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起心)
선종의 여섯 번째 조사 육조 혜능께서 아직 출가하기 전 떠꺼머리 총각으로 나무 장사를 하고 있을 때 어느 여관에 나무를 팔러 갔다가 한 스님 손님이 방에서 읽고 있는 한 구절 금강경 게송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起心)을 듣고 바로 발심하여 출가하게 되었다고 한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은 한문 금강경의 '제10 장엄정토분' 중간쯤에 있는 넉 자로 된 두 구절의 게송이다. 우리말로 직역하자면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어야 한다.」이다. 이 게송을 듣고 혜능스님께서 단번에 발심하셨다는 것이다.
한문은 중국 글이고 중국 말이다. 한문은 우리가 듣기에 어렵고 이해가 힘든 말이고 난해하기 짝이 없는 글이지만 중국인들에게는 평상적으로 늘 듣고 쓰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같이 어려움을 느끼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 유식하지 않았던 시골의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장작 팔이 총각이 더군다나 논리적이기로 유명한 금강경의 요약된 게송을 듣고 단번에 이해하고 공감해서 출가를 결심했다는 설화는 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육조는 역사 속 여느 위인 못지않은 선종을 세계화하는 초석을 다진 걸출한 실존 인물이다. 상당한 행적의 가감이 있었으리라 짐작되긴 한다.
모든 위인전이 각본 각색을 거쳐 이루어졌을 것을 감안하면 그러려니 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불교의 어렵기로 유명한 논리의 집성체인 반야부의 금강경이 아니던가?. 그런 금강경에 있는 간추린 사구게인「응무소주 이생기심」을 듣고 단박에 심취하여 출가를 결행했다는 줄거리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여기서 잠시 그 구절 「응무소주 이생기심」에 대해 우리 말로 좀 더 생각해보기로 하자. 우리말로 뜻을 풀어보면 『어떤 고정관념에도 매이지 말고 생각을 내어야 한다.』이다.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새롭고 자유로운 깨달음의 정신세계로 나를 나아가게 하여 어떤 매임의 고통에도 끌려다니지 않게 하려는 니르바나 해탈을 향한 새 출발의 소리가 바로 「응무소주 이생기심인⌟ 것이다.
이미 양보할 수 없는 각종의 고정관념이 나를 꽉 거머쥐고 있어 그 고정관념을 벗어난 자유롭고 매임 없는 새로운 생각을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오랜 고민이나 명상이나 노력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불가능 한 일이다.
불가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인연이 이루어질 때 이를 '전생의 인연'이라 여긴다. 혜능스님도 당연히 전생부터의 많은 인연이 맺어져 있어 그런 불가사의한 일이 이루어 졌을 것이라 여기긴 한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의 「어떤 고정관념에도 매이지 않고 생각을 내어야 한다.」는 그 철학적 단어를 나는 얼마나 공감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숙고해 본다. 혜능 스님처럼 단박에 동의하고 이해하여 생을 송두리째 바칠 수 있을 정도의 공감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말이다.
인간은 누구나 기본적으로 삶의 바탕에 깔고 사는 저마다의 고정관념이 있다. 지방색이 그렇고. 신구의 견해 갈등이 그렇고, 종교의 집착이 그렇다. 고정관념에 대한 집착은 지식인일수록 더 심하고 종교인에게는 목숨을 바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고정관념이란 이미 굳어져서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막무가내의 이념을 말한다. 한 치의 양보가 불가능한 학자들의 논쟁이 그러하고. 수많은 사람을 이념에 중독시켜 테러를 아무 죄의식 없이 저지르게 하는 종교가 그러하다.
오늘도 나는 금강경을 읽으면서 그렇게 간절히 비움의 미학을 강조하시고 내려놓음의 자비를 노래하신 석가님의 노심초사를 느끼며 잠자리에 들 때마다 반복 훈습하고 예경 때마다 다짐하는 이 노력이 생활에 얼마나 실천되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금강경 속의 또 다른 구절 『아무 집착 없고 고집 없는 비움의 실천이 어떤 공덕보다 수승 하다.』는 말씀을 한 번 더 새겨본다.