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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五章 상관안의 위기 1 맹춘가절(猛春佳節), 팔로(八路)에 도화(桃花)가 만발하고 신록이 우거져 눈을 시원하게 하 는 어느 아침 날이었다. "바… 바로 이 길이다." 검주 깊은 곳으로 들어서며 눈시울을 붉히는 흑삼청년 하나가 있었다. 등에 한 자루 고검을 메고 허리에 붉은빛 도는 옥적(玉笛) 하나를 찬 아주 잘생긴 젊은이였다. 나이는 이제 막 약관을 넘은 정도로 보였다. 검미성목(劍眉星目)의 수준함은 드넓은 사천성 이내를 다 뒤져 봐도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검강을 따라 걸으며 추억에 젖는 표정이 되었다. "아버지와 함께 죽간(竹竿)을 들고 낚시질하곤 하지 않았던가? 아버지는 큰 잉어를 잘 낚으 셨는데… 아, 아버지께서 손수 만들어 주신 잉어회의 맛이 아직 잊혀지지 않는데……." 그의 행동거지는 범인과 다른 데가 있었다. 우선 신색이 특이했고,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보 법(步法)이었다. 다리가 떠서 움직이는지 지면을 밟고 움직이는지 알지 못할 정도였다. "저기군." 그는 길모퉁이를 돌아서며 한순간 눈에서 황홀한 빛을 뿜어 냈다. 대체 무엇을 보았을까? 황홀하게 지어진 고루거각(高樓巨閣)이라도 발견했단 말인가? 그가 발견한 것은 울울창창히 서 있는 거대한 죽림(竹林)이었다. 그곳에는 다른 곳과는 달리 새벽 밥 짓는 연기가 솟아오르지 않았고, 오직 푸른 안개가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저… 저곳이 나의 고향이다." 흥분되어 외치는 준수한 젊은이는 풍운아 상관안이었다. 그는 형주를 떠난 이래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나는 듯 달려 새벽 무렵 고향 검주로 들어서 게 된 것이었다. "아버지가 가꾸시던 채미밭과 내가 뛰어놀던 마당이 저 안 어디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십여 년 간 아무도 돌아보지 않은 어머니의 묘역도……." 상관안은 너무 흥분해 허기진 것도 잊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자신이 왜 여기 왔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죽림에서 동쪽으로 칠십 리가 떨어진 곳에 있는 아주 깊은 호수 만장호(萬丈湖)로 와 있을 천녀제를 찾아왔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이었다. 상관안은 감개무량한 표정이 되어 죽림 안으로 접어들었다. 걸음 걸음이 낯익기만 했다. 아주 어렸을 적의 기억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버지의 자상하고 온화하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고,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의 모습이 희 미한 그림자로 떠올랐다. 상관안은 죽엽을 밟아 가다가 죽림 안 공터에 이를 수 있었다. 돌집 한 채가 서 있었다. 상관안이 어린시절을 보내던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상관안은 돌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걸어 돌집 뒤로 돌아갔다. "어머니의 산소가 어찌 되었을까?" 상관안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어머니의 얼굴을 그려 보며 돌집 뒤로 걸어가다가 한순간 놀라 입을 딱 벌렸다. "이… 이럴 수가……?" 상관안의 눈앞에 너무도 놀라운 일이 벌어져 있었다. 황폐해질 대로 황폐한 무덤 하나가 있었다. 봉분이 두부가 갈라지듯 쩍 벌어져 있고, 안에 묻혀 있던 관(棺)이 무덤 밖으로 나와 있었 다. 