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판리
법주사, 갈목리, 중판리, 말티고개(둘리공원, 솔향공원, 식물원) 가는 길의 사거리에 위치하여 있다.
속리산을 올라가는 길목에 있어 주변에 관광지가 산재해 있다. 법주초등학교 내에는 칠송정이 현재 한 그루만 남아 있다.
새목이재(대목고개)에 숯을 만드는 가마골이 있었으며 대목리로 가는 고개이기도 하다.
면사무소 뒷산에 제단이 있으면 매년 구정 다음날 새벽5시에 생기복덕에 의해 제주3명(초헌, 아헌, 공양주, 종헌)을
선정하여 산제사를 지낸다. 축문 시작 문귀는 송동국 대한민국으로 시작하여 200명 인구수마큼 소지를 태워 제사를 지낸다.
음력 10월 10일에는 연고 없는 14명의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정이품송
은구석
이 돌은 본래 복천암에 있던 돌로 서기 1464년에 세조대왕이 복천암에서 기도를 끝내고 환후가 쾌차한 지라 내심
기쁨을 참지 못하여 불은에 감격함과 회춘을 기념하기 위하여 속리산 안에 있는 모든 스님을 모아 선언하기를
그 돌에 줄을 메고 끌고 가다가 힘이 빠져 멈추면 그 멈춘 곳까지의 산과 들과 전답과 집터까지 모두 절
소유가 되도록 허락할 것이다. 곧 실시하라 하였다. 스님들은 기뻐서 있는 힘을 다하여 복천암과 법주사를 거쳐 훤히 트인
보은 가도로 6km를 끌고 왔는데 힘이 지쳤던지 물욕이 없어 그랬던지 돌이 요지부동이라 그제야 세조대왕이 웃으며
사물에는 한도가 있느니라 하며 이만하면 공양미와 식량이 되리라 하고 끌고 온 돌을 그곳에 세우고 돌을 세운 곳에서
속리산 쪽으로 전 토지를 절 땅으로 내려 주었다 한다. 그 후 세운 돌을 은구석이라 하고 선돌이 있는 산모퉁이를
은구모퉁이라 부르고 있다.
○ 정이품송(正二品松)
말티재를 넘은 세조의 일행이 내속리면 상판리에 당도하니 길가에서 우산 모양의 한 큰 소나무가 한그루 우뚝 서 있었다.
세조는 소나무 아래 잠시 쉰 후 다시 길을 떠나려고 연을 타고 보니 늘어진 가지에 연이 걸릴 것 같았다. “연 걸린다.”
세조는 연을 멘 사람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축 늘어져 있던 소나무 가지 하나가 하늘을
향하여 올라가고 있었다. 참으로 기특하고 신기한 일이었다. 또한 소나무는 세조가 피접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갈 때
이 소나무 아래서 비를 피할 수 있었다. 세조는 “올 때 신기하게 나를 무사히 지나도록 하더니 이제 갈 때는 기특하게도
비를 막아주니 참으로 기특하도다”하면서 이 소나무에게 정이품(正二品)의 품계를 하사하였다.
이후부터 이 소나무를 “연거랑이 소나무(???)” 혹은 “정이품송”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 진터와 가마골
조선 제 7대 임금이신 세조대왕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어려서부터 매우 슬기롭고 영리하여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 하며
자랐다. 그런데 세조가 김종서 등 여러 대신들을 죽이고 마침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딸은 몹시 안타깝게
여기면서 “부왕 마마, 왜 어진 재상들을 모두 죽이시나이까, 그리고 어린 임금이 가엾지 않으십니까?”
하고 품의하였으나 세조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뒤이어 성삼문 등 충신들을 잡아 죽이고 어린 단종까지 영월로 내쫓은 후에
죽이자 공주는 비통한 마음을 금치 못하여 눈물을 흘리며 간하였다. “아바마마, 어쩌자고 충신들을 그처럼 참혹하게 죽이시고
이제 죄없는 어린 상왕마저 살해하시나이까? 후에 사람들이 아바마마를 어떻다 하오리까? 참으로 너무하시나이다.” 하고는
통곡했다. 이에 세조는 크게 노하여 “참으로 방정스럽고 괴이한 계집애다. 당장 끌어 내어 사약을 먹여라.”
