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三國志) (30) 위기속의 진류왕
한편,
대궐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진의 부장(副將) 오광(吳匡)은 궐안의 소란스러운 소리에 놀라 대문을 두드렸다.
"하 장군님! 하 장군님! 무슨 일이옵니까?"
그러자 성안의 관병(官兵) 하나가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며,
"이 썩을 놈들아! 조용히 하거라! 네 놈들의 주인인 하진은 역적질 한 것이 탄로나서, 방금 전에 참형에 처해졌다! 자, 이것이나 가지고 썩 돌아가거라! "
하고 외치며 성밖으로 무엇인가 던져 주는데, 급히 주워 보니 그것은 바로 대장군 하진의 머리였다.
성문밖에 대기하던 호위병들은 경악해 마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오광은 불같이 화를 내며, 성문에 기름을 끼얹어 불을 지르게 하고 부하들과 함께 성문을 깨고 궁중으로 뛰어들어, 환관이란 환관은 눈에 띠는대로 닥치는대로 목을 잘라 죽였다.
궁중은 삽시간에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아비규환의 도가니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이리하여 십상시 조충과 곽승, 하운등은 황급히 도망을 가다 서궁 취화루(西宮 翠花樓)아래서 하진의 호위병에 의해, 창검에 쓰러져 죽었다.
그러나 장양과 단규 등 몇 명의 십상시만은 재빠르게 몸을 피하여 하 태후에게 달려왔다.
그리하여 어린 황제와 하 태후, 그리고 진류왕(陳留王), < 협 황자를 나중에 "진류왕"으로 불렀다> 세 사람을 데리고 북궁으로 달아나려 하였다.
그리하여 검은 연기가 중천으로 타오르는 대궐을 바라보며 북궁 비취문(北宮 翡翠門)으로 막 들어가려는데, 늙은 장수 하나가 갑옷을 갖춰 입고 큰 칼을 비껴든 채로 쏜살같이 말을 달려왔다.
그는 대궐에 변이 생겼다는 소리를 듣고 황실을 도우려고 달려온 노식(盧植) 장군이었다.
"이 역적놈들아! 네놈들이 감히, 황제와 태후를 어디로 모셔가려고 그러느냐! "
노식 장군이 큰소리로 외치며 달려오자 장양은 황제와 진류왕이 타고 있는 수레에 채찍을 가하여 번개같이 도망을 쳐버리고, 노식은 하 태후가 타고 있는 수레만을 붙잡았다.
마침, 그때 조조가 달려왔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태후에게,
"황제를 찾아 모실때 까지 태후마마께서 정사를 살피셔야 하겠사옵니다."
하고 말한 뒤에, 병사들을 각지로 보내어 황제와 진류왕의 행방을 찾게 하였다.
대궐에서는 아직도 불길이 하늘을 찌를듯이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거리는 세간의 백성들은 병란(兵亂)을 피하려고 가장 집물을 둘러메고 피난을 떠나는 무리로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한편, 하진의 부장 오광은 환관 무리를 색출하려고 이곳저곳을 살피다가, 때마침 하진의 아우 하묘를 발견하였다.
"이놈! 재물이 탐이나서 형을 죽게한 놈아! "
하고 벼락 같은 고함을 지르며 하묘를 한칼에 베어 버렸다.
그리고 원소는 원소대로 화염이 충천하는 궁중에서 십상시의 가족들을 모조리 찾아내어 죽여대는 바람에 대궐안은 그야말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아비규환(阿鼻叫喚)의 혼돈 천지가 되었다.
한편, 황제와 진류왕을 납치해 가지고 궁중을 떠난 장양과 단규는 성 밖으로 멀리 벗어나는 대로 수레를 버리고 산중으로 숨어들었다.
어느덧 날이 저물었는데 그들은 숨을 곳이 없었다.
게다가 어린 황제와 진류왕은 다리가 아파 더 이상 걸을 수도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행이 북망산(北邙山)속 여물물을 끼고 있는 풀밭에 모여 앉아 잠시 쉬고 있노라니까, 문득 어디선가 추격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장양은 이제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여울물 속으로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단규만은 아직도 삶의 미련이 남아서 황제와 진류왕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어둠속으로 자취를 감춰 버렸다.
황제와 진류왕은 겁에 질려 나무 그늘에 몸을 숨겼다.
이윽고 말을 타고 나타난 사람은 하남 중부연사 민공(閔貢)과 그가 이끄는 이십 여명의 군사들이었다.
그러나 민공은 황제와 진류왕이 나무 그늘에 숨어 있는 것을 모르고 그냥 지나쳐 버렸다.
"아이, 배가 고파라! "
어린 황제는 울상이 되어 중얼거렸다.
그때, 때마침 한 떼의 반딧불이가 무리를 지어 두 사람의 앞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아, 형님! 저 반딧불이가 우리를 구해 주려나 봅니다. 저 반딧불이를 따라가 보십시다."
어린 진류왕이 용기를 내어 말했다.
