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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와 강가에서의 금식기도
2026년 7월 16일 / 에스라 8:21-23, 31
스 8:21-23 / 그때 내가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22)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 23)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의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 【현대어 성경 - 나는 거기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일을 선포하였다. 우리는 모두 우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겸손히 낮추고, 우리 모두와 우리 어린아이들과 우리가 가지고 가는 모든 재산을 위하여 그리고 무사히 고국에까지 여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간구하였다. 22) 우리가 가는 먼 길에는 대적이나 강도의 위험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왕에게 그런 위험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도록 기마병을 내어 달라는 간청은 하지 않기로 작정하였다. 그런 간청은 부끄러워서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왕에게 이미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하나님은 자신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을 보호해 주십니다. 그러나 당신을 버리고 멀리하는 이들에게는 무서운 분노를 내리십니다.’ 23) 그래서 우리는 금식하며 위험하고 먼 여행길에서 우리를 보호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호소를 들어주셨다.】
스 8:31 / 첫째 달 십이 일에 우리가 아하와 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갈새 우리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사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지신지라 【우리는 그해 1월 12일에 아하와 강가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오는 길은 멀고 험하였으나 항상 지키시는 여호와의 손이 위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셨기 때문에 원수들의 공격에서도 무사히 벗어나고 매복하였다가 달려들던 강도떼의 손에서 벗어났다.】
칼 야스퍼스(Karl Jaspers)는 하나님과 인간의 접촉점을 ‘극한 상황’ 혹은 ‘한계상황’이라고 했다. 인간의 지혜와 노력으로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형편과 처지를 말한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인도로 홍해 가까이 다다랐을 때 한계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앞에는 인간의 힘으로 건널 수 없는 망망대해가 가로놓여 있었고, 뒤에는 애굽의 병거와 마병들이 쫓아오고 있었는가 하면, 좌우에는 험산준령이 둘러싸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들은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다. 야곱이 집을 나와 외삼촌에게로 가는 도중이라든지, 고향으로 가는 중 형 에서가 400명의 군인들을 거느리고 온다고 하였을 때가 한계상황이다. 특히 약 2.9~3미터에 달하는 거구였으며 청동 갑옷과 투구를 착용하고 거대한 창과 칼을 사용하는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에 40일 동안 일대일 결투를 요구하며 조롱했지만 당시 이스라엘 군사들은 그의 위압적인 모습과 강력한 무기에 두려움을 느껴 나서지 못했다. 그러나 그때로 다윗을 통하여 하나님 도우심의 손길은 있었다. 이 시점이 바로 인간과 하나님이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유다 왕국을 멸망시키고 많은 유다 백성을 포로로 잡아간 바벨론을 하나님께서 페르시아를 들어 정복하게 하시고, 페르시아의 왕들로 하여금 유다 백성을 놓아주어 그들의 고국 땅으로 돌아가게 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 바벨론 군대에 의해 파괴된 성전을 다시 세우도록 명하게 하셨다. 멸망하고 흩어졌던 민족공동체를 복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단지 유다 백성을 고국 땅으로 돌아오게 하고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게 하는 일로 그치지 않고 새 성전에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제사를 드리게 하시며,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사는 바른 신앙을 회복하게 하셨다.
이런 영적 회복 운동에 하나님께서 들어 쓰신 이가 율법학자 겸 제사장이었던 에스라였다. 에스라는 당대의 페르시아 왕인 아닥사스다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었다. 아닥사스다는 자신과 자신의 일곱 자문관의 이름으로 에스라를 유다로 보냈으며(스 7:14) 그를 보낼 때 하나님께 성심으로 금과 은을 보냈다(스 7:15). 그뿐 아니라 그는 바벨론의 온 도(스 7:16)와 궁중창고(스 7:20)와 유프라테스강 건너편 지역의 모든 창고(스 7:21)에서도 예루살렘 성전과 거기서 섬기는 일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부족함 없이 내다 쓸 수 있도록 조치해주었고 성전에서 일하는 모든 이들에게는 일체의 조공과 관세와 통행세를 면제해주었다(스 7:24).
