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령이 선포되어 등교가 정지되고 대학 새내기의 꿈 대신 운동장에는 탱크와 군인들이 진을 치던 1980년 5월이 시작된 그 시절, 최루탄과 전투경찰과 군인들이 판을 치는 도시와 자취생의 부족한 생활이 힘들어 고향으로 내려와 아픈 아버지를 대신해 농사를 돌보던 그 시절, 무슨 병인지 알면서 손도 써보지 못했던 철없고 가난했던 시절이 있었다.
졸업하면 취업이 되고 군대에 가지 않는 고등학교에 가라고 강압하시던 이유를 알았던 그날, 의사의 말대로 한 달 보름 만에 조용히 숨을 거두시던 찌는듯한 8월의 그날, 넋을 잃은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보면서 입술을 깨물며 장례를 치렀던 그날이 있었다.
그래도 사람들이 좋았다. 친구들과 동네 어르신들 덕분에 상주로서 아버지를 기어이 보내드렸다. 그때의 경험 때문인지 지금도 나는 사람을 믿고 좋아한다. 세상이 각박하다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달리 생각한다.
고향의 여름 하루는 길고 길었다. 여름방학이 되면 해가 넘어갈 때까지 개울과 연못이나 산과 들로 쏘다니다가 새까만 얼굴로 마당에 깔아 놓은 멍석에 둘러앉았다.
하늘엔 별과 달이 같이하고 농사일로 피곤하신 부모님, 누나와 동생이 함께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저녁을 먹었다.
종류도 알 수 없는 벌레들과 모기들도 아버지가 피워놓은 모깃불에 힘을 쓰지 못했다. 아이들은 낮에 놀던 일들을 쫑알거리고 누나는 객지에 나가 있는 친구들을 부러워하며 투덜거리고 부모님은 농사일이나 돈 관련 이야기로 마무리했다.
호박잎, 깻잎, 고구마 줄기, 콩잎 등을 된장에 한입 싸서 넘기려다 목이 막혀 눈물을 글썽이며 물을 찾기도 했다.
저녁을 먹고 감자와 함께 낮에 잡아 손질한 개구리를 호박잎에 싸서 모깃불을 휘젓어 구워 먹고 사과밭 옆에 있는 용천에 갔다. 깜깜한 여름밤에 반딧불과 별빛을 조명 삼아 목욕을 마치고 도란거리는 아버지, 어머니와 누나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편안하게 모기장 속으로 파고들었다.
아버지가 없는 가을의 산과 들은 달리 보였다.
얼굴에 소금기가 묻어나도록 들일을 하시다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놋쇠 솥 아궁이에 불을 지펴 저녁을 짓는 어머니, 호롱불 아래서 내일 입혀 보낼 옷가지를 준비하며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는 어머니처럼 보였다. 황금물결이 넘실거리는 가을 들판은 결실을 바라며 아이들의 등록금, 옷, 신발과 먹거리를 생각하시는 어머니의 주름살 같기도 했다.
그렇게도 좋아하던 손자의 첫 용돈을 받고 기뻐하시던 어머니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봄날 맏며느리의 품에 안겨 아버지 곁에 가셨다.
내 기억에는 어머니와 함께한 것은 많지만 안방에서 잠을 잔 기억은 거의 없다. 안방에 들어가 잤더라도 깨어나 보면 건너방의 아버지와 함께 있었고 동생과 누나는 어머니와 함께 있었다. 그래서 장남은 당연히 아버지와 함께 자야 하고 어머니 품에는 동생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살아가기 바빠 잊어먹고 있었던 아버지와 관련된 궁금한 사항을 알아보기로 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이야기와 숙모님과 큰누나의 말을 종합해 보면 아버지 인생의 큰 굴곡점은 일제강점기 시절의 강제징용과 결혼, 해방 후 군대 입대와 한국전쟁에서 수류탄 파편에 의한 왼손 중지 절단과 허벅지 부상이라 생각된다. 보훈대상자 자녀들은 학비라든지 취업에 혜택이 있었는데 우리 가족은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궁금해하는 나에게 아버지는 “한국전쟁에서 죽고 다친 사람이 너무 많아서 손가락 하나 정도는 보훈 대상이 되지 않는다.”라고 하셨다. 나는 그렇게 믿고 살아왔다.
일본 강제징용 및 한국전쟁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알기 위해 각종 서류를 확인했다.
나를 중심으로 가족관계증명서를 발급받아 확인했으나 아버지의 주민등록번호는 알 수 없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제적등본을 확인하니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관련된 내용들을 알 수 있었다. 수기로 작성된 주민등록과 호적 사항을 전산화하면서 생긴 오류 사항도 있었지만 내가 알고자 하는 내용들은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강제동원자명부의 명부검색에서 아버지를 찾아봤다. 동명이인이 8명 있었으나 생년월일이나 지역이 달랐다. 강제징용 관련 내용은 숙모님과 큰누나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고 알아보기로 했다. 강제동원자명부의 명부소개에 따르면 일제는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여 국가총동원제도를 개편하고 1939년부터 1945년까지 ‘강제 모집’, ‘관 주도’, ‘징용’, ‘근로보국대’, ‘근로정신대’ 등 다양한 방식으로 조선인을 강제 동원하였다. 2004년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진상규명특별법] 제정을 위한 국회 청원 자료에 의하면 조선 국내 지역은 물론 일본, 중국, 러시아, 남양군도(현 미크로네시아) 등에 총 7,879,708명(국내 6,126,180명, 국외 1,390,063명, 군인·군속 363,465명)이 동원되었다. 강제 동원된 이후 조선인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기준으로 노무동원(노동자, 군속, 근로보국대, 근로정신대 등), 병력동원(군인), 성동원(일본군 위안부, 10만 이상)으로 구분할 수 있다.
동네 주민센터에서 아버지의 병적증명서를 신청했으나 병무청에서는 지금의 자료로는 발급할 수 없어 군번이 있어야 한다며 군번 찾는 방법을 문자로 알려왔다. 국방부 홈페이지 민원·국민 참여 메뉴에서 군번 찾기 민원을 신청했다. 국민의 민원 신청은 행정기관 민원 서비스 통합에 따라 국민권익위원회에서 운영하는 국민신문고를 통해 서비스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현재 국민신문고에서 카톡으로 국방부에 민원이 접수되었다는 안내를 받았다. 시간이 많이 흘러 사실을 확인하기 힘들지만 있는 힘껏 알아볼 계획이다.
거친 세상에 어머니와 우리 형제만 남았다는 두려움이 몰려올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
아들이 장가가던 날, 나는 아버지 생각을 많이 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취직과 결혼은 물론 용돈도 한번 받지 못하셨다. 자식의 공부와 가정 살림을 위해 병원 치료도 변변히 받지 못하시고 집에서 돌아가셨다.
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아버지를 닮아 가고 추억과 기억은 희미해지고 있지만 가장이라는 틀에 갇혀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가신 아버지의 뒷 모습은 흑백사진이 되어 돌아온다.
2024.5.9. 김주희
첫댓글 아버지에 대한 연민의 정이 깊지요. 지난 세월이 뒤돌아 보는 것이 인생인가 합니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고생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가신 것은 아니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힘드시다 어렵다 고생스럽다 하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의 나는 반성 해야겠습니다. 자식들은 나를 어떻게 볼까 부끄럽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