관이 엉망진창으로 부서져 있고 인골(人骨)이 제멋대로 흩어져 있었다. "이… 이것이 어느 요괴(妖怪)의 장난이란 말인가?" 상관안은 소름을 돋으며 그 자리서 무릎을 꿇었다. 너무도 분해 눈앞이 깜깜해졌다. "어… 어머니의 묘가 이리 되다니……." 상관안의 눈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무덤이 바로 백화선자란 가련한 여인의 무덤이었다. "어… 어머니……." 상관안은 파헤쳐진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 번 분개해 하며 소리치다 가 뒤에 누군가 나타나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흠……!" 아주 나직한 숨소리가 들려 왔다. "누구요?" 상관안이 기겁을 하고 머리를 돌리자, 한 사람의 모습이 아주 커다랗게 눈 안으로 들어왔다. 백의여인 하나가 아주 가까운 곳에 나타나 있었다. 머리를 높이 틀어 올려 아주 수려한 용모의 중년부인 하나가 야릇한 표정을 짓고 그를 바라 보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녀의 신발에 이슬이 묻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 이목을 속이고 이렇듯 가까이 접근하도록 몰랐다니…….' 상관안은 백의여인이 쉽게 볼 수 없는 절정고수임을 직감했다. 여인의 얼굴색은 밀랍같이 창백해졌다. 귀밑머리가 약간 희었는데, 그것이 신비하고 성스러 운 면모를 더해 주었다. 여인의 눈빛은 음산했고, 입가에 맴돌고 있는 미소가 지독스레 냉혹했다. 그러나 한눈에 보아 알 수 있는 지극히 뛰어난 인물이었다. "너는 … 백화선자와 어떤 사이냐?" 여인의 말소리가 상관안의 고막을 때렸다. "뉘… 뉘시오?" 상관안이 경계하며 묻자. "백화선자와 어떤 사이냐니까?" 백의여인이 다시 차게 물었다. "나… 나의 어머니가 백화선자이외다. 그런 말을 묻는 아주머니는 어느 분이십니까? 왜 여 기 와 계십니까?" 상관안이 긴장된 표정으로 묻자. "호호… 그럼 네 이름이 안(雁)이냐?" 백의여인이 뒷짐지며 입을 열었다. "그… 그렇소. 나는 상관안이오. 백화선자의 아들이오. 한데, 나의 이름이 안이라는 것을 어 찌 아시오?" "백화선자와 무림제일기재 상관위가 결혼해 안이라는 아들 하나를 낳았다는 것은 강호 사람 이 다 아는 사실이다. 너의 어머니와 각별한 사이였는지라, 네 이름에 대해 잘 알고 있지!" "어… 어머니를 잘 아신다고요?" 상관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렇다." "어… 어느 분이십니까?" 상관안은 전보다 훨씬 공손해졌다. 어머니와 절친했다면 예사롭게 대할 수 없다. 백의여인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상관안를 바라보았다. 바늘 끝보다 예리한 시선. 상관안은 급히 공력을 끌어올리며 여인의 시선을 마주했다. 두 사람의 시선에 허공 중에 묘하게 얽혀 들었다. 백의여인은 상관안이 시선을 마주하자 당혹감을 느낀 듯, 눈꼬리를 미미하게 떨었다. "나는 너의 어머니를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네 아버지 되는 사람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사실… 나는 안이라는 아이를 찾아다니기도 했었다." "아……!" 상관안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고향 땅에 와서 어머니를 아는 사람을 만나다니… 이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상관안은 흥분감으로 인해 여인에 대한 경계를 늦추었다. "나는 며칠 전, 이곳 검주로 왔다. 일이 있어 왔지. 지금 여기 온 이유는, 네 어머니의 묘를 보기 위함이다. 한데, 저리 훼손이 되었으니……." 여인의 눈길이 묘 쪽으로 쏠렸다. 상관안이 다시 고개를 돌려 어머니의 묘를 바라봤다. 