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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 전봉준이 1895년 2월 9일(음)의 법정의 심문에 답한 재판기록으로 필사본이며 당시 조선 법부아문에서 편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1895년(고종 32)에 법부아문(法部衙門)에서 편찬한 8,000자 내외의 간략한 책자이다. 법부아문의 재판관과 일본 영사가 연석한 가운데 1894년 2월 9일부터 3월 10일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심문한 문목(問目)으로 구성되어 있다. 1894년의 1월 고부에서 봉기하여 두 차례의 농민운동을 일으킨 후 부하의 밀고로 체포되기까지의 사정이 자세하게 진술되어 있다.
특히 정부나 일본측에서 가장 중점을 두고 추궁하고 있는 것이 1894년 농민운동과 흥선대원군과의 관계로서, 3 ·4 ·5초 문목의 대부분이 이 부분에 관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고부봉기와 두 차례에 걸친 농민운동의 원인 및 경과, 농민군의 인적 구성, 전봉준과 동학의 관계, 동학의 교리 ·조직 ·교세 및 농민운동에 미친 영향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 제1차 신문과 진술
문 - 너의 이름은 누구인가?
답 - 전봉준이다.
문 - 나이는 몇 살인가?
답 - 41세이다
문 - 살고있는 곳은 어느 고을인가?
답 - 태인 산외면 동곡리이다.
문 - 하는일은 무슨 일인가?
답 - 선비로써 일하고 있다.
문 - 오늘은 법무관원과 일본영사가 회동심판하여 공정히 처결할 터이니 일일이 바로 고하라.
답 - 일일이 바로 고하겠다.
문 - 아까 이미 명유하였거니와 동학사는 일신에만 상관한 일이 아니라,
즉 국가에 크게 관계되는 것이니 비록 어떠한 높은 지위에 관계되는
것이 있어도 숨기지 말고 바로 고하라.
답 - 마땅히 소교에 의하려니와 당초 본심에서 나온 일로 타인과 더불어 관계가 없다.
문 - 너는 전라도 동학의 괴수라 하는데 과연 그런가?
답 - 처음은 창의로 기포하였고 동학괴수라 일컬은 적은 없었다.
문 - 너는 어디에서 인중을 불러 모았느냐?
답 - 전주, 논산 땅에서 의병을 모았다.
문 - 작년 3월간 고부등지에서 민중을 도취하였다 하는데 어떤 사연이 있어 그렇게 하였는가?
답 - 그 때 고부군수는 액외의 가렴이 기만냥인 고로 민심의 원한으로 이 거사가 있었다.
문 - 비록 탐관오리라 하여도 반드시 명색이 있었을 것이니 상세하게 말하라.
답 - 지금 그 세목을 다 말하지 못하겠으나 그 대개를 간단히 고하리라.
일은 민보아래 축보하고 늑정으로 민간에 고시하여 상답인즉 일두락에 이두세를 거두고 하답인즉 일두락에 일두세를 거두니 벼가 도합 700여 석이요 진황지를 백성들에게 그 경식을 허하고 관가로부터 문권을 주어 징세아니 한다 하더니 그 수수시에는 늑징한 일이요, 일은 부민에게 돈을 2만냥을 늑탈한 일이요, 일은 그의 부가 일찍이 태인현감을 지낸고로 그 부의 비각을 건립한다고 돈을 늑렴한 것이 천여냥이요, 일은 대동미를 민간에서는 정백미로 16두식을 준가로 수렴하고 상납시에는 추미로 바꾸어 이조를 몰식한 일이요 이외 허다한 조건을 이루 다 기득할 수가 없다.
문 - 지금 고한 가운데 2만냥의 늑탈한 돈은 어떠한 명목으로 행하였는가?
답 - 불효, 불목, 음행 및 잡기등 명목으로 죄목을 구성하여 행하였다.
문 - 이같은 일은 한곳에서만 행했나? 또는 각처에서 행하였나?
답 - 이같은 일은 한곳에서그친 것이 아니라 수십처가 된다
문 - 수십처에 이른다니 그 가운데 혹 이름을 아는 자가 있는가?
답 - 지금은 이름을 기득할 수 없다.
문 - 이 외에 고부군수가 어떠한 일을행하였는가?
답 - 지금 진술한 바 사건이 모두 민간탐학의 일이나 축보시에 타산에서 수백년된 거목을 늑작(늑탈해 배는것)하고 축보하는 역사에 민정을 일전도 주지 않고 늑역 하였다.
문 - 고부군수 이름은 누구냐?
답 - 조병갑이다.
문 - 이러한 탐학한 일은 다만 고부군수에게만 그쳤느냐? 혹 이속배들의 작간은 없었는지?
답 - 고부군수 단독으로 행하였다.
문 - 너는 태인땅에서 거생했는데 어찌하여 고부에서 기요 했느냐?
답 - 태인에서 살다가 고부로 이사한지 수년이 되었다.
문 - 그런즉 고부(현 이평면)에는 너의 집이 있느냐?
답 - 불타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문 - 그때 너는 늑징의 피해가 없었느냐?
답 - 없었다.
문 - 일경 인민이 다 늑렴의 피해를 입었는데 네 홀로 피해가 없었다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답 - 학구로써 업을 하기 때문에 전답이라고는 삼두락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문 - 너의 가족은 몇 명이나 되느냐?
답 - 가족은 합해서 6명이다.
문 - 일경 인민이 모두 늑렴의 해를 입었는데 너만 홀로 없다하니 참으로 의혹이 간다.
답 - 나는 아침에는 밥, 저녁에는 죽을 먹을 정도이니 어찌 늑렴할 것이 있겠는가?
문 - 고부 군수가 도임한 것은 몇 년 몇 월 인가?
답 - 재작년 동지 섣달 양월간이다.
문 - 도임이 꼭 어느달인가?
답 - 상세히는 알 수 없으나 거년이 일년이다.
문 - 도임하자마자 처음부터 곧 학정을 행하였는가?
답 - 처음부터 행하였다.
문 - 학정을 처음부터 행하였다면 무엇 때문에 즉시 기요 하지 않았느냐?
답 - 일경 모든 인민이 참고 또 참고 견디다가 종말에 부득이 행하였다.
문 - 너는 피해가 없었다 하는데 무엇 때문에 기요 하였느냐?
답 - 한 몸의 해를 위해 기포하는 것이 어찌 남자의 일 이라 하겠는가? 중민이 원탄하는 고로 백성을 위해 제해코져 하였다.
문 - 기포시에는 무엇 때문에 주모하였는가?
답 - 중민이 모두 나를 추대하여 주모로 삼은고로 민언을 따랐다.
문 - 중민이 너를 주모로 삼았을 때 너의 집에 왔었는가?
답 - 중인 수천명이 나의 집 근처에 모인고로 자연히 이를 하게 되었다.
문 - 수천명 중민이 무엇 때문에 너를 추대하여 주모로 하였는가?
답 - 중민은 비록 수천명이나 모두가 어리석은 농민으로 나는 문자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 - 네가 고부에 주접해 있을 때 동학을 가르치고 있지 않았는가?
답 - 나는 훈도로서 어린 소년과는 관계하였으나 동학을 가르친 일은 없다.
문 - 고부 땅에는 동학이 없었는가?
