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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29 章 겨울비 속에 떠난 女人
후드득!
때아닌 겨울비가 스산하게 내리고 있었다. 장대비로 일주야를 계속해서 내렸다.
세상은 온통 음침함과 암흑으로 뒤덮여 있었다.
두두두!
인적 하나 없는 대로를 질주하는 한 대의 마차가 있었는데 향하는 곳은 바로 정천친왕부였
다.
마부석에는 해골을 연상케 하는 피골이 상접한 괴노가 연신 채찍을 무섭게 휘둘러 대고 있
었다.
백골에다 가죽을 입힌 듯한 백골괴노, 그는 바로 기검하의 보이지 않는 그림자 무령상문신
한삭이었다.
마차 안은 온통 휘황찬란하게 치장된 화려한 내실이나, 그런 중에서도 사람으로 하여금 편
안한 느낌을 갖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 한쪽에는 붉은색 융단이 깔린 침상이 놓여 있었고, 그곳에는 한 명의 흑의미공자가 세상
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몸을 묻고 있었다.
그는 바로 기검하로 몸은 편안하나 그는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듯했다.
(태상태부 이홍장…… 무적의 제국 백련대황교를 무려 일백 오십 년 동안이나 이끌어온 무
서운 인물…… 모든 일은 쌓는 것보다 지키기가 더 어려운 법…….)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백 오십 년 동안 백련대황교를 무적제국으로 지켜온 백련대황교주 이홍장! 그는 어쩌면 신
보다 더 무서운 인물일지도 모른다.)
조각처럼 정교한 기검하의 눈가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더욱 점조직으로 이루어진 백련대황교의 백 인의 수뇌! 그 어느 한 사람이라도 무시할 수
없는 인물들이다. 어쩌면 그들은 벌써 나의 생명을 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눈가에 돌연 맑고도 차가운 신광이 쏟아졌다.
(하나 점조직은 그 머리만 자르면 와해되는 것…… 모든 일은 태상태부 이홍장을 만난 후에
결정하겠다.)
기검하는 침상에 눕힌 몸을 서서히 일으키더니 마부석의 무령상문신 한삭을 향해 말했다.
"한삭, 정천친왕부까지는 얼마나 남았느냐?"
"반각 후면 도착할 것입니다."
한삭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싸늘한 폭갈과 함께 마차가 급격히 멈추어졌다.
히히힝!
"누구냐? 비켜서라."
마차의 정면 쏟아지는 장대비 속에 취의궁장여인이 묵묵히 서 있었다.
농염한 삼십대의 미부로 장미꽃같은 화사함과 우아함 속에서도 환상적인 신비마저도 감추고
있는 그런 여인이었다.
비록 쏟아지는 비에 촉촉히 젖어 있었으나 처절하도록 아름다운 미색만은 감출길이 없었다.
그녀는 바로 금릉제검가의 여가주 유리대부인 초예상이었다.
마차 안에서 기검하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누구냐?"
한삭은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유리대부인입니다. 어찌할까요?"
"들여보내도록 하여라."
마차 안에는 기검하와 초예상이 한참동안 묵묵히 서로를 마주보았다.
"……."
기검하는 이 시각에 그녀가 이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느
끼고 있었다.
"예상! 그대가 이곳에 어떻게?"
"……."
"예상! 나는 지금 몹시 바쁜 사람이오."
"알고 있어요. 하지만 당신을 보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녀는 처연한 눈빛으로 기검하의 두 눈을 뚫어질 듯 응시하였다.
"소첩은 상공과 맺어질 수 없는 여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하나 상공을 잊기에는 소
첩은 너무 깊이 빠져들고야 말았어요."
그녀의 눈빛은 환상의 미망인같은 고아함과 정숙함을 이미 상실해 가고 있는 대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몸부림치는 나이든 여인의 집요한 열정과 안타까움만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소첩을 요부라고 생각해도 좋아요. 하나 소첩은 이 세상의 온갖 멸시와 죽음보다도 상공의
사랑을 택하고 싶어요."
"……."
그녀의 몸에서는 장미꽃 향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두 눈은 노을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단 한 번 뿐…… 마지막으로 상공의 사랑을 받고 싶어요."
"……."