두 소년이 반딧불이를 따라 얼마를 걸어가니, 산속에 커다란 기와집 한 채가 보였다.
그러나 그 집은 어떤 집인지를 몰라서 섣불리 찾아 들어갈 수 없었다.
그리하여 배고픔과 피곤함에 지친 두 소년은 애처롭게도 집앞 나무 그늘에 쓰러진 채로 곤히 잠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슴푸레 밝아오는 새벽에 두 소년을 흔들어 깨우는 사람이 있었다.
"애들아! 너희들은 어디서 온 아이들이냐? "
깜짝 놀라 깨어난 진류왕은 황제를 가르키며,
"이 분은 얼마 전에 새로 즉위하신 황제 폐하이십니다. 어젯밤 십상시의 난을 피해, 여기까지 피난을 오신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엣? 이 분이 천자님이시라구?..... 그러면 당신은 누구시오? "
"저는 천자님의 아우인 진류왕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크게 놀란 사람은 두 소년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이렇게 누추한 곳으로 모시게 되어 황공 무비하옵니다. 소인은 사도 최열(司徒 崔烈)의 동생 최의(崔毅)이옵니다. 일찍이 벼슬을 지내다가 십상시의 난동이 자심하기에,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지내고 있는 중이옵니다."
집 주인은 어전에 엎드려 자기를 소개하였다.
이윽고 날이 밝고, 아침이 되었다.
천자와 진류왕이 방안에서 조반을 잡숫고 계시는데, 어떤 장수 한 사람이 대문 밖에서 주인을 찾았다.
"누구시오? "
"나는 중부연사 민공이라는 사람이오. 밤새워 배가 몹시 고프니 아침을 좀 먹을 수 있겠소? "
"어렵지 않은 부탁입니다."
집 주인 최의가 그렇게 대답하며 민공을 살펴 보니, 그의 말허리에는 사람의 머리가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앗? 이게 웬 수급(首級)입니까? "
깜짝 놀란 최의가 물었다.
"이 머리는 십상시의 한 놈이었던 단규의 머리요. 어젯밤에 도망가는 단규의 머리를 벤 것은 다행이었으나, 황제 폐하 형제분의 행방을 몰라서, 나는 그분들을 찾아 헤매는 중이오."?
주인은 그 소리를 듣고 또 한 번 놀랐다.
"금상과 진류왕께서는 지금 저희 집에 계시옵니다."
민공은 그 소리를 듣고 크게 기뻐하며, 이내 방안으로 들어와 천자와 진류왕을 찾아 뵈었다.
"어젯밤에는 얼마나 괴로우셨습니까? 궁중에서는 모두가 폐하를 애타게 찾고 있사오니, 피곤하시더라도 지금 곧 황궁으로 돌아가셔야 하옵니다."
민공은 두 분을 모시고 즉시 길을 떠났다.
그리고 민공이 낙양 가까이 왔을 때, 황제가 환궁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사도 왕윤, 태위 양표, 좌군교위 순우경, 우군교위 조맹, 후군교위 포신, 중군교위 원소 등이 제각기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영접을 나왔다.
이렇게 어가(御駕)가 낙양에 가까워 지고 있는 바로 그때, 문득 산속에서 수많은 군사들이 깃발을 높이 들고 어가를 향하여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앗! 제게 웬 군사냐? "
어가를 모시던 일행이 수많은 군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하여 원소가 앞으로 달려나가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금상께서 환궁하시는데 무엄하게도 앞을 막는 군사는 누구냐?"
"오오, 나요! 나 ,서량 지사 동탁이오! "
기골이 장대한 장수가 군마를 내달아 나오며, 마주 소리를 지른다.
그러는 이 사람이야말로 진작부터 승지에 대군을 멈춰 놓고 낙양의 정세만 유심히 살피고 있던 야심가 동탁이었다.
원소는 동탁의 위세에 눌려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자 문득, 소년 진류왕이 동탁의 앞으로 말을 달려나오며,
"그대가 누구길래, 방자스럽게 천자의 앞길을 막느냐?"
하고 엄숙한 소리로 꾸짖었다.
아홉 살짜리 소년으로서는 놀라운 기백이었다.
아무려니 동탁도 소년의 꾸짖음에 기가 질렸다.
그리하여 소년을 향하여 물었다.
"그러는 그대는 누구시옵니까?"
"나는 천자의 아우 진류왕이다. 그대는 천자를 영접하러 온 것이냐? 아니면 어가를 겁탈하려고 온 것이냐?"
"옛? 폐하를 영접하러 왔사옵니다."
"그렇다면 무엄하게도 어느 안전이라고 말을 타고 시끄럽게 구느냐?"
"넷! 항송 무비하옵니다."
동탁은 저도 모르게 말에서 뛰어내려 마상에 진류왕에게 허리를 굽혔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오호! 제법인데 ...! 저런 인물이라면...조만간 천자를 폐하고 진류왕을 새로 책립해야 하겠다.)
하고 혼자의 결심을 굳히는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