그리고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누가 저런 못된 짓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자가 감히 저런 인간으로 하지 못할 일을 했는지……." "흠, 네 부모와 원한을 가진 자의 소행이다." "짐작되는 자가 있습니까?" "네 어머니를 죽이고, 네 아버지를 죽게 한 자를 알고 있다." "예… 에?" 상관안이 기겁을 하고 고개를 홱 돌릴 때였다. 언제 날아들었는지 모를 두 개의 희디흰 손 바닥이 그의 앞가슴에 와 강하게 부딪쳤다. 너무나 창졸간의 일격. 쾌속하기 짝이 없는 손속이었기에 상관안은 그대로 일 장에 얻어맞 고야 말았다. 꽝-! "아악!" 상관안은 가슴에 도끼를 맞는 듯한 고통 속에서 허공으로 높이 솟구쳐 올랐다. "큭!" 몸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 통증. 상관안은 정신이 혼미해짐을 느끼며 퉁겨 올랐고, 실 끊어진 연같이 날아가 죽림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그를 친 장본인은 바로 백의여인이었다. 그녀의 눈빛은 사악한 독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호호… 이제야 상관가문의 씨를 완전히 없앴군. 상관안이란 놈이 나타날까 걱정했었는데, 쉽게 처치했군." 백의여인은 안심하는 표정이 되어 상관안 있는 쪽으로 걸어가려다가 일순 몸을 세웠다. '누군가가 다가서는군.' 백의여인은 한 사람이 바람처럼 날아든다는 것을 알고 얼른 죽림 속으로 날아 들어가 모습 을 감췄다. 상관안이 날아가 버린 곳과는 반대되는 곳이었다. 순간, 백의인영 하나가 백화선자의 묘 앞으로 떨어져 내리며 입을 열었다. "사… 사부님!" 여인의 목소리는 곱디고운 꾀꼬리 소리를 무색케 하는 옥음(玉音)이었다. "사부님, 어디 계십니까?" 백의여인이 고개를 돌리며 사부를 찾을 때, 그녀의 말에 대답으로 들려 오는 창노한 말소리 하나가 있었다. "네가 어인 일이냐?" "아……!" 백의여인의 몸뚱이가 벼락맞은 듯 휘청여지며. "긴… 긴히 드릴 말이 있어 왔습니다. 검주분타에 갔더니, 사부님이 여기 와 계시다는 말을 하기에 급히 왔습니다." 여인이 무릎을 꿇자, 죽림 안에서 몽면으로 얼굴을 가린 백의여인 하나가 허공을 밟고 걸어 나왔다. 상관안을 기습했던 백의중년여인, 그녀는 어느 틈엔가 얼굴을 몽면으로 가렸으며 음성마저 변성술로 바꾸고 있었다. 그녀는 어기비행술(馭氣飛行術)로 다급히 나타난 백의여인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무슨 중대한 일이 있길래, 예까지 나를 찾아왔단 말이냐?" 여인의 음성은 몹시 사나웠다. 그녀가 새로 나타난 백의여인 앞으로 떨어져 내릴 순간이었 다.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백의여인의 손이 번개같이 위로 쳐들리며 작살 같은 경력이 뻗어 나왔다. 날카로운 파공성이 일어나면서 무형의 경력이 그대로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펑-! "흐으윽……!" 죽립 안에서 나타난 백의여인의 앞가슴이 피로 물들었으며, 입술 사이로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으윽……!" 여인이 피투성이가 되어 몸을 뒤틀 때, 일 장을 쳐낸 백의여인이 재차 장력을 날리려 했다. 그녀의 몸뚱이가 피투성이 여인 곁으로 닥칠 때, 비틀거리던 백의여인이 손을 들어 기이한 금나수를 발휘했다. 팍-! 젊은 여인의 손아귀가 중년여인의 손아귀 안에 쥐어졌다. "고… 고약한 년! 네… 네가 감히 나를 암살하려 하다니……." 여인이 노해 젊은 여인의 머리통을 일 장에 박살내려 할 때였다. "사부님! 죽여 주십시오. 저는 사부님을 암살한 직후 자결하려 했습니다." 젊은 여인이 눈을 꾹 감으며 피눈물을 흘렸다. "……." 중년여인은 손을 번쩍 쳐든 채 다음 행동으로 들어서지 못했다. 