답 - 동학이 역시 있었다.
문 - 고부기포시에는 동학이 많았는가? 원민이 많았는가?
답 - 기포시에는 원민, 동학이 비록 합하였으나 동학은 적고 원민이 많았다.
문 - 기포 후에는 어떤 일을 하였는가?
답 - 기포 후에는 진황늑징세를 민간에 돌려주고 관에서 축조한 보를 훼파(파괴) 하였다.
문 - 그때는 어느때인가?
답 - 작년 3월 초이다.
문 - 그 후에는 어떤 일을 행하였는가?
답 - 그후 흩어졌다.
문 - 흩어진 후 무슨 일로 다시 기포하였는가?
답 - 그후 장흥부사 이용태가 안핵사로써 본읍에와 기포 인민을 동학으로 통칭해서 이름을 나열하여 체포하고 그 가옥을 불사르며 당사자가 없으면 그 처자를 붙잡아 살륙을 자행하는고로 다시 기포하였다.
문 - 그런즉, 너는 처음 일차적으로 관정에 소장을 올린 일이 있었는가?
답 - 처음에는 40여명이 소를 제기하였으나 붙잡혀 갇히고 재차 60여명이 호소를 하니 또 쫓겨났다.
문 - 등소한 것은 어느 때인가?
답 - 처음의 호소는 재작년 11월 이었고 재차는 동년 12월이었다.
문 - 재차 기포는 안핵사 때문이었는데 그때도 네가 주모 했느냐?
답 - 그렇다
문 - 재차 기포후 어떤일을 하였는가?
답 - 영군 만여 명이 고부 인민을 도륙코저 하는고로 부득이 접전 하였다.
문 - 어데서 접전했나?
답 - 고부땅에서 접전했다.(황토현 싸움을 말함)
문 - 군기·군량은 어느곳에서 구획했는가?
답 - 군기·군량은 모두 민간에서 마련했다.
문 - 고부 군기고의 군물 역시 네가 탈취하지 않았느냐?
답 - 그 때는 탈취한 일이 없었다.
문 - 그 때도 역시 네가 주모하였느냐?
답 - 그렇다.
문 - 그 후 오래도록 고부에 있었느냐?
답 - 장성으로 갔었다.
문 - 장성에서도 접전하였는가?
답 - 경군과 더불어 접전하였다.(황용싸움)
문 - 경군과 더불어 접전하여 어느쪽이 이기고 어느쪽이 패했나?
답 - 아군이 취식할 때 경군이 대포로 사격하여 아군의 4,50명이 죽자 아군은 일제히 추축하니 관군은 패주하여서 대포 이좌와 탄환을 탈취하여 왔다.
문 - 그때 양군의 수는 각각 얼마나 되었던가?
답 - 경군은 7백명이고, 아군은 4천여 명이었다.
문 - 그 때 장성에서 행한 일을 바른대로 일일이 고하라.
답 - 경군이 패주한 후 아군은 배도(발걸음을 두배로 빨리하는것)하여
경군보다 먼저 전주에 들어가 수성하였다.
문 - 그때 감사는 없었는가?
답 - 감사는 우리 군대가 오는 것을 보고 도주했다.
문 - 수성후 무엇을 행하였는가?
답 - 그 후 경군이 뒤따라 완산에 이르러 용두현에 유진하고 성중을
향하여 대포로 공격함으로써 경기전이 훼상되었다. 이 연유를 경군에게 허급하였더니 경영중에서는 효유문을 만들어 "너희 소원 대로 따르겠다" 하므로 감격하여 해산하였다.
문 - 그 후에는 어떤일을 행하였는가?
답 - 그 후에는 각기 집으로 돌아가 농사에 힘쓰고 그 나머지는 불항의 무리가 되어 민간에 표략한 것도 있었다.
문 - 불항의 도(徒) 표략군은 너와는 관계가 없었느냐?
답 - 관계가 없었다.
문 - 그 후 다시 행한 일은 없었느냐?
답 - 작년 10월에 나는 전주에서 기포하고 손화중은 광주에서 기포하였다.
문 - 다시 기포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
답 - 그 후 들은즉 귀국(日本)이 개화를 한답시고 처음엔 민간에게 일언반사의 알림도 없었고 또 격서도 없이 솔병하고 도성에 들어와 야반에 왕궁을 격파, 주상(임금)을 경동케 하였다는 말이 들리는 고로 시골선비등은 충군애국의 마음으로 분개를 이기지 못하여 의병을 규합, 일인과 더불어 접전하여 일차적으로 이 사실을 청문하고자 하였다.
문 - 그후 다시 어떠한 일을 행하였는고?
답 - 그후 곰곰히 생각하여 보니 공주감영은 산이 막히고 강이 둘러 있어 자리가 형승하기 때문에 그 땅에 옹거하여 고수를 도모한다면 일병이 용이하게 쳐들어 오지 못할 것을 알고 공주로 들어가 일병과 상치코저 하였는데 일병이 먼저 공주에 확거하였으므로 사세는 불가피 접전이 없을 수가 없었다. 그런고로 2차 접전후 1만여명의 군병을 점고한 즉 남은자가 불과 3천명이요, 그 후 또다시 2차 접전후 점고한즉 5백여명에 불과하였다. 그런고로 패주하여 금구에 이르러 다시 초모한 즉 수효는 좀 증가하였으나 기율이 없어 다시 개전하기는 극히 곤란하였다. 그런데 일병이 뒤따라와서 2차 접전하여 패주하고 각기 해산하였다. 금구 해산후 나는 경중(서울)의 이면을 상세히 알고 상경할려고 하다가 순창땅에서 민병에 의하여 붙잡혔다.
문 - 전주에 들어가 군사를 초모 하였을 때 전라일도 인민이 도취하였는가?
답 - 각도 인민이 조금 많았다.
문 - 공주로 향하였을 때 역시 각 도 인민이 좀 많았는가?
답 - 그때도 역시 그러하였다.
문 - 재차 초모할 때는 어떠한 방책으로 규합하였는가?
답 - 초모할 때는 충의의 선비로써 같은 창의의 뜻을 방문으로 내어 걸었다.
문 - 초무할 때 다만 자원자만 규합하였나? 혹 강제로 몰아 모았나?
답 - 내가 거느린바 4천명의 군졸은 자원자이나 그 외는 각처에 통문으로써 "만약 이 거의에 불응하는 자는 불충 무도"라고 하였다.
작년 3월 고부에서 기포하여 전주로 향하는 동안 몇읍을 경유하고 접전은 몇 차례 하였나?
경유한 읍은 무장·고부와 태인·금구를 거쳐 전주에 달하려 하였는데 영병 만여명이 내려온다하기에 부안으로 갔다가 되돌아와 고부에 이르러 영군과 더불어 접전했다.
그 후에는 어느곳으로 갔나?
정읍으로부터 고창·무장·함평을 거쳐 장성에 이르러 경군과 더불어 접전 하였다.
문 - 전주에 들어간 것은 언제며 해산한 때는 어느때인가?
답 - 작년 4월 26∼27일간에 전주에 들어왔으며, 5월초 5일∼6일간에 해산하였다.
문 - 재차 기포할 때는 어느 곳에서 시작했는가?