그러나 에스라는 이스라엘 귀환민들을 이끌고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 한계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에스라는 오직 하나님께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평탄한 길을 간구하였다.
1. 바벨론 문화에 익숙한 백성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일은 에스라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오랜 세월 동안 바벨론에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부분은 정든 땅을 버리고 다시 황폐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를 싫어했다. 왜냐하면 70년간 바벨론에서 살다 보니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 문화와 풍습에 그만 물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바벨론은 세계 문명의 중심지였다.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모든 면에서 이스라엘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비록 노예의 신분이었지만 바벨론에서 사는 것이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서 폐허의 땅을 개척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좋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이 70년간 바벨론에서 살아가는 동안 유대인 특유의 상술로 많은 재물을 모은 사람들도 있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유대인’ 하면 돈 버는데 특별한 재능이 있는 백성으로 통한다. 바벨론에 살던 유대인 2∼3세들 중에는 바벨론 여자와 결혼한 자들도 있었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따라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바벨론 같은 세상을 떠나서 신앙의 고장인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죄악된 세상에서 신앙 세계로 발걸음을 옮겨 놓아야 했다.
여하튼 바벨론의 생활을 청산하고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제2의 귀환대열은 앞서간 제1차 귀환민보다도 훨씬 인도하기 힘든 무리였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지만 대부분 신앙, 기도, 열심, 목표도 없이 마지못해서 가는 귀환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을 인도한다는 것은 에스라에게는 버거운 십자가였다.
2. 백성들의 귀향을 방해하는 이방인들의 침략을 막는 일은 에스라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에스라의 사명은 이 같은 맥이 빠진 귀환민들을 이끌고 약 1,500km나 되는 길을 4개월에 걸쳐 행군하는 일이었다. 거기에다 바사 왕 아닥사스다로부터 성전 건축비 조로 하사받은 많은 금은보화를 낙타에 싣고 험난한 광야길을 통과하는 일도 힘이 드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광야에는 귀환민들을 괴롭히는 이방의 침략자들이 잠복하고 있었는가 하면, 보물을 강탈하려는 광야의 도적떼들이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아닥사스다 왕이 이 사실을 알고 보병과 마병을 보내어 이스라엘 귀환민을 보호하도록 했다. 그러나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의 호의를 거절했다. 그 이유는 바벨론 군대의 호위로 광야길과 험곡을 무사히 통과하게 되면 가뜩이나 믿음 없는 귀환민들이 하나님보다 바벨론의 위력에 더 의존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도 앞서 말씀드린 한계상황이다. 바벨론 군대의 보호를 받으려고 하니 백성들의 신앙에 손해가 있을 것 같고, 군대의 호위를 거절하려고 하니 이방의 침략자와 도적 떼를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무엇으로 어떻게 대항해서 싸울 수 있겠는가?
우리는 종종 신앙생활을 할 때 갈림길에서 방황할 때가 많다.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하면 쉽게 해결될 수는 있으나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된다. 그렇다고 믿음으로 하려고 하니 자신이 없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에스라는 신앙적인 결단을 내렸다. 인간의 도움보다는 하나님의 도움이 더 좋은 길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에스라는 전적으로 아닥사스다 왕의 힘을 빌어서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면 거기에는 반드시 놀라운 기적이 있을 것을 확신했다. 이것이 참된 신앙이다. 인간의 길을 택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리라고 확신하는 것이 믿음이다.
에스라는 그 험난한 광야를 지날 때, 인간적인 힘과 방법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의 길을 선택하였다. 이 믿음의 길이 바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인생이라는 광야를 지날 때 인간적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 믿음의 길을 배워야 한다.
