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흑백 사진
정경희
어디를 가나 환한 얼굴로 사진 찍는 사람이 많이 보인다. 관광지의 멋진 장소는 줄 서서 기다려야 겨우 내 차례가 된다. 흘러가버릴 순간을 간직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심이다.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는 장면을 다시 불러오는데 사진 만큼 좋은 것이 또 있을까? 오래된 사진첩 속에서 까마득히 잊었던 사진 한 장을 꺼내 들었다.
나는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새로운 곳 여행할 때도 마음 가는 데로 느끼려고 그 상황에 집중할 뿐이다. 하루 종일 등산한 날에도 정상석 앞 사진 한 장이면 끝이다. 이런 저런 행사나 단체 여행에서 어쩔 수 없이 카메라 앞에 서면 참 어색하다. 연예인처럼 자랑하고 싶은 외모라면 이러지 않았을지 모른다.
수십 년째 초등학교 동기들이 서로 연락 주고받으며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어느 날 총무가 재미있는 안을 내었다. “중앙초등 졸업 50주년을 기념하는 〈추억의 사진〉을 공모합니다. 어릴 적 멋졌던 그때를 추억하고, 폰 카로 잘 찍어서 총무에게 보내주세요”라고 하였다.
오십 주년 기념할 정도의 사진이 내게 있기나 할까? 지금이야 사진 찍는 자체를 싫어하지만 예전에는 기회가 거의 없었다. 육학년 때쯤 삼촌이 카메라 들고 집에 왔던 생각이 났다. 추억의 사진이 몇 장은 있겠지 싶어 구석에 밀쳐둔 사진첩을 들추었다.
초등학교 일학년 봄 소풍가서 찍은 흑백사진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옛날에는 사진 크기가 이렇게 작았구나? 딱 내 손바닥만 한 크기에 수십 명의 얼굴이 올망졸망 들어있다. 일학년 때이니 오십 년은 훨씬 더 지난 사진이다. 열 명이 넘는 엄마들은 거의 다 한복을 입었다. 아기를 업고, 안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최고 멋쟁이 엄마는 양산을 쓰고 있지만 우리 엄마는 보이지 않는다.
작은 사진 속 인물들이 누구인지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하다. 앞줄에 앉아 있는 나를 찾았다. 짧은 단발머리에 어깨 끈 달린 주름치마를 입었다. 두 다리를 앞으로 쫙 펴고 앉아 있다. 등을 얼마나 꼿꼿하게 세웠는지 당당하기 그지없다. 빛바랜 흑백 사진 속에서 짙은 색 소풍가방이 유난히 눈에 띈다. 평소 기억나지 않던 그 옛날 내 모습을 보며 한참을 웃었다. 웃고 있는데 어느 사이 눈물이 흐른다.
중년이 될 때까지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는 생각을 해 보지 않았다. 바로 아래 남동생과 달리 취학 전 사진 한 장 없으니 그럴 만하였다. 언제나 동생 업고 다니며 심부름 하느라 마음껏 뛰어다니지 못하였다. 어느 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서 엄마를 발견하고서야 옹졸한 자신을 돌아보았다. 다정하게 표현할 줄 몰랐던 엄마 성격 탓이라고 핑계를 대었다.
어릴 때 소풍사진을 보며 또 한 번 때 늦은 후회가 밀려온다. 내가 얼마나 사랑받고 있었는지 알았다. 학교생활이 얼마나 재미있고 자신감 있었는지 사진은 말해 주고 있다. 엄마는 소풍에 따라 오지는 않았다. 그래도 언제나 선생님께 드릴 선물을 준비해 주었다. 여선생님에게는 사탕 한 봉지, 남선생님에게는 담배 한 갑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무슨 선물일까 싶지만 나를 으쓱하게 만들었다.
그 옛날 어떻게 사진을 찍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사진사가 따라 왔을 것이다. 우리들이 줄지어 앉고 엄마들은 뒷줄에 나란히 선다. 선생님은 창 모자 쓰고 우리들의 오른쪽에 혼자 앉았다. “ 자아~ 허리 펴고, 활짝 웃으며 이쪽 보세요.”“찰칵.” 웃으라는 사진사 말대로 진짜 웃는 아이는 한두 명이다. 햇살에 눈이 부신지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 몸을 비비 꼬는 듯 쑥스러운 표정도 보인다.
사진 찍은 지 오십 년이 훨씬 지났다. 그 긴 세월동안 분실되지 않고 내 앨범 첫 장에 꽂혀 있는 것이 고마울 뿐이다. 흐르는 눈물 훔치며 휴대폰 카메라로 소풍 사진을 사진 찍었다. 액자에 넣어 걸어두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저장하였다.
매일 볼 수 있고, 주변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다. 누군가 만날 때마다 내 소풍사진을 자랑 하였다. “우리 엄마가 이렇게 나를 키운 줄 몰랐다. 내가 바보 같았어, 어때 예쁘지? 이 가방도 한 번 봐. 시골에서 이렇게 하기는 어려울 텐데…. 그렇지?” 대답을 강요하며 혼자 호들갑을 떨었다.
언제나 동기를 생각하는 마음씨 고운 총무에게 사진을 보내었다. 여러 친구들이 보았다. ‘둘째 줄에 몇 번째 아이는 누구 아니가? 그 뒤에 머리 빡빡 깎은 아는 누고?’ 오래된 사진으로 친구들은 순수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즐거워하였다. 추억의 사진이 별로 없었는지 몇 명만이 공모에 사진을 제출하였다. 순위 정하기 곤란하다며 총무는 참여자에게 커피와 케이크 쿠폰을 보내왔다. 젊은이들이 줄지어 주문하는 찻집에서 휴대폰의 쿠폰을 내밀었다. ‘나도 아직은 구세대가 아니란다.’소풍사진 속의 어린 내 모습처럼 볼을 빵빵하게 하며 어깨를 편다.
평소에는 사진 찍기를 무척이나 싫어하였다. 늘어나는 얼굴 주름과 푸석한 머릿결이 그대로 드러나는 내 모습이 안타까워 일 것이다. 허공에 대고 포즈 잡는 것이 쑥스럽기도 하지만 사진을 쌓아 놓은 들 무슨 의미 있을까싶은 생각도 사진을 멀리하게 만들었다.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누군가는 사진은 “찰나의 순간을 영원히 남기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라고 하였다. 나도 인간이니 순간을 남기고 싶은 욕망은 당연히 있다. 지난날의 사진 한 장으로 몇날 며칠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도 사랑받고 자란 귀한 딸이었다는 사실에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제부터는 경치 좋은 곳에 가면 남들처럼 열심히 사진 찍고 싶다. 좀 더 과장된 행동으로 포즈도 취하며, 활짝 웃어야지….
휴대폰앨범에 저장된 소풍 날 사진을 다시 확인한다. 세월이 흐르면 언젠가는 다른 사진들도 얼마나 의미 있게 다가올 것이다. 모처럼 시간 내어 지난 날 사진을 정리하였다. 그렇게 싫어하며 찍은 사진 속 내 모습이 오늘보다 더 풋풋하다. 연예인처럼 잘생기지 않음을 탓할 필요는 없다. 부모의 사랑 듬뿍 받고 자란 어린 소녀가 어른이 되어 가고 있다. 사진 한 장으로 감동하고, 이 땅에 나를 있게 해 준 모든 이에게 감사의 마음을 보낸다.
(20250224)
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
한비수필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