 ‘~처럼'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술가의 이러한 은유적 능력을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을까? 이 은유가 바로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상상력’이라 할 수 있다. 상상력은 하
나의 사물 안에 있는 은유적 의미와 더 깊은 곳에
있는 본질을 볼 수 있는 힘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치 씨앗을 보고 다 자란 나무를 상상하듯이 나무
의 씨앗 안에 이미 완성된 존재인 나무의 형상이
깃들여져 있다고 보았다.
다만 씨앗이 아직 완전히 자란 나무의 형상으로 현
실화되지 못했을 뿐인 것이다. 그에게 예술은 이
씨앗처럼 그것을 보고도 나무를 그릴 수 있는 은유
의 능력, 즉 상상력을 통해 나무를 그릴 줄 아는 것
을 의미한다. 이를 완전한 상태의 모방, 미메시스
라고 부른다.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능태
로 이미 세계에 형상화되어 있는 개별적인 은유가
바로 시인의 언어이자 예술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다름과 닮음의 유사성을 통한 은유의 미메시스는
마찬가지로 유추(analogy)를 가능케 한다. 유추
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은유로 기본적으로 논리적
구조를 중요시한다. 이는 어떤 사물들이 본질적으
로 특정의 비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추정하는 것
이다.
유추는 비례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아날로지아(an
alogiā)에서 유래한 말로 둘 혹은 그 이상의 현상
이나 복잡한 현상들 사이에서 유사성을 발견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기에 수많은 예술가들이 사물이
나 현상들에서 형상이나 비례를 유추하여 아름다
운 예술작품을 만들어낸다.
모든 모방에는 은유와 유추가 기본이 된다. 다만,
특별한 상상력이 위대한 예술을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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