▶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 인간적인 길과 하나님의 길 사이에서 선택의 갈림길에 설 때가 많다. 인간적인 길은 아주 넓고 편하고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길은 아주 좁고 험하여 때로는 매우 미련해 보이기까지 한다. 지금 당장은 넓고 큰 길이 쉽고 편리해 보이고 옳은 것처럼 보인다. 그 길로 가지 않으면 손해를 볼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넓고 쉬운 길이 아닌 좁고 험한 길로 걸어가야 할 때가 있다. 힘들고 외롭고 손해를 보더라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좁은 길이 있다. 이 길이 바로 십자가의 길이다.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험해서 그곳을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다.’(마 7:13-14). 예수님을 따라 살려면 넓고 편해 보이는 길로 가는 것이 아니다. 좁고 험한 길이라도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라면 그 길을 선택해야 한다. 누가 뭐래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의의 길을 가야 한다. 당장은 힘들고 외롭고 손해를 보는 것 같으나 결국 그 길은 생명의 길이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가장 좋은 길이 될 것이다.
다윗의 고백이 생각이 난다.
시 23:3-5 /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3. 아하와 강가의 금식기도는 극한 상황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최선의 기회였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다. 에스라 일행의 귀향길은 페르시아에서 예루살렘까지 직선거리로 900km이다. 돌아서 가면 1,500km를 가야 한다. 4달을 걸어가야 하는 거리이다. 어린아이들과 여자도 있었다. 그런데 금을 30톤이나 가지고 가므로 강도를 만날 위험이 많아 호위하는 군대 없이 여행한다는 것은 참으로 무모한 일이다. 에스라는 자기를 절대 신임하고 직접 자기를 명하여 예루살렘으로 보내며 전폭적인 지원을 하는 페르시아 왕에게 호위 군대를 요청할 수도 있었다.
과거 느헤미야가 고국 땅으로 돌아올 때는 페르시아 왕이 보내준 군대 장관과 마병과 함께 왔다(느 2:8-9). 그 사실로 보아 에스라도 왕에게 요청하기만 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에스라는 페르시아 왕에게 그런 요청을 하지 않다. 그런 요청을 하는 것 자체를 부끄럽게 여긴 것이다.
본문 22절이다.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라고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하였음이라.”
에스라는 이미 페르시아 왕 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믿음을 드러내 놓고 말한 적이 있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실 것이므로 하나님을 믿고 가면 달리 도와줄 군대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했는데, 이제 와서 갈 길이 멀고 험해서 걱정이 된다고 호위해줄 군대를 요청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 특히 지도자로서는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다.
에스라의 일행 중에는 아무래도 군대의 호위가 필요하지 않겠느냐며 왕에게 호위군대를 요청하자는 제언을 한 사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에스라는 그것을 부끄러운 일로 여겼고 오로지 하나님의 보호에 의존하기로 다짐하였다.
그래서 에스라는 대신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일을 선포하였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겸손히 낮추고, 자기들과 어린아이들과 가지고 가는 모든 재산을 위하여 그리고 무사히 고국에까지 여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간구하였다(스 8:21).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을 위한 다른 준비에 앞서 에스라가 행한 것은 바로 이 영적 준비였다. 이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
스 8:31 / 첫째 달 십이 일에 우리가 아하와 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갈새 우리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사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지신지라.
이 말속에서 우리는 실제로 에스라 일행을 대적하거나 매복했다가 공격을 감행한 자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물러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손이 도우셨다는 것이다.
모세, 다윗, 느헤미야, 엘리야, 바울, 다니엘, 예수님도 금식하셨다. 비장한 기도 외에 뚫을 수 없는 영적인 장벽이 있다면 금식기도를 해야 한다. 금식기도는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능력에 불을 당겨 준다.
금식은 자기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서게 한다. 세상의 영은 항상 불안, 시기를 불러일으키지만 금식은 영적인 시각을 변화시킨다. 하나님이 크게 보시는 일을 우리도 크게 보게 한다. 모든 문제를 거룩한 시각에서 보게 한다. 삶이 간결해지고, 대범해지게 한다. 금식과 기도로 영적인 체력이 업그레이드된다.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을 의존하지 아니하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했다. 자기와 자기 백성과 어린 생명과 모든 소유를 오직 하나님께 맡겼다. ‘하나님! 모든 것을 의지하오니 우리를 도와주소서.’