답 - 전주에서 시작했다.
문 - 재차 기포할 때 초모하여진 사람은 전부 몇 명인가?
답 - 4천여 명 이다.
문 - 공주에 이르렀을 때에는 몇 명이나 되었는가?
답 - 만여 명이었다.
문 - 공주 접전은 어느 때인가?
답 - 거년 10월 23∼24일이다.
문 - 당초 고부 기포시의 동모자는 모두 누구 누구 였던가?
답 - 손화중·최경선 모모인 이었다.
문 - 이외 또 다른 사람은 없었는가?
답 - 이 삼인외 허다인으로 그 수는 헤아릴 수 없다.
문 - 4천명이 규합했을 때는 이 세 사람에게만 그치지 않았을 것이니 그 외 사람을 상세히 말하라.
답 - 이외 쇄설(잔것)의 사람을 어찌 다 말할 수 있는가?
문 - 작년 10월의 기포했을 때 동모자가 없었느냐?
답 - 이외 다만 손여옥·조준구 뿐이다.
문 - 손화중·최경선은 그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나?
답 - 그 두사람은 광주(光州)일이 긴급하였으므로 오지 못하였다.
문 - 손·최 양인은 광주에서 어떠한 일을 하였는가?
답 - 이 두사람은 즉시 공주로 향하였다가 일병이 바다로 온다는 말을 듣고 해안을 막아 광주를 지키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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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심문과 진술] [서기 1895년 2월 11일(음)]
문 - 너의 작년 3월에 행한 기포의 뜻은 백성을 위해 제해할 뜻으로 하였다하는데 과연이냐?
답 - 그렇다.
문 - 그런즉 내직에 있는 자들이나 제외임의 관원도 모두 더불어 탐학인가?
답 - 내직에 있는 자들도 매관육작을 일삼으니 내외를 물론하고 다 탐학이다.
문 - 그런즉 전라일도 탐학의 관리를 제거코저 기포하였느냐? 그렇지 않으면 팔도를 한가지로 이같이 할 의향이었느냐?
답 - 전라일도 탐학을 제거하고 또 내직의 매작권신을 쫓아내면 팔도가 자연히 한몸이 될 것이다.
문 - 전라도 감사 이하 각 읍의 수재가 모두 탐관인가?
답 - 십중팔구이다.
문 - 무슨일을 가리켜 탐학이라 하는가?
답 - 각 읍 수재는 상납을 칭탁하여 혹 가렴 결복하여 횡징호역하며 좀 부요민이 있으면 공연히 죄를 만들어 전재를 늑탈하며 전장을 횡침하는 것이 비일비재이다.
문 - 내직 매관자는 누구인가?
답 - 혜당 민영준·민영환·고영근 등이 이들이다.
문 - 이들 뿐인가?
답 - 이외 역시 허다하나 다 기억할 수는 없다.
문 - 이들이 매관한 것을 어떻게 분명히 알 수 있느냐?
답 - 온 세상이 훤자하여 모르는 사람이 없다.l
문 - 너는 어떤 계책으로 탐관을 제거코저 하였느냐?
답 - 별도로 계책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본심의 간절한 바가 안민에 있으므로 탐학을 본즉 분탄을 이기지 못해 이 일을 하였다.
문 - 그런즉 소를 드려 칭원하지 않았는가?
답 - 영읍에 진정한 것은 몇 차례인지 모른다.
문 - 영, 읍에 진정할 때 네가 친히 이곳에 갔는가?
답 - 매차의 소장(진정서)은 내가 제작하고 드린 것은 원민으로 하여금 하게 하였다.
문 - 그런즉 조정에도 역시 소(진정서)를 제기 하였는가?
답 - 진정할 길이 없어 홍계훈 대장이 전주에 유진하고 있을 때 이 연유를 써서 드렸다.
문 - 그때는 모두 수재가 탐학했는데 어찌 비록 정소해도 청시함이 있으리라 그러하였는가?
답 - 비록 그러하나 호소할 곳이 없어 부득이 그곳에 정소 하였다.
문 - 영,읍에 진정한 것은 어느때인가?
답 - 작년 정 2·3월간이다
문 - 정월 이전에는 정소하지 않았느냐?
답 - 정월 이전의 고부에는 민장뿐이었기 때문에 대단한 정소는 하지 않았었다.
문 - 누차 영에 드리고 읍에 드렸으나 끝내 청시하지 아니하는 고로 기포하였는가?
답 - 그렇다.
문 - 너는 고부군수에게서 피해가 많지 않았는데 어떠한 의견으로 연유하여 이 거사를 행하였는가?
답 - 세상살이가 날로 그릇되어 가는고로 개연히 한번 세상을 건져 보고자 하는 의견이었다.
문 - 너와 동모한 손화중·최경선 등은 모두 동학을 대단히 좋아했었는갸?
답 - 그렇다
문 - 소위 동학이라는 것은 어떤 주의이며 어떤 도학인가?
답 - 마음을 지켜 충효로 본을 삼고 보국안민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문 - 너도 동학을 대단히 좋아하는 자인가?
답 - 동학은 이에 수심경천의 도이기 때문에 매우 좋아한다.
문 - 동학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답 - 동학의 시초는 30년 전에 비롯되었다.
문 - 어떤 사람이 시작 했는가?
답 - 경주에 사는 최제우가 시작했다..
문 - 지금 역시 전라도 내에 동학을 존중하는 자가 많은가?
답 - 난을 겪은 후 죽은 자가 계속 있어 지금은 크게 감해졌다.
문 - 네가 기포할 때 거느린 바는 모두가 동학인가?
답 - 소위 접주는 다 동학이나 그 나머지 솔하는 충의의 사로써 일컬은 자가 많았다.
문 - 접주사란 어떤 명색인가?
답 - 영솔의 호칭이다.
문 - 그런즉 기포시에는 군기 군량을 조판하는 자인가?
답 - 무슨 일에 있어서나 다 지휘한다.
문 - 접주와 접사는 본래부터 있었는가?
답 - 이미 전부터 본래 있었으나 기포시에는 혹 창설한 것도 있다.
문 - 동학중 영솔명색이 접주 접사뿐인가?
답 - 접주·접사 이외 교장·교수·집강·도집·대정·중정 등 6종이 있다.
문 - 소위 접주라 하는 사람은 평상시에는 어떤 일을 하는가?
답 - 별로 행하는 일이 없다.
문 - 소위 법헌이란 어떤 직책인가
답 - 직책이 아니라 장로의 별호이다.
문 - 이상 여섯 직책은 각각 어떤 일을 하는가?
답 - 교장, 교수는 우민을 도모하는 자이고, 도집은 풍력있고 기강에 밝아 경계를 알아야 하고, 집강은 시비에 밝아 기강을 잡고, 대정은 공평을 갖고 삼가 후 원하며, 중정은 직언 강직을 말하는데 능해야한다.
문 - 접주와 접사는 같은 직책인가?
답 - 접사는 접주가 지휘하는 것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다.
문 - 이상 많은 명색은 누가 차출을 하는 것이냐?
답 - 법헌으로부터 교도가 많고 적은 것을 보아 차례로 차출한다.
문 - 동학가운데 남접·북접이라고 말하는데 무엇으로 구별하여 남·북이라 하느냐?