젊은 여인이 발작적으로 말 했다. "저… 저는 사부님이 혈홍문의 원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뭐… 뭐라고?" "사부님이 미혼관음과 마후상인을 사주해 혈홍문을 멸망케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구대문파가 혈홍문을 쳤다는 것은 저를 속이기 위한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누… 누가 그런 말을?" "단장협(斷腸俠)!" "놈이 그런 말을 했다고?" "단장협은 혈홍문의 신패를 보이며 제게 사실을 알렸습니다. 소녀는 그 말을 믿을 수밖 에……." 그녀는 바로 이불지였다. 이불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중년여인의 눈빛이 무섭게 타올랐다. 이불지는 감히 눈빛을 접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떨구었다. 이불지의 암격에 피투성이가 된 여인, 그녀는 바로 천녀제였다. 음양무상신공을 익히고 있었 기에 이불지의 일 장을 고스란히 맨몸으로 받아넘길 수 있었던 것이다. 천녀제의 눈에서 폭사되는 독광이 한층 강렬해졌다. "으음, 그… 그놈이 짐작한 대로 바로 그놈이었군." 천녀제는 피투성이가 된 채 노광을 폭사해 내다가 이불지의 손을 풀어 주었다. 그리고 아주 엄숙히 말했다. "언제고 네게 말하려 한 일이 있다. 지금 네가 암산한 것은 그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벌 어진 불상사에 지나지 않는다." "예… 에?" "나를 따라와라. 내… 네게 모든 것을 말해 주겠다." 천녀제는 그 말을 끝으로 훌쩍 날아 올라갔다. 이불지의 일 장에 당해 피투성이가 되었으나, 신법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몸이 금강불괴 지신의 경지를 넘어섰기 때문이었다. 이불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되어 있다가 천녀제가 사라진 방향을 따라 몸을 날렸다. 죽림 안은 곧 정적에 빠져들었다. 한 시진, 두시진… 무정한 시간이 세 시진 가량 흘러 춘광 (春光)이 죽림을 따사롭게 비추는 시작이 되었을 때였다. "으으……!" 죽림의 적막을 깨는 신음 소리가 있었다. "이…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죽림 안, 죽엽을 피로 물들이며 몸을 나뒹구는 젊은이 하나가 있었다. 창졸지간의 암습에 피 범벅이 되어 날아올랐던 상관안이 죽지 않고 몸을 뒤트는 것이다. 역골대선단 세 알을 복용하지 않았다면 여인의 장력에 서려 있던 한기와 열기에 의해 몸이 으스러졌으리라. 지룡혈옥지(地龍血玉芝)를 복용하지 않았다면 백의여인의 일 장에 접하는 찰나, 수백 토막으 로 나뉘어졌을 것이고. 상관안은 영약을 많이 먹은 탓에 천하에서 가장 강한 근골의 소유자가 되어 있었고, 그 덕 에 끈질기게 살아나고 있는 것이었다. "으으……!" 상관안은 겨우 몸을 일으켰으나 발을 제대로 놀릴 수 있는 상태가 되지 못했다. 눈앞이 깜깜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지가 이미 떨어져 나간 것같이 흐느적대기만 했 다. 의식도 뚜렷하지 못했다. 고향으로 들어선 선물치고는 너무도 가혹한 것이었다. "살아야 한다." 상관안은 눈을 꾹 눌러 감고 몸을 뒤틀다가 굵은 대나무 줄기를 붙잡고 몸을 지탱하며 손을 품안에 넣었다. 목갑 하나가 손에 쥐어졌다. 그것을 꺼내려 했으나 손가락에 힘이 전달되지 않았다. "크으으……!" 상관안은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나뒹굴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쿵-! 상관안의 몸이 대나무 줄기를 타고 나뒹굴 때, 그의 품안에 있던 목갑이 충격에 의해 튀어 나와 죽엽 위를 뒹굴었다. 안에 들어 있던 단약이 뚜껑이 열려지는 통에 밖으로 굴러 나와 향기를 풍겨 냈다. 그 향기 가 일말의 생기를 전해 주었다. "구… 구령단을 먹자." 상관안은 엉금엉금 땅강아지같이 기어 단약 떨어진 곳까지 가 입을 벌렸다. 구령단이 흙, 대나무 잎사귀와 함께 입 안으로 굴러들었다. 