그녀는 섬섬옥수를 들어 비에 젖은 구름결같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그 가벼운 손짓 하
나에 풍겨지는 달디단 유혹의 내음을 뉘라서 거부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그녀의 취의궁장은 비에 젖어 있어 여지없이 삼십대의 무르익은 농염한 육체의 굴곡
을 완연하게 드러냈다.
터질 듯 솟아오른 젖가슴의 굴곡과 은은히 돌기된 유실, 기름진 아랫배의 선과 그 밑으로
드러난 풍염한 둔덕이 자리잡았다.
정녕 뇌살적인 여체가 아닐 수 없었다.
일순 폭발적인 유혹의 여체가 기검하의 품에 살며시 안겨왔다.
"상공, 어쩌면 이것은 당신과 마지막 결합이 될지도 몰라요. 소첩은 마지막으로 상공의 영원
한 추억(追憶)을 간직하고 싶어요."
비장한 결의가 담긴 음성이었다. 이어 그녀의 싸늘한 눈망울에는 한겹 서글픔이 배어들고
있었다.
"기랑! 부탁이예요. 소첩을 안아주세요."
"……."
달짝지근한 숨결, 앵두같은 입술은 목마르게 비를 기다리고 있는 꽃잎처럼 살짝 벌어져 있
고, 그녀의 전신에서는 아찔한 장미꽃 향기와 함께 도발적인 염기가 폭발하듯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인일인지 농염한 요부의 욕정이라기보다는 순결한 의식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어인 연유
일까?
기검하는 그녀의 청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녀에게 죄스러움과 연민마저 일었다.
어쨌거나 그녀의 몸에 애증의 불을 당긴 것은 기검하 자신이 아니던가!
기검하는 서서히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천천히 하나씩 하나씩 그녀의 취의궁장을
벗겨내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수줍은 듯 발그레 홍조를 떠올리면서도 그의 손에 몸을 내맡겼다.
사르륵!
성숙한 미망인의 허물이 하나씩 둘씩 풀어 헤쳐졌다. 이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가
비오는 날에 여인의 옷벗는 소리라고 했던가?
비는 내리고, 마차는 기분좋은 율동을 일으킨다.
상의가 가냘프도록 섬세한 허리의 선을 타고 소리없이 흘러내렸다.
백옥을 깎아만든 듯한 투명한 살결, 아기에게 젖 한 번 먹이지 않은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젖가슴에는 버찌빛 돌기가 수줍게 떨고 있었다.
그 위로 촉촉히 젖은 칠흑같은 머리카락이 젖가슴의 구릉을 살며시 애무하며 휘날린다.
"……."
사나이의 손은 그녀의 상체를 미끄러지며 하의에 이르고 있었다.
잘록한 버들 허리가 드러나고, 그 아래로 숨이 막힐 정도로 확산된 풍만한 둔부의 동산.
알맞게 기름진 아랫배와, 두 다리는 백옥의 기둥처럼 미끈하게 뻗어 있다.
완벽한 나신이 현란하게 사나이의 눈을 어지럽혔다.
"하아……."
유리대부인은 그의 뚫어질 듯한 시선에 두 볼을 도화빛으로 물들이며 몸을 움츠렸다. 그리
고는 사내의 품에 깊숙이 파고 들었다.
"……."
무르익은 육체의 감촉이 새삼스럽게 손 끝에 느껴졌다.
코 끝을 자극하는 성숙한 여인의 향긋한 머리카락 내음과 살냄새에 기검하는 서서히 타오르
고 있었다.
그녀의 턱이 살며시 치켜져 올라갔다.
"아……!"
촉촉히 젖은 그녀의 입술에서 달콤한 과향내음이 흘러나왔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하얀 치열이 빛을 발하고, 그 사이로 분홍빛 살점이 사내의 혼을 잡아
끌었다.
기검하는 싱그럽게 웃더니 그녀의 입술을 덮어버렸다.
"으읍……."
그녀는 기검하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뜨거운 숨결을 토해내며 두 입술과 그 속에 살점이
어울리며 춤을 추었다.
목에 감겼던 그녀의 손이 그의 가슴으로 왔다. 그의 장삼이 벗겨지고, 하나씩 하나씩 융단
위에 쌓여가며 그녀의 손에 의해 기검하의 건장한 알몸이 드러나고 말았다.
두 사람의 몸은 한 치의 틈도 없이 밀착되었다.