이리하여 공주는 꼼짝없이 죽게 되었는데 왕비 윤씨가 이 소리를 듣고 자식을 사랑하는 모정에 차마 그대로 둘 수가 없어
몇 번이나 남편에게 매달려 살려달라고 하였으나 세조의 고집을 꺽을 수는 없었다. 생각다 못한 윤씨는 마친대 금은 패물을
한 보퉁이 싸서 유모에게 맡기고 어디든지 공주를 모시고 가서 숨어 살 것을 부탁하였다.
공주와 유모는 남복을 한 후 눈물을 뿌리며 대궐을 빠져나왔으나 구중궁궐 깊은 곳에서 살던 그들에게 세상이 넓다 한들
어디로 가랴? 그저 앞이 캄캄할 뿐이었다. 그들은 낮에는 숨고 밤이면 걸어서 발길 닿는 대로 온 곳이 보은 땅이었다.
두 사람은 발을 끌다시피 하면서 걸어가다가 큰 소나무 아래 이르자 공주가 “아유 이제 더 못 가겠우. 예서 쉬어 갑시다.”
하고 털썩 주저앉아 유모도 따라 쉬고 있는데 마침 그때 나무꾼 한 사람이 나무를 한 짐 지고 오더니 짐을 받쳐놓고 쉬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일시에 나무꾼에게 쏠렸다. 이제 한 십 칠팔세 가량 되어 보이는 준수하게 생긴 총각이었다.
나무꾼도 두 사람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디를 가시는 나그네이시온지 매우 피곤해 보이십니다.” 나무꾼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약간 의아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 하고는 물었다. 분명히 차림새는 남자임이 분명한데 젋은 나그네의
아릿다운 얼굴 모습이라든지 중년객의 목소리가 여성의 음성이었다. 나무꾼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오늘은 날도 저물어 가고
또 여기서 인가가 있는 곳을 가려면 한참을 걸어야 하니 저의 집이 여기서 멀지 않으니 같이 가시는게 어떠하시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두 사람은 그 말씨나 태도가 매우 공손하고 믿으직스러울뿐더러 더 가야 남의 집에서 자기는 매일반이라,
총각의 뒤를 따라 깊은 산중 숲속 바위밑에 자리잡은 움집으로 안내되었다.
깊숙한 산중에 외딴집에서 가족도 없이 총각 혼자 살고 있는 것이 겁도 나고 의심도 적지 않았으나 워낙 총각이 공손하고
다정스러워 그날 밤 총각이 지어다 주는 밥을 먹고 피로에 지친 몸을 쉬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이 되었으나 피로가 겹친
공주가 병이 나자, 그들은 떠나지 못하고 그 움집에서 며칠을 더 묵게 되었고 하루 이틀 지나는 동안에 두 나그네가
여인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모는 총각을 불러놓고 “우리들은 본시 서울 대삿집 아녀자들이온데
큰 화를 당해 변장하고 숨어 다니는 중이옵니다. 이제 다행히 당신같이 좋은 주인을 만나 토설하는 터이오니
제발 숨겨주시어 목숨만 살게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목메인 소리로 호소를 하였더니 총각의 얼굴색이 순간 달라지면서
눈물이 글썽해 지며 자기도 역시 화를 피하여 이곳에 살고 있는 길이라 하며 어차피 같은 처지이니 함께 지내보자는 것이었다.
그 뒤부터 그들은 한솥밥을 먹고 한방에서 기거를 하게 되어 부지중에 젊은 두 남녀는 정이 들게 되었고
이성간에 무사할 수 없었다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날을 가려서 맑은 냉수를 떠놓고 성례를 하여 드디어
부부가 되었다.
부부가 되자 총각이 먼저 물었다. “당신은 대체 어느 댁 따님이시오? 우리 기왕 한몸이 되었으니 숨길 것이 무엇이겠소?”
