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저기 가는 저 노인 꼬부랑 노인 우물 쭈물 하다가는 큰 일 납니다.” 우리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배웠던 교과서에 실려 있는 노랫말이다. 참으로 정겹고 추억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동요이다. 자전거를 통해 얽힌 아름다운 추억과 삶 그리고 변화된 자전거 문화를 생각해 본다.
당시만 하여도 자전거는 매우 귀중한 탈 거리였으며 백여 호 넘는 마을에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집배원 아저씨의 자전거를 가끔 볼 수 있었으며 버스가 오전 오후 두어 번 다니던 마을 앞 신작로에서도 이따금 자전거를 볼 수 있던 시절이다.
그 시절 자전거는 이동 수단이기도 했지만 짐을 싣고 나르는 운반용 자전거를 가지고 오일장을 다니며 난전을 꾸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짐을 집채만큼 싣고서 오르막을 오를 때면 누군가가 밀어주지 않고는 고개를 오를 수 없어 고개 아래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짐자전거의 애환도 간간이 볼 수 있었다.
일본 M사 자전거는 일제 강점기를 이십여 년이 지난 세월 속에서도 우수한 일본 제품으로 우리 생활가운데 남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신제품 자전거와 바꾸지 않는 다는 풍문이 파다했다. 뒷바퀴 커버에는 동그란 원안에 M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겉모양도 검으면서도 약간은 엷은 구리 빛을 담고 있어 야무지게 보였다. 자전거가 귀한 시절이기도 했지만 M사 자전거는 고급 승용자 차고처럼 마루에 올려두고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가 하면 기름걸레로 아침과 저녁으로 닦아주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자전거를 또래 친구들 보다 일찍 소유하게 되었다. 안타깝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자전거가 내 소유가 된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
되돌아보면 자전거를 통하여 많은 것이 변화되었다. 세워둔 남의 자전거를 가지고 타는 법을 습득했다. 또래 친구들보다 머리 하나는 작았던 나는 자전거를 무척 타고 싶었으나 발이 폐달에 닿지 않았다. 자전거 몸체 사이로 다리를 넣어 자전거를 배웠다. 마침 우리 동네 앞 신작로는 고개를 넘어 몇 백 미터가 넘게 내리막길 이어서 누기 잡거나 밀어주지 않아도 다리를 몸체 사이로 집어넣어 배우는 방법이 가능 했다. 한쪽 발이 땅에 닿아 넘어질 염려는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차량을 구매하거나 값이 비싼 가전제품 등을 구매하는 데는 결단이 필요 했다. 가정 경제적 문제도 있었지만 신문물에 대한 거부감 없는 사용의지랄까 깨인 사고가 필요했다.
어쨌든 자전거라는 문명의 이기는 나에게 도전 정신과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입학하게 되면서 안동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집안이 가난해서 입학을 시켜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하며 학교를 다녀야 했다. 학교는 시내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서 자치 방은 가격이 낮은 변두리에 얻을 수밖에 없었다. 학교까지 거리는 2KM 정도였는데 뛰어 다니다시피 하여도 30분이 족히 걸렸다. 당시만 하여도 시내를 운행하는 버스가 없었다. 있다고 하여도 버스비가 아까워 타고 다니는 학생도 없었거니와 형편도 되지 않았다.
부엌이라곤 19공탄 연탄아궁이 하나가 전부였다. 마루를 덮개처럼 만들어 들어내면 부엌이 되고 덮으면 마루가 되는 구조였다. 조리에 필요한 부엌살림이라고는 냄비 하나와 같이 자치하던 사촌의 그릇을 합쳐 그릇 두벌 반찬 그릇 하나가 모두였다. 한겨울 날씨가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던 날씨에 자치 환경은 너무나 열악했다. 문고리를 잡은 젓은 손은 감전이 된 듯 쩍쩍 들어붙기가 일쑤였다.
따뜻한 아랫목에 손을 녹인다는 것이 잠이 들어 냄비 밥이 타는 냄새에 주인집 아주머니 고함 소리가 새벽 공기를 가르며 방문을 급하게 두들겼다. 그러니 다시 밥을 짓거나 누룽지 가 된 냄비 밥을 다시 물을 붓고 끓여 먹자니 등교하는 시간은 언제나 지각이었다.
열악한 자치 환경에서 구하여 준 것이 언제 내 소유가 된지도 모르는 자전거였다. 언제나 시간 쫓겨 발을 구르던 나에게 자전거는 구세주였다. 급히 단무지 반찬에 도시락을 싸고 나면 양치질 할 시간도 빠듯하였다. 자전거가 마치 삶의 은인과도 같았다. 뿐만이 아니었다. 버스비를 절약하기 위해 주말이면 낡은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왔다. 위험하다며 만류하던 어머니의 묵인 하에 100여리 길을 일주일 먹을 양식과 반찬을 싣고 다녔다. 요즘 같이 자전거 전용 포장도로와 동호인들이 타고 다니는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값비싼 자전가가 아니다. 참으로 대견한 모험이었고 도전이었다.
균형을 잡기 위해 애쓰던 모습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5분이 채 안되어 학교에 도착했다. 자전거는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었다. 나의 삶의 소중한 순간들을 만들어주는 친구와 가족 같은 존재였다.
이제 공공 자전거 서비스는 자전거 타기를 더욱 쉽게 만들어주었다. 언제 어디서나 자전거를 대여할 수 있게 되었고, 출퇴근이나 등교 시에도 간편하게 이용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자전거는 이제 단순한 취미뿐만이 아니라 일상적인 교통수단과 레저 등 종합 문화로 자리 잡아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졌다.
처음엔 호기심으로 가득했던 자전거였으나 자전거는 생활비를 아껴주었다. 때론 대중교통보다 빠를 때도 많았고, 시간 절약에 경제적으로도 많은 이점을 누릴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자전거는 삶의 태도를 바꾸어 주었다. 도전 정신을 길러주었다. 무슨 일이든 포기하지 않는 강인함을 심어 주었다. 나에게 자전거는 체육대회 싸구려 경품이 아닌 삶 자체이다.
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
한비수필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