짜부라질 듯 가슴에 닿는 젖가슴의 물컹한 감촉, 그녀의 입술은 서서히 사내의 가슴 쪽으로
미끄러졌다. 그녀는 사내의 가슴에 있는 건포도 알을 찾아내 입술로 물고 분홍빛 살점으로
핥고 또 핥았다.
"으음……."
사내의 몸에서 화염이 치솟아 올랐다. 사내는 두 손으로 그녀의 허여멀건 둔부를 받쳐들었
다.
둥근 엉덩이는 탄력이 있었다. 기검하가 그 풍염한 엉덩이를 받쳐 올리며 힘껏 끌어안자 사
내의 힘찬 손자국이 찍혔다.
그의 뜨거운 하체가 거기서 무섭게 트림을 하며 용해되고 있었다.
"허억!"
자지러질 듯한 신음을 발하는 그녀의 길다란 목이 뒤로 꺽여지고 말았다.
사내의 몸은 무섭게 반동을 일으켰다. 여인의 희끗한 허벅지가 사내의 허리에 감겨지고, 엄
청난 포만감에 벌어진 입에서는 자지러질 듯한 흐느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흐흐흑…… 당신은 악마예요. 사랑의 악마예요. 흐흑……."
"……."
그녀는 끝없는 혼미 중에서 절규하고 또 흐느꼈다.
"나는 몰라요…… 이대로 죽고 싶어요……."
"……."
하나 사내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끝없는 쾌락의 늪 속으로 질주해 가고 있었다.
둔중한 박동이 마차를 진동시키고, 그에 따라 여인의 흐느낌은 점점 더 고조되어 갔다.
"아…… 흐윽…… 당신은 나빠요. 헉…… 그만…… 안돼요……."
장대비는 억수같이 쏟아지고, 그녀의 아우성은 끝없이 빗줄기를 타고 흘러가고 있었다.
기검하와 유리대부인 초예상, 두 사람의 몸은 철목이었다.
두 사람은 무섭게…… 그리고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기검하와 초예상은 허탈하게 침상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반듯이 누운 기검하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배어 있었고, 초예상은 정인의 땀마저 소중하다는
듯이 깨끗하게 핥았다.
여인의 순결한 정성이 알알이 배어 있었다.
문득 그녀는 꿈을 꾸듯 몽롱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기랑…… 소첩은 영원히 당신을 잊지 못할 거예요."
돌연 그녀는 미친 듯이 기검하의 품 속으로 파고들었다.
"기랑! 제발 부탁이예요. 마차를 이곳에서 돌려 주세요. 아니 돌려야 해요."
하나 기검하는 무섭게 말했다.
"당신은 내가 가는 곳을 알고 있소?"
그녀의 눈가에는 처연한 빛이 스쳤다.
"그래요. 당신이 가고 있는 곳은 정천친왕부! 이미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기다리
고 있어요."
"……."
"어쩌면 당신은 태상태부 이홍장을 만나기도 전에 죽을지 몰라요. 당신을 기다리는 그들은
무서운 사람들이예요."
그녀는 결사적으로 기검하를 만류했다.
"설혹 태상태부를 만난다 하더라도…… 태상태부를 거역한 이상 당신은 살아날 수 없어요."
"……."
"태상태부…… 그는 이미 인간이 아닌 신, 그 누구도 그를 결코 거역할 수 없어요."
문득 기검하가 물었다.
"당신은 태상태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 같구려."
기검하의 그 한 마디에 유리대부인 초예상의 안색은 화석처럼 굳어졌고, 기검하의 시선이
비수처럼 그녀의 가슴에 틀어 박혔다.
"예상! 당신은 내가 무엇 때문에 정천친왕부에 가는 것까지도 잘 알고 있는 것 같구려!"
"……."
화석처럼 굳어져 있던 그녀는 돌연 선홍빛 입술을 꼭 깨물었다.
"만약 소첩이 백련대황교의 일백 인의 수뇌 중의 일인이라면…… 당신은 믿을 수 있겠어
요."
"으음!"
기검하는 경악했다. 이토록 사랑에 나약한 여인이…… 나이 십 팔 세에 남편을 여의고 금릉
제검가의 여가주가 된 유리대부인 초예상이 백련대황교의 일백 인의 수뇌 중 일인이라니!
기검하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고 그녀는 서글픈 눈동자로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불행하게도 사실이예요. 그러나 소첩은 여전히…… 당신을 사랑해요."
"……."