그리고 녹아 약수로 화해 목구멍 을 타고 배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상관안은 전신이 뜨거워짐을 느끼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의 두 눈은 핏발로 곤두서 있었다. "내가 어리석은 탓이다. 그 계집이 우리 가문의 원수인 것을 몰라보다니……." 상관안은 주먹이 으스러지도록 힘껏 쥐었다. "단장협이 말한 자가 바로 그 계집이란 말인가? 나를 죽여 상관가문의 씨를 말리려 한다는 자가……." 그제서야 단장협의 당부가 수긍이 갔다. 상대가 그토록 강한 고수였기에 신신당부를 했을 것이다. "나를 능멸한 것은 용서할 수 있다. 하지만 어머니의 산소를 뒤집어 놓은 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절대로!" 상관안은 이를 갈며 죽림 깊숙이 걸어 들어갔다. 그가 걸음을 내딛는 곳에 혈흔(血痕)이 나타났다. 상관안이 살아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태극선강을 익히지 못했더라면 이미 시체로 불렸을 것이다. "으득- 으득-!" 상관안은 복수의 화신이 되어 생명의 불길을 조금씩 조금씩 환히 밝혀 가며 죽림 깊숙한 곳 으로 사라져 갔다. 구령단으로 겨우 살아나기는 했으나, 기경팔맥의 대부분이 막혀 있다. 서둘러 치료를 하지 않으면 반년 이상 드러누워야 할지도 모른다. 백의여인을 뒤따르고 싶었으나 지금은 참아야 했다. 참는다는 것! 그것은 상관안이 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완벽한 일일 것이다. 2 삼라만상이 어둠에 잠겨 있다. 삼경, 하루 중 가장 어두운 시각이다. 눈부신 푸르름으로 깨어났던 산록도 어둠에 잠겨 검게 보일 뿐이다. 검강이 굽어보이는 야산. 사람이 살 수 없는 깊은 산중에 야음을 깨는 가느다란 호흡 소리 가 있었다. "휴!" 길게 내뱉는 호흡 소리. 그리고 다시 사위가 침묵 속으로 빠져든다. "흡!" 길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 야음을 깨는 호흡 소리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반복되었다. 흡(吸)- 지(止)- 호(呼)- 지(止)-! 숨을 내쉬다가 멈추고, 다시 들이마시다가 멈추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호흡하는 것이 운 공조식의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다. 호흡을 하며 기를 단해에 모으면 실낱 같은 진기가 만들어지고, 사지백해를 따라 진기가 일 주천하는 와중에 무한한 잠력으로 변하게 된다. 벌써 오 일째다. 그가 정좌한 채 운공조식에만 열중한 지도. 기습으로 중상을 입은 상관안, 그는 상세를 완벽히 치료할 요량으로 깊은 산중에 숨어 운기 행공(運氣行功)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희뿌연 기류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휴!"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흰 기류가 훨씬 짙어졌고, 들이마실 때마다 흐려지기를 계속했다. 운기행공은 아주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호흡의 수가 오래될수록 흰 기류의 농도가 짙어졌고, 순환이 빨리 이루어졌다. 운기행공의 심오함이 점점 더해지는 탓이었다. 얼마나 지나갔을까? 하루가 순환되며 숲에 어둠이 다시 찾아올 때, 그의 몸을 휘감고 있던 흰 기류가 오므린 입술 사이로 하나 남김없이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한순간 백광(白光)이 일어났다가 곧 사라졌다. "어리석은 계집! 너는 나를 죽이지 못했다. 죽이기는커녕… 하하하… 나의 태극선강을 완벽 의 경지로 올려놔 주었다. 하하하……!" 상관안의 웃음소리가 너무 맑아 사람의 웃음소리가 아니라 옥과 옥이 부딪쳐 깨어지는 소리 인 것만 같았다. 