그리하여 공주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이곳까지 오게 된 사연을 말하였다. 한숨과 눈물 속에 이야기를 다 듣고난 신랑은
갑자기 일어나 공주에게 두 번 절을 하고 목메인 소리로 자기의 신분을 밝혔다. “처음부터 귀인이신 줄은 짐작했습니다만
참으로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이 사람은 바로 절재 김종서(節齋 金宗瑞)대감의 둘째 손자올시다. 집안이 온통 망하고
가족이 모두 살해될 때 하인의 친절한 주선으로 도망쳐 나와 이곳에 숨어 살게 된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공주와 유모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형용 못할 야릇한 감정이 솟아 올랐다. 원수끼리 맺어진 신랑 신부.
그러나 젊은 그들은 한껏 정답고 단란하기만 했다. 실로 꿈같은 현실속에서 꿈같은 세월이 흘러 갔다.
몇 년이 흐르자 이들은 귀여운 아들 딸을 낳았고 차츰 경계가 누그러지자 값진 보물을 팔아 마을로 내려갔다.
거기서 집과 땅도 사고 그리고 뒷산 골짜기에 숯 굽는 가마를 만든 후 숯을 구워 보은 읍내에 나가 팔기도 하며
행복하게 살아갔다.
그런데 이 무렵 피부병이 든 세조임금이 병을 고치기 위하여 명산 대찰을 찾아 기도를 드리는데 마침 속리산으로
행차하게 되었다. 이들이 사는 집은 속리한 초입 길목인 정이품송 근처 마을에 있었다.
이 소문을 들은 공주 내외는 그 때 여섯 살 난 아들과 네 살짜리 딸에게 꼼짝하지 말라고 부탁하였으나,
세조가 그 마을 앞 큰 소나무 아래 행차를 머물게 하고 쉬자, 동네 아이들은 웬 구경꺼리냐고 일제히 내달아와서
구경을 하게 되자 이들의 어린 두 남매도 부모님의 타이름이 있었으나 어린 호기심에 그만 구경을 하게 되었다.
그때 세조가 무심히 아이들을 내려보다가 맨앞에 서 있는 어린 두 남매를 발견하고 생김생김이며 차림차림이
다른 아이들과 훨씬 돋보이는 데다 모습이 어쩌면 옛날에 죽였던 자기 딸의 얼굴과 흡사했다. 세조는 측근 신하를 불러
저 아이들의 집을 알아보라고 지시한 후 그곳을 떠났고 지시를 받은 신하는 두 남매의 뒤를 따라가 집을 알게 되었다.
이튿날 세조는 평복을 하고 두 명의 신하만 거느리고 이 집 앞에 당도하여 물을 얻어오게 하였다. 그리하여 신하 한 사람이 물 한 그릇을 청하게 되었는데 공주가 문틈으로 밖을 내다본즉 부왕마마가문 앞에 서 있는지라 깜짝 놀라 뒷문을 통하여
숯을 굽고 있는 남편을 찾아가 이 사실을 알리고 아이들과 함께 산을 넘어 도망을 가고 말았다.
대신이 조금 전까지 인기척이 있었는데 아무리 물을 청하였으나 대답이 없으므로 의심이 더럭 나서 문을 열어보니
뒷문이 열려 있고 사람의 흔적이 없으므로 이는 분명한 역적의 무리라 생각하고 세조를 급히 모시고 돌아간 후 군사를 이끌고
마을에 진을 친 뒤 군사를 풀어 아무리잡으려 했으나 잡을 수 없었고 세조는 자신의 딸이 숨어 살고있음을 알고
천륜의 정이 쏠리었으나 차마 발설을 못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뒤부터 군사들이 진을 친 곳을 진터, 숯을 굽던 곳을 가마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칠송정(七松亭)
지금으로부터 약 210년 전에 안정 라씨 칠형제가 선산 묘소에 사초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칠형제가 각각
한 그루씩을 심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같은 어머니 품에서 태어난 칠형제가 한날 한시에 소나무를 심어서 부모님의 은혜를 기리기 위함이라한다.
그 후손들은 그 소나무 일곱 그루를 선조가 심었다고 해서 선조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7송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현재는 법주초등학교 교정에 한 그루만 남아있어 그 후손들은 물론 그 내력을 듣는 이로 하여금 아쉬운 감을 되새기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