"흐으윽…… 절대로 가셔서는 안돼요. 절대로……."
기검하는 초예상을 직시했다. 그의 두 눈은 믿을 수 없게도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토록 간절한 유리대부인 초예상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저었다.
"예상…… 나는 그곳에 가야하오. 아니 갈 것이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다, 당신…… 흐윽……."
그녀는 격정을 누르지 못하고 처연한 흐느낌을 터뜨렸으나 기검하는 무정하게 말했다.
"예상! 이제 헤어질 시간이 되었소."
그녀는 도리없이 마차에서 내려야했다.
두두두!
그녀가 내린 기검하의 마차는 무정하리만치 한 여인을 내버려둔 채 정천친왕부를 향해 달리
고 있었다.
"흐흐흑……."
겨울비, 처량한 겨울비만이 떠나가는 마차를 바라보고 있는 초예상의 전신을 두드리며 쏟아
지고 있었다.
쏴아아!
정말 지겹게도 내리는 겨울비였다.
사랑을 담고 겨울 속으로 사라져 가는 마차, 그리고 빗물은 유리대부인 초예상의 얼굴에 넘
치고 있었다.
* * *
겨울의 밤비는 스산하게 내리고 있었다.
정천친왕부!
스산한 밤비에도 불구하고 정천친왕부는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밝혀져 흡사 불꽃의 성처럼
보인다.
그 화려함 속에 죽음과 같은 정적이 흐르고 있다고 느낀다면 착각일까?
"……."
이 순간 한 대의 마차가 정천친왕부의 철문 앞에 멈춰섰고, 문이 열리며 지면에 내려선 기
검하는 보이지 않는 가공할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기검하는 그런 것은 아랑곳 없이 정천친왕부의 안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하는 곳, 그곳은 한 채의 석옥으로 앞에는 한 명의 노인이 기검하를 바라보고 있었
다.
그지없이 평범한 노인으로 영락없이 사람좋아 보이는 촌노같은 친근감이 드는 인물이었다.
단지 조금 특이하다면 그의 허리가 약간 굽었다는 사실 뿐이었다.
한데 기검하가 느끼기에는 그 모든 것이 항거할 수 없는 위압감이 드는 것이었다.
(거인…… 이다!)
그것은 다가갈수록 더욱 기검하의 전신을 조여왔다.
(대자연의 위압감과 대지의 포용성과 여유마저 갖춘 항거할 수 없는 인물이다!)
기검하는 느낄 수 있었다.
(태상태부 이홍장…… 역시 그는 신이라 불리울 자격이 있다.)
평범한 노인은 바로 태상태부 이홍장이었다.
이때 조용히 시선을 들어 기검하를 응시하는 이홍장의 눈빛도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무섭도록 뛰어난 아이군! 천하에서 유일하게 내 젊은 날을 회상시켜 주는 놈이야!)
나이 먹은 노인들의 가장 큰 즐거움은 바로 자신을 닮은 신선한 젊은이를 대했을 때일 것이
다.
이홍장은 가슴에 천 갈래 만 갈래 뜨겁고 신선한 피가 솟구침을 느꼈다.
(저놈! 정말 마음에 들어!)
사람의 만남에 하늘의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숙명의 만남. 지상이 생긴 이래 가장 뛰어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뜨거운 감동마저
느끼고 있었다.
"……."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뗀 사람은 백련대황교주인 이홍장이었다.
"자네가 십기대작 기검하인가?"
"그렇소이다."
이홍장은 문득 석옥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으로 들어오게. 그렇지 않아도 자네를 위해 차를 끓여 놓았네."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난 조손처럼 한 잔의 차를 놓고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 내심에 서린 갈등을 누구라서 알 수 있겠는가?
태상태부 이홍장은 태어나 처음으로 지기를 만난 듯한 신선한 포만감같은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노부는 이 세상에 태어나 이루지 못한 것이 없네. 그 무엇이라도 노부가 원한다면 못 이
루어질 것이 없다네. 지금 역시 그것은 변함이 없네."
"……."
"황제보다 더한 권력…… 최강의 절대자…… 황금…… 인간이면서도 신이라 숭앙을 받을 정
도였지."
태상태부 이홍장은 거의 완벽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었으나, 지금의 그는
미미한 흥분마저 일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성취보다 어쩐지 자네를 만나는 이 순간 더욱 마음 든든하게 느껴지는
데…… 아주 좋은 기분이야."