답 - 호(湖) 이남을 남접, 호중(湖中)을 북접이라 일컬은다.
문 - 작년 기포시에는 이상 각종 명색등에 있어서 어떠한 사건들을 지휘하였느냐?
답 - 각기 직장으로써 행하였다.
문 - 각기 직장이 모두 너의 지휘를 듣고 행하였는가?
답 - 내가 모두 지휘했다.
문 - 수심경천의 도를 일컬어 무엇 때문에 동학이라고 하는가?
답 - 우리 도는 동에서 나온고로 동학이라 일컫는다. 자초본의인 즉 시작한 사람은 분명히 얻어서 아나, 나는 다른 사람의 일컬음을 따라 이를 일컬은 것이다.
문 - 동학에 들어가면 능히 괴질을 면한다고 하는데 그러한가?
답 - 동학서 가운데 말하기를 3년 괴질이 앞으로 있으니 경천수심하면 가히 면한다고 한다.
문 - 동학은 팔도에 다 전포하였는가?
답 - 5도에는 모두 교가 행하여져 있느나 서북 3도는 모른다.
문 - 동학을 배운즉 병을 면하는 외 다른 이익은 없는가?
답 - 다른 이익은 없다.
문 - 작년 3월 기포시에는 탐관을 제거한 후 어떤 일을 하려고 하였는가?
답 - 다른 뜻이 없었다.
문 - 작년 절목을 홍대장(홍계훈)에게 드렸다 하는데 과연인가?
답 - 그렇다.
문 - 절목을 드린 후 탐관을 제거한 징험이 있었던가?
답 - 별로 징험이 없었다.
문 - 그런즉 홍대장이 어찌 백성을 속인 것이 아닌가?
답 - 그렇다.
문 - 그런즉 백성은 무엇 때문에 다시 칭원이 없었는가?
답 - 그 후 홍대장은 서울에 있었으니 다시 무엇을 칭원하겠는가.
문 - 재차 기포는 일병이 범궐(왕궁을 침범함)의 연고로 인하여 재거했다고 하였는데 재거 후 어떤 거조를 하고자 하였는가?
답 - 범궐의 연유를 힐문코져 하였다.
문 - 그런즉 일병과 경성에 유주하고 있는 각국인을 더불어 모두 구축하려 하였는가?
답 - 그렇지 않다. 각국인은 다만 통상만 할 뿐인데 일인은 솔병하여 경성에 유진하는 고로 우리 나라 국토를 침략하는 것으로 의아하였다.
문 - 이름을 이건영이라고 일컫는 사람을 아는가?
답 - 잠시 만나기는 하였다.
문 - 만났을 때 어떤 말이 있었는가?
답 - 소모사라고 일컫는고로 내가 말하기를 "소모사라면 마땅히 어느 곳에 소모영을 설치하라"고 하였지만 나와는 더불어 상관이 없다하니 금산으로 갔었다.
문 - 어느 곳에서 만났는가?
답 - 삼례역에서 만났다.
문 - 그때 만나서 이건영의 말이 어데서 왔다고 하던가?
답 - 경성으로부터 왔다고 말했다.
문 - 누가 보냈다고 하던가?
답 - 정부로부터 보내더라고 하였는데 3∼4일후 들으니 즉 가칭 소모사인고로 잡으라는 명이 있었다고 하였다.
문 - 소모사를 증거할 만한 문적이 있던가?
답 - 증거할 만한 문적을 보지는 못했다.
문 - 그때 너의 도당은 몇 명이었나?
답 - 수천여명 이었다.
문 - 그 외 소모사라 일컫고 기포를 권한 사람은 없었는가?
답 - 그런 사람은 없었다.
문 - 송정섭을 아는가?
답 - 다만 충청도 소모사라고만 소문으로 들었다.
문 - 재차 기포할 때는 최법헌에게 의논하였던가?
답 - 의논이 없었다.
문 - 최법헌은 동학의 괴수인데도 동학당을 규합하는데 어찌 의급하지 않았는가?
답 - 충의는 각기 본심인데 하필 법헌에게 의논한 후에 이 일을 해야 하는가?
문 - 작년 8월에 너는 어디에 있었던가?
답 - 태인 집에 있었다.
문 - 그 나머지 도당은 어느 곳에 있었던가?
답 - 각각 본가에 있었다.
문 - 충청도 천안 지방에는 너의 도당이 있었던가?
답 - 그곳에는 도당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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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심문과 진술] [서기 1895년 2월 19일(음)]
문 - 네가 일전에 고한 바 송희옥을 모른다고 하였는데 희옥 두자는 이름인가? 호인가?
답 - 희옥은 이름이고 칠서는 자이다.
문 - 송희옥과 이미 삼례역에서 이와 더불어 동모했은즉 그 이름자를 어찌하여 상세히 모르는가?
답 - 송희옥은 본시 허망한 사람으로 홀연히 가고, 홀연히 오고하여 실제의 거처가 확실하지 않다.
문 - 송희옥은 이에 전라도 일도의 도집강이라 들었고, 또 너와는 친척이 된다는데 지금 고하는 것은 오직 장찬(허물을 감추려고 숨기는 것)이니 바르게 실고하지 않는 것이 의심되며, 항차 네 죄의 경중은 송희옥의 장찬에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희옥의 죄안이 네가 숨겨 보호하는 것이 아니니 오로지 믿어야 하는데 이는 진실로 어떤 마음에서냐?
답 - 아까 고한 바와 같다. 송은 본시 부황의 유로 지난번 일본영사관 물음에 답변할 때 영사가 한 글을 내어 보이는데 희옥의 필적이다. 그 글에 일컫기를, 운현변(대원군측을 칭함)과 상통한 것으로 되어 스스로 생각해 보니 그가 이 말을 위조하여 시국의 힘을 빌리려 한 것으로 이 불근지설을 만드니 실로 남자의 일이 아니며 역시 존엄을 모독하고 공연히 때의 물의를 일으키게 되는 고로 잠깐 이를 꾸며서 말한 것이다.
문 - 남자의 말은 비록 참말을 백번하였어도 만일 한 마디의 말에 속임이 있은 즉 백 마디 말을 다 속인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본즉, 이제는 모른다고 한 것이나 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어찌 다 속인 것이 아니겠는가?
답 - 마음과 정신이 혼미하여 과연 착오한 바가 있다.
문 - 송희옥은 갑오 9월 서(書)에 말하기를 "어제 저녁 또 사람이 비밀리 하래했는데 전말을 상고한즉 과연 개화파에 눌려 먼저 효유로 보호하면 뒤에 비기가 있을것이다"했는데 이는 누가 보내온 글인지 역시 네가 모르는 것인가? 지난 너의 고한바는 "작년 10월에 재기한 것은 일인이 군대를 거느리고 입궐하여 이해의 소재를 알지 못하는고로 우리가 신민이 되어 감히 한시도 안심할 수가 없이 이에 이 거의를 한 것이다"고 말하였은즉 대원군의 뒷 비밀편지가 따른 것을 알 수 있는데 역시 너의 재기와 암합한 것이 아닌가?
답 - 그간에는 비록 혹 이같은 무리들의 내왕이 있었으나 본래 그면을 알지 못한즉 중대 사건을 어찌 의급하겠는가? 그런고로 행적이 특별히 수상한 자는 한 사람도 만나지 않았다.