상관안은 몸을 일으켜 세운 후 사방을 쏘아봤다. 원한에 불타는 눈빛이었고, 대지를 압도하 는 눈빛이었다. 독심장부(毒心丈夫). 상관안의 눈빛을 보는 사람이라면 그런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빚을 갚아 주고야 말겠다." 상관안은 중얼거리다가 쌍장(雙掌)을 앞으로 밀어내는 자세를 취했다. 순간, 단전(丹田)에서부터 말할 수 없이 강한 힘이 일어나며 두 손바닥이 본래에 비해 두 배 정도 확대되었다가 아주 신비로운 힘을 일으켜 냈다. 우르르릉-! 천만균(千萬鈞) 벼락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상관안의 앞쪽 십 장 이내가 황폐해졌다. 나무와 돌이 뿌리째 뽑혀 하늘로 날아올랐고, 지면이 파일 수 있는 한 깊게 파여 검은 흙을 드러내 보였다. "으하하하……!" 상관안은 자신의 내공이 백의여인의 암습 아래 쓰러지기 이전에 비해 오히려 삼(三) 성(成) 정도 증가되었다는 것을 느끼며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상관의 모습은 곧 산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로부터 밥 한 끼 먹을 시간이 지난 후, 상관안은 백의여인을 만났던 자리에 도달하게 되 었다. 모든 것이 본래대로였다. 죽음의 장막 같은 어둠이 사위에 조용히 내려지고 있을 뿐이다. "그 요사한 계집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상관안은 어머니의 유골이 산산이 흩어져 있고, 다른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데 착 잡함을 금치 못하고 허리를 숙이며 유골 조각을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펴는데 온 신경이 쓰였다. 그를 낳아 주신 어머니, 그를 낳다가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골이니 어찌 일개 뼈다귀와 같을 수 있겠는가? 뼈마디 하나하나가 마치 자신의 살덩이인 것만 같았다. "어머니." 상관안의 양 뺨이 더운 눈물로 뒤덮였다. 얼마 후, 상관안은 입고 있던 천잠사 흑의에 어머니의 유골을 모두 담아 놓고 네 번 절하게 되었다. 한 번 한 번 절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상관안은 어머니의 얼굴도 모르는 불행한 청년이었으나 남들보다 훌륭한 어머니를 갖고 있 다 자위할 만한 신세의 주인공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천하에서 가장 착한 여인이기도 했다. 상관안의 본심이 순후하고 인물이 출중한 이유는, 그의 어머니를 닮은 데 기인한 바가 큰 것이었다. "어머니! 소자, 무림의 평화를 회복시킨 이후 이곳에 와 여생을 어머니의 묘를 지키며 살겠 습니다." 상관안은 굳게 맹세하며 유골을 싼 겉옷을 들고 으슥한 곳으로 향했다. '잠시 남의 눈에 뜨이지 않는 곳에 매장한 후, 무림이 평화로워진 후 본래의 자리에 묻자.' 상관안은 다른 사람이 쉽게 찾을 수 없는 곳에 어머니의 유골을 파묻은 후, 흑삼을 걸쳤다. 모든 것을 마무리졌을 때는 달이 먹궁 위로 둥실 떠오른 후였다. 상관안은 수일 동안 아무것도 취하지 못했으나 일점의 허기조차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원 기왕성하기만 했다. 지니고 있던 잠재력(潛在力)이 모두 폭발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내공 수위는 고금(古今)에 드물다 할 정도로 성숙되었고, 금강불괴지신은 더욱 강한 것 으로 되어 있었다. 전화위복(轉禍爲福). 백의여인이 준 것은 죽음이 아니라 더한 성취였다. '그 여인이 우리 가문과 무슨 철천지한이 있는지 모르겠군.' 천룡신협 상관위는 평생을 협행으로 일관한 사람이다. 그에게 원한을 가진 사마외도의 무리 가 어디 한둘이랴? "분명 천녀교의 비밀 고수일 것이다. 천녀제를 찾는다면 만날 수 있겠지." 