기검하의 입가에는 처음으로 미소가 떠올랐다.
"태부께서 그동안 외로우신 덕분이겠지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나 내 나이쯤 되면 외로움은 세상을 살아가는 친구같은 친근감이 든다
네."
"……."
"노부는 모든 것을 성취한 사람…… 그동안 이룩한 모든 것을 회상하며 지켜본다는 것은 무
척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지."
"그런 것 같군요."
"차를 좀 더 들지 않겠나? 이 설록차는 노부가 손수 끓인 차일세."
태상태부 이홍장은 자애스럽게 기검하의 찻잔에 푸르디 푸른 설록차를 따라주었다.
"그러나 천수가 다해감에 따라 노부는 한 가지 사실에 애석함을 금치 못하고 있네."
"……."
"그것은 노부의 마지막을 지켜보아 줄 후계자가 없다는 것일세."
이홍장의 주름진 노안에 황혼의 역광같은 씁쓸한 여운이 감돌고 있었다.
"나같은 노인에게는 그동안 지켜온 인생을 지켜 줄 후세가 죽음보다 더욱 필요하네. 어쩌면
그것은 내 나이 이십에 품었던 야망보다 더욱 절실하다네."
"……."
이홍장의 전신에서는 처음으로 패도적인 기운이 폭발하고 있었다.
"나의 인생을 후세에 지켜주게. 나의 인생은 백련대황교…… 백련대황교를 맡아주게."
말투는 부드러웠으나 전신에서는 이백여 년 동안 대륙천하를 짓누른 연륜과 강압적인 위압
감이 알알이 배어 나왔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절로 무릎을 꿇게 하는 대자연의 독선같은 횡포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기검하는 고개를 저었다.
"태부께서는 욕심이 많군요. 태부께서는 지는 해…… 붙잡으려 한들 스스로의 무게 때문에
쓰러질 뿐입니다."
"……."
기검하는 냉혹했다.
"이제 물러나십시오. 이 이상의 욕심을 부린다면…… 늙은이의 노망에 불과할 뿐입니다."
"노망……? 늙은이의 노망……? 허허허…… 나 백련대황교주 이홍장이 노망을……."
이홍장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가 이런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하나 분노보다 오만한 기검하에게 더욱 친근감이 드는 것은 어인 연유일까?
마치 어린 손자의 재롱을 보는 듯한 흡족함이 그의 전신에 신선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허허허…… 자네는 이 늙은이의 젊은날에 못지 않은 독선과 패기를 지니고 있구먼…… 정
말 노부의 마음에 들어."
"……."
"그렇기에 노부는 더욱 자네를 포기할 수 없네."
기검하는 몸을 일으키며 이홍장의 두 눈을 직시하였다.
"그럼 어쩔 수 없겠지요. 태부는 내가 이 세상에서 존경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 태부께
영광스럽고 위대한 최후를 맞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홍장의 두 눈에서 냉엄한 기광이 폭사되었다.
"영광스러운 죽음이란 이 세상 늙은이들의 허약한 넋두리에 불과하다. 나 이홍장에게는 오
직 영원한 삶이 있을 뿐이다."
"돌아가겠습니다."
기검하가 등을 돌려 걸음을 옮기자 그 뒤를 향해 이홍장은 말했다.
"이것 한 가지만은 알고 있거라. 네가 이제껏 클 수 있었던 것은 나의 방치 때문이었다는
것을…… 내가 너를 후계자로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십 년 전에 무적철혈신 기무빈과 함께
너는 죽어야 했을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나 역시 그 은혜로 태상태부를 한 번은 죽이지 않을 것입니다."
태상태부 이홍장의 노안에는 고뇌가 물결치고 있었다.
"허허허…… 어쩔 수 없는 아이로고…… 이것도 숙명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
어인 일인지 그의 음성에는 조금의 힘도 들어있지 않았다. 단지 늙은이의 푸념같은 여운을
남길 뿐이었다.
석옥을 나서는 기검하가 문득 멈추어섰다.
빗물에 젖은 한 소녀, 그토록 천진하고 순수하던 태양천녀 이교홍이 한 떨기 배꽃 옆에서
기검하를 처량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기검하는 그녀를 바라보자 가슴 속 저 깊은 곳에서 한 줄기 쓰라린 격정이 스며들었으나 무
정(無情)하게 시선을 돌리며 걸음을 옮겼다.