문 - 남원부사 이용헌·장흥부사 박헌양이 입은 피해는 모두 누구의 소행인가?
답 - 이용헌은 김개남의 소위이고, 박헌양은 어떤 사람에게 피해를 입었는지 모른다.
문 - 은진에 사는 김원석이 입은 피해는 누구의 짓인가?
답 - 공주의 동학 괴수 이유상의 소위이며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문 - 작년 재 기포시 조정으로부터 하송해온 그 효유문을 너는 보지 못했는가?
답 - 대원군의 효유문은 보았으나 조정에서 내려온 효유문은 보지를 못했었다.
문 - 비록 조정의 효유문은 보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대개 대원군의 효유문을 보았은즉 시사를 알 것인데 사기의 여하를 생각지도 않고 임의로 백성을 움직여 무단 야요하여 백성들을 물불에 빠뜨리고 이는 어찌 신민이 가히 할 일인가?
답 - 상세한 내막을 몰라 임의로 백성을 움직였으니 과연 이는 주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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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삼초문목 일영사문(제3차 심문과 진술)
(이하의 심문은 일본 영사가 물은 것이다.) (1895년 2월 19 음)
문 - 송희옥의 글 가운데 소위 대원군의 비기의 허실을 어떻게 정확하게 아는가?
답 - 송은 본래 부랑자인 고로 이로 미루어 보아 말한 것이고, 또 대원군 쪽에서 혹 이러한 일이 있다면은 마땅히 나에게 먼저 통지할 것이지 송에게 먼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 - 송은 너의 수하이냐? 수상이냐?
답 - 별로 상하로 일컬을 만한 것이 없고 서로가 똑같은 처지에 있는 것이다.
문 - 송과는 재기시에 같이 더불어 의논하지 않았는가?
답 - 내가 기포할 때에 간혹 참석하였으나 처음 좌가 옳다, 우가 옳다는 말을 하였다.
문 - 송의 이 일이 만약 좌가 옳다 우가 옳다 한 말이 없은즉 대원군측 비기를가칭, 타인에게 기서한 것은 무엇때문인가?
답 - 송의 기서는 혹인이 처음 일포로 시작되었고 비록 거슬러 올라가 생각하기는 어려우나 나의 일에 있어서는 방관이었다.
문 - 송은 너와 더불어 이미 같은 포가 아닌즉 피차 행한바 일에는 반드시 서로 알지 못하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답 - 그렇다.
문 - 그런즉 송이 가칭한 비기를 너는 어찌 능히 밝게 아는가?
답 - 송은 처음 서울에 머문 일이 없고 또 저명한 인사가 아닌고로 스스로 생각해서 말한 것이다.
문 - 전후의 진술한 것을 합하여 본즉 송과 너와는 본래부터 서로 친한데 줄곧 모른다고 하니 역시 의심이간다.
답 - 지난번 귀관(일본영사)에게 답변할 때, 내어보인 글은 부랑에 관계되는 것 같아 역시 모르는 바이다. 그런고로 만약 친지자로써 대한다면 반드시 그의 내력을 물을것이니 변혹하기 어려운 고로 잠시 여기에 만고(속여서 고함)했다.
문 - 그런즉 너에게 이로운 것을 물으면 대답하고 너에게 해로운 것을 물으면 모른다고 대답하니 되겠는가?
답 - 이해로 마음먹은 것은 아니나 특별한 사연으로 변혹하기 어려운 것은 그렇다.
문 - 전라도내 사람이 반복무상하다고 일찍이 들은바나 지금 네가 고하는 것은 역시 그대로 상투적이다. 그러나 질문이 오래되면 정상은 스스로 나타날 것이며, 비록 일언반사라도 속여 고한 것은 반드시 얻지는 못할 것이다.
답 - 송희옥의 건은 비록 속여서 고하였다고 하드라도 그 나머지는 처음부터 한 마디 말도 꾸미고 속인 것이 없었다.
문 - 지금의 이 재판은 양국에 관계되는 심판으로써 반드시 조금이라도 편벽된 청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구태여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속여 만들어 한때를 넘기고자 한즉 출간지설을 징탐하리니 모두가 믿을 것이 없다.
답 - 사로 잡힌 것이 수삭, 또 병에 묶인 몸이라 한마디 말의 실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문 - 송과 너와는 척분이 안되는가?
답 - 처족 7촌이다.
문 - 기포시 비로소 어디서 보았나?
답 - 비록 삼례에서 보았으나 실지 같은 포의 일은 없었다.
문 - 비로소 보았을 때 어떠한 의논을 한 일이 있는가?
답 - 비로소 보았을 때 행해야 할 일을 말하고, 나도 역시 추후에 기포해 올라 오겠다고 말하였다.
문 - 그때는 어느 때인가?
답 - 작년 10월 재기 때이나 일자는 자세히 모르겠다.
문 - 너의 재기는 무슨 일을 할려고 하였느냐?
답 - 앞서 고한대로 이미 다 이야기하였다.
문 - 네가 송과 더불어 삼례에서 상견했을 때 혹 대원군의 말을 칭탁한 것은 없느냐?
답 - 송이 대원군으로부터 내려왔다고 일컬으면서 2월에 속히 올라오면 좋을 것 같다 한다고 말하기에 내가 묻기를 글이 있느냐고 하였더니 대답이 없었다. 나에게 문자를 보이지 않으므로 책망했더니 횡설수설하여 실로 황당하는 눈치였다. 또 반드시 대원군이 가르쳤다고 말할 필요는 없는 것으로 일을 마땅히 행할 것은 내가 스스로 여기에 당하겠다고 말하였다.
문 - 삼례에서 기포할 때는 군중은 얼마나 되었는가?
답 - 4천여 명이었다.
문 - 그 후 접전은 어느 날에 있었는가?
답 - 삼레에서 일어나 20여일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접전하기 시작하였다.
문 - 송이 말한 운현궁(대원군을 칭함)으로부터 내려온 두 사람의 이름은 누구인가?
답 - 그때는 들어서 알았으나 지금은 기억하기 어렵다.
문 - 두 사람의 이름은 모두 들을 수는 없으나 성과 이름은 끝끝내 기억할 수 없느냐?
답 - 그 성은 박·정 같은데 상세하지 않다.
문 - 박·정은 곧 이가 박동진 정인덕이 아닌가?
답 - 박동진은 이가 분명하나 정은 상세하지 않다.
문 - 박·정은 송을 보고 어떠한 말을 하였나?
답 - 송이 일컫기를 "운현궁(대원군)이 역시 네가 올라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였다.
문 - 송희옥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답 - 금번 올라올 때 듣기로는 고산 민병에게 죽었다고 하였는데 상세하지 않다.
문 - 운현궁 효유문은 어떻게 얻어 보았나?
답 - 9월 태인의 본집에 있을 때 접솔한 사람이 등초하여 와서 보았다.
문 - 그때는 바로 기포를 펼 때인가?
답 - 그때는 집에서 병을 치료할 때로 기포의 생각은 없었다.
문 - 그 도내 동학도의 작요가 없었느냐?
답 - 그때는 김개남 등이 열읍에서 작요하였다.