이와같이 기도는 의존 감정의 결단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면서 기도하는 것이 참 기도이다. 우리는 종종 내 뜻대로 결정해놓고 또는 처리해놓고서 어려움이 올 때는 아버지의 뜻대로 해 달라고 기도할 때가 많았다. 그리고 맡겼다면 그대로 행동으로 옮겨야 할 터인데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의 약점이요 보완해야 할 점이기도 하였다.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받은 금은보화를 제사장들의 어깨에 나누어 메게 했다.
스 8:24-25 / 그때 내가 제사장의 두목 중 12인 곧 세레뱌와 하사뱌와 그 형제 십 인을 따로 세우고, 저희에게 왕과 모사들과 방백들과 또 그곳에 있는 이스라엘 무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드린 은과 금과 기명들을 달아서 주었으니
이것은 확신에 찬 에스라의 결단이었다. 믿고 행하면 된다는 확신에서 나타난 결단이었다. 예수님도 ‘ …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 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라고 말씀하셨다.
아하와 강가의 기도가 있은 후 귀환민들은 무사히 예루살렘까지 도착하게 되었다. 그렇게도 두려워하던 이방의 침략자와 아말렉과 같은 광야의 도적 떼도 해를 끼치지 못했다. 어린 생명 하나 상하지 아니했다. 하나님이 지켜 주셨기 때문이다.
아하와 강가의 기도가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있기를 기원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는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설교를 마감하면서
스 8:21 / 그 때에 내가 아하와 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기도는 자신의 부족함을 스스로 인정하고, 자신이 해결치 못한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드리는 자는 겸비할 수밖에 없다. ‘겸비하다’란 말은 ‘복종하다, 고난당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값진 것을 얻으려고, 그들 스스로를 낮추어 복종하고 고난조차 감수하리라는 마음가짐으로 하나님을 찾았다. 우리도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고 이 말씀 때문에 고난을 당하겠다는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한다.
겸손하신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빌 2:8).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높여주시고(빌 2:9), 그의 소원을 들어주시며(시 10:17), 구원해주시고(욥 22:29),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벧전 5:5).
▶ 사실 본문을 택하여 설교를 준비하게 된 원인은 ‘나의 남은 생애는 이렇게 살렵니다’라는 설교를 준비하다가 계속 입에서 ‘겸손’에 대한 찬양이 나왔기 때문이다. ‘어떠한 자기주장도 버리고 오직 모든 것을 주님 뜻에 맡기며 내가 강한 것이 아니라 주가 강함을 보여줌이 진정한 겸손’. 그래서 급히 본문을 택하여 설교를 준비하게 된 것이다.
‘겸손’은 10년 전에 알았던 곡이 있었다. 그러나 이 곡은 요즘도 잘 불러보지 않았다. 그러나 ‘겸손’이란 곡은 지금까지도 겸손에 대해 나 자신 생각조차 못한 많은 깨달음을 주고 있다.
❶ 슬픔 속에서도 울지 않는 것 억울해서 울지 않는 것 걱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속에도 걱정하지 않는 것 사랑할 수 없는 사람조차도 사랑하며 품어주는 것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일지라도 용서하여 주는 것 어떠한 자기주장도 버리고 오직 모든 것을 주님 뜻에 맡기며 내가 강한 것이 아니라 주가 강함을 보여줌이 진정한 겸손
❷ 참을 수 없어도 화내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는 것 감사할 수 없는 그런 조건에서도 감사하며 사는 것 칭찬이나 비난 가운데서도 침묵하며 살아가는 것 말씀 순종하길 어려울지라도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 어떠한 자기주장도 버리고 오직 모든 것을 주님 뜻에 맡기며 내가 강한 것이 아니라 주가 강함을 보여줌이 진정한 겸손
<후렴> 겸손은 겉 사람이 드러나지 않고 속사람이 드러나는 것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바로 겸손한 사람 어떠한 자기주장도 버리고 오직 모든 것을 주님 뜻에 맡기며 내가 강한 것이 아니라 주가 강함을 보여줌이 진정한 겸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