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보유의, 장연우 皇甫兪義, 張延祐
#高麗史94卷-列傳7-皇甫兪義-001
○皇甫兪義史失其世系穆宗朝歷官至宣徽判官.
황보유의의 가계(世系)는 사료(史料)가 유실되어 알 수 없으며 목종 때에 벼슬이 여러 번 승차되어 선휘 판관(宣徽判官)으로 되었다.
王寢疾金致陽謀變王知之命選文武各一人率軍校往迎顯宗於是蔡忠順崔沆等議曰:
당시 목종이 병석에 눕게 되자 김치양(金致陽)이 반란을 꾸미고 있는 것을 왕이 알고 문관, 무관 각 한 명씩 선발하여 그들에게 군교(軍校)를 인솔시켜 현종을 맞이하러 갈 것을 명령하였다. 이때 채충순(蔡忠順), 최항(崔沆) 등이 의논하기를
"皇甫兪義志存宗社且其父祖有勳勞於國當不墜家業以盡心力 遣此人幷擧武班郞將文演." 以聞乃命忠順草與顯宗書授兪義文演及別將李成彦高積等十人往迎于三角山神穴寺又命開城府 軍金延慶領卒一百郊迎.
“황보유의는 애국자이고 또 그의 조상들도 국가에 공로가 있었은즉 그의 자손으로서 응당 가문의 명예를 회손치 않기 위하여 전심전력을 다 바치어 사수할 것이니 이 사람을 어찌 보내지 않겠는가? 그리고 무관으로는 낭장(郞將) 문연(文演)이 적당하다고 인정된다”고 아울러 추천하니 왕이 채충순에게 명령하여 현종에게 보낼 교서의 초안을 작성시켜서 황보유의와 문연에게 주고 그와 함께 별장(別場) 이성언(李成彦), 고적(高積) 등 열 명을 삼각산 신혈사(三角山神穴寺)로 보내 현종을 맞이 해 오게 하고 한편 개성부 참군(開城府參軍) 김연경(金延慶)에게 병사 1백 명을 영솔하고 교외까지 마중하게 하였다.
兪義等至寺僧疑爲姦黨所遣匿不出
황보유의 등이 신혈사에 이르니 그 절의 중들이 간당들이 보낸 자나 아닌가 의심하여 현종을 숨기고 내놓지 않았다
兪義等具道所以迎立之意遂奉以還. 顯宗卽位授殿中侍御史進吏部侍郞改內史舍人尋爲中樞院日直員.
황보유의 등이 그 분을 왕으로 맞이하러 온 사유을 자세히 설명하고 마침내 그를 모시고 돌아 왔다. 현종이 왕위에 오른 후 그를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임명하였다가 이부시랑(吏部侍郞)으로, 다시 내사사인(內史舍人)으로 임용하고 또 미구에 중추원 일직원(中樞院日直員)으로 임명하였다.
自庚戌用兵以來增置軍額由是百官祿俸不足
경술년(庚戌) 전쟁 이후 군사비 지출이 증대되어 일반 관리들의 봉급 지출이 부족되었다.
兪義與中樞院使張延祐建議奪京軍永業田以充祿俸武官頗懷不平上將軍崔質又以邊功累拜武職而不得爲文官居常怏怏遂與上將軍金訓朴成李 李翔李暹石邦賢崔可貞恭文林猛等以奪田激衆怒誘諸衛軍士鼓 入禁中縛兪義及延祐 撻垂死詣閤中面訴云:
그래서 황보유의가 중추원사(中樞院使) 장연우(長延祐)와 함께 건의하여 서울 군사들에게 주었던 영업전(永業田)을 회수하여 그 수입을 관리 봉급 지출에 충당하였으므로 이런 처사에 대하여 무관들이 자못 불만을 품게 되었고 또 상장군(上將軍) 최질(崔質)이 변방에서 군공을 세웠으므로 여러 번 무관직은 겪었으나 문관으로 되지 못하여 언제나 불만을 품고 있던 차이라 드디어 상장군 김훈(金訓), 박성(朴成), 이협(李協), 이상(李翔), 이섬(李暹), 석방현(石邦賢), 최가정(崔可貞), 공문(恭文), 임맹(林猛) 등과 공모하고 영업전을 빼앗긴 것을 구실로 삼고 여러 사람의 분노를 격발시킴으로써 호위군을 반란에로 유도하니 군대들이 아우성을 치면서 대궐로 달려 들어 황보유의와 장연우를 결박한 후 죽게 매질하고 왕의 거처로 나가서 왕을 면대하고 신소하기를
"兪義等占奪我輩田實謀自利殊非公家之利若截趾適 柰四體何? 諸軍洶洶不勝憤怨請除國 用快群情."
“황보유의 등이 우리의 영업전을 강탈한 것은 공가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실은 자기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마치 발가락을 잘라서 신에 마추는 격이니 그러면 그 몸체는 어찌 되겠습니까? 지금 군대들이 분하고 억울함을 참지 못하여 기세가 험악하니 이렇게 나라를 해롭게 하는 무리를 제거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을 풀어 주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니
王重違衆志除兪義延祐名流配. 後起授給事中累轉御史大夫與 知政事王可道築開京羅城拜中樞使歷 知政事吏部尙書陞內史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判戶部事靖宗二年改門下侍郞八年卒.
왕이 대중의 의사를 무시하기가 어려워서 황보유의와 정연우를 제명(除名)시키고 귀양 보냈다. 그 후에 황보유의를 다시 급사중(給事中)으로 임용하였사대부(御事大夫)로 임명하여 참지정사(參知政事) 왕가도(王可道)와 함께 개성의 외성(羅城)을 축조하게 하였다. 그는 중추사(中樞使)를 거쳐 참지정사 이부 상서(參知政事吏部尙書)를 역임하고 내사시랑 동 내사문하 평장사 판 호부사(內史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判戶部事)로 승진되었다가 정종(靖宗) 2년에 문하시랑(門下侍郞)으로 임명되었고 정종 8년(1042)에 죽었다.
#高麗史94卷-列傳7-皇甫兪義-002
延祐瀛州尙質縣人新羅末父儒避亂吳越後還國光宗以解華語累授客省每中國使至必使儒 接之. 延祐長於吏事以幹能稱後以戶部尙書卒贈尙書右僕射.
장연우는 영주 상질현(瀛州尙質縣) 사람인바 신라 말년에 그의 아버지 유(儒)가 오월(吳越) 지방으로 피난 갔다가 후에 귀국하니 광종(光宗)은 그가 중국말을 통한다 하여 여러 차례 객성(客省) 직에 임명하고 중국 사신이 오면 반드시 그를 시켜 접대하게 하였다. 정연우는 행정 사무를 잘 하므로 재간과 수완이 있다는 평을 받은 사람으로 후에 호부상서까지 벼슬 살다가 죽었는데 죽은 후에 상서 우복야(尙書右僕射)를 추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