문 - 열읍은 곧 어느 읍인가?
답 - 순창·용담·금산·장수·남원 등이고 그 나머지는 상세하지 않다.
문 - 대원군 효유문을 다만 한번만 보았었나?
답 - 그렇다.
문 - 효유문에는 어떤 말이 들어 있던가?
답 - "너희들의 오늘날의 이 기요는 실로 수재의 탐학과 중민의 원굴로 말미암은 것이니 지금으로부터 이후 관의 탐학은 반드시 징치하고 백성의 원굴한 것은 반드시 펼 터이니 각기 돌아가 안업하면 가하나 만일 부준하면 곧 마땅히 왕장으로써 다스리겠다"고 하였다.
문 - 효유문에는 인적이 있던가?
답 - 내가 본 것은 동초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없었으나 관에 도착한 원본에는 이것이 있다고 하는데 방곡에 게시하여 붙였다.
문 - 방곡에 게시하여 붙인 것은 누가 하였는가?
답 - 관에서 하였다고 한다.
문 - 효유문은 누가 가지고 갔는가?
답 - 주사의 직함을 띄고서 가지고 갔다고 하였다.
문 - 그때 효유문을 네가 보니 진짜던가? 가짜던가?
답 - 이것은 관에서 게시하여 붙였는데 어찌 가짜로 보겠는가?
문 - 너는 이미 이를 진짜로 알았으면 어찌하여 재기하였는가?
답 - 귀국(일본 영사관)의 속을 상세히 알고자 그렇게 하였다.
문 - 가히 상세히 속을 안 다음 장차 어떤 일을 계획하려 했나?
답 - 보국안민의 계책을 하고자 하였다.
문 - 너의 재기에는 이미 대원군의 효유문을 불신하지 않았는가?
답 - 이에 앞서 조정의 효유문은 1,2차에 그치지 않았으나 끝내 실시한 것이 없으니 하정을 상달하기가 어렵고, 상택(임금의 은덕)은 하구하기가 어려운고로 꼭 일차 서울에 이르러 민의를 상진하려 했다.
문 - 이미 효유문을 보고도 구태여 일을 재기한 것은 이를 소실한 것이 아닌가?
답 - 눈으로 친히 보고, 귀로 친히 듣지않고서는 깊이 믿기 어려운고로 이에 일을 재기하였는데 어찌 소실이 있겠는가?
문 - 아까 고한 바 소실한 것이란 어떤 일인가?
답 - 아까 소실이라 일컬은 것은 시사의 이면에 상세하지 못한 것을 가리킨 것이지 효유문의 보고 안 본 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문 - 너의 재기에는 대원군 효유문으로써 개화파가 압박한 것으로보고 겸하여 운현궁(대원군)으로부터 너희들의 상래(上來)를 기다린다고 하였으므로 이에 이를 행한 것인가?
답 - 효유문의 개화파로부터 압박됐던 안됐던 관계가 없는 것이고 재기한 일에 이르러서는 본심에서 우러러 나왔고, 또 비록 대원군의 효유문이 있었서 깊이 믿을수가 없는고로 재기를 힘써 도모하였다.
문 - 일병의 범궐은 어느때 들었는가?
답 - 7∼8월간에 들었다.
문 - 어느 사람한테 들었는가?
답 - 소문이 널리 퍼져 있으므로 자연히 이를 알 수가 있었다.
문 - 이미 이르기는 창의라 하였은즉 듣고서도 즉시 행하지 않고 무엇 때문에 10월까지 기다렸는가?
답 - 때마침 몸이 아프고 또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움직이기가 어려웠고 겸하여 신곡이 나오지 않아 자연 10월에 이르렀다.
문 - 대원군이 동학의 일과 관계가 있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이며 또 대원군은 지금 권한이 없은 즉 네 죄의 경중은 오직 이 장소에 있고, 대원군에 있는 것이 아닌데 너는 끝끝내 솔직히 말하지 않고 대원군의 암호를 깊이 믿고 있는 것 같은데 이는 과연 어떠한 뜻에서인가?
답 - 대원군은 다른 동학 몇 백과 관계가 있을지언정, 나에 관하여서는 처음부터 관계된 바가 없다.
문 - 대원군은 동학과 더불어 서로 관게가 있는 것은 세상이 다아는 바인데 네가 홀로 듣지 못하였던가?
답 - 실로 듣지 못한 바이다.
문 - 대원군이 동학과 더불어 상관한 것을 처음부터 한 가지도 들은 바가 없었단 말인가?
답 - 그렇다. 나의 것도 숨기지 않는데 항차 다른 사람의 것이랴!
문 - 송희옥이 대원군과 더불어 서로 관계된 바가 있는 것을 너도 역시 알고 있었겠지?
답 - 송희옥은 반드시 서로 관계된 것이 없을 것이다.
문 - 네가 어찌해서 그 서로 관계된 것이 없는 것을 아는가?
답 - 송희옥과 대원군과의 증표가 있다면은 모르겠으나 스스로 자세한 것인즉 반드시 서로 관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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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사초문목 일영사문(제4차 심문과 진술)
(이하의 심문은 일본 영사가 물은 것이다.) (1895년 3월 7 음)
문 - 너의 이름이나 호는 하나 둘이 아닐텐데 몇 개인가?
답 - 전봉준 하나 뿐이다.
문 - 전명숙은 누구의 이름인가?
답 - 나의 자이다.
문 - 전녹두는 누구인가?
답 - 세상 사람들이 가르키는 이름이지 내가 지은 이름이 아니다.
문 - 너는 별호가 있는가?
답 - 없다.
문 - 이 외 별호 및 소자의 칭호가 없는가?
답 - 없다.
문 - 네가 매양 사람에게 글을 써 붙일 때는 이름으로서 쓰는가? 자로써 쓰는가?
답 - 이름으로 쓴다.
문 - 네가 작년 10월 재기의 일자는 어느 날인가?
답 - 10월 12일간 같은데 잘 모르겠다.
문 - 삼례재기 전에는 어디에 있었느냐?
답 - 내 집에 있었다.
문 - 너는 전주에서 초토병과 접전하고 해산한 후 어데로 향하였는가?
답 - 10여 읍을 들러 귀화하라 권하고 곧 나의 집으로 돌아왔다.
문 - 전주로부터 해산한 것은 어느 날인가?
답 - 5월 초7∼8일간이다.
문 - 전주에서 해산한 후 처음 이른 읍은 곧 어느 읍인가?
답 - 처음 금구로부터 김제·태인 등지에 이르렀다.
문 - 처음 금구에 이르런 것은 어느 날인가?
답 - 금구에는 곧 잠간 지나는 길에 거쳤고 5월 초7·8일간 김제에 이르고 초10일간에 태인에 이르렀다.
문 - 태인에 이르른 후 거친 고을은 어느 고을인가?
답 - 장성·담양·순창·옥과·남양·창평·순천·운봉을 거쳐 그후 내 집으로 돌아왔다.
문 - 집으로 돌아온 것은 몇월 몇일인가?
답 - 7월 그믐 · 8월 초간이다.
문 - 열읍을 돌아다닐 때 네 혼자이던가? 동행자가 있었던가
답 - 기솔 아울러 20여명이 있었다.