상관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죽림을 벗어났다. 달빛이 그의 발걸음을 인도했다. 그는 무작정 걸어 동쪽을 향해 갔다. 죽림을 어떻게 벗어났는지 모르는 가운데 벗어나게 되었고, 정신없이 걸어 오 리 정도 가게 되었을까? 앞쪽에서 말소리가 들려 왔다. "허허… 정말 신기한 일이 아닌가?" "그러게 말일세! 이런 일이야말로 고금동서에 드문 일이네." 두 명의 농부 차림 노인이 커다란 나무 밑에 서서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모두 촌로에 지나 지 않는 평범한 노인들이었다. "정말 희한한 일이 아닌가? 이것은 아마… 하늘과 땅의 정기(精氣)가 한데 합해 벌어지는 일일 걸세!" "글쎄? 자세한 것을 알고 싶으나, 도무지 그 근처로 접근할 수가 있어야지!" "하긴, 근처로 갔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다 하니……." "인심이 흉흉해졌어. 전에는 한 사람이 죽어도 난리가 났는데, 이제는 연일 변사가 발견되어 도 놀라는 사람이 없으니……." 두 명의 촌로가 중얼거릴 때, 그들 곁으로 다가서는 흑의인영 하나가 있었다. 상관안이었다. "할아버지!" 상관안이 불현듯 나타나자, 촌로의 얼굴에 경계의 그늘이 만들어졌다. "도대체 어인 말씀이십니까? 그냥 듣고 넘기기에는 궁금해 견디기 힘들어 결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묻는 것이니, 말씀해 주십시오." 너무도 청아한 음성이다. 상관안의 부드러운 음색에 촌로들의 얼굴에 떠올랐던 일말의 긴장 감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젊은이는 어디 사는 사람인가? 전에 보지 못한 젊은이인데?" 노인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는 이곳 사람입니다. 오랫동안 고향을 떠났다가 얼마 전 검주로 돌아왔습니다." "흠……!" 노인 중 하나가 헛기침을 하며 아주 심각한 기색이 되었다. "보통 일이 아니야! 이곳에 고금에 드문 변괴가 일어났네!" "어인 변괴인지요?" "놀라운 일이네. 만장호를 아는가? 만장호가 오늘 새벽부터 붉게 달아오르더니, 급기야 끓는 불덩이같이 되었다네. 빛이 점점 금빛으로 물드는 것이 천하의 장관이네." "만… 만장호!" 상관안의 눈에서 신광이 흘러나왔다. '만년화리가 예정보다 빨리 나타났군. 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는 것은, 만년화리가 나타날 때가 되었다는 소리가 아닌가?' 상관안이 마른침을 꿀꺽 삼킬 때였다. 파팟-! 싸늘한 파공성와 함께 세 사람 곁으로 떨어져 내리는 홍의인영 하나가 있었다. 손에 귀두도 를 하나 쥔 중년대한 하나가 바람같이 들이닥치며 다짜고짜 호통쳤다. "어디서 굴러먹던 말똥이기에 여기서 비밀을 캐고 다니는 것이냐? 이곳 검주가 천녀교의 영 역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단 말이냐?" 그의 말소리가 숲에 낙엽을 지게 했다. "으으……!" "아이고, 이제 죽었구나!" 촌로들의 얼굴에서 생기가 사라졌다. 중년대한은 촌로들이 사색이 되는 것을 보고 득의의 표정을 지으며 상관안을 향해 큰소리로 물었다. "웬 놈인지 말해 봐라!" "흠……!" 상관안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 되어 그의 옷차림을 살펴 보았다. <혈탑호법(血塔護法)> 옷자락에 네 자가 검은색 실로 수놓아져 있었다. 그것은 중년대한이 혈탑의 고수 중 삼류라 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상관안이 그의 옷차림을 살피며 아무 대꾸도 않자, 중년대한이 노화를 이길 수 없다는 듯 귀두도 자루에 힘을 가했다. "고약한 놈! 단칼에 요절을 내리라." 그가 귀두도를 번쩍 쳐들자. "하하… 나는 싸우고 싶지 않소. 그러니 칼을 거두시오!" 상관안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손을 내저었다. 