빗속으로 사라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주시하는 이교홍의 두 볼에 한 줄기 눈물이 고여 선을
그리며 흘러내렸다.
"흑……."
그녀는 와락 복받쳐 오르는 설움을 견디지 못하고 흐느낌을 터뜨렸다.
이때 석옥 안에서 이홍장의 자애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홍아야! 그놈을 따라가거라! 그놈은 너를 따뜻하게 맞아줄 것이다."
빗속으로 사라져 가는 기검하 역시 이 음성을 들을 수 있었으며, 얼굴에는 한 줄기 서글픈
미소가 떠올랐다.
"물론입니다. 우리같은 독한 사내들 때문에 천진한 여인이 울어선 안될 것입니다."
무령상문신 한삭은 마부석에 앉은 채 기검하를 기다리고 있었고, 마차에 다가선 기검하는
아무말 없이 마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마차는 정천친왕부를 빠져나갔다.
유유하게 빗속을 달리는 마차, 언제부터인지 마차의 뒤를 따르는 보이지 않는 수백의 그림
자가 있었다.
침상에 앉은 기검하의 귀에 들려오는 한 가닥 전음이 있었다.
(혈주! 구주풍각괴 유광입니다. 이미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잠시 마차로 들어오도록 하시오."
기검하의 말이 끝나는 순간 마차 안으로 스며드는 소리없는 한 인영이 있었다.
구주풍각괴 유광으로 그의 손에는 하나의 두꺼운 서책이 들려 있었다.
기검하는 구유조상혈의 육대공봉 중의 일인으로 풍각의 각주인 구주풍각괴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혈주의 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구주풍각괴 유광은 손에 들고 있는 서책을 기검하에게 건네주었다.
(백련대황교 구십 팔 인의 수뇌들의 신상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외에도 백련대
황교에서 꼭 제거해야 할 놈들의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서책을 구주풍각괴 유광에게 건네주는 기검하의 눈에서 무서운 위엄
이 뻗어나왔다.
"계획대로 모조리 없애시오."
기검하의 음성에는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질타하는 천엄이 담겨 있었다.
"기한은 단 삼 일! 그 이후에는 이 지상에서 백련대황교도들의 모습이 절대로 보여서는 안
될 것이오."
"존명!"
그의 명령은 곧 법이다.
드디어 기검하의 야망의 칼이 백련대황교를 가르는 것인가?
이 순간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수십 인의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스스스!
분명히 느낄 수 있었으나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그야말로 번개같은 순간에 마차의 주위에는 수백 명의 흑의인들이 몰려들고 있었
다.
채 반각이 흘렀을까? 일천 인이 넘는 흑의인들이 마차와 함께 질주하였다.
과연 이들은 누구인가?
이때 마차 안에 있는 기검하의 귀에 들려오는 전음이 있었다.
(옥주! 암흑등혈옥의 일천 수하 대령이옵니다.)
그럼 이 흑의인들이 살인무학의 대가 암흑등혈옥의 인간살인병기들이란 말인가?
그들은 바로 암흑등혈옥의 은살자들이었다.
기검하는 단호하게 말했다.
"본좌는 백련대황교를 일소하기로 마음먹었다."
기검하는 구주풍각괴 유광의 손에 든 책자를 마차 밖으로 던지며 말했다.
"이 책자에는 백련대황교의 모든 것이 적혀 있다. 한 놈도 남김없이 없애라!"
(존명!)
(예, 옥주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러한 음성은 기검하만이 들을 수 있었다.
순간 기묘한 광경이 벌어졌다.
쫘아악!
기검하가 던진 서책이 허공에서 산산히 한 장씩 한 장씩 찢겨지며 난무하였다.
그리고 암흑등혈옥의 은살자들이 그 한 장을 찢어 나누어진 종이를 들고 사방으로 분산되어
사라졌다.
스스스!
일천 명의 인물들이 소리없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는가?
오직 서로 죽이는 일만으로 팔백 년 동안 투쟁해 온 암흑등혈옥의 은살자들!
드디어 그 죽음의 살수가 천하에 내려지고 말았다.
---지옥의 천사 은살자의 태동!
훗일 가장 무서운 살인의 전문가로 일컬어지는 은살자의 죽음의 대폭풍은 이렇게 시작되었
다.
첫댓글 잼 납니다
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