문 - 그때 최경선도 동행하였던가?
답 - 그렇다.
문 - 손화중도 역시 동행하였던가?
답 - 손은 동행하지 않았다.
문 - 전주 해산후 손화중은 어느 곳으로 향하였던가?
답 - 그때 손은 우도(雨道) 열읍을 돌아다니면서 귀화를 권하였다.
문 - 손이 전주에서 해산한 것은 너와 더불어 같은 날인가?
답 - 그렇다.
문 - 전주로부터 해산하고 너는 손을 보지 못하였는가?
답 - 4∼5개월 동안 서로 만나지 못하였다.
문 - 4∼5개월후 어데서 만났는가?
답 - 8월 그믐경 순상의 명령을 띠고 먼저 나주로 가 민보의 해산을 권하고 돌아오는 길에 장성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만났다.
문 - 손과는 만난 후에 의논한 적이 있는가?
답 - 그때 나는 이르기를 "순상으로부터 별도로 부탁받은 바가 있으니 같이 영문에 갔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의논을 하였다.
문 - 그런즉 손은 어떠한 말로 대답하던가?
답 - 지금 병중에 있으므로 같이 갈 수가 없으니 병이 완쾌 되는 것을 기다려 뒤따라 가겠다고 말했다.
문 - 이 외 다른 것을 의논한 바는 없었는가?
답 - 그렇다.
문 - 일병의 범궐은 언제 어느 곳에서 들었는가?
답 - 7월경 남원땅에서 들었다.
문 - 그런즉 열읍을 돌아다니고 귀화할 때 이 소리를 들었는가?
답 - 이는 도청도설에 의한 것이다.
문 - 이 소리를 들은 후 군중을 일으켜 일본을 치는 일을 비로소 의논한 것은 어느 곳이던가?
답 - 삼례역이다.
문 - 특히 삼례역에서 이 일을 의논한 것은?
답 - 전주부 외에 주막이 얼마간 많은 것이 삼레 같은 곳이 없기 때문이다.
문 - 삼례에 이르기 전에는 혹 도회지가 없는가?
답 - 원평에 이르러 하루밤 묵고 곧 삼례에 이르렀다.
문 - 집으로부터 처음 출발한 날은 언제인가?
답 - 10월 초순경이다.
문 - 네가 삼례로 행할 때 동행자는 누가 있었던가?
답 - 없었다.
문 - 길을 가던 중 만난 사람도 없었던가?
답 - 없었다.
문 - 그대 최경선은 동행하지 않았던가?
답 - 최는 추후에 왔었다.
문 - 삼례에 이르러 누구 집에 모였던가?
답 - 주막에서 모였다.
문 - 삼례 땅에는 본래 친구의 집이 있었는가?
답 - 처음에는 친한 친구가 없었다.
문 - 삼례의 호수(戶數)는 얼마나 되었던가?
답 - 1백여 호이다.
문 - 네가 사는 근처에도 반드시 1백여호의 촌장이 없지 않을 터인데 특히 이곳에 모인 것은 무엇때문인가?
답 - 이곳은 도로가 사방으로 통했고 겸하여 역촌이기 때문이다.
문 - 최가 삼례에 이른 후 며칠이나 같이 유숙했는가?
답 - 5∼6일 머문 후 광주·나주 등지로 향하였다.
문 - 무엇 때문에 광주·나주 등지로 향하였는가?
답 - 기포의 일 때문이었다.
문 - 최의 광주·나주에 간 것은 네가 시킨 것인가?
답 - 내가 시킨 것은 아니나 그가 광주·나주지방에는 많은 친지가 있어 기포하는데 용이했기 때문이다.
문 - 삼례도회때 동학도의 가장 저명한 자는 누구이었던가?
답 - 금구의 조진구·전주의 송일두·최대봉 몇 사람이가장 저명한 자였으나 그 나머지 허다한 사람은 지금 다 기억하기가 어렵다.
문 - 그때 삼례에서 소위 의병으로 모인 자는 얼마나 되었던가?
답 - 4천여 명이다.
문 - 이들 군중을 거느리고 처음 어느곳으로 향하였던가?
답 - 처음 은진·논산으로 향하였다.
문 - 논산에 도착한 날은 언제였던가?
답 - 지금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문 - 어째서 간단하게 기록한 것도 없다는 말인가?
답 - 10월 그믐 쯤 될 것이다.
문 - 논산에 이르러 어떠한 일을 했는가?
답 - 논산에 이른 후 역시 널리 군을 모집하는 일을 했다.
문 - 이곳으로부터 다시 어데로 향하였는가?
답 - 공주로 직행했었다.
문 - 공주에 다다른 것은 언제인가?
답 - 그달 초 6∼7일쯤 같은데 자세히는 모르겠다.
문 - 공주에 이른 후에는 무슨 일을 하엿는가?
답 - 공주에 이르지 못하고 접전하여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문 - 네가 사람들에게 글을 부칠 때는 언제나 친서로써 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대서인가?
답 - 때로는 친서로도 하고 때로는 대서로도 한다.
문 - 혹 대서시에는 꼭 너의 도장을 찍는가?
답 - 피봉에는 도장을 찍을 때가 많으나 대개는 그렇지 않을 때도 많이 있다.
문 - 네가 삼례에 있을 때 사람들에게 부친 글이 많이 있는데 이것은 친서인가? 아니면 대서인가? 그리고 대서로 할 때는 너의 도장을 찍었는가?
답 - 모두 통지문으로 부치고 사간은 하지 않았으나 오직 손화중한테 부친 글은 있다.
문 - 처음 한자도 사간으로서 사람에게 부친 글이 없었는가?
답 - 만약 그 서간을 보면 알 수 있으나 지금은 자세히 모르겠다.
문 - (영사가 서간을 내어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네 친서인가 대서인가?
답 - 대서이다.
문 - 누구를 시켜서 대서했던가?
답 - 접주의 필적인 것 같은데 지금은 그 사람을 자세히 모르겠다.
문 - 너는 일찍이 최경선으로 하여금 대서케 한 일이 있는가?
답 - 최는 글에 능숙한 자가 아니다.
문 - 이 편지는 삼례로부터 낸 것인가?
답 - 그렇다.
문 - 이 편지의 년, 월, 일은 분명히 9월 18일인데 어찌 10월에 삼례로 나와서 모였다고 하는가?
답 - 전에 10월이라고 말한 것은 9월인 것 같다.
문 - (영사가 또 하나의 편지를 내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네 친서인가 대서인가?
답 - 이것도 역시 대서이다.
문 - 그 편지는 누가 대리로 쓴 것인가?
답 - 이것 역시 접주를 시켜 썼으나 지금은 그 사람을 기억하기 어렵다.
문 - 오늘의 진술을 너는 솔직히 고하라. 그런 연후에야 안이 속결될 것이다. 여러 가지로 속여 고하면 일이 괴롭고 싫증만 날뿐 역시 너의 자신에게도 많은 해가 있을 것이다.
답 - 월·일은 과연 자세히 기억하기 어려우나 그 나머지는 무릇 관계한 것을 어찌 조금이라도 속여 고했다 하겠는가?
문 - 대서를 할 때에는 어찌 반드시 소정의 사람이 있을 터인데 어찌 몰라서 되겠는가.