중년대한은 상관안이 자신을 싸울 상대로 보지 않기 때문에 싸움을 피하려 한다는 것을 모 르고 두려워 피한다고 오인했다. "흐흐……!" 그의 웃음소리가 점점 오만해졌다. "등에 검을 메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림인 같은데?" "무림인이오!" "흐흐… 무림인이라면 죽을지언정 싸워 보는 것이 도리이다. 네놈은 비겁하게 싸움을 피하 려 하다니……." "상대가 되지 않아도 싸워야 한단 말이오?" "물론이다." "정말 싸워야 하오?" "그렇다. 그것이 무사들의 본분이다. 상대가 강하다 해도 물러나지 않는 정신이야말로 무사 도이다!" 그가 검을 높이 쳐들고 외치자. "하하……!" 상관안이 진기를 모아 웃음을 터뜨렸다. 귀두도를 번쩍 쳐들던 홍의대한은 그 웃음소리에 고막이 터지는 상처를 입으며 뒤로 다섯 걸음 물러나 비틀거렸다. "어… 어이쿠!" 그가 귀두도를 떨구고 휘청일 때, 상관안이 미끄러지듯 움직여 홍의대한 바로 앞에 이르렀 다. 홍의대한은 그제서야 상관안이 겉보기와는 판이하게 다른 절세적 고수라는 것을 알고 안절 부절하지 못했다. "제… 제발 목숨만……." 홍의대한이 엎어져 손이 발이 되게 빌자, 상관안의 얼굴 표정에 살기가 드리워졌다. "만장호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말해 봐라!" 그가 빙굴 안에서 일어나는 바람 소리보다 차게 말하자. "저… 저희 같은 하수들이 어찌 상전들의 일을 알겠습니가? 다만… 만장호 근처에 태상교주 님과 혈탑주께서 계시다는 것을 알 뿐입니다." "천녀제가 와 있다고?" "예." "무상마녀도 왔느냐?" "그… 그분은 오 일 전에 오셨습니다." "그 외 누가 있느냐?" "아… 아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저희 검주분타 사람들은 두 분께서 귀찮은 일이 없게 하기 위해 근처의 질서를 정돈하고 있을 뿐입니다. 만장호 근처로 들어서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 명령입니다요." 그의 말이 거기에 이를 때, 상관안의 손가락 하나가 퉁겨졌다. 팍-! "음……!" 홍의대한은 목덜미에 따끔함을 느끼며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상관안의 격공점혈수법은 이미 신의 경지에 이르러 있기에 십 장 거리를 격해 혈도를 점할 수 있었다. 홍의대한이 한순간 정신을 잃고 마는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상관안은 홍의대한의 혈도를 점해 혼절시킨 다음, 겁먹어 떨고 있는 두 노인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겁내실 것은 없습니다. 이 사람은 여기서 한 시진 자다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부 터는 괴력(怪力)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고, 노인 어르신네들보다 힘이 약해질 것입니다. 그러 니 두려워하실 것 없습니다." "예… 에?" "어… 어인?" 노인들이 눈을 동그랗게 뜰 때, 상관안의 몸이 보라매같이 날아올라 동쪽 하늘을 가로질렀 다. 달을 향해 비상해 가는 젊은 용의 모습이 그러하리라. 상관안은 검주의 촌로들에게 신인(神人)으로 오해받으며 만장호를 향해 치달려갔다. 무상마녀까지 와 있다는 것이 흥분감을 일으켰다. '오 일 전에 왔다면, 단장협이 혈홍령의 이름으로 명한 것을 이행하지 않았음에 틀림없군. 이불지마저 완전히 마성에 젖었음에 틀림없으리라.' 상관안은 이불지도 자신만이 아는 살인명단 안에 넣기로 작정하며 신법을 배가시켰다. 비천유성신법은 천하에서 가장 빠른 신법이었다. 오십여 리를 달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 간이 걸리지 않았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즐독 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