답 - 그때 나는 본래 졸필이라 매양 사람으로 하여금 대서케 했으나 본래 정해진 사람이 없다.
문 - 이 두 편지는 모두 다 네가 시킨 것인가?
답 - 그렇다.
문 - 삼례의 규합은 모두 너로부터 나왔는가?
답 - 그렇다.
문 - 그러면 모든 기포에 관한 것은 모두 네가 주모했는가?
답 - 그렇다.
문 - (영사가 또 하나의 편지를 내어 보이면서) 이것도 역시 네가 시킨 것인가?
답 - 그렇다.
문 - 전날 진술한 바 너는 김개남과 상관없다 했는데 지금 이 편지를 본즉 두 사람 사이에 상관이 많은 것 같은데 어떠한가?
답 - 김은 내가 왕사(王事)에 합력하자고 권하였으나 끝끝내 들어 주지 않는 고로 비로소 상의한 바 있으나 마침내는 끊고 상관하지 않았다.
문 - (영사가 조그마한 종이를 내어 보이면서) 이 두 종이의 필법은 이가 한 사람의 붓인데 앞의 글은 네가 했다고 진술하고 지금 것은 어떻게 모른다고 하는가?
답 - 지금 이 글은 내가 한 것이 아니다.
문 - 아까 말하기를 삼례의 일은 모두 너로부터 나왔다 하였는데 지금은 녹편을 보이자 그러지 않다니 실로 모호하구나.
답 - 녹편중 서학이라고 한 것은 서병학을 말하는 것인데 서병학은 이미 나와 더불어 끊어져 왕래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내가 시킨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문 - 동학도 가운데 접주를 차출하는 것은 누구가 하는가?
답 - 모두 최법헌이 한다.
문 - 네가 접주가 된 것도 역시 최가 차출하였는가?
답 - 그렇다.
문 - 동학접주는 모두 최가 낸 것인가?
답 - 그렇다.
문 - 호남과 호서가 전부 같은가?
답 - 그렇다.
문 - 도집, 집강의 임명 같은 것도 전부 최가 차출하는가?
답 - 비록 최로부터 많이 나오나 때로는 접주 등이 차출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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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오차문목 일영사문 (제5차 심문과 진술)
(1895년 3월 10일 음)
문 - 오늘도 전과 같이 사실을 조사할테니 숨기지 말고 바르게 들어라.
답 - 잘 알겠다.
문 - 작년 9월 삼례에 있을 때 별도로 대서인이 없고 접주 중에서 바꾸어 가면서 썼다고 하는데 과연인가?
답 - 별도로 대서인은 없으나 접중에서 바꾸어 가면서 이를 썼다. 처음 임오남으로 하여금 이를 쓰게 하였으나 그가 무식하므로 이를 두고 또 김동섭으로 하여금 잠시 쓰게 하였다.
문 - 대서인은 오직 김동섭·임오남 두 사람뿐인가? 아닌가?
답 - 접주 가운데 문계팔·최대봉·조진구가 혹 대서하였으나 몇 차례의 편지를 쓴데 불과하다.
문 - 너는 최경선과 서로 친한 것이 몇 년이나 되는가?
답 - 동향이므로 서로 친한 것이 5∼6년이 된다.
문 - 일찍이 최가 너에게 상사의 분이 있는가? 없는가?
답 - 다만 친구로서 상종할 뿐이지 가르침을 받는 일은 없었다.
문 - 너의 진술이 부실한 곳이 있는 것 같은데 공연히 재판을 끌고 또 네게 해가 없을 텐데도 무엇 때문에 이같이 하는가?
답 - 별로 정상을 속인 것은 없으나 일전 송희옥의 일로 잠시 숨겼으나 다시 명백히 말하였다.
문 - (하나의 종이를 내어 보이면서) 이는 너의 친필이 아닌가? 정상을 속인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답 - 이미 나의 것은 진술하였다. 글은 나의 글이나 필적으로 말하면 나의 필적이 아니다. 어찌 나에게 유익한 것이 있어서 속이겠는가? 과연 내가 쓴 것이 아니다.
문 - 최경선의 진술로는 이것은 너의 필적이라고 하는데 너는 아니라고 말하니 어찌 정상을 속인 것이 아닌가?
답 - 다시 최에게 물어보면 좋겠다. 또 습자를 시켜보면 필체의 획은 가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문 - 일전 너를 심문할 때 너는 삼례에 있을 때 서기라는 명색이 없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서기라는 명색이 있는 것으로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답 - 앞서는 대략 말하였던 것이고 지금은 상세히 이를 묻는고로 그때 잠시 대서한 것을 서기라고 말하였다.
이상이 법무아문 재판관(法無我門 裁判官)과 일본영사(日本領事)가 심문한(주로 일본영사) 진술의 내용이다. 모두 275개 문항이다.
제3차 심문(1895년 2월 19일)부터는 어디까지나 전봉준(全琫準)과 대원군(大院君)과의 관계를 캐내려고 파고 들었으며 또 전봉준의 가까운 심복을 알려고 애썼다. 그러나 전봉준은 대원군과의 관계를 전적으로 부인한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건들을 직면할 때마다 책임을 자기 동료들에게 돌리지 않고 전봉준 자신이 전적으로 책임을 질려고 애쓴 흔적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상 5차 공초기록(供招記錄)에서 갑오동학혁명(甲午東學革命)의 성격을 비롯하여 전봉준과 동학교(東學敎)와의 관계도 짐작할 수 있다.
첫댓글 원사료를 올린것은 이후의 역사가들에 의해 해석된 것을 읽기에 앞서서 각자 나름대로 생각해보고자 하는 의미에서 올렸습니다. 이것 말고도 동시대인으로서 황현이 쓴 '오하기문'도 있는데 시간이 되면 찾아 보겠습니다.
님의수고와노력으로 편하게 접근해봅니다.....자료감사합니다
읽어 보았습니다. 이런 글을 남겨 둔 사실로 보아 전봉준의 위치를 가늠케 합니다. 그런데 중간에 내직 매관자가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민영환이라고 한 대답이 있는데 을사늑약 때 자결한 충정공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민영환이 개화를 지지했기 때문에 이런 대답을 했을까요? 궁금해요.
그러게요. 저도 그부분 읽고 좀 놀랐습니다. 우국지사 민영환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민영환은 명성황후의 조카로서 그 당신 가장 큰 세도를 누리던 집안이었던 걸로 보아 전봉준의 말이 근거가 없는 얘기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http://eroom.korea.com/post/board.aspx?bid=jinok&mode=read&view=board&pid=153281&cate=74058&page=3 이글을 한 번 읽어 보시면 참고가 될 듯 합니다.
그리고 용어 정리가 어렵네요. 신문과 진술 혹은 심문과 진술, 그리고 삼초문목 사초문목 하다가 오차문목으로 바뀌어서 어느 것이 당시 용어인지 불분명하군요.
원래는 8,000자정도의 한문으로 되어 있는 것을 번역 한것입니다. 번역과정에 신문과 심문의 용어가 혼용되었나 봅니다. 初招問目, 再招問目, 三招問目, 四招問目, 五招問目 이렇게 5차에 걸친 재판의 기록입니다. 한자로 안